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1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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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ohn 1–15 NKRV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알겠습니다. 사무엘 예화를 빼고, 사울과 다윗의 대비를 중심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설교문: 교회를 살리는 사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

본문: 요한삼서 1-14절

들어가며

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교회를 살리는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를 살리는 사람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앞에서 섬기는 사람, 말을 잘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성경은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교회를 살리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요한삼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중 하나입니다. 단 15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편지 안에 교회를 살리는 사람과 무너뜨리는 사람의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 본문의 배경: 요한은 왜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썼는가?

요한삼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편지가 쓰인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이 편지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당시 교회에서 그가 가진 영적 권위와 연륜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요한이서를 쓴 바로 그 요한입니다. 이 편지가 쓰인 시기는 대략 주후 90년대, 요한의 생애 말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교회 전체가 아니라 '가이오'라는 한 개인에게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초대교회는 지금과 달리 건물이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을과 마을 사이를 다니는 순회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관에 묵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여관은 대부분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선교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먹이고 재우고 다음 여정을 위한 노자까지 챙겨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 선교사들을 환영했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저 사람이 누구야?", "우리한테 허락받았어?", "괜히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하며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중심에 서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 첫 번째 인물, 가이오: 교회를 살리는 신앙

요한은 편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요한삼서 1절)
요한이 가이오를 얼마나 아꼈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요한이 가이오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그가 유명해서도,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3절
"형제들이 와서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 곧 네가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을 증언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요한삼서 3절)
여기서 핵심 단어는 '행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안에서 걷는다',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가이오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진리가 그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5-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요한삼서 5-6절)
가이오는 자기 교회 성도도 아닌, 이름도 잘 모르는 선교사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먹이고, 재우고, 아무런 대가 없이 다음 여정을 위한 재정까지 챙겨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이것은 상당한 희생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고, 그들을 대접하는 것은 경제적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8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요한삼서 8절)
가이오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전도 여행을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왜일까요? 그가 복음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님 접대가 없었다면 선교사들은 다음 마을로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섬김이 복음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성경 속 가이오: 바나바

성경에는 가이오와 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도행전 9:26)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사울은 불과 얼마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그를 믿겠습니까? 교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섭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9:27)
바나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평판을 걸고 사울을 보증했습니다. 그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 두 번째 인물, 디오드레베: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앙

이제 편지의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요한은 9-10절에서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을 언급합니다.
"내가 교회에 편지하였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요한삼서 9절)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첫째가 되는 것을 사랑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리더십을 발휘하지 말라거나, 책임을 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중심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이 자기를 거쳐야 하고, 자기의 승인이 있어야 하고, 자기가 인정받아야 하는 신앙 말입니다.
디오드레베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10절이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하지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들을 금하여 교회에서 쫓아내는도다" (요한삼서 10절)
디오드레베는 네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사도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악한 말로 요한과 선교사들을 비방했습니다. 셋째, 순회 선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넷째,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여기서 정말 무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복음의 길을 막은 사람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 디오드레베: 사울 왕

성경에는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을 보면, 사울은 자신을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 사울은 변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노래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무엘상 18:7)
사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8-9)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다음 세대를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왕국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자 그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막았습니다.
디오드레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무엇이든 막았습니다. 사도의 편지도, 선교사들도, 심지어 그들을 도우려는 성도들까지도 막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막았던 것처럼, 디오드레베는 복음의 길을 막았습니다.

4. 사울과 다윗: 두 가지 선택

여기서 다윗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이 동굴에 들어왔는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 동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 죽이십시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무엘상 24:6)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하나님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자기 손으로 길을 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사울과 다윗,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왕국을 지키려다가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았고, 한 사람은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길을 열었습니다.
같은 위치, 다른 선택, 다른 결과였습니다.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둘 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복음의 길을 열었고, 한 사람은 복음의 길을 막았습니다.

5.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

청년 여러분, 여기서 잠시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디오드레베나 사울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그런데 성경이 이들을 기록한 이유는 저런 극단적인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그들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리를 두지 않습니까? 내 스타일이 아니면 마음속으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내가 중심이면 하고,자신이 속해있지 않으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면 불편해지지 않습니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불안해지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우리도 디오드레베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막는 것은 거창한 악이 아닙니다. 작은 태도들이 쌓여서 복음의 길을 막습니다.

6. 세 번째 인물, 데메드리오: 검증된 신앙

요한은 11절에서 중요한 권면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삼서 11절)
그리고 곧바로 데메드리오라는 세 번째 인물을 소개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또 진리 자체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삼서 12절)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요한은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뭇 사람에게" 증거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신앙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진리 자체에게"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의 삶이 진리와 일치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요한 자신도 증거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말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직함이나 위치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증거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신앙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경 속 데메드리오: 다니엘

성경에서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다니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다니엘 6:4)
원수들이 흠을 잡으려고 했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 자체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30일간 왕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게 합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의 다락 열린 창문이 예루살렘으로 향한 곳에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10)
다니엘은 자기 신앙을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신앙을 알았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데메드리오도 그랬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검증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나는 믿음이 좋다"고 말해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7. 요한삼서가 우리에게 묻는 것

이 짧은 편지는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 교회를 살리는 사람이냐?"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를 비교해 보십시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해 보십시오.
가이오는 진리 중심이었고, 디오드레베는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가이오는 섬겼고, 디오드레베는 통제했습니다. 가이오는 길을 열었고, 디오드레베는 길을 막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고, 사울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다윗은 다음 세대를 세웠고, 사울은 다음 세대를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고, 사울은 자기 왕국을 위해 살았습니다.
둘 다 교회에 다녔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복음의 길을 열었고, 한 사람은 복음의 길을 막았습니다.

8.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적용

청년 여러분, 이제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가 아닙니다. "복음의 길을 열고 있느냐, 막고 있느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막고 있는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기뻐하는가, 아니면 불안해하는가? 내가 빠지면 일이 더 잘 되는가, 아니면 내가 있어야만 일이 되는가? 나는 다음 세대를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또한 이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신앙은 내가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함께 사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나를 더 신뢰하는가, 아니면 거리를 두는가?
바나바처럼 누군가에게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됩시다. 다니엘처럼 원수도 흠을 잡을 수 없는 삶을 삽시다. 가이오처럼 내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는 것, 복음의 길을 여는 것,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신앙입니다.

나가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너를 보아 대면하여 말하기를 바라노라" (요한삼서 13-14절)
편지로는 부족합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마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결국 관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살며, 복음의 길을 여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가이오 같은 한 사람, 바나바 같은 한 사람, 다윗 같은 한 사람, 다니엘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복음의 길을 열어주는 사람,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람,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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