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밤섬으로 찾아온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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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밤섬으로 찾아온 빛
저는 최근에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사진)
주인공 김 씨는 소위 '망한 인생'의 전형입니다.
직장에서 잘리고, 빚은 산더미인데, 애인에게는 무능하다며 버림받았죠. 절망 끝에 한강에 몸을 던졌는데,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어 한강 밤섬에 표류하게 됩니다.
눈앞에는 화려한 63빌딩이 보이고 수만 대의 차가 마포대교를 지나가는데, 정작 그 섬에 갇힌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백만 명이 모여 사는 거대 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그는 철저히 고립된 '나만의 무인도'를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또 다른 김 씨가 등장합니다.
3년째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 고립 청년'입니다.
그녀는 자기 방안에 스스로 무인도를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둔 것이죠.
이 영화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섬에 갇혀 있습니까?"
꼭 밤섬이나 골방이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각자의 무인도에 표류할 때가 참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웃고 있지만 마음은 텅 비어 있는 무질서한 상태,
내 고민을 말할 사람 하나 없어 우울이라는 섬에 갇힌 상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 1장은 바로 이런 '표류하는 인생들'을 위해 쓰여진 정교한 네비게이션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무인도에 직접 찾아오신 한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뚫고 찾아와 우리 삶에 텐트를 치신 그 분을 함께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1]
혹시 내 삶이 무질서하다고 느껴질때가 있습니까?
너무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정신이 없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이것도 해야할거 같고 저것도 놓치면 안될거 같아 갈피를 못잡는 인생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만 쳐다보며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니까 나도 무조건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삶에 열심은 있지만 그 방향과 중심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장 1 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여기서 ‘태초에' 라는 단어를 들으면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그 어둠과 공허,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창조의 순간에 함께 계신 존재가 있다고 증언합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분명 하나님과 구분되는 존재입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질서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로고스'라고 부릅니다.
로고스는 온 우주를 질서있게 만드는 창조의 설계도입니다.
1장 17절은 이 신비로운 로고스가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우리 삶의 질서를 유지하시는 분이십니다.
흔들리는 배는 바다 속 깊이 내리는 닻이 있어야 고정됩니다.
우리 삶에도 닻과 같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파도가 덮칠 때, 우리를 단단히 붙들어 줄 닻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표류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조회시간을 가질 때였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이 질서 있게 움직이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기준’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기준!’이라고 외치면, 흩어져 있던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줄을 맞춥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준'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의 SNS입니까, 세상의 평가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만드신 설계자, 로고스 예수님입니까?
[본론2]
그 분을 떠난 인생은 어둠 속에서 헤맬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고통과 절망, 슬픔과 아픔들이 삶의 어둠을 가져다 줍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삶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망의 빛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씨 표류기’의 김씨들이 모두 그들입니다.
하지만 이 어둠을 이기는 빛이 있습니다.
1장 4-5절입니다.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가장 독보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무려 36번이상 반복됩니다.
이 단어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로고스, 즉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는 새 생명이 있습니다.
육적인 생명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이를 영생, 거듭남,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기적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 고친게 아닙니다.
모두 새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새 생명이 이식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새 생명을 얻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내 표정과 언어와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그 증인이 바로 접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남들이 또는 세상이 가라는 길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예수님 만나 정신차렸습니다.
삶의 의미조차 삶의 목적조차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새 생명을 얻자 변화된 것입니다.
새 생명 안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빛이 어둠에 비추는데 어둠이 이를 이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새번역과 달리 개역개정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새 생명을 얻은 삶을 이해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이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직 어둠속에 있기에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맙니다.
"나약한 자들이나 믿는 거지, 왜 일요일마다 교회가서 내 시간을 낭비하나?“
”왜 일부러 손해보면서까지 정직하게 살아가려 하나?“
이렇게 말합니다.
둘째,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길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의미가 더 강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은 물러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빛의 능력입니다.
어둠은 단지 빛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통, 절망, 슬픔은 결코 우리를 지배할수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수 없습니다.
암막 커튼에 약간의 빛만 들어와도 어둠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론3]
하지만 빛은 우리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빛 자체가 아닌 빛의 반사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1장 6-8절입니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침례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빛이 아니고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증언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증언하다’는 동사가 33번이나 등장합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빛과 생명의 증언자가 됩니다.
하지만 증언자가 빛은 아닙니다.
빛을 받아서 빛을 반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8절은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증언자는 자신을 높이거나 내세우면 안됩니다.
단지 빛을 드러내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하고 믿게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빛의 증언자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삶을 통해 예수를 드러내고 믿게 하는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높아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룬 것들 가진 것들은 모두 그 분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내가 높아지지 않을때 우리는 비로소 참 빛이신 예수님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빛의 반사체로서 살아갈 때 주님이 주신 놀라운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권세’입니다.
12절입니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세상에서는 무엇인가 권세를 얻으려면 쟁취하거나 타고나야 합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거나 개천에서 용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녀의 권세는 다릅니다.
내가 노력해서 쟁취해서 따내는 ‘자격증’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신분’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와대에 있는 구내식당을 가셨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서 밥퍼주시는 아주머니가 얼마나 당당하고 기가 세던지 놀랐다고 합니다.
청와대 직원이라는 그 신분 하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럼 온 세상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요?
세상의 평가에 기죽지 않고 눌리지 않고 살아갈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때 하나님께 기도할 권세, 고난중에 주님을 의지할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바로 이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권세는 우리의 자격이 아닌 ‘은혜’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은혜란 무엇일까요?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선물입니다.
하지만 어둠속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Give and take, 공짜 점심은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관에서는 은혜란 있을수 없습니다.
자격이 있어야 가질수 있고 누릴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돈을 지불하고 구독해야 충분히 누릴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조차 이 은혜를 잘 누리지 못합니다.
머리에 큰 짐을 짊어진 어떤 아주머니가 길을 가시다가 트럭 운전사 분의 호의로 차를 얻어 타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목적지까지 이 아주머니를 태워드리는데 아주머니가 머리에 계속 짐을 얹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트럭 기사분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계세요?”라고 물으니 “차도 얻어타는데 짐까지 내려놓을수 있나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만 여전히 우리 인생의 짐은 내가 짊어지고 쩔쩔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란 내 힘을 빼고 내려놓고 맡기는 삶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싸구려가 아닙니다.
이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구원하신 것도 모자라 우리의 삶을 충만케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를 보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느날 김씨는 쓰레기 더미에서 짜파게티 수프 한봉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 짜장면이 너무나 먹고싶어 그것을 직접 만들어 먹으려 합니다.
결국 밭도 일구고 씨를 뿌려 옥수수를 얻어 그걸로 반죽을 해서 짜장면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 짜장면을 먹으며 그는 오열을 합니다.
그에게 짜장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야할 이유였고, 작은 빛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짜장면 한 그릇이 죽으려고 했던 그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버려진 짜장 수프 한봉지가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소망이 되었다면, 그럼 하물며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짜장면은 잠시 생존을 이어주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밤섬’에 찾아오셔서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김씨처럼 내가 무엇인가 증명해야만 얻을수 있는 희망이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은혜입니다.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때론 우리의 인생이 밤섬처럼 외롭고 척박하지 않습니까?
짜장면같은 존재를 소망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존이 아닌 생명을 주십니다.
그 분을 영접할 때 우리 삶에 무질서가 끝이 나고 어둠이 우리를 삼킬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평가도 우리의 신분을 바꿀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입니다.
그런 권세로 살아가는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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