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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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한히 여기지 말라
등한히 여기지 말라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이 성경을 규정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역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들어야 하는 위치와 온전한 들음이 순종과 연결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쉐마’입니다. 그 내용은 앞서 히브리서 1 장에서 1 절부터 4 절까지의 정의된 말씀을 그리고 4 절부터 14 절까지 들은 바 말씀이 천사들이 전해 주었던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해 주었던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말씀이야 말로 ‘찐’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그리고 천사들에 의해서 계시됐던 분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분이라고 우월성을 비교를 통해 강조합니다.
특히 들은 것은 단순히 귀로 들었다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더욱 굳게 간직해야 하는 일 즉 ‘순종’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 간다 라고 경고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영적인 무지한 상태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사람 아니야? 아무리 부활했다는데 너 봤느냐? 등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예수보다 천사 사상도 성경에 있는데 무슨 문제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말씀을 알고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아무런 문제 없으면 신앙 생활을 등한시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그때서야 밀린 숙제하듯 한다는 것이죠.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모든 일이 그렇듯 꾸준함이 필요한대 무슨 일만 있거나, 어떤 때는 기분에 따라서 자기 방식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자리조차 지킬 수 없다. 떠내려 간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성장해라, 자라나라, 앞으로 나가라, 경기하는 것처럼 해라하면서 강도를 높여가는 성경입니다.
그래야 진짜로 다가올 더 큰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지금이딱 살기 좋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로부터의 박해가 시작되는 즘입니다. 사실 우리 삶도 지금이 힘들어도 다가올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늙음, 경제적 어려움, 관계들에 대한 문제, 그로인한 극단적인 외로움말이죠. 그래선지 요즘 유행하는 티비 프로그램은 각종 심리, 상담, 문제 해결, 관계 맺기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지 않습니까?
2 절에 보면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라고 할 때 천사들이 전해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율법이죠. 여기에서 율법이 "효력을 내어" 라고 하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본문도 가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는 말씀을 우리도 작년 1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로 인해 법적인 공정한 갚음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난주에 살펴봤던 호세아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오죽하면 선지자를 음란함에 물들어 있는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시켜서 자녀를 낳았고 이름을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흘러 떠내려 갔다는 것입니다. 떠내려 가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하고 그렇게 바친 가증한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역겹다. 가지고 오지 말라고 아예 성전까지 없애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아모스 5:21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새번역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이사야 1:13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여기 가증하다는 단어 ‘토에바’ 우상숭배나 성적 타락을 묘사할 때, 구토를 유발할 정도의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말라기 1:7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그래서 말라기 1:10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경고, 심판이 끝이 아니라 회복의 과정임을 살폈고 회복의 최종 버전이 ‘보내실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3절이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이 이것입니다. 물론 읽히기엔 그때 순종 안해서 지금도 순종 안 하면 똑같이 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더 깊은 데 있습니다. 4절까지 가야 합니다. 4 절에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서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절의 내용은 ‘요한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드러난 것이 ‘표적, 기사. 능력’입니다. 여기서가 끝이 아니라 요14장에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는 읽을 때 우리의 태도에 대한 문제를 경고하지만 따듯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냐오냐가 아니라 그냥 두면, 흘러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묘사합니다. 철학자 세네카는 목적없는 삶을 항구 없는 항해라고 했고 백경으로 잘 아려진 모비딕에서 광풍에 속에 배는결국은 파멸하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노인과 바다에도 혼자 사투하는 바다의 모습을 기억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바람이 불어 온다면 돛을 단 배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요즘이야 거대한 엔진의 힘으로 바람과 파도도 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바람이 가야할 방향에서 불어오니 돛을 펼치는 순간 오히려 밀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죠. 마치 인생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고나 병이나 관계의 깨어짐 등 사실 우리 인생이 순풍에 돛단듯 하는 말처럼 살 수는 없어도 가려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너무한거 아닌가 하지 않습니까? 흔히 영화에서는 이럴때 하늘을 보면서 도대체 나 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렇다고 안 갈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영화에서 배들 앞에 커다란 삼각형의 돛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로 삼각돛이 맞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역활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면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중요한 게 있는데 삼각돛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배를 만들때 중심 바닥에 앞에서 뒤로 마치 건물의 대들보처럼 길게 자리잡은 용골이 버텨서 뒤로 밀리는 것을 막아 줍니다. 일종에 저항이죠. 노를 저을 때 이리저리 젖는 것처럼 바람을 받는 삼각돛이 마치 노처럼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바꿀 때 배의 용골이 저항이 추진력이 됩니다.
말은 쉬워도 어디 그렇습니까? 막상 앞에서 부는 바람을 맞아봐야 훈련과 생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치가 되죠. 경기야 훈련이지만 인생에 훈련이 어디있습니까? 성경은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실전이고 항로에 들어선 우리가 모비딕처럼 파멸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최근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분의 말로를 보셨을겁니다. 평생을 자기 이익을 따라 바람 부는 곳으로 돛을 펼치며 그래서 화를 피하고 부를 쌓고 그에 인생을 함축하는 말이 택시 값이 천 원즘에 머물러 버린 삶이 누가 봐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어떨때는 내란의 깊은 파도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23년형 선고를 보면서 혹시 우리가 하는 생각에 ‘그 때 멈췄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런 상황이 되면 멈출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작은 교통사고가 나도 지나고보면 생각에 방금 전 신호에서 섰다라면처럼 그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걸하면서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운동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너 왜 집중안해’, ‘그렇게 너 하고 싶은대로 할거면 다른데 가서 해’라는 즉시의 코치, 인생은 져도 되는 경기가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실전 코치/ 생명을 살리는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매주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그것이죠. 예배에 참여하고 한 주를 돌아보고 또 살아내야 할 한 주를 바라보는 유일한 시간이나 다름 없는 것이죠. 그런데 ‘등한히 여기고’ 있는거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이 보헤사 즉 카운셀러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한 가지 그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앞서 하시는 말씀이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에 공정한 보응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5 절부터 시작합니다. 자꾸 예전에 아는거 가지고 구원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시대, 성령께서 꾸짖고 이끄는 시대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천사 이야기 고만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의 시대도 다가올 시대를 바라보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는 미래적 소망으로 살았는데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과거를 바라보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7 절에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셨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죠. 성육신으로 잠시 동안 낮아진 상태.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되시는 것은 우리의 상태와 비교합니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상태가 아니라 창조의 섭리로 회복되는 상태인 에덴의 회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부터 어떤 회복인지를 보여줍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는 회복입니다. 만물의 복종은 진정한 에덴의 회복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말 그대로 ‘아직’의 상태를 이어지는 9절에서 우리 역시라고 연결합니다. ‘천사들 보다 잠시 동안 못한 존재’에 있음을 말하면서 ‘죽음의 고난’을 말합니다.
