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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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찾아옵니다
[서론]
이번에 제가 예기치 못한 건강의 문제로 오랜 시간 집에 있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워도,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세워둔 많은 계획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질병은 그 모든 것들을 강제로 멈추게 했습니다.
처음 일주일이 제일 힘들더라구요.
아무것도 할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는 무기력함이 찾아왔습니다.
'쉬는 것 자체가 제게는 고통'이었습니다.
힘차게 시작해야할 새해 왜 이런 일이 내게 오나하는 원망과 짜증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2주쯤 시간이 흐르자, '내려놓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 계획과 열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멈춤의 시간을 통해 제가 깊이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얼마나 성급한 사람인지, 그리고 제 믿음이 얼마나 작은지를 정직하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은 분명 원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단순히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내 믿음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평안할 때는 다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삶의 어려움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응답이 내 생각보다 더딜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내 믿음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상황이 훨씬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마주한 인생의 기근, 그 위기 앞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함께 점검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1]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많은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12장 2-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12장 7절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많은 후손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이동한 가나안 땅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후손들도 많이 주시고, 땅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대감이 컸을까요?
그런데 정작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복은 커녕 재앙이 찾아옵니다.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든 것입니다.
당시의 기근은 오늘날의 경제 불황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슨 복지 시설이 있습니까?
구호 물자가 있습니까?
그 곳에서 기근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 말씀을 따라왔는데, 왜 복이 아닌 기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말씀과 괴리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약속과는 정반대의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따라 약속을 따라 이동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복이 아닌 기근입니다.
약속은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아브라함은 현실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잠시 떠나 나일강이 흐르는 풍요의 땅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이 쉬운 것도 아닙니다.
기근인 상황에서 이집트까지 가려면 1-2주일은 족히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의 선택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이게 믿음의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신앙공식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도 안하고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가족의 운명을 섣불리 결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어찌합니까?”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이 이미 이집트로 기울어진 다음에 하나님께 보호해달라는 기도였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아브라함의 상황이었다면 어떨까요?
갑자기 건강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갑자기 경제적 위기가 찾아옵니다.
갑자기 관계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내 기도는 계속 응답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기근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떨까요?
본능적으로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잠시만 어떤 방법으로든 이 위기를 넘기자. 하나님도 이해하실거야.”
그럼 우리가 아브라함과 다를게 뭐가 있습니까?
[본론2]
아브라함의 생존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 그는 한 가지 ‘꾀’를 냅니다.
12장 11-13절입니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우니까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입니다.
자기 살려고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의 비겁함을 또다시 쉽게 정죄합니다.
하지만 좀 더 그 당시 현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대로 된 법이 없는 약육강식의 환경입니다.
족보도 알수 없는 한 이방인이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냥 남편을 제거하고 아내를 취해버리면 됩니다.
이게 다반사로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선택은 어떠해야 할까요?
최소한 그의 선택은 가장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입니다.
실제로 사래는 그의 이복누이이기도 하기 때문에, '절반의 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생존 앞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제가 대학교 졸업반때 했던 뼈아픈 실수를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은행 면접보려고 이미 합격한 회사에 첫 출근을 하지 않아 짤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금의 아내에게 그 회사에 거짓말까지 시킨 적이 있습니다.
결국 은행 면접도 망쳐 떨어졌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함부로 아브라함을 비난할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또한가지 우리가 주목할 점은 사래의 침묵입니다.
오늘 말씀 어디에도 사래의 반응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바로 왕의 궁으로 내몰릴 때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어쩔 수 없지"라는 암묵적 동의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방패막이 삼는 남편을 향한 뼈아픈 배신감과 두려움이었을까요?
아무튼 성경은 사래의 목소리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선택이 결국 더 큰 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입니다.
목숨은 부지했을지 모르지만 아내를 바로의 후궁으로 빼앗기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이런 위기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론3]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못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와야 하는데 바로의 후손이 나오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깨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생존전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치 앞도 못보는 어리석은 꾀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의 꾀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보십시오.
아내는 남의 아내로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설령 아내를 구하더라도 그 원망은 평생 듣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도 다 깨지게 생겼습니다.
그것뿐입니까?
12장 17-19절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분명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이 복을 얻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바로는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의 책망을 받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수는 없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향한 복이 되기는 커녕 민폐로 여겨질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책망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책망합니다.
코로나 시절 몇몇 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답시고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이로 인해 코로나가 더 퍼지는 계기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난과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때만 그런게 아닙니다.
매주 우리 집 앞의 대형교회는 예배 차량들이 도로의 한 차선을 막고 있습니다.
제대로 우회전할 수가 없어 도로의 혼잡을 야기합니다.
이게 과연 세상의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의 역할일까요?
비단 교회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싫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고, 더 배타적이고, 더 차별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세상의 복이 되라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의 꾀가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생존 전략은 나름 합리적이고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빼앗길뻔했고, 하나님의 약속은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이방 왕에게 수치스러운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떠난 인간의 지혜가 마주한 결과입니다.
저 역시 제게 일어난 일을 계기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제 지혜로 삶을 컨트롤할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깨달았습니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역시 삶의 기근 앞에서 나만의 이집트를 찾아 헤맬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반전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존전략과 그의 비겁한 자기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셔서 반전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에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삐딱한 나의 열심을 하나님의 더 크산 열심이 덮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어떤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재앙은 바로가 당할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당했어야 마땅합니다.
바로가 잘못한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제 발로 이집트를 찾아온 것도 아브라함입니다.
속임수를 쓴 것도 아브라함입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인해 자격없는 그를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오히려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그에게 풍요를 주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우리 죄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재앙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새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는 몇번이나 더 큰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주님께 바치며 믿음의 조상됩니다.
고난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민낯을 보고 우리 믿음의 위치를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올해 우리의 실패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열심과 꾀를 내려놓고 끝까지 책임지시는 주님의 손을 붙드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