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에서 십자가로
Notes
Transcript
요한복음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어릴 적 겨울이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사골국이 있었습니다. 며칠 내리먹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먹을수록 더 깊은 맛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 을 묵상할 때, 그 사골국이 떠올랐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3장 16절 은 수백 번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울리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영생의 약속까지 복음의 모든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귀한 예배 시간에, 다른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Ⅰ.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
Ⅰ.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
요한복음 2장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표적은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시킬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본질을 알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도 그러한 표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였고, 종교적 열심과 지식을 갖춘 당대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단순히 어두운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밤’은 무지, 두려움, 영적 미성숙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지금 목원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과정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고, 목사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있게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고, 겸손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공부하며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알기 위해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밤’에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그랬을 겁니다. 사람들은 다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 안에 있는 풀리지 않는 갈급함과 영적 무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면 때문에 낮에 드러나게 예수님께 올 수 없어서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게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3장은 단순히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개인적인 대화가 아닙니다. 니고데모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영적인 대화입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너는 무엇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면서 신앙생활의 기준을 분명하게 세우며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녹아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입니다.”라고 높이며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놀랐지만,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본질을 온전히 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 안에도 니고데모 같은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믿음이 예배 가운데 감동이 있을 때, 기도에 응답이 있을 때,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때만 신앙이 깊어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적도 보여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표적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머무르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빵을 주는 예수님만 쫓아다닌 이스라엘 백성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중심은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묻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바로 그러한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영적 생명에는 이르지 못한 종교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Ⅱ.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 – 성령으로 태어나는 새 생명
Ⅱ.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 – 성령으로 태어나는 새 생명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단번에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변화가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36장 에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러한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바람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합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바람의 움직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바람이 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성령을 통한 진정한 거듭남의 새 생명입니다.
Ⅲ. 십자가 –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궁극의 표적
Ⅲ. 십자가 –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궁극의 표적
구약에 정통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수기 21장 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불뱀으로 심판하시고, (8절)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어떤 사람은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지금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데 해독제는 안 주고, 놋조각을 쳐다보라는게 말이나 됩니까?” 그렇지만 (9절) 하나님은 “쳐다보는 자”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토록 미련해 보입니다. 내 노력, 내 선행, 내 헌금으로 구원받는 게 '상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시고,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뱀을 인용하시며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쳐다본 것밖에 없는데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 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건강한 신앙은 ‘표적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참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시는 ‘복음’의 깊은 사골국 같은 진미를 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내 시선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자는 필연적으로 삶의 어둠을 걷어내게 됩니다.
Ⅳ. 빛과 어둠 – 거듭난 자의 삶
Ⅳ. 빛과 어둠 – 거듭난 자의 삶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의 마지막 부분은 빛과 어둠의 대조로 끝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빛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둠에 숨어있으면 어둠에 가려져 나의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으로 나아가면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게 무서워서 어둠에 숨어있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가 드러났을 때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용서받고 치유받게 됩니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나의 행위가 온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에게 죄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빛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있겠다는 신앙의 용기를 말합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빛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빛으로 나아가면 참된 생명을 얻게 됨을 알기에 악한 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은 빛으로 나갈 때가 아니야. 지금 빛으로 나가면 너의 더러움이 완전히 드러나서 하나님이 실망하실 거야. 술만 끊고, 담배만 끊고 교회 나가는게 낫지 않겠어? 사업이 좀 안정되서 수입이 더 많아졌을 때 십일조를 하는게 너도 부담이 없고 교회도 더 좋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 더 준비하고, 나아지면 그때 나가자” 그러나 그 속삭임은 우리를 어둠에 붙잡아 놓기 위한 가장 교묘한 거짓말입니다. 빛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절대로 나아질 수 없는게 죄의 문제이기에 우리에게 거짓으로 유혹하는 겁니다.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지만 우리의 허물과 죄의 더러움을 찾아내고 씻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영생”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있는 성도님들과 인사합시다. “속지 맙시다!”
Ⅴ. 결론 – 표적에서 십자가로
Ⅴ. 결론 – 표적에서 십자가로
말씀을 시작하면서 요한복음 3장은 “너는 무엇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을까요?”
은혜로 주어진 거듭남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진리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표적을 넘어 십자가로 나아오라.
지식을 넘어 성령의 계시로 나아오라.
어둠을 넘어 빛으로 나아오라”
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신기한 기사와 이적 그리고 표적을 쫓는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빛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오늘도 십자가의 빛 가운데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