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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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01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c0ZVOEoLHho
여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4 (NA28)
14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첫 장을 넘기면 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투 코스무 너희죠 그죠 너희는 에스테 이다. 토 포스 그 빛이다. 투 코스모 그 세상의 그 빛이다. 세상의 빛이다.
추천의 글
통합적 사고로 진리를 말합니다.(사상, 윤리, 은혜의 힘을 회복함)
강영안 교수
이 책을 손에 드신 분들은 김남준 목사님 책을 저보다 더 많이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님 책을 아직 그리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이 책의 원고를 손에 들고 며칠간 푹 빠져 읽으면서 목사님의 신앙과 사상 세상과 사물을 보는 관점 글 쓰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이 책을 비평과의 관점에서 읽지 않았습니다. 수용자 또는 독자의 마음으로 일종의 공감적 독서를 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감동을 받은 사람은 그냥 빙긋이 웃는 얼굴로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나 여러분보다 앞서 이 책을 읽는 사람으로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김남준 목사님의 사고가 매우 통합적이라는 사실을 저는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다른 훈련이나 활동으로 보면 목사님은 뛰어난 신학자여 목회자이지만 성경을 읽고 사고하고 적용하는 과정을 보면 신학과 철학 인문학과 자연학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풀어냅니다. 심지어 도시미학에 관한 상당히 긴 논의를 하는 것을 보고는 목사님의 학문적 폭과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은 무지할 권리가 없음을 목사님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통합 학문은 성경 한절 한 단어를 풀어낼 때도 드러납니다. 요즘 학자들은 자신이 한 전공의 좁은 범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어떻게 있냐면 어 아 이게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이제 어떤 사람이 이제 교회에서 좀 어려운 질문을 했더니 목이 그런 거는 목회자 잘 모르고 신학자를 찾아가야 된다 그랬습니다. 학교 교수를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어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물어보니까 그거는 나는 조직 신학을 했기 때문에 나는 성경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찾아서 돌봐야겠다 그래 이제 성경 신학는 교수를 찾아서 그래서 로마에서 보자 모르고니까 아 난 전공 구약이라서 신약은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약 교수를 찾아갔어요. 서 공부했때 말까 아 나는 복음서 전공이라서 어 바울 서신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럼 누굴 찾아가야 되냐? 바울 신학을 전공한 찾아가요? 가울 신학을 전공한 교수를 찾았어. 그 교수하는 말이 어 내 전공은 그 데살로니가 살아서 로마서에 나오는 걸 가지고 함부로 내가 얘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떻하냐 그니까 바울 신학을 한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야 돼요. 그래서 간신히 로마서와 가지고 박사만 사람을 만났어. 어 그래서 이게 부장 가르쳐주죠. 나는 전공 8장이라서 9장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들 내가 지었는 얘긴데 그런게 지금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사실이 너무 몰라.
그러니까 그 신학하는 사람들은 역사 신학에 대해서 김세윤 교수를 뵙고 그러면서도 아 이렇게 공부 많이 하시는 역사 신학이 유치원생 같이 모르시는구나! 역사 역사 신학을 좋은데도 아마 좀 배우셨거든요. 그렇게까지 심지어 성도의 견인을 부인하는데까지 이렇게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네. 그 얘기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걸 이제 굉장히 권위게 생각 아 너 8장 전공이라서 9장은 내가 한번 이야기할 수 있는 거면 사람들이 그 사람이 더 위대하게 보는 거예요. 아마 팔장을 깊이 팠으면은 부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래 웃긴다는 거예요.
