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23. 바울-2

주일오후예배(인물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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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디모데후서 4장 6~8절(신약 239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23. 바울-2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벌써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시는데요.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제 예언은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식물 더 나아가서는 사물까지도요. 그리고 이 예언은 역사상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제 예언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 예언은 사실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예언은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개인차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예외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제 예언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지금껏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고요. 제 생각에는 앞으로 수백 년은 유효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제부터 제가 예언을 할 겁니다. 잘 들으세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은 모두 죽을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심지어 우리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 더 나아가서 사물까지도 때가 이르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어떠십니까? 기대했는데 허탈한 마음이 드십니까? 혹 이미 예상하신 분도 있으십니까? 저는 오늘 ‘죽음’에 관한 주제를 다루려 합니다. 죽음이 참 무거운 이야기잖아요. 처음부터 죽음에 관해 얘기하겠다고 하면 너무 엄숙해질까 해서요. 조금 편안하게 주제에 접근하려고 애를 써봤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이상해졌다고 느끼셨다면, 이런 의도가 있었음을 이해해 주시고요. 오해를 푸시길 바랍니다.
제 예언이 아니더라도 분명 죽음은 모두가 맞이할 미래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확인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죽음도 극복할 과제라고 생각해서 영생에 따른 연구가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에 관한 접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체를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가령, 3D 프린팅 기술로 각자의 신체를 정교하게 만들어서 필요에 따라 교체합니다. 또한, 손상된 장기도 세포를 통해 다시 만들어내는 방식의 연구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의식을 데이터로 만들어서 컴퓨터나 로봇에 옮기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의 뇌를 완벽하게 스캔하여서 디지털로 변환해 인터넷 공간에 또는 로봇에 이식하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어떤 성과가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요. 기술은 늘 발전을 거듭해 왔으니까요. 혹시 수백년이 지나면 지금과는 다르게 죽음이 극복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현재의 기준으론 이는 가능성이 아주 낮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극복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죽음을 스스로 택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상가에 따르면요. 인간에게 죽음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무엇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언젠가는 끝이 있는 것에서 선택된 것이 그러합니다.
가령, 202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고용노동부에 등록된 직업의 숫자는 16,891개입니다. 2025년인 지금은 그것보다 더 늘었을 겁니다. 이렇게 많은 직업을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절대로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생 겨우 몇 가지의 직업을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직업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면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포기를 감수하면서 선택한 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요.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요. 예를 들면 약 17,000개의 직업을 1번부터 끝번까지 다 경험할 수 있다면요. 이렇게 삶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요. 우리의 삶에 선택은 없어질 것입니다. 선택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인데, 포기할 필요가 없으면 구태여 선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이 없어지면 삶의 의미와 가치도 없어집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해도요. 결국,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죽음이 극복된다는 아주 낮을 가능성을 두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것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관해 사실 크게 관심하지 않습니다. 분명 죽음이 닥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깊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는 죽음이 삶에서 멀리 있을 때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우리의 마음은 쉽게 무너집니다. 또는 매우 큰 고통과 혼란을 겪습니다. 죽음에 관해 준비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죽음에 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관심했으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본래 예수의 박해자였지만, 예수를 만나서 매우 적극적인 예수의 추종자로 인생이 변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예수를 통해 180도 바뀌었는데요. 달리 보면 이는 죽음에 관한 그의 이해 역시 달라졌음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결국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죽음에 관한 이해는 예수를 믿고 달라집니다. 이는 바울의 죽음 이해가 신앙인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 바울을 통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도 바울의 죽음에 관해서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죽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기원후 1세기에서 4세기의 해당하는 오래된 기록은 분명 바울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 자막 ]
가령, 기원후 1세기 초대 교회의 로마지역을 대표한 클레멘스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를 들었거나 그들과 함께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기록한 클레멘스 1서라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바울) 동방과 서방에 복음을 전하고... 통치자들(혹은 집정관들) 앞에서 증언한 후 이 세상을 떠나 거룩한 곳으로 갔다"
[ 자막 ]
또한, 기원후 2세기에 기록된 위경으로 분류되는 ‘바울행전’이 있습니다. 위경이라는 말은 바울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바울이 직접 쓴 책이 아닙니다. 또 성경과는 신학적으로 충돌하는 책을 뜻합니다. 그러나 고대의 문서로서 가치를 지닌 것인데요. 여기에는 바울이 로마 황제 네로의 명령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처형 당시 바울의 목이 잘리자 피 대신 우유가 튀어나왔다’는 신기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자막 ]
