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기도가 깊다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서론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제 1장 고독한 기도가 깊다.
출애굽기 33:6–7 NKRV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한 사람의 천재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성공하려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말고 한 사람의 천재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어느 재벌 총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제 밥벌이나 하지만 천재적인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는 수십만 명을 먹고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공식이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준비된 한 사람을 통하여 잠들어 있는 교회에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도 하고 어두운 역사를 깨우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탁월한 영적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기도의 세계를 가진 한두 사람 때문에 역사가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즐겨 하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서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시나이반도였습니다. 그 시나이반도에 시내산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가기 전 약 열한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오랜 애굽 생활로 몸에 밴 불경건한 습속과 불신앙의 잔재들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과 삶을 위한 율법을 수여받게 됩니다.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오늘 본문은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서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게 된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서 범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애굽기 32장 9-10절
그때 모세는 생애를 바친 중보의 탄원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매달립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장 31-32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진노를 진정하신 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영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자. 비록 하나님께서 완전히 용서하신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진노를 푸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2장 34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가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정하지 아니하니” 출애굽기 33장 1-4절
이스라엘의 각성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믿음을 버렸을 때 늘 하던 반문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모세는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인도해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한 이가 모세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니까,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기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만들게 된 것도 사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대로 가나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범죄하였든지 간에 어쨌든 자기들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가서 기업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정하지 아니하니” 출애굽기 33장 4절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구절에서 ‘준엄한 말씀’이라는 말이 ‘재앙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 축복의 약속이 그들에게 재앙의 말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주목한 것입니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태도가 바뀌게 되자 이런 놀라운 영적인 분별력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 같으면 그렇게 사랑하였을 단장품들을 모두 제해 버리고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손에 넣어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자신들의 행복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무리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증표는 세상의 번영이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누리고 있는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일한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약속한 바를 다 이루어 주겠다. 가나안도 갖고 원주민도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실컷 먹고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희와의 관계는 끝이다. 자, 올라가거라.”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긴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결정적인 화해의 선언은 없었습니다. 결심을 굳히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냉담한 선언 앞에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과연 이처럼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판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가나안으로 올라가야 하는가?” 이 두 갈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영적지도력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모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막을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하는 저 바깥 한적한 곳에 텐트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회막을 설치한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저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자”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 중 떤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곧 떠나 버릴 것 같은 영적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한 일은 이처럼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3백만 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구의 대집단이었습니다. 본문에 회막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회막에서 막이 단수로 나옵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의 회막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거기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 같은 일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진과 떨어진 곳에 단 하나의 회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애굽기 33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만이 그 진 바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회막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로 나아가서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다운 치유와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판단은 모세의 영적 지도력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기도함
여러분은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쓸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진노를 일단 거두신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겠노라고 다시 말씀하시리만치 그 마음을 돌리신 것도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이 모두 모세 한 사람의 기도를 기억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깨어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의 기도만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그 환경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회막을 세워 주었습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을 앞서 이끌며 인도하여 나가던 모세가 갑자기 뒤로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등을 밀어 기도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각성이 가져다준 결과였습니다. 영적 각성은 평상시에는 보지 못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영적 각성은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영적 각성은 진정한 의미의 각성이 아닙니다.
중보 기도는 중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은혜를 받을 만한 관계를 유지할 때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전심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백성들이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깨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유하는 데 스스로를 헌신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백성들이 이 회막에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를 통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와 대면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는 표증을 주셨습니다.
거처에서 떨어진 회막
오늘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회막이 위치하게 된 장소입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애굽기 33장 7절
모세는 이러한 위기 앞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의 회막을 정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기서 일컫는 ‘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거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영적 상태나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붐비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영적인 일이나 위의 것을 찾는 일에는 냉담한 사람들이 육신의 안목을 쫓고 세상의 환심을 사는 일에는 열렬한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위기 상황이지만 이 진중에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켜 놓고 연속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가롭게 잠자리에 누워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고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한담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 세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 진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곳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 어울리는 신앙적인 긴장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곳은 기도에 몰두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회막을 진 바깥, 그것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구별된 장소,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고독이 보장된 처소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응답의 음성을 듣기 위한 장소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고독한 기도가 깊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의 처소를 마련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도로 사는 생애의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결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대면하는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의 성공과 육신의 즐거움을 대가로 얻는 대가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사모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번잡하고 바쁜 일과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하여 더욱 고독한 시간을 그리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자연과 매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인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때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영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 속에서 고독한 시간을 마련하며 하나님과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기껏해야 삼겹살이나 구워 먹고 싶어 하였을 그 숲속에서 그 해변에서 그들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분은 어디서든 기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서도 기도하셨고 문상객들이 운집한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늘 기도하는 생활 이면에는 구별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고독한 시간을 가지며 아버지와 교제하시던 집중된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집중된 기도를 위하여 언제나 홀로 계실 수 있는 한적한 장소를 택하셨습니다.
마음을 준비하라.
