세상은 우연이 아니라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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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와 비전
하나님의 창조와 비전
다윗의 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어려운 설교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많은 친구들이 설교 노트를 작성하고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에 우리 중고등부가 꽤나 수준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다시 복습차원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세계관”이라고 나누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은 잊어버리지 않길 소망한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창조주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영광의 왕이라는 주제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여러분은 미술시간이나 과학시간에 직접 만든 작품이 있는가? 어떤 친구는 그림으로, 어떤 친구는 점토를 가지고, 아니면 재활용품을 이용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든 작품의 소유권은 누구 것인가? 그렇다. 만든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내 작품을 훔쳐서 그것을 전시하거나 경매에 비싼 값에 팔아버리면 내 소유권도 뺏기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훔친 사람이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또 대한민국에 어떤 사람이 나는 한국을 국가로 인정도 안하고 이 땅은 대한민국 땅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 법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 시민이 아닌 사람이 대한민국에 산다면 그러한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가? 불법체류자라고 말한다. 결국 그러한 사람은 한국 법에 처벌이 될 것이고 결국 한국에서 추방당하게 되어 한국에 입국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오늘 함께 읽었던 시편 24편에 1-2절은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이 땅을 지으셨고, 심지어 그 땅에서 사는 사람도 누가 만드셨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렇기에 내 자신의 소유권도 사실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서울이 대한민국의 것이라면 대한민국을 포함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대한민국 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한민국 땅이 안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도 마찬가지다. 불신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하나님의 소유가 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어떻게든 세상의 시작을 찾으려고 갖가지 연구를 하면서 수많은 가설을 내는데, 우리는 정답을 알고 시작하지 않는가? 창세기 1:1 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미 불신자들과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중에서 누가 세상을 지으셨을까?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힌트를 알 수 있다. 함께 읽어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우리”는 1인칭 단수인가 복수인가? 그렇다. 복수이다. 적어도 2-3명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우리와 같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지만 개념이 다르다. 정말 딱 한 분 하나님만 믿는 믿음으로 이 구절을 읽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세상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보기에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세상을 지었다고 본다. 그것에 대한 근거 구절은 요한복음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두 인격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실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이 함께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분이 누구신지를 14절에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 누구이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독생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도 하지만, 완벽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신 유일한 분이라는 단어가 독생자라는 표현이다. 구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구약의 역사에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만약 삼위일체 개념이 먼저 주어졌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3명의 신이라고 따로 생각하며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에 한 분 하나님으로 여호와 또는 야훼라는 단어를 통해 유일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면서 구약에서 감추었던 비밀을 보여주신 사건이 된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이 한 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와 희생 제사는 결국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에서 지켰던 율법이 완성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일이다. 이처럼 계시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것 또는 비밀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곧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을 통해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한번도 태초에 일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과학자들의 가설이 타당한가, 아니면 실제로 그 태초의 현장에 계셨고 심지어 그때 창조하신 유일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타당한가? 그렇다.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이시고, 창조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고 그것을 증거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그러니 창조 사건은 누가 하신 일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건이다. 이렇게 시편 24편 1-2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시편 24편에서 3-6절은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갈 때 어떠한 상태가 되어야할 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여기서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세워진 시온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곳에 접근하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로만 제한되어있다. 그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어떠한지 설명한다. 먼저 ‘손이 깨끗하다’와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동기가 깨끗한 지, 자신들의 행동과 마음에서 결백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니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예배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같아야 함을 보여준다. 교회에서는 착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학교에서나 친구들 앞에서 욕을 함부로 내뱉고 막말을 쏟아내거나, 악플을 다는 행동 등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결백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한다는 것은 히브리어 단어에서 뜻은 무가치한 대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상이다.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 십계명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을 기억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실제로 손이 깨끗하지 않거나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당시 구약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렸고, 지금 우리는 진심어린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여호와께 복을 받는다. 신명기 27-28장에서 발견되는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오늘 읽은 시편도 동일한 맥락에서 복을 말한다. 그 복은 다른 사람과 이웃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물질의 번영과 행복한 가족 관계를 갖게 될 것이고 그리고 전쟁 승리를 누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에게 주는 복이 아니라 이러한 복을 흘러보내는 복의 통로로써의 복을 말한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만 누리는 것이 아닌 그를 통하여 이웃들도 복을 누리게 되는 원리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원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고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를 가리킨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고자 갈급한 사람은 매일 성경 말씀을 듣고자 갈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7-10절에서는 인간 영역으로 들어가는 여호와에 대한 예배시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선포한다. 찬양 중에서도 “문들아 머리 들어라”라는 찬양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여호와의 법궤가 예루살렘 성 혹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시고 왔던 때 혹은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여호와의 법궤를 성전으로 모셔 들이던 장면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문”은 예루살렘 성문이거나 성전의 문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보다 더 넓은 해석으로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생각하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전쟁에 능하신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임재하신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오신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현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문들이 머리를 들어야”하는 것일까? 여기서 문은 성문 또는 성전의 문인데, 이 “문”은 인격체가 아닌 물체이므로 실제로 머리를 들 수는 없다. 이것은 성경에서 특별히 시편에서 비유적인 어법으로 사용하는 의인화 기법이다. 사물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방법이다.