최근에 뭐가 있냐면은 일본에 장인 정신이라는 거 있잖아. 한국 사람이 시기에 이제 갔대 도재 교육을 받는 식으로 이렇게 하는데 가니까는 어 설거지를 시키래 그래서 설거지를 만족게 왔더니 밥을 하라 그래 밥는 거만 3년이 걸린다는 거 초밥 만드는 밥을 하는 거 그래서 해가지고 이제 열심히 이제 했는데 어떤 날은 잘했다 그러고 어떤 날은 못했다 그러더래 근데 솔직히 자기가 보기에는 똑같은 밥인데 그러게 되는 거지. 그래 놓고 이제 페이는 열정 폐인 수준이야. 왜 애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근데 이제 그러면서 이제 스시를 만들 배우기까지는 10년이 걸린다고 얘기 10년. 근데 우리는 이제 그게 진짜인 줄 알았거든. 근데 저도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요리새 중에서 다 사기다. 내가 일식집에 자기 정지는 다 사기다 그러면서 자기는 6개월 만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치렸어. 학생들이 몰려왔어. 아시 아카드미로. 그래서 6개월 동안 배웠는데 그 6개월 배우고 어떤 사람이 식당을 열어 가지고 2년 만에 미슐랭 스타를 투스타를 얻었어. 다 사기라는 거야. 다 사기라. 그렇게 해서 쉽게 얘기하면 이제 노동력을 노동력을 이제 쉽게 빼먹는 거를 하고 그렇게 폼을 잡고 온갖 유세를 끌면서 그런 것. 한국도 많아. 한국에서 의식집에 내려갔을 때 좀 물어봐서 이렇게 생선을 이렇게 상심이 뜰 정도 되면은 얼마나 훈련을 받아야 되냐고 3년을 받아야 되 처음에는 이제 어 그 야채 다듬는 거부터 시작을 해서 그다음에 생선 다듬는 거 그다음에 이제 어 생선을 이제 해체하는 거 뭐 등등등 등등 하나가 이제 그래도 40일 때 정도 되면 3년 나도 뜬다. 나도 3년 안 배워.
신학자들도 이점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로마서를 전공했고 로마서 가운데에서도 9장에서 11장까지 이른바 ‘이스라엘 문제’ 를 전공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엔 잘 모른다.” 이런 방식입니다. 소논문을 쓰거나 학위 논문을 쓸 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방식으로 연구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은 성경 한구절을 읽더라도 단순히 단어의 뜻과 구문의 구조 뿐만 아니라 성경 신학과 교의학, 역사신학과 실천 신학의 관점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나긴 독서 과정을 통해서 통합 신학을 몸으로 익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처럼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를 이어줄 사고의 줄을 상실한 때에 목사님이 시도하는 통합신학적 방식은 성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성숙한 공동체로 키워 가는 데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특히 반갑게 생각하는 점과 윤리, 지성과 실천적 삶을 다같이 강조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 온 신앙 전통은 믿음, 열심, 헌신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과 윤리적 삶은 소홀히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반지성주의와 윤리무관심주의가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상당히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아멘하고 열심히 모든 일에 참여해야 좋은 신자인 것처럼 이해될 뿐 아니라 세상의 윤리 기준으로 보아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는 태도가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이책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의 덫을 벗어나 제대로 된 사상 체계를 가질 수 있는 길과 도덕주의와 윤리 무관심주의의 덫을 벗어나 윤리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은 삼위 한 분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 안에 있는 사랑과 은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임을 목사님은 잊지 않고 계속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야, 이 두 개를 아치처럼 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야, 항상 그거를 생각하면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해야 해.