기도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며 섬김입니다. 언제나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하여 점령당한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을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간절히 찾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는 기도이지만 그 근원이 되는 샘은 마음입니다. 그 샘이 맑고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쏟아낸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도의 통로를 넓게 할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더럽고 그 양도 풍부하지 못하다면 기도라는 통로는 보물로 가득 찬 하수관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도무지 거룩함 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외로운 환경의 도움 없이 마음의 정결함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의 마음과의 치열한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도록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맹렬하고 처절한 전투 끝에 그것을 정복할 때 우리는 거룩한 빛이 있는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는 결코 기도가 고통스러운 의무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둔하게 하는 준비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정복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하여 흐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준비가 곧 영력 있는 기도의 조건이며 마음이 은혜에 정복되는 것이 곧 축복받는 인생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위하여 우리는 복잡하고 일상적인 생활로부터 잠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고독한 벌판에서 만들어집니다.
고독을 회복하라.
오늘날 조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고독입니다. 일상의 번잡함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만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도의 영은 방법을 찾아다니기에 바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고 자신과 교회를 도우실 분이 오직 하나님밖에 없으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분을 응시하는 고정된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가장 잘 경험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간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만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 즐기는 일에는 시간을 바쳐도 기도를 위하여는 거의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도무지 홀로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만을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의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교제의 달콤함과 기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단지 고통스러운 의무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굴삭기를 버리고 호미로 일하는 인부
묘목과 같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아도 거목과 같아 보이는 그리스도인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많아도 방금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것 같은 거룩함의 흔적이 설교 속에 깃들어 있는 증거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전도자는 있어도 불타는 마음을 가진 전도자는 흔치 않습니다.
교회는 많은 봉사와 세밀한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지만 세상을 향하여 충천하는 능력과 영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생겨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조국 교회가 방법에 대하여 궁리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힘쓴다면 더욱더 커다란 복음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굴삭기를 버리고 호미로 일하려는 공사장의 인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시도록 간구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킴으로 위대한 일을 보리라는 결심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계속되는 복음 전도의 실패나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상황이 바로 우리를 회막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
그 다음에 보도가 또 한 번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애굽기 33장 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가도록 일단 허락은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상황을 위기라고 받아들인 것은 몇 사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같은 상황을 위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단장품도 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팽배한 영적 긴장이 감돌고 있는 위기 상황 속에서 진에 가만 앉아서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 위하여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신앙적인 정체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앙모하는 자’는 원의상 ‘간절히 찾는 자’, ‘반복해서 추구하는 자’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기도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진리의 진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이라는 사실입니다. 더 분명히 말해서 기도하게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한 교회가 기도의 영을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 교회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상태는 모두 그들의 영적 수준과 상태의 핵심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며 평소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도록 그 무엇이 가슴속에서 역사하던 소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 진을 떠나 한적한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백성들이 잠자리에 들 때도 그들은 진을 떠나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진으로부터 멀어져 회막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중의 일상적인 일들과 번잡함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의 마음도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진중의 백성들의 소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갖추어 갔습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열렬함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이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함을 알았고 특별한 기도를 위하여는 특별히 구별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회막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과의 대면을 위하여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으로 하여금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며 자신을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성별하여야 합니다.
갈릴리 해변이 어디입니까?
언젠가 교회, 학교 교사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교사의 영적 삶에 대하여 강의하는 가운데 기도생활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도구가 되기 위하여는 교사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 해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갈릴리 해변은 어디입니까?” 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새벽 기도를 다니십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새벽 기도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평소에 안 나오시던 새벽 기도를 나아 보겠다고 결심해 오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교회당에 나아 오십시오. 은혜로운 예배를 마친 후 고요한 예배당 한구석에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거기가 바로 당신의 칼릴리 해변입니다.”
방해받지 않고 홀로 고독한 장소에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고요함 속에서 그가 더욱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모세가 만들어 놓은 기도 처소에 나아갔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성한 소수로서 대부분의 백성들과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려 간구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성경은 ‘여호와를 향한 앙모함’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기도의 영을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결집된 기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가 전심으로 추구하는 바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교회는 교회를 운영해 나감에 있어서도 순간순간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기보다는 제도와 방법과 계획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로 바보 같은 자기만족입니다. 우리들을 거룩한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예배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림으로써 어두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걷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는 이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찾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가난한 교회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민족의 역사를 보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볼모로 잡아 우리는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분투하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불현듯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도 없고 마음의 정함도 없으면서 수시로 오는 사람들의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 무기력함에 짜증나게 합니다.
기도의 용사
이 위기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사람들이 기도의 짐을 진 용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자신을 모두 바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위기 가운데 교회가 정말 위기라고 느낀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때에도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인질로 잡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연약함들을 극복하고 우리와 조국 교회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위하여 진을 떠나 멀리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신앙으로 변혁하도록 부름을 받아 마주한 이 세대 앞에서 오히려 함께 죄에 물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는 우리를 회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냉담한 세상과 목매어 전파할 선포의 제목을 잃은 교회의 영적 상황도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용기를 갖자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잠시 세상의 즐거움을 버릴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보다 영원한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세상 나라에서 잠시 소외될 용기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만약 열렬한 기도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침륜에 빠지기 전에 먼저 영혼의 침륜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골고다에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시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승리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오늘 게으름을 벗 삼아 나태와 안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태만과 안일의 진중을 떠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앙모하며 기도하십시오.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부르짖으십시오.
맺는말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을 추스르시고 이전에 여러분에게 주셨던 기도의 도전들을 되새기십시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영을 회복하도록 분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는 은총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단지 진중에 머물고 있는 현실 만족에 빠진 다수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기도로 역사를 움직이는 소수가 되시렵니까?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