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라! 나의 ID : Code name - X(vol.2)

2026 겨울캠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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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겨울캠프 금요기도회

창세기 32:22–30 NKRV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사랑합니다! 2026 꿈사땅 겨울캠프와 함께하는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번 캠프의 주제는 함께 본문을 읽어보아서 아시겠지만, 야곱이라는 한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고자 하는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게임도 하고 개회예배 때 잠깐 나누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정체성을 확인한다. 내가 어떤 직업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업적을 이뤘는지, 내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사회적 지위가 정체성을 말해주는 언어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이뤘다고 생각한 성과가 흔들릴 때 함께 자신의 정체성도 무너지는 약점을 보여준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평가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기에 타인의 시선은 강력한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도구가 된다. 칭찬이나 인정, 어떤 집단의 소속감, SNS의 반응을 포함하여 이러한 방식은 결국 정체성을 확인한다기보다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거으로 만든다. 내가 어느 국가, 민족, 정치적 입장, 세대, 문화 코드, 심지어 특정 소비 취향(예: 덕질)까지도 정체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강한 연대감을 주지만, 결국 갈라치기로 다른 편의 사람들을 혐오하게 되는 역효과가 일어나기 쉽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상처나 실패,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인생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나는 이것을 이겨낸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의미를 부여해 주지만, 동시에 과거에 계속 묶여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은 정체성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 타인, 사회 또는 경험 속에서 확인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결과는 정체성이 상황과 평가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구조를 갖게 된다.
우리가 이제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정체성은 뭔가 신실하고 착한 이미지라기보다 사기꾼에 가까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이 야곱의 집안에 내린 축복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세 가지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대로 반복된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정작 약속의 씨는 한 명, 이삭이었다. 물론 하갈이 낳은 아들과 첩 그두라가 낳은 여러 명의 아들들을 통하여 후손이 있었다.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이삭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불임에 시달리다가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이 죽기 전에 에서에게 복을 주려고 한다. 에서가 사냥을 해 온 고기를 요리해서 가져오면 복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이 형을 대신해서 복을 받기 원한다. 형이 사냥을 하러 간 사이에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를 대신하여 복을 받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리브가와 야곱이 아버지를 속일 생각을 한 것은 이삭이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7:1 NKRV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아버지 이삭은 죽기 전에 에서가 사냥해서 잡은 고기로 만든 별미를 먹고 에서를 축복해 주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쌍둥이 아들 가운데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는 동생 야곱을 좋아한다. 성경 기자는 흥미롭게도 에서를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로 그리고 야곱을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즉, ‘그녀의 아들 야곱’으로 표현한다. 쌍둥이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애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그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 형 대신에 복을 받으라고 한다. 야곱은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한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창세기 27:11–12 NKRV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야곱은 형과 자신의 차이점을 생각한다. 야곱은 눈 먼 아버지를 속이는 것을 걱정한다. 그는 또한 자신을 “속이는 자”로 말한다. 그렇게 야곱의 염려했던게 실제로 일어났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만져본 것이다. 야곱 이야기에서 속임과 복이 중요한 주제이다. 야곱은 어머니의 계획대로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을 꾸미고 별미를 가지고 들어간다. 아버지의 질문에 에서라고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를 속여 복을 받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내용 가운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땅과 후손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는 사실이 참 재밌다. 이것을 고려하면 이삭의 태도가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복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로, 밭의 향취,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에 대한 자연 소산의 복을 빌어준다. 둘째, 형제들의 머리가 될 것이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며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할 것이라고 한다. 이 복이 재밌다. 에서라면 당연히 형제들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로 생각하고 있는 야곱을 다시 형제들의 주인으로 축복한다. 셋째,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 가운데 하나이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 원한다’이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복을 가로채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을 빼앗긴 에서는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리브가가 이 계획을 알게 되어 야곱을 하란으로 피난시킨다. 야곱을 피난시키는 이유로 헷 여인을 신부로 취한 에서를 들면서 야곱에게 하란에서 신부를 구하라고 권한다. 이삭이 야곱을 밧닷 아람의 라반에게 보내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내용으로 축복한다.