저는이 책이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신뢰를 많이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하면 어느 곳에나 반대와 미움과 배척이 있지 않느냐?”하고 반할 분이 있겠지요. “어둠은 빛을 싫어한다!”고 말하지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기독교는 선교 초기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복음이 이 땅에 돌아와 사람들의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꾸는데 너무나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희생 봉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통로를 통해 포착됩니다. 스스로 빛이라 자처하지만 열매를 보면 어둠이 아니고서는 맺을 수 없는 것들을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이렇게 반문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신뢰가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은 그만이지.”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자신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까? 말의 가치는 신뢰를 바탕 했어야 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고 전한 복음대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만일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그가 하는 말도 당연히 가치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 자체에서는 신뢰가 나오지 않습니다. 말과 삶의 일치, 말과 행동의 일치가 반복될 때 신뢰가 쌓입니다. 타인에게 한 약속을 지킨다든지 기대한 능력과 실제 능력에 차이가 없다든지, 정직하다든지 할 때 사람들은 신뢰를 하게 됩니다. 말에 뒷따라야 할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명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목사님의 책이 제공해 주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족이 될지 모르지만 한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읽을 때 부딪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있는 말씀을 제자들만 모아놓고 따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왜 수많은 무리를 포함시키셨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제자들이 일차적 청중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리는 일종의 들러리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신 이유가 무리 때문임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런데 그 무리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을 고치신다는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구별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불러 모으신 사람들입니다. 무리는 자신의 욕구와 필요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놓고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복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성품에 대한 여덟 가지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컬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일종의 존재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제자들은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무리가 이 존재 선언을 받을 만한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거치면서 비로소 성령 하나님의 깨우침과 내재를 경험하고서 제자들이 참 제자가 되고 무리가 더 이상 무리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변화된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제자된 삶의 존재론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다시 생깁니다.이 물음에 대한 답을 김남 목사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 14-16절 까지 단 세절을 가지고 이토록 넓고 깊은 논의를 할 수 있는 신학자, 목회자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고등학생들부터 대학생들이 먼저 이 책을 읽고 깊이 묵상하고 토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물론이고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10쪽을 보시면은 어 간격하게 말하자는 사실은 세 절이 아니라 사실은 한 절이야. 그 무리 세상의 빛 가지고 하는데요. 일장에서는 빛을 보신 사람들 어 참가 누구나는 세상을 비추게 하시는 사람들 세 번째장에서는 그 빛이라고 하는 것의 가변성과 불변성 그리고 이 가장 길고 가장 중요한 거 그래서 어 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이 나오고 그다음에 이제 음 사장에서는 그 집과 하나님 장을 합니다. 그 >>
출간에 부치며
그래도 우리는 빛이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본문의 의미를 열어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구절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본문은 수없이 읽은 말씀이요 굳이 성경을 펴지 않더라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이요 요즘은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른 땅과 같아 보이는 이 말씀이 열리면서 반짝이는 빛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원에 있었습니다. 하늘 높이 장렬하는 불꽃의 파편들처럼 본문 말씀에 감추어졌던 진리들이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환희의 기억을 붙잡아 두려는 아이처럼 그분께로부터 부어지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거침없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불꽃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체계적으로 배열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때 들려 주신 것은 저뿐 아니라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깨우치고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그 소명대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바로 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진리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빛바랜 복음으로 굶주린 영혼을 채울 수 없고 진리 없는 번영으로 번영의 죽음만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이 책을 정확히 2주 동안 썼습니다. 집필하는 내내 교회를 세속화하기 위한 세상의 시도는 이토록 치밀하고 철저한데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교회의 시도는 엉뚱하고 허술하기 그지없어서 눈물이 나도록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간절히 이 땅의 교회들이 진리를 맡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꽃처럼 타오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말씀을 통해 찬란하게 타오르는 진리의 빛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빛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을 향한 소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음 그 팔복에 대한 선언이 나오고 나서 그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나오잖아. 그래서 그냥 아무나 보고 예수님을 너희는 빛이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이제 믿고 팔복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그때 그 사람들이 에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빛이 그런 관련성을 속에서 이제 이해를 해야 돼.