그 외에도 더 있지만, 끝으로 기원후 4세기 유세비우스라는 인물이 쓴 최초의 교회사는요. 바울이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네로 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바울의 참수와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이 같은 시기에 일어났음을 기록하며, 당시 로마에 바울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바울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결국 순교 곧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참수 곧 목이 잘려 죽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배려받은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시기에 붙잡혀서 죽은 베드로는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사실 십자가는 매우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형벌입니다. 죄수를 발가벗겨서 십자가에 달고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죽이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이 십자가형이 면제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둘 다 잔인하다 싶지만, 오히려 빨리 죽음에 이르는 참수형이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러운 죽임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 죽었다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불행한 결말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죽음을 결코 불행으로 생각지 않았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바울의 죽음을 기록하진 않지만요. 바울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4장 6~8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8절(신약 239쪽)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무렵은 기원후 66년에서 67년 사이로 추정이 되는데요. 당시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무렵이고요. 바울이 처음 로마에 죄수로 갔을 때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이때는 그 이후보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환경에서 자유가 제한되었습니다.
[ 그림 ]
하지만 디모데후서를 쓸 무렵에는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입니다. 사실 마메르틴 감옥은 로마의 사형 대기소였습니다. 그에 따라 감옥의 환경도 매우 열악했습니다. 빛이 전혀 들지 않고 습하고 악취와 냉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이 바울에게 가까이 엄습해오는 곳에서 바울은 디모데라는 후배 동역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바울의 동역자인 두기고를 통해 디모데에게 전달 됩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에 관한 조언을 하고요. 또 겨울 외투와 가죽으로 된 책을 가져 달라는 몇가지 부탁을 하는데요. 특별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서 바울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잘 읽어 보면, 바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하거나 죽음이 코 앞에 닥친 것에 괴로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림 ]
자세히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전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는 구약 시대 제사의 한 방법입니다.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제사의 방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죽음을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이해함을 뜻합니다. 마치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제사와 같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성구 ]
또한 바울은 6절에서 ‘떠남’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의 본래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배가 닿을 올리고 출항하는 것 또는 군인이나 유목민이 텐트를 걷고 길을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감을 뜻합니다. 보다 크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 보다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대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배가 항구를 떠날 때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가 있고요. 임시거주지인 텐트를 걷고서 더 완전한 거주지를 향한 소망을 갖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죽음은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죽음을 전제와 같이 영광스럽고 숭고한 것으로 비유하고요. 바울은 떠남이라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의 현실은 감옥에 갇혀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요. 죽는다는 것이 그저 무섭고 떨리는 일이 아니기에 바울은 그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고요. 오히려 죽음 너머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죽음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해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마냥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기대와 소망을 품게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슬픔과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가 불행한 사건은 아니며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새로운 삶에 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죽음의 이해와는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이후엔 어떤 소망도 미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기준에서 죽음은 허무한 것입니다. 또한, 그 때문에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가 있고 사실 그 세상이 지금보다 더 크고 놀라운 세상일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죽음의 이해에 바탕을 둔 신앙인의 삶을 달라진다고 봅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요. 우리가 살면서 남길 수 있고 어쩌면 죽음 이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기에 결국 우리는 지금 마주하는 이들을 죽음 이후에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만남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다면 이 만남은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만남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의 말씀인데요.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사도행전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요. 함께 교제하고 예배하는 관계가 바로 사랑입니다. 저는 이것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화됨으로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만약 죽으면 끝이라는 세상의 생각을 따른다면, 이와 같은 삶을 불가능할 것입니다. 현세의 삶에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얻기 위해 나눠주기는커녕 서로 빼앗기에 열을 올릴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서로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행복한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늘 성경 말씀 7절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같이 읽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신약 239쪽)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표현은요. 오늘날 올림픽의 시초가 되는 경기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가져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의 삶이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선수들과 같았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올림픽 경기가 사람들에 매우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는 제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기에 참여하고 승리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신 앞에서 보이는 일종의 제사였고요. 이는 숭고한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경기에 참여하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며 그것에 승리하는 것은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것이니까요. 이 일을 준비하고 이 일에 최선을 다해 좋을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인 것이지요.