창세기 28:3–4 NKRV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자기를 소개하셨던 칭호이다. 이삭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계승자임을 확실히 한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란 표현에서 이제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받는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삭에게, 이삭에게서 야곱에게 이어진다. 다음으로 야곱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라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던 창조 명령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제 야곱에게서 성취되기 시작한다. 형 대신 복을 받은 야곱은 세 단계로 받을 받는다. 첫 번째로 형 에서를 대신하여 이삭에게서 받은 복이 있고, 두 번째로 이삭은 야곱이 하란으로 떠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들의 복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복을 주신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가는 도중 길에서 잠을 잔다. 그 때 꿈을 꾼다. 이 꿈에서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 그대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한다. 야곱이 꿈에 본 신기한 사건은 3가지로 사다리와 하나님의 사자가 사다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사다리”는 일반적으로 “사다리”로 번역하지만 어떤 이들은 “계단”으로 또 다른 사람은 “벧엘 산의 오르막, 비탈”로 해석하기도 한다. 번역의 어려움이 있지만 사다리의 기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연결은 물론 하늘과 땅 사이의 연락과 교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야곱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지금 땅에 있는 야곱에게 전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소개하신다. 창 28:13b-14
창세기 28:13–14 NKRV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그 복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야곱은 심은대로 거둔다. 아버지를 속인 것은 그대로 보응을 받는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후손을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신기하게 이루어진다. 후손이 많아지려면 결혼을 잘 해야 한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사기 결혼을 당한다. 야곱은 심은대로 거두는데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진다. 야곱은 하란의 라반 집에 도착하여 자기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모두 말한다. 그리고 라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라반이 야곱에게 일에 대한 삯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는데 야곱은 둘째딸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하겠다고 말한다. 7년의 노동력은 결혼 지참금으로 많은 액수이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경 기자는 라반의 두 딸들에 대하여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을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야곱은 라헬을 위해 열심히 7년간 일을 한다.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라반은 그 언니인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시집보낸다. 야곱이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야곱이 라반에게 항의한다. 억울함이 가득한 그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창세기 29:25 NKRV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받은 야곱이 외삼촌에게 속아서 결혼을 한다. 이렇게 사기결혼을 당한 것이다. 야곱은 함께 한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라반은 야곱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라반은 야곱에게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말하면서 7년을 더 봉사하라고 한다. 야곱은 심은 대로 거두는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아내를 얻는데 14년을 보낸다. 야곱은 두 명의 부인을 얻었으나 라헬을 더 사랑한다.
창세기 29:31 NKRV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이는 ‘레아는 미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야곱의 편애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라헬은 사랑하고 레아는 미워한다.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레아에게 아들을 주시기 시작한다. 레아가 4명의 아들들을 계속 낳는다. 레아가 아들들의 이름을 짓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드러난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레위는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라리로다”, 유다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로 지었다. 레아를 보면서 마음이 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아는 아들들을 낳고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레아는 아들을 잘 낳는데 반해 라헬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 그래서 언니 레아를 질투한다. 그리하여 라헬은 다른 방법을 쓴다. 자기의 종 빌하를 야곱의 세 번째 아내로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한다. 라헬의 계획은 성공하여 빌하는 두 명의 아들인 단과 납달리를 낳는다.
라헬이 할 수 있는 것은 레아도 할 수 있었다. 레아가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녀의 종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네 번째 아내로 준다. 실바 역시 두 명의 아들인 갓과 아셀을 낳는다. 두 아내가 아들 낳기 경쟁을 한다. 이렇게 콩가루가 가득한 질투와 경쟁 속에서 후손을 많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되어 간다. 하루는 레아의 큰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온다. 합환채는 겨울을 넘겨 2년 이상 사는 식물인 다년생 지중해 식물이다. 고대로부터 합환채는 정욕을 자극하며 불임 여성의 임신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불임에 시달리는 라헬이 합환채를 요구한다. 라헬은 합환채를 받는 조건으로 레아에게 야곱과 오늘 저녁에 동침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이것을 보면 야곱이 얼마나 라헬을 사랑하며 라헬과 얼마나 붙어지냈는지 알 수 있다. 라헬은 합환채로 자신의 불임을 치료해 보려고 하고 레아는 야곱과 함께 동침하기를 원하고 있다. 레아는 다시 임신을 해서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는다. 스불론의 이름의 뜻은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말한다. 남편의 사랑을 얻기 원하는 레아의 강한 열망을 볼 수 있다. 합환채가 없어도 레아는 아들을 낳는데 합환채를 가져간 라엘은 아들 소식이 아직 없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라헬이 아들을 낳는다. 