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이야기-22. 바울-1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로마서 1장 16~17절(신약 239쪽)
설교제목: 성경인물이야기-22. 바울-1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반갑습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에 관한 절기입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기다리는 것이 있으십니까? 최근 저는 이때를 기다립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의 비슷한 바람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사람처럼 대화할 날이 오기를 말입니다.
그러면 저와 아내는 육아의 해방을 맞이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런데 선배님들은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참 많이 속는다고요.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새로운 시작이더라고요. 오히려 지금이 좋을 때라고요.’
생각해보니 오래된 광고가 떠올랐습니다. 엄마가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차 조심하고, 밥 잘 먹고 돈 아껴 써라’ 이 이야기를 듣고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아들은 흰머리가 성성한 중년의 모습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늘 어리게만 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저의 기다림은 사실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기다림은 대체로 이와 비슷하리라 여겨집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 괜찮아질 것 같고 이것만 벗어나면 끝일 것 같다’는 생각은요. 여전히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육아뿐만 아니라요. 우리가 사는 동안에 문제는 계속될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참으로 기다릴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상황의 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겁니다. 몸이 약해서 감기에 걸리고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을 갑니다. 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약도 처방을 받아서 병을 치료합니다. 일시적으로는 그렇게 병에서 회복될 수 있지만, 몸을 건강한 체질로 바꾸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쉽게 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방이 치료보다 우선’이라는 말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던 모든 인생은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소개할 사도 바울이라는 성경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변화를 이루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이에 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지도 ]
바울은 자신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소개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길리기아의 다소는 현재 튀르키예 남쪽 지역의 메르신(Mersin) 주의 타르수스(Tarsus) 시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해보면, 지리적으로는 경상도의 부산과 유사합니다. 사실 길리기아의 다소는 내륙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깊은 강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길리기아의 다소는 내륙임에도 사실상 항구도시의 역할을 했습니다.
항구도시가 그러하듯 이곳은 무역거래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그로 인해 도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습니다. 또한, 이곳은 로마제국의 자유 도시입니다. 이는 로마제국의 간섭을 덜 받았고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로 인해 학문이 발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토아학파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당시 길리기아의 다소는 아테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학문 도시였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굉장한 특권입니다. 이는 로마제국 내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계급이 높고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유와 생명이 쉽게 구속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이 있다면 로마제국의 보호 아래 자유와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 시민권은 자유와 생명을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정확히 얼만지는 몰라도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을 만난 천부장도 자신이 많은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부모에게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오랜 군 복무를 통해 또는 로마제국에 특별한 공헌으로 황제 받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이 비록 타국에서 태어나 로마 시민권자로 살아가지만요. 그의 부모님이 모두 유대인이기에 혈통적으로 유대인이고요. 그가 율법을 잘 따르는 철저한 유대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가말리엘’이라는 저명한 율법학자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자신이 혈통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한 유대인임을 자부심 있게 말합니다.
이로부터 바울의 성장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자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고향에 있는 유대인 이상으로 혈통적으로 종교적으로 철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부유하고 넉넉한 환경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더하여서 유학을 가서 당시 저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에 바울은 유대인으로서도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바울의 배경을 살피면서 참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이런 배경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은 당시 사람들로써는 부러워할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몰라도 제가 느끼기엔 이렇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바울은 눈 떠보니 ‘재벌 2세에 독립운동가 후손’ 같은 배경을 지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배경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가진 배경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삶이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삶을 살았던 바울은 그것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결국, 어떤 인생도 예수님 없이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완전하다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사도 바울은 그의 남은 인생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그것이 3차례에 걸쳐 행해진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입니다. 이 여정은 바울의 부유하고 안정적이었던 삶과는 큰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죽을 뻔한 위기도 만나고 여러 어려움과 직면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에 막바지에 이릅니다.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나라에 대흉년으로 먹고사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에서 보내온 헌금을 가지고 그곳으로 전달할 예정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를 거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려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다음에 방문할 계획인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를 로마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곧 로마서라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는 이러합니다. 먼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해온 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려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계속해서 전해온 복음의 정체를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자신이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바울의 계획은 서바나 오늘날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스페인 선교를 하려 했던 것은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화면을 보고 같이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지도 ]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바울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에게 스페인은 땅끝이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보면, 서쪽에 있는 스페인이 땅끝에 해당합니다. 이 무렵에 아직 신대륙 이른바 아메리카 대륙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페인을 가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로마는 스페인과 지리적으로 가깝습니다. 또한 로마는 당시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처럼 로마는 제국에 속한 세상과 통하는 길이어서 물자나 서신의 전달이 다른 지역에 비해 쉽고 유리했습니다. 더욱이 스페인은 바울에게도 미지의 세계였기에 여러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땅끝 곧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바울이 만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수님의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은 고대 그리스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이 말은 본래 로마 황제에 관한 소식을 뜻했습니다. 가령, 로마 황제의 탄생했다는 이야기 또는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로마제국의 어떤 지역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처럼 로마 황제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유앙겔리온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원후 1세기 무렵은 로마제국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로마제국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세계는 평화를 이뤘습니다. 이를 ‘팍스로마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는 로마제국의 황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는 세상에 평화를 주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로마 황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야기가 복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평화와 구원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경험한 사건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에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유대교의 이단이었고요. 유대교에 악영향을 주는 매우 위험한 존재라 여겨졌을 겁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신천지를 비롯한 기독교 이단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습니다. 다른 신을 믿는 타종교였다면 문제가 덜했을 겁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 거짓되고 잘못된 사상을 전파하는 이들은 교회에 위협이 됩니다. 오죽하면 각 교회들이 ‘신천지OUT’이라는 팻말을 내걸기 시작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보기에는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당시 유대교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분명 같은 유대인이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신으로 여긴다 이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바울은 당대에 저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오늘날치면 매우 뛰어난 신학자입니다. 