바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숭고하게 준비되고 열심히 행해졌음을 말합니다. 마치 자신이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와 같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승리를 이루고자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힘써 살아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끝이지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요. 우리는 죽음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요. 그래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마치 운동선수가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준비하고 그 경기에 온 힘을 쏟아붓듯이 우리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러한 삶의 결과를 바울은 오늘 성경 말씀 8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금 같이 읽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신약 239쪽)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힘써 살아온 삶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 올림픽에서 승리하면 월계수로 만든 관을 머리 씌워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자신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달리 보면 죽음의 과정을 통해 자신은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게만 주어지는 상급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짐을 말합니다. 여기서 ‘나타나심’이라는 표현의 원어적 뜻은 이러합니다. ‘왕의 방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주 특별하고 존귀한 존재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그냥 가만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집을 청소하고 접대할 음식을 마련하는 등의 일을 하며 준비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짐을 말합니다. 보다정확하게는 주님의 재림을 믿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일까요? 참 어려운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온전히 주의 뜻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리오’ 그러나 이것에 비할 바 없이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우리와는 격이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해 제가 최근에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신 만큼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삶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오늘 우리가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의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는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요. 그 역시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그것이 문제고 고통이라고 여기지만요.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킴으로 우리를 더 성숙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게요. 바울이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는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여러 방해와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지어 목숨에 위협을 느끼다 못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에 사형수가 되어서 감옥에 갇힌 것이고요. 또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참수형을 당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생이 더 고생스럽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인생이 고통으로만 얼룩진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오는 것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지점은 이러합니다. 지금 내게 주어지고 벌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주어진 것을 묵묵히 감당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감당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은 내 예상처럼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내 판단을 앞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내년도 청년부 겨울 수련회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 저와 우리 청년들에게 기도하는 일이 참 중요한 것 같은데요. 청년들에게 이번엔 수련회 가서 주야로 기도만 하자고 하면요. 청년들이 이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심지어는 수련회를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를 놓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 켠에 청년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일까를 놓고 계속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설득하지 이런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더 늦추고 미룰 수 없어서 지난 토요일에 모여서 수련회 얘기를 꺼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요. 제 생각에는 걱정되었던 것이요.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되었습니다. 수련회 기간에 참석이 어려운 청년들을 제외하고는 기도원에 가서 수련회를 진행하는 것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일에 뛰어들면 하나님은 그 일을 도우십니다. 물론 그것은 반드시 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요.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말입니다. 내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제가 오늘 나눌 죽음이라는 주제를 좀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사실은 삶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앙인에게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또한, 힘써 살아온 현재의 삶에 대한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주의 뜻을 따라 묵묵히 힘써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이렇게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의의 면류관을 향하여 선한 싸움을 이어가고 계십니까? 현실이 삶이 괴롭고 힘들다고 낙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쌓아온 소중한 시간이 귀한 열매를 맺고 영광에 참여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바라건대, 다가올 죽음 앞에서 현실의 삶을 주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내는 우리가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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