라헬이 임신하게 된 것은 합환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0:22–24 NKRV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러면서 야곱은 라반에게 말한다. “점이 있거나 얼룩 있는 양과 염소만 내 월급으로 주세요”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런 가축은 거의 안 나오기 때문에 라반에게 엄청 유리한 계약처럼 보였다. 그래서 라반은 “오케이”하고 바로 동의한다. 라반은 약속하자마자 이미 점 있고 얼룩 있는 가축을 전부 빼돌리고 자기 아들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야곱을 멀리 떨어뜨린다. 그래서 야곱이 점이나 얼룩 가축을 얻을 가능성을 아예 원천 차단한 것이다. 한마디로 “약속은 했지만, 너는 절대 월급을 못 받게 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래서 야곱의 대응은 가축이 새끼를 낳을 때를 잘 관찰했다. 튼튼한 가축이 교미할 때만 나무껍질을 벗긴 막대기를 물 앞에 둔다. 약한 가축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임신 중에 본 것이 새끼 모양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과는 튼튼한 가축은 모두 점과 얼룩 새끼가 태어나서 야곱의 것이 되고, 약한 가축은 그냥 새끼로 태어나 라반의 것이 되었다. 이것은 야곱이 요술을 부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31장 9절에서 야곱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장인 라반의 가축을 나에게 주셨다”고 고백한다. 나무막대기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라반의 불의를 멈추게 하신 것이었다. 야곱의 행동은 도구였고, 결과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자를 그냥 두지 않으신다. 오래 참고 일하는 사람이 계속 손해만 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눈에 보기엔 라반이 이기는 것 같아도 마지막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게 야곱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는 것을 결국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야곱은 그렇게 받은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아버지 이삭에게 떠났다. 그것도 라반 몰래 그를 속여서 도주를 한 것이다. 그때 라헬은 몰래 야곱도 모르게 자기 아빠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쳐서 함께 떠났다. 삼 일 뒤에 야곱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하란에서 길르앗까지 거리가 대략 640km 정도 된다. 그러나 실제로 7일 동안 그 거리를 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적으로 거리를 계산하면 대략 225~340km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까지 라반이 쫓아간 것은 다름이 아니라 드라빔 때문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집안에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서 티어(계급)가 정해진다. 드라빔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우상들 중에서 상위 계급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우상을 집 앞에 두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집안에 규모와 군사력, 재산 등을 대략 알 수 있어서 수호신처럼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라헬이 몰래 훔쳐서 라반은 다시 되찾아오려고 그렇게 먼길을 온 것이다. 우리 식으로 쉽게 생각하자면, 반포 자이 아파트 집문서를 몰래 가져온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우여곡절 야곱과 라반과 화해를 하게 되었고, 20년 정도의 처가살이를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가나안으로 돌아가면서 형 에서를 만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형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야곱에게서 에서는 자신이 속이고 도망쳤던 과거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야곱은 극도로 불안해진다. 그래서 야곱은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게 된다. 자신의 위기 앞에서 아주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서 기도한다.
창세기 32:9–12 NKRV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면서 야곱이 전략을 세워서 형에게 선물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먼저 가축 떼를 종들에게 맡겨서 몰아서 데리고 가게 한다. 그러면서 “에서를 만나면 ‘주인님의 종 야곱은 저희들 뒤에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자신이 가기 전에 선물을 받으면 형의 마음이 풀어질지도 모르기에 그런 다음에 형을 만나면 형이 나를 맞아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들 모두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자기는 건너지 않고 홀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보면 참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3대가 모두 자기 목숨을 먼저 선택하는 정말 하남자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후에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이 등장하게 된다. 어쩌면 야곱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이름 모를 한 사람이 나타나서 야곱과 밤새 씨름을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환도뼈를 치시고 야곱이 더이상 계산하거나 도망가지 못하게 되는 상태가 되었다. 환도뼈는 허리와 엉덩이를 연결하는 부위의 뼈이다. 그리하여 이후로 야곱은 평생 다리를 절게 되는 장애를 얻게 된 사건이 되었다. 이 사건은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이 야곱으로 하여금 씨름을 포기하도록 부추기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더욱더 끈질지게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간다. 그리고 야곱은 그러한 영웅적인 끈기 덕분에 결국 그 낮선 인물에게서 복을 받는 것이다. 이 일의 핵심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호세아 12:3–5 NKRV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여기서 야곱은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아서 에서와 다투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하나님과 다투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야곱이 씨름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동과 영광스러운 모범으로서 칭찬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이 씨름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지기 위해서 야곱 안에 있는 본성이 참으로 좋은 것을 갖고자 하는 끈질긴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야곱이 낯선 사람과 씨름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그보다 먼저 그 낯선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야곱이 기도할 때에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면서 또한 그의 경험을 기도의 한 가지 모범으로 만들어 준다. 야곱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경쟁자가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간절함은 날이 점점 밝아오면서 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야곱은 왜 축복을 구하고, 축복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매달렸는가? 