율법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똑똑히 머리에 새겼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율법을 어기는 예수쟁이들은 도무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을 붙잡고 제거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바울은 스데반을 죽게 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스데반은 초대 교회에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놓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바울은 더 적극적으로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섭니다.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에게 있어 율법의 승리이고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졌을 겁니다. 그리하여 그 일로 흥분한 바울은 이 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그림 ]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라는 대제사장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이를 집행하기 위해 바울 일련의 무리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0km 떨어진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 일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보여줍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로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240km를 도보로 이동하려면 무려 일주일은 걸립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겠다는 목표로 일주일이상의 시간을 그 일에만 쏟아부을 만큼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 일행은 상상치 못한 일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햇빛과는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빛에 의해 땅에 엎어집니다. 너무나 강렬한 그 빛은 어떤 존재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햇빛보다도 더 밝은 그 빛이 뿜어나오는 이가 바울에게 말합니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이 누구시냐고 묻자 음성이 답합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짧지만 강렬한 만남은 바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박해자에서 예수의 추종자로 180도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대체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성경이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력 너머에 우리의 언어 너머에 계신 분일 겁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의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이로부터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예수를 만나고 정말로 이전과 다른 삶을 이루고 있습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 교회가 또는 이 시대의 교회가 진지하게 성찰해야할 지점일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과연 나는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변화된 삶을 이루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질문 앞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됨을 고백합니다. 분명 예수를 믿고 나름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목사가 되기까지 하였는데요. 저는 정말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갈 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요. 이른바 신앙 안에서 철이 들어가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생각이 앞서고 제 욕망에 종노릇할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 그림 ]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다니고 이른바 신앙생활을 오래했어도 우리가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더 성숙하기보다 제자리 걸음하거나 퇴보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늘 그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는데, 요사이 읽었던 책에서 그에 관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멍청해지기 전에 읽는 뇌과학’입니다. 제목을 통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뇌를 잘 활용하면 멍청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입력된 정보를 행동으로 출력을 해야 그것을 중요한 정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무리 고상하고 대단한 지식을 머리에 입력했어도 그 지식을 바탕에 두고 적용한 삶이 없다면, 그 지식을 우리의 뇌는 별로 중요한 정보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정보는 급방 사라지게 되고요. 반대로 말하면, 행동을 통해 새겨진 정보는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는 얘기죠. 생각해보면 그렇죠. 우리가 자전거타기를 비롯해서 운동을 통해 입력한 기술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요. 어쩌면, 우리가 설교를 비롯한 좋은 성경말씀을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것을 막상 적용하면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아내지 못했기에 우리의 신앙은 신앙생활의 연수만큼 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제의 신앙성적표가 초라한 것은 하나님의 믿고 그분께 삶을 맡겨보는 행동의 시간이 적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퇴보한다고 느껴진다면요. 이제는 행동을 할 차례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라’라고 배웠으면 사랑하도록 움직이는 것이고요. ‘기도하라’라고 배웠으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극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요. 아마도 그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일에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지 않습니까? 이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진리를 전파하는 것에 앞장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회심한 이후에 삶의 대부분을 이 복음전파에 온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정체를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을 다시금 같이 읽습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신약 239쪽)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뜻했습니다. 십자가 형은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에 반역한 이들 또는 흉악범에게 처벌하였습니다. 십자가 형은 발가벗겨져 높이 달아 놓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수치를 주었고요. 또한 십자가 형은 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고 호흡곤란으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형벌이었습니다.
게다가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3절 하반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는 심각한 죄를 지은 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죄를 범하여 처형된 후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것은요. 그 죄가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극도로 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입니다.
이 때문에 십자가 형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을 어떤 이들은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은 부끄러운 일이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서 모든 사람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경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 성경이 증언하는 바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17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서 말해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님이 로마 황제보다 크고 훌륭한 분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복음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비웃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렇게 잘난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죽었냐고요. 이에 대해 바울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분명하게 경험한 것이고 성경이 증언하는 바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이를 믿으라 이야기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입니까?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관계되시는 분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교회에서 열심으로 제가 보기에는 몸을 갈아 넣어서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정말로 충성을 다해 봉사하는데도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때때로 어려움이 닥칩니다. 최근에도 그런 일을 경험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요. 하나님에 관한 원망도 듭니다. 제가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스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이렇게 자기를 희생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분들이 더 편안한 삶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는 생각이 다르신지 때로는 근심이 되는 일을 주십니다. 이런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과연, 예수를 믿고 그렇게 충성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이 그분들께 복음이 되는 지가 의문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에게 헌신하는 일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저는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 어떠시냐고 상태는 좋아졌냐고요.’ 세상은 잘 나갈 땐 가까이하려 하지만 힘이 없고 연약할 땐 외면합니다. 하지만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에서 가장 약한 그때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어쩌면, 세상은 주께 헌신하는 이들을 비웃을지 모릅니다. 너희가 그렇게 헌신다고 해서 대체 무엇을 얻었냐고요. 차리리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했다면 더 안락한 삶이 있지 않았겠냐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는 구원이 없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도 한때는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봤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따라 자기 열심도 내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바울을 만족케 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만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까? 그분이 진정 우리의 삶에 구원을 가져다 주시고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구원을 찾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한번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이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온전한 복음이 되시는지 말입니다. 아마 그때 우리의 삶을 이전과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의 영광 곧 자신을 둘러싼 배경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이 믿음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진정 이 믿음 안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지길 바라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전과 달라진 삶으로 나아가기실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예수님이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