제1장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

I. 들어가는 말

이장의 본문은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7장까지로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한 구절입니다. 다수의 신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전체가 한 번에 설교된 내용일 것이라고 주측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본문은 꽤 길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설교의 핵심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이 세상의 소금과 빛에 비교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가 우리가 이 책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차적으로는이 말씀을 적용하는 우리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바로 앞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제자들을 가르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야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는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온 요단 전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느라”(마 4:23-25).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팔복산이라고 불리는 이산의 명칭은 공식적인 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언덕을 가리키는데, 갈릴리 호숫가에 위치한 어느 언덕임에는 틀림 없지만 실제 위치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첫째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각색 병든 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려는 구원이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인적 구속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병 고침이 진정한 구원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산으로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왕처럼 좌정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시기 위한 준비인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신 12제자 같은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 고침을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 백성이 된 모든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당신의 나라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그 빛으로 살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그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II.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천국의 백성을 빛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빛의 비유는 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빛의 비유들의 연속 선상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익숙한 유대인에게이 비유는 아주 친근했을 것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해박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과 선지서들을 통해 사용된 빛의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시 27:1, 37:6, 사 62:1).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빛의 비유는 구속사의 전개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명백해지는 신약 계시 안에서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빛 구약에서 빛이 오르거든 오르. 그런데 그 빛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빛도 가르쳐야겠지만은 그러나 비유적으로의 가르킬 때는 진리를 의미한다. 진리 그리고 진리와 그다음에 그 진리의 빛으로 깨달은 총명. 그것을 가르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그 지혜를 지혜와 연결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어 나는 빛이라하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심으로써 구약이 가르쳐오던 그 모든 지혜의 화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는 그런 구속자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이제 제가 읽어야 돼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2-4).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약에서 예표로 제시된 빛의 실체이심을 고려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신 것은 가장 권위 있으시면서도 친근한 방식의 가르침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면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와 무지로 인하여 알지 못하던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그빛가운데 사랑으로 교통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사랑으로 교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우리가 서로 사귐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A. 신약에 나타난 빛의 의미

신약 성경에서 빛을 의미하는 단어의 ‘포스’는 약 75회 정도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리적 빛, 윤리적 빛 그리고 신학적 빛입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물리적 빛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광학적인 빛을 가리킵니다. 곧 어둠을 비추는 자연의 빛을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이 세상에 많은 보화 또 그 보화가 나타내는 영광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마 24:29, 눅 11:36, 계 21:11 등).
둘째로, 윤리적 빛입니다. 이것은 그 빛을 담지한 사람의 착한 행실로서 진리의 효과를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일 때 그 사람을 빛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따르는 그의 올바른 삶이나 인격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진리를 알게 하는 효과를 나타낼 때 그것을 빛이라고 묘사하습니다(마 5:16, 13:43, 요 3:21, 롬 13:12 등).
셋째로 신학적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 나아가서 어떤 가치의 질서를 보여주는 효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빛은 곧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요 1:4, 7, 3:19, 21 등).

B. ‘그 빛’ 인 신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수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병충에 받아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름이까지 모두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수준의 상황에서들을 단수인 수비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갈에서 사탄소는 와 1차적 청중은 경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물이었으나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차적 청중의 의미까지 그 빛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19:48)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선언의 의미와 주명성을 살수기 위하여 우리는 빛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이를 위해서는 먼저 빛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이를 빛의 문제 하나님께서 청하신 사무 >> 그만큼 독특한 성능의 물질은 없습니다. 그래서 과자부터 아이슈타인는 이탈지 문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념적이고 철라적인 산물이라고 말씀 말하였습니다. 현대물학에서 빛의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이는 정의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존대합니다. 만약 빛을 시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광선으로 교정한다면 그것은 가시 가시 광선에 북한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빛이 존대합니다.
(20:29) 빛은 광선의 파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분류되는데 그렇다고 빛을 파정에 극한시켜 생각할 수도 없었 없습니다. 왜냐하면 밑은 파장인 동시에 광자라는 입자에 등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빛이 퍼져 나가는 것은 파동이면서 입자인 전다 기파의 발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비슷대로 아름다운 색깔로 드러나기도 하는데이 색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의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빛의 특성은 다른 사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질입니다. 프리즘의 스 스 스펙트럼 실험을 통하여 빛의 입자서를 주장하였던 아이자 뷰터는 유체 세일 빛의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합성 비율를 바꾼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21:06) 그래서 뉴턴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 말하자면 광선에는 색이 없다. 광선에는 세계의 감각을 일으키는 능력과 성질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빛의 색깔이라는 것이 순전히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감각에 강관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바라보는 노란 색깔의 꽃은 조류의 눈에는 보라색을 뛴 회색 빛으로 보입니다.이 이만누의 칸트가 물 자체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 이처럼 빛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존재 양식에 있어서는 다른 사물들과 현재 구별됩니다. 빛이 존재하는 양식은 결코 물이나 나무 돌과 같지 않습니다.