대칭적 비교를 잘 살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에서 사람의 신분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담의 신분에서 죄로 인해 삶이라는 고난을 사는 존재의 우리와 대칭을 이루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되셨다. 그러니까 우리도 회복될 것을 대조하면서 진정한 회복의 미래를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말입니까 예수의 높아지심을 보면서 말입니다.
여기 높아지심은 그저 뜻밖에 찾아온 행운 같은게 아닙니다. 10절에 사람으로 낮아지심으로 안에 들어있는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 과정을 들었다. 따라서 너희도 인생이라는 고난의 과정을 흘러 떠내려가는 결과로 끝내지말고 받아 들여라/걸어가야 한다/ 바람을 거슬러 오르는 힘든 노 젖기를 마땅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1절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법칙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근원’이 되는 것이 말하는 바입니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그런 자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된다라고 엄청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새번역은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구약은 백성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시고 ‘자녀의 관계’가 됨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을 ‘형제 자매’로 부르는 것도 엄청난대 12절에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다고 말합니다. 에덴의 아담은 창조와 피조의 관계였습니다. 더 좋은 에덴은 이제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과 가족의 관계로 묶는 놀라운 변화를 갖습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불러온 구원의 파급 효과는 구약의 제사인 일시적 관계의 회복이 아닌 영원한 회복을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규정합니다. 이것을 ‘거룩’의 진정한 의미이자 저와 여러분을 ‘성도’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누리는 기쁨을 생각해보세요. 이 기쁨은 친구들과 누를 수 없고 회사 동료들과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교회가 그렇게 누렸습니다. 사도행전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마치 가족만 가능한 상태를 교회가 누렸다는 것입니다.
12절 찬양하는 누림의 결과 13절 신뢰하겠다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여기 매우 중요한 점이 믿음을 우리는 내가 믿는다라는 말때문에 출발이 나에게 있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믿는 믿음도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 주어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신학 교수가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도 은혜이지만 은혜를 받는 숟가락도 주는 은혜, 숟가락 들 힘도 은혜라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여러분, 14절에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인 우리는 여전히 혈과 육에 속해 있습니다. 아직까지 말이죠. 그래서 주님도 후반부 ‘같은 모양으로’ 우리와 같은 혈육이 되신 것은 혈과 육을 붙잡은 사망/ 죽음의 세력과 싸우려하신 것입니다. 먼저 싸워 이기는 본이 되셨습니다. 싸워 이겨 가족 구성원 모두가 살게 되는 구원의 효과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하신 예수께서 15절에 혈과 육이 당하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 노릇에 매여있는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 다시말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저자는 다시 신학적 정리를 합니다. 17절 하반부에 첫 번째.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하심이라고 정의하고, 두 번째가 그런 일을 감당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을 성육신하셔서 혈과 육을 입고 죽음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대제사장의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는 구원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을 행함으로 그 직을 감당했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행하신 대속의 영원성의 결과는 ‘거룩한 상태’의 영원성의 이루어지심입니다.
마치 자녀들은 부모의 방에 언제든 들어가는 자유를 가족이라는 거룩함 안에서 누립니다. 결코 직원은 사장의 방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계의 모든 방은 그렇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제물로 죄를 속량하신 놀라운 은혜는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서’ 스스로 제물되시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심을 마지막으로 저자는 정의합니다.
그리고 다시 3:1절에 그러므로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여기에 1. 함께 2, 부름심을 받은 3. 거룩한 4. 형제자매 얼마나 명확하고 놀라운 논증입니까? 그런데도 저와 여러분이 등한히 여긴단 말입니까? 단순히 정신을 차리고 태도를 바꾸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 삼음에 대한 자녀의 위치, 거룩함 가운데 자녀의 삶을 알고 누리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당신의 삶 되기를/ 아버지의 마음 알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형제됨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새언약에 대한 것입니다.
1장에서 들은 바/ 2장에서 들은 바에 대한 태도 3장에서 믿는 도리 17절 이하의 하나님이심(자비하시고 신실하심이죠) 그리고 대제사장 즉 구약 제사의 마침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 성육신으로 어셔서 혈과 육을 입고 죽음을 맞서 싸워 승리하신 구원을 믿는 도리/ 그래서 찬송하고 신뢰하게 되는 믿음의 도리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부르신 예수께서 행하신 고난을 몸소 받아 온전하게 하신 신실하심을 믿게 되는 선물로써의 믿음 이러한 좋은 것들의 거룩한 가족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누림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의 명제안에 담은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를 저와 여러분도 깊이 생각하시기를 그래서 드러나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