문들이 머리를 든다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문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다 감당할 수 없어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대로 문을 연다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 건물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크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셋째, 문들이 여호와의 임재를 환영하며 경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내용을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이스라엘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성전이 되어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가 곧 성전이 되었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다. 그래서 “문들아 머리들어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분을 믿는 신자들에게 임하신다는 의미이며, 성도들이 그 주님을 경배하며 그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는 복음의 확장에 따라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가야 한다. 그래서 “문들아 머리 들어라”의 문구는 이 세상 가운데 복음의 능력으로 주님의 임재가 확장되도락 한다는 명령의 의미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나누며, 말씀을 증거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들아 머리 들어라”의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때 그분을 받아들아며 찬양하고 경배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들이 주님을 경배하게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일들이 우리를 통해 일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그 문을 통해 누가 들어오시는가?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 여호와가 인간의 공간에 들어오실 때 필요한 고백은 여호와만이 유일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왕으로 고백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영광의 왕은 여호와이시다. 즉 여호와는 가나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알이나 엘이 아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아니고 로마의 황제도 아니다. 영광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이시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시에서 말해준다. “강하고 능하신”,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광의 왕”이시다. 여호와의 이미지가 신적인 용사와 왕으로 그려진다. 이 은유의 핵심은 혼돈의 위협에서 창조세계를 구원할 능력과 존재감을 가진 거룩한 분에 대해 보여주고 더 나아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의”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의 근거에 대해서 이미 앞서 1-2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건으로 인해 온 땅의 왕이심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 24편은 여호와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영광의 왕”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고, 이 거룩한 분의 임재 앞에 누가 설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시는 여호와가 거룩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 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 거짓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헛된 말이나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거룩한 분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모든 조건을 다 지키실 수 있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에서 필요하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를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가 도무지 지킬 수 없었던, 얻어낼 수 없었던 그 의가 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임재를 감당할 수 없고 또 저항할 수도 없는 그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영광의 왕이 오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영광의 왕”이 오셨을 때 그를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헤롯 왕이 먼저 죽이고자 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마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려고 했다.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반드시 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왜 반드시 죽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영광의 왕은 “강하고 능하신”분이기에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수 없고 우리에게 양보하지도 않을 분이기 때문이다. 또 그 분은 적당하게 합리적인 거리에서 머물러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사탄이나 파라오나 우리에게 통치권을 주장하는 어떤 다른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는 분으로, 이 분이 오시면 누군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에 왕”은 영원에서 오셨기에 힘과 주권과 심지어 통치권도 가졌지만, 그것을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죽이기보다 죽임당함을 택하셨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게다가 예수의 죽음으로 사망 자체가 죽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영광의 왕”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치권이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말구유에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셨다. 여기 있는 저와 꿈사땅 여러분은 우리의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을 날마다 찬송하고 감사가 넘쳐나는 우리 공동체 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