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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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세례
제목: 예수님의 세례
본문: 마태복음 3장 13-17절
본문: 마태복음 3장 13-17절
찬송: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찬송: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인 오늘, 우리는 신앙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2천 년 전 요단강가로 나아가 보겟습니다. 그곳은 거친 숨소리와 통회의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불호령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그 서슬 퍼런 경고 앞에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은 마지막 소망을 붙들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은 처절한 회개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의 길고 긴 줄 끝에, 도저히 그 자리에 계셔서는 안 될 한 분이 묵묵히 서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죄 없으신 창조주께서 굳이 죄인들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지, 그 낮은 포복과 같은 걸음 속에 담긴 깊은 사랑의 신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세례는 죄인이 씻음을 받기 위해 받는 것인데, 성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부정한 자들의 행렬에 동참하셨을까요? 주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평온한 사생활을 뒤로하고, 오직 이 세례를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요단강을 향해 100km가 넘는 먼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발걸음은 우리를 향한 거룩한 ‘찾아오심’의 시작이며,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 속으로 직접 뛰어드시는 은혜의 서막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정면으로 목격한 세례 요한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요한이 보았을 때 자기 앞에 계신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 장차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지, 결코 자신에게 물세례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당혹감은 곧 우리의 상식과 충돌합니다. 거룩한 것이 어찌 속된 것 앞에 무릎을 꿇으며, 영원한 빛이 어찌 어둠의 예식에 참여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 역설적인 장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겸손의 신비: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의
겸손의 신비: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의
본문 14절을 보면 요한이 주님을 ‘말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렸다’는 말은 단순히 정중하게 사양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는 온몸을 던져 가로막고 강력하게 저지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손 아래로 들어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요한의 믿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저지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기꺼이 고개를 숙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겸손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빌 2:5). 야고보서 4장 6절 은 우리에게 엄중히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사실 주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지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겸손의 자리에 서심으로, 높이 고여 있던 하나님의 은혜가 낮은 우리에게까지 세차게 흘러오는 통로를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보다 못한 자의 권위 아래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목소리를 높이고, 작은 공로만 있어도 대접받으려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걷다 자꾸만 남보다 높아지려 하고 내 의를 드러내고 싶을 때, 우리는 요단강에서 머리를 숙이신 주님의 젖은 어깨를 떠올려야 합니다. 참된 ‘의’는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는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기꺼이 내 권리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겸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낮아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삶에서 시작됩니다.
동정의 신비: 우리와 하나 되시는 연합의 의
동정의 신비: 우리와 하나 되시는 연합의 의
본문 13절은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 그들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강가에 의도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죄인들과 함께 줄을 서신 것은 우리를 향한 깊은 ‘동정’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동정(sympathia)은 멀리서 관찰하며 가엾게 여기는 값싼 연민이 아닙니다. 측은지심을 뛰어넘어 그 대상과 ‘함께 고통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구원 계획을 지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요단강의 흙탕물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조건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죄책감의 무게, 말할 수 없는 수치심, 인생의 풍랑 속에 느끼는 고독과 절망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함께 아파함’의 의로운 모습입니다. 주님은 거룩함의 커튼 뒤에 숨지 않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이 소용돌이치는 그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드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대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은 이를 두고 ‘사람과 사람을 얽어매는 황금의 사슬’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례를 통해 우리와 자신을 그 끊어지지 않는 황금 사슬로 묶어버리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패는 주님의 아픔이 되고, 주님의 거룩함은 우리의 옷이 되었습니다.
혹시 인생의 밑바닥에서 홀로 버려졌다고 느껴지거나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그 깊은 고통의 물속에 이미 우리 주님이 먼저 들어와 계십니다. 주님의 동정의 사슬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책임의 신비: 십자가를 향한 구원의 의
책임의 신비: 십자가를 향한 구원의 의
나아가 주님의 세례는 인류의 구원을 끝까지 완수하시겠다는 ‘책임’의 장엄한 선포였습니다. 15절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다는 거룩한 책임감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의’는 단순히 개인적인 도덕적 결백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에 대한 전적인 응답입니다.
주님은 본래 흠 없는 ‘순백’의 아들이셨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온 인류의 죄악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쓴 ‘순흑’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물속으로 완전히 잠기시는 그 짧은 순간, 주님은 이미 수년 뒤 갈보리 언덕에서 지게 될 십자가의 무게를 미리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책임’지기로 결단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위인일수록 책임감을 크게 지고 강하게 느끼지만, 소인일수록 책임을 회피하는 법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의 어깨에 메는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며 남의 불행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까마귀 같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6절에서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온유함과 정결함,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여 평화를 일구는 성품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까마귀 같은 세상의 권력욕을 거절하시고, 비둘기 같은 온유함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십자가 끝까지 짊어지셨습니다. 가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들을 대신해 죽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그 책임 있는 사랑이 오늘 우리를 지옥의 낭떠러지에서 건져낸 줄 믿습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주님이 세례를 마치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온 인류가 목격해야 할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이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가만히, 아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 음성은 주님이 방금 보여주신 그 ‘겸손과 동정과 책임’의 길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여기시는지를 온 우주 앞에 선포하신 대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머리를 숙인 예수님의 그 겸손을 보시고 하늘 문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요한에게 머리를 숙인 너의 그 낮아짐이 바로 나의 성품이며, 나의 본심이다. 네가 나의 자존심을 지켰구나!” 또한 죄인들의 줄에 기꺼이 선 예수님의 그 동정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며 말씀하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기로 결단하고 죄인의 흙탕물 속에 몸을 담근 너의 그 사랑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구나. 내가 너를 진심으로 기뻐하노라!”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의 세례를 통과하겠다는 그 책임 있는 결단 위에 성령의 능력을 부으시며 선포하십니다. “이 책임 있는 순종을 통해 내가 무너진 세상을 다시 창조하리라!”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단강가에서 우리 인생의 닫혔던 하늘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늘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여 금의환향할 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겸손을 택할 때, 나보다 약한 이웃의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며 동정의 사슬을 스스로 맬 때,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그 눈물 어린 순종의 자리에서 하늘은 활짝 열립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세례받은 자로서 우리는 이제 세상의 ‘까마귀’ 영을 버리고 ‘비둘기’의 성품을 입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아지고, 더 이기적으로 살라고 유혹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요단강가에 서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겸손히 낮아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존귀한 자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으로 품고 그들의 짐을 나누어 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천국의 기쁨을 맛보실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들려왔던 그 영광스러운 음성이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 가슴 속에도 천둥처럼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나의 자존심이자, 내가 가장 기뻐하는 딸이다!” 이 복된 선포를 방패 삼아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겸손과 동정과 책임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요단강 낮은 물가에 낮은 포복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죄인들의 줄 끝에 서서 우리를 만나주신 그 사랑의 신비를 대면하며 우리 영혼이 주를 경배합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우리가 주님의 젖은 어깨를 보았사오니, 우리도 주님처럼 머리 숙이는 겸손을 배우게 하옵소서. 이웃의 아픔을 황금 사슬로 묶는 동정의 마음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책임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까마귀 같은 이기심을 버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성품으로 새롭게 빚어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모두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때 하늘 문이 열리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주님의 음성을 방패 삼아 승리하게 하시며, 기도의 능력으로 소망을 누리는 복된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