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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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따르지만 길은 다르다
복을 따르지만 길은 다르다
보편적인 기도자의 패턴이 제시되는 시편이다.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상들의 무가치함을 나열하고 그래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초정이다. 의지할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다는 확신으로 나아가고 선포하고 찬양한다. 그렇다면 기도자는 왜 영광을 우리에게/자신에게 돌리지 말라고 시작할까? 직역을 하면 ‘우리에게가 아닙니다’라고 반복한 후 ‘오직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라고 말한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환경을 의지해 일이 해결되면 ‘굳이 하나님께’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너무 쉬운 일, 흔한 일에도 그렇다. 그리고 우상의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나온다. 4절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 우상의 정체다. 그런데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이다. 지나다가 길에서 주운 것이 아니고, 땅에서 자란 어떤 것도 아니고 가장 가치가 높은 재료다. 누구나 갖고 싶어하고 탐을 낸다. ‘보암직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것으로 모양을 만들었다. 두꺼비를 끼고 살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금 두꺼비는 징그럽든, 추악하든 상관없다.
가치가 있다면 우상이 된다. 우상화한다. 8절 ‘우상을 만드는 사람’ 그들은 공적 가치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만든다’. 이사야 44:9 “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인생의 허망을 돈으로 바꾸는 자들이다. 눈에 보이는 ‘금과 은’을 쫓는 것이 ‘허망’을 쫓는 길이고 수치를 당하는 길이다.
이렇게 말한다. 살려면 ‘금과 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먹지 못한다. 그런데 먹을 것을 살 수 있지 않나요라고 적당하게 끼워 넣는다. ‘일용할 양식’보다 더 큰 것을 모으고, 큰 것을 바라는 허영의 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자가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허망의 방향에서 고개를 돌려 달라는 기도이다. 마치 못 볼 것을 막아주고 고개를 돌려주는 부모의 손길을 요구한다. ‘금과 은’을 추구하면 2절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박국 2:18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유익의 근거가 ‘세상’이다. 금과 은이 주는 유익이 크다. 이어서 하박국 선지자는 19절에서 ‘금과 은으로 입힌 것… 그속에는 생기가 없다’라고 했다.
이런 자들은 성령도 돈으로 사려한다(행8). 만능주의에 빠진 세상은 ‘돈 = 만사OK’ 공식을 세우고 안주하고 세력을 키운다. 최근 우리사회가 악행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고 있는지 모두 경험했다. 그런 지점에서 기도자는 ‘이스라엘아 주님을 의지하여라’고 부르짖는다. 주님의 도움, 방패가 되심을 경험하자고 고백한다. 아론의 집이라 부른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세운 자이다. 그렇게 시작했지만 제사장의 집안이다. 그들조차 잘못된 불을 드려 심판을 받기도 한 자들임에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상황은 마치 오늘의 상황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목회자들의 타락은 치명적이다. 돈을 따라 사는 방향성은 적당한 설교의 양념으로 온갖 곳에 뿌려진다. 부를 구하는 기도, 성도를 위한 답시고 내뺃는 각종 부를 구하는 주문과 같은 기도에 판을 친다. 그러나 13절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바라크’ 복은 생명이 있다. 차별이 없다. ‘낮은 사람, 높은 사람, 구별하지 않고’ 주시는 복이기 때문이다. ‘금과 은’을 추종하면 차별을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가 따라온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복은 차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를 ‘번창하게’ 하신다.
기도자는 금과 은을 사는 것과 죽는 것으로 비교한다. 17절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그렇다. 인생은 살아 있는 시간에 복과 찬양을 하는 존재이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자는 18절에 ‘그러나’ 영원까지 생명 있음(구원 받음)으로 찬양’하게 되는 길을 간다. 그런 존재의 지음 받음을 기도자는 깨달아 알기 때문이고 기도는 하늘의 문을 구하고, 두드리고, 여는 것이다. 금과 은의 가치로 무장한 세상에 살고 싶은 욕망은 나이듦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죽어가는 과정으로 산다. 자신의 죄를 알고도 호텔의 평안을 마지막처럼 누리는 전직 총리가 떠 오른다. 이 정도가 나에게 맞지, 마지막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어떤 이유든 그는 ‘금과 은’을 붙잡고 깊은 바다로 가라 앉는 자이다. 더러운 우상의 길은 영원한 역사에 남아 자손을 괴롭힐 찌르는 가시가 되는 길임을 명심하자.
주님 옳은 길은 이미 성경에 제시되었으니 다만 주님처럼 고난을 배워 순종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