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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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여러분들을 위한 나의 고통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내 육체 안에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위해 예비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 나갑니다.

바울은 1장의 마지막 부분을 왜 자신이 골로새서를 쓰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씁니다. 물론 1장 전체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친절한 설명이라 할 수 있지만, 특히 24절 이하의 설명은 매우 구체적인 바울의 의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골로새 교인들이 현재에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고통에 대해 좀 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이 현재 그러한 불신 불안 고통 안에 계신다면 오늘 어느정도 그 부분에 대해 답을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4절은 ‘닌’ 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1장의 대부분을 복음을 설명하고 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설득시키는데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바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왜 바울이 골로새서를 지금 시점에서 쓰고 있는가? 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닌’ 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고 분위기를 환기시킵니다. 이제 지금 바울은 어떤 상태인지를 말해 줍니다.
첫번째,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고통을 기뻐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파티마’ 고통이라는 단어 앞에 있는 소유격 관사를 해석하지 않아서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대신 겪는다라고 해석할 여지를 줍니다. 하지만 바울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은 자신이 겪어야 하는 자신 몫의 고통입니다. 이게 어떻게 다르냐면, 바울이 고통을 겪는다고 골로새 교인들의 고통이 줄지 않는 점입니다. 대신 겪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겪어야 하는 고통의 총량이 있는 것 처럼 이야기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현재 받는 고통이 장차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점입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주어진 고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일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과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단지 정확하게 우리가 그것들을 알았을 때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예시가 아닐 수는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근육을 키우시는 분들은 특정한 운동을 통해 해당 부위의 근육을 집중적으로 훈련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운동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만족해 합니다. 고통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지만 고통이 주는 의미를 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시로 특히 여성분들이 다이어트를 할 때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특정 음식을 피하고 총 칼로리를 계산하고 먹기 싫은 음식을 먹습니다. 배고픔과 식욕과 싸웁니다. 그래야 원하는 부위를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배고픔과 싸울 수 있습니다. 결과가 확실하니까요. 운동 선수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훈련을 합니다. 엄청난 양의 훈련을 하고 땀을 흘리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원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현재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교회들이 그 의미와 결과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온다 정도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정작 자신들은 그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고 겪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관대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조차 고난과 고통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알면 당연히 기뻐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정확히 그 고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편지를 쓰는 그 시점에서 골로새 교인들 때문에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부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부분을 오해하면 아주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고난을 받아 그리스의 고난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받아야할 고난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은 우리 몫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여겨주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할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을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받는 고난은 교회에게 주어진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부분이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각각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그것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각자 개인들이 고난을 받지만, 결국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고난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총량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쌓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리스도가 겪는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다시한번 우리가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계산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피할 것도 아니고 괴로워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전하지만 완성되어 갑니다. 또 다른 신비입니다. 부족하지 않지만 더 풍성해집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 아닌 풍성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두 단어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서 ‘남은’ 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스테레마’ 인데 부족함 가난 이라는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주로 바울이 사용했던 단어인데 절대적인 부족을 말합니다.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채워야하는 공간을 뜻합니다. 그 다음 단어는 ‘안타나피에로’ 라는 단어로 다른 사람이 비워놓은 곳에 가득 채운다는 뜻이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해석하기 까다로운데, 바울조차 신약성경에서 딱 한번 여기에서만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이 두 단어를 조합하면 의도적으로 비워놓은 공간을 채워나간다는 뜻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의도는 명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받아야할 고난의 공간을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간을 차곡 차곡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채워야 하는 빈 공간이 됩니다.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을 지식적으로 인지하고 직접 경험하며 그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기쁨과 평안이 주어집니다. 그 무엇보다 결과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그 고난을 채우는 장소가 육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데, 바울 개인의 고난을 채우는 장소가 바울의 육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우리의 몸으로 수고하고 몸을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채우는 고난 저장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운 고난은 교회의 고난으로 계산되어지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그 교회의 사역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들을 위해 채우는 일을 맡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복음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고 이해시키고 채우고 완성시키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역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해시키고 채우는 것은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주목할 단어는 ‘플래로’ 라는 단어인데, 이루어지다 성취하다 채우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어적으로 빈 그릇을 완전히 채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고 교회에 채우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는 복음을 채우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24절의 단어와 25절의 단어가 다릅니다. 그렇게 함으로 둘의 성격이 다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채워야 하는 두가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는 고난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입니다. 교회는 그 두가지를 채우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육체 역시 그 두가지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울이었고, 지금 골로새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새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이제 막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은 편지의 서두부터 복음에 대해 설명하고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한 교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책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 왜 골로새서를 공부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골로새서를 공부하면서,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여러 진리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골로새서를 통해 알게될 하나님의 마음을 기대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채워야 할 두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완전했고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채워야 할 고난의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 각 개인은 우리의 육체에 고난을 채웁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에 받은 고난으로 계산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고난을 기뻐해야하는지의 이유입니다. 둘째로, 복음을 채워야 합니다. 복음은 교회인 우리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복음은 전해야 하고 완성시켜야 합니다. 복음이 완성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충만하게 채워질 때입니다. 복음은 일회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생명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명은 자라고 열매를 맺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복음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기쁨으로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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