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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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믿음 - 신뢰 : 전적인 믿음-전적인 신뢰가 아니라 부분적인 믿음-부분적인 신뢰가 아닌가? 교회 안에서는 믿음과 신뢰가 작동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조영민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혼자 반대편에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중이 갖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반대편에 홀러 서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예화추가)
<본문이야기> 느부갓네살 왕이 커다란 금신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모든 관료는 그 신상에 절해야 한다는 포고를 내립니다. 이 명령을 듣지 않으면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다른 관료들의 고소로 잡혀 온 세 친구에게 왕은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세 친구는 거부했고, 결국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화력으로 불타는 풀무 안에서 세 친구는 전혀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왕은 이들을 밖으로 불러 내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세 친구는 더 높은 직책에 오르게 됩니다.
(질문) 세 친구는 어떻게 세상의 거대한 압력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 느부갓네살의 의도> 왜 갑자기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웠을까요? 느부갓네살은 20년 내내 정복 전쟁을 이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전쟁은 끝났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릴 수 있도록 기념비를 세워 행사를 열고 싶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꿈에서 본 것과 다른 신상을 세웁니다. 느부갓네살은 힘을 자겼고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았지만 그대로 성취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막고 싶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방해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잠깐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잘못과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변화되지 않는 세상은 언제든 상황이 좋아지면 대번에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나라, 내 왕국, 내 왕권이 영원해야 합니다. (바벨탑-바벨론의 금신상)
(질문)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의 목적 :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계속해서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이 있지만 성경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바벨론식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원하는 바는 ‘우리와 같은 바벨론 사람이 되라’는 메세지 입니다. (우리와 같은 신을 섬겨라!)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우리와 같아져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난미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말라고, 천국의 소망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세계, 지금 이 삶이 영원하다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질문) 과연 이 세상의 소리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세상의 이르한 외침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 친구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본문에 압박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의 이름이 게속 등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엄청났습니다. 위대한 정복 왕의 이름 - 그 위대한 이름의 권세로 지금 압박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이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모든 악기’-’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활과 및 모든 악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모든 사람이 신상을 향해 엎드립니다. 동참하지 않기가 과연 쉬울까요? 셋째, 실제적 위험입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면 화형이라는 가장 잔혹하고 고통 스러운 형벌을 받으며 죽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 끔찍하다는 압박입니다. 세상과 같아지려 하지 않는 성도를 세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합니다.
(질문) 과연 맞서는게 가능할까요?
첫째 힘은 ‘세상의 실체를 아는 지식’입니다. 본문에 ‘세운’을 뜻하는 ‘쿰’이라는 단어가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거듭 알려 줍니다. 저 거대한 금 신상은 사람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신상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위협합니다. 세상이 힘과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상은 화려하지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상은 남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합니다.
둘째 힘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입니다. (단 3:15) 느부갓네살은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는 신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 때 세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단 3:16-18) 세 친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금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 모름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믿음의 핵심) 그리고 이미 밝혀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우상에게 절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 죄를 짓지 않겠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셋째 힘은 네 번째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이 네 번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사람은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세 친구를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계시다면 세 친구가 불 가운데로 던져지지 못하도록 막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세 친구를 구원하십니다. 그분은 불 밖이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와 세 친구와 함꼐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ㄱ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와 함꼐 그 고통의 자리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불 가운데 던져졌을 때,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를 향해 불 속으로 뛰어들어 오시는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이미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다시 말해 타는 불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 ㅂ루 가운데 들어오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세상 앞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세사의 힘 앞에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노진준 ‘다니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예화) 정말 순수하게 했는데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 서운해하거나 실망하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보면,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에도 불순함이 끼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보여 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찬양이 회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더라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30M 높이의 커다란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금이었습니다. 문제는 낙성식 때 일어났습니다.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을 불러 모아 그 형상에 절하도록 했습니다.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불에 넣겠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점성가들이 절하지 않았다고 고자질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대노했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로 보자면 왕에게 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단 3:15)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렇게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교만해지면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지고 배은망덕해지고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것처럼 무모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법입니다.
느부갓네살에 말에 세 친구는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단 3:17-18) 그런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에 2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우선 기복적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이 치열하지 않고 마치 그 말로 사람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려는 듯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리 아니하셔도 괜찮습니까? “하나님 저희 교회를 부흥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순수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더 순수합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하나님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말처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함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감동시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세 사람의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얼마나 확신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들이 신뢰했던 하나님은 풀무불의 시련을 주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과 동행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확신했던 것은 고난을 당하지 않으리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인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 고백은 건지실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 떄문에 비록 풀무불 속에서 타죽을지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문제를 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도와 달라 기도하면서도 느부갓네살과 풀무불만 보고 하나님은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다니엘서는 유독 해피 엔딩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정말 드물게 보는 일들입니다. 3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해피 엔딩입니다. 그런데 타이밍과 방법이 너무 비현실적이여서 황당합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초대교회 교부 폴리갑의 화형)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풀무불의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 더 뜨겁게 하여 세 사람을 불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 넣다가 그만 불이 옮겨 붙여서 타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질문) 이 모습을 보는 세 사람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들은 정말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실 것이라고 확신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하난미의 능력은 무엇입니가? 이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이들이 불쌍히 여긴 누군가가 있어서 기도했다면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풀무불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일단 풀무불에 들어가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그나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가능하다 싶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그 믿음은 풀무불 속에 던져지기 전까지 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이긴 줄 알았을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세 친구들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파산도 막지 못했고 가족의 죽음도 막지 못했고 사랑하는 자식의 장애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사건 떄문에 그 때 기회를 놓쳐서 길고 지루한 고난의 풀무불 인생을 살기 시작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꼐서 그 때 그 능력을 보여 주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불 속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 불 속에 계셨습니다. (사 43:2) 물이 침몰하지 못하고 불꽃이 사르지도 못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물이 삼키지 못하고 불이 사르지 ㅁ소하도록 하겟다는 약속의 궁극적인 근거는 세 친구가 그 불 속에 타지 않은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왜 불 속에 들어가기 전에 오지 않으셨냐고 섭섭해하고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불 속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인간을 감싸셨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우리와 함꼐 하시며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이 바로 친히 불 속에 뛰어들어 우리를 타지도 상하지도 않게 하신 임마누엘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극적인 경험들이 없을까요? 왜 하나님이 세 친구에게 보여주신 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가요? 이 사건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말씀은 바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들과 그들이 경험한 일들을 언급합니다. (히 11:32-38) 이 말씀이 충격적인 것은 불의 세력을 멸한 세 사사람의 경험과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경험이 같다고 말하기 떄문입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 속에서 타지도 상하지도 않고 걸어 나온 것과 군인들에게 붙잡혀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한 것이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고난을 모르고 산 것과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고난 밖에 모르는 인생이 같습니까? 그런데 같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부활 때문입니다. 그 생명 때문에 우리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영원한 본향 때문에 그 경험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풀무불 속에 하난미이 계쎴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은 풀무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렸겠지만 하나님은 풀무불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실 것이고, 우리가 죽는다 해도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셔서 어떤 심판과 정죄의 불도 우리를 사르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고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위험도 칼도 권세도 천사도 죽음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 끝난 것 같아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찬양)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