야곱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한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속임수로 받았지만, 이 축복을 오직 매달림으로써 받을 수 있다. 야곱이 이 축복을 바란 것은 공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한 것 같다. 아마도 야곱은 400명을 데리고 자신에게 오는 에서를 만날 때 이겨낼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담겨있던 마음의 태도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아주 특수한 종류의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죄 용서를 위한 기도였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기도였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통해 야곱이 갈구하여 얻은 복도, 죄 용서의 복이었고 또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복이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야곱은 약속된 축복이 오직 죄 용서와 또한 정결하게 된 양심을 기반으로 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변화가 무엇이었는가?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일이 나타난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대답한다. “야곱입니다.”그의 이름 안에 담겼던 정체성은 ‘속이는 자, 발꿈치를 붙잡는 자’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김”라는 뜻이다. 이것은 야곱이 강해서 주신 이름이 아니었다. 이전의 야곱의 인생은 사람을 붙잡아 살아온 인생이었다면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시면서 야곱은 하나님께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가는 것이다. 축복은 그가 힘이 쎄고 강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것은 곧 버림받았던 자였고 속이고 빼앗으면서 살았던 인생에서 언약의 상속자요 하나님 백성의 선택된 지도자로 바꾸어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무엇인가?
에베소서 2:3 NKRV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정체성이 어떠했는가? 세상의 사람들처럼 똑같이 죄된 본성을 좇아 살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온갖 일을 저질렀다. 우리가 본질상 어떤 자녀였는가?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 어떤 정체성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가?
요한복음 1:12 NKRV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를 믿을 때 어떤 정체성이 새롭게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직분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고린도후서 5:17–19 NKRV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에게 어떤 직분을 주셨는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그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어떤 직분인지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베드로전서 2:9–10 NKRV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 화목하게 하는 직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이제 의인이라고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이러한 정체성을 부어주신 이유는 그럴 만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니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가, 내 감정이 어떤가, 사회적 역할을 무엇을 하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성경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체성의 뿌리를 왜곡하고 흔들리게 만든다.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 다른 사람 또는 피조물 속에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로 인한 결과는 정체성이 불안정해지고, 상황에 따라 흔들리면서 끊임없이 증명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은 회복되고 확정된다. 기독교 신앙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성도는 자신의 감정이나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와 구속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결국 사람의 정체성은 자기 자신 안이 아니라 하나님, 더 정확하게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이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기에 누군가의 비교와 무엇을 성취한 것에 따르지 않고 은혜에 의해 주어진 단단한 토대 위해 서 있다. 그러니 사랑하는 낙원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가장 두렵고 연약한 순간에 우리를 만나신다. 진짜 변화는 상황이 바뀔 때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무너질 때 시작된다. 그러니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32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혀 변화되는 야곱의 이야기이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야곱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이 되어 내 상황이 막막하고 답이 없어보일지라도 그 곳에서도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복된 인생들 되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전 사역지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에 이야기를 하고 마치고자 한다. 당시 그 학생은 중1이었다. 제자훈련 1학기를 마치고 나서 2학기를 시작하면서 그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맨날 했던 소리가 있었다. “전도사님 저 이것만 끝나면 일요일에 예배만 드리고 바로 도망칠거에요. 저 찾지 마세요.” 그러면서 제자훈련 때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졸기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그냥 무사히 잘 마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에게 이런 저런 과학과 성경과 대립되는 질문들을 하면서 그것에 대해 열심히 답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제자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일에 수료식을 하기로 했었는데, 그 친구가 토요일에 독후감 숙제를 제출하러 교역자실에 온 것이었다. 그때 안에 계시던 목사님이 “뭐야 너 누구야!”라고 장난식으로 물어보니까, 그 친구가 말하길 “저요? 그리스도인이요.”라고 답한 것이었다. 그때 그 감격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다음 제자훈련 심화반에도 수료했고 지금은 교회에서 임원을 하면서 열심히 섬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순종하고 따라오기를 요구하신다. 여기 있는 저와 낙원의 가족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빚어가심을 믿는다. 그 은혜를 날마다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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