(21:38) 빛은 자신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내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빛을 객관적 사물로만 인식하신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 기능 혹은 능력으로도 생각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빛은 사물과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인식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이는 마치 진리가 인간에게 도덕적 설복의 방식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할뿐 아니라 사람에게 인식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2:11) 이러한 빛의 독특성 때문에 빛은 자주 진리 자체 혹은 그 진리의 효과를 가르키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빛에 대한 이러한 수고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빛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둘째로 빛의 본질은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빛을 누리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빛은 자신을 나타낼뿐 아니라 그 빛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하거나 잘못 보았을 사물들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 줍니다. 넷째로 빛은 존재와 인식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진리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그 효과를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빛이 있어도 인간이 그 빛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물들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22:49) >> 그 빛 발광과 권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정말 우리가 빛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공적인 불빛을 모두 배제하였을 때 세상에 어둠이 내리면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밝은 빛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달입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달빛이 비치는 지역은 미국의 콜로라도라고 합니다. 고지대 있고 공개가 맑아서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이면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밝은 빛입니까? 지구와 달의 거리는 363,300km부터 405,500km의 범위에서 개도상 위치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23:22) 타원형을 보기 때문에 어 가까이 있을 때는 3,6만이고 멀리 있을 때는 40만km까지 나가니까 4만km 정도라는 엄청난 기대를 차가 나 >> 우리가 흔히 지구와 달래 거리를 38만4,400km라고 하는데 이것은 2천원 유동적인 거리의 평균을 산출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달리 반사하여 빛이는 빛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하니 그 빛의 세계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스스로 빛을 바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그 빛을 받아 단지 반사하기만 하는 암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할지라도 그 빛은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운 것을 받아서 비춘다는 점에서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암체와 같은 존재입니다.
(24:01) 그러나 표면의 태양 빛이 비쳐 반사될 뿐인 거울이나 달의 빛과 달리 우리가 비추는 빛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단단한 자의 껍질을 깨뜨려 우리의 지성 속으로 파고 들어와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지힌 결과라는 측면에서 암체의 비유되는 것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치는 빛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뿜어져 나오는 것이 거 것이기 거 것이 거시기는 하나 우리 안에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춰 주신 진리의 빛을 받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교리와 지식의 말씀으로 사상의 체계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또한 성령의 은혜로서 우리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랑 안에서 순종의 삶을 살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더 입은 결과입니다.
(24:45) 그런 점에서 우리가 빛이라 할지라도 아 그것이 결코 빛의 온천이신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감하는 것이 아닙니다.이는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이 세상의 모든 마무리에 자연 법칙을 부여하셨으나 우주 마무리 하나님 없이 법칙에 의존하지 아니하시고 그 법칙이 당신을 의존하게 하여 그 안에서 만물을 친히 유지하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자신이 인간의 모든 거룩한 성향들의 원인이시나 그것들이 하나님 없이 인간의 마음의 작용과 삶을 주관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의지의 작용 안에서 인간을 다스려 가시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인간 자신은 빛이 아님 그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치 자신 안에 빛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고 나아가 자신의 빛이라고 자차하였습니다.
(25:25) 빛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한채 자신의 이성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거나 이성만으로 그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형성해 온 시대 정신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이러한 시대 정신이 극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진리의 존재를 거부아 오늘날 시대 정신의 특징은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내팽겨지고 도덕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이 시대가 도덕을 무시하는 이유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덕은 객관적인 진리의 개념인 도와 그에 합치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인 덕을 의미합니다.
(25:52) 현대에는 도덕을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수립한 인간 억압의 수단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도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근거없는 억압으로부터 완전한 인간 해방을 통하여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나 통 행동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절대 기준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거부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즉 절대적 가치 기준을 강려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며 인간 본성 안에 진리가 될 만한 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견되는 빛이나 진리도 감정적인 것일뿐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6:17) 아니 영원한 것일 불로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퍼스터 모던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 또한 이제까지 관성으로 거쳐오던 유기적 영향들조차 이미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나불던 나쁘던 교육을 위한 보호들은 이제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옛날 학교를 비롯한 주요 강공 앞에는 항상 커다란 가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호들이 뛰어 있었습니다. 1950년대의 표가 부치자 공산당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었고 1970년대에는 유신으로 번영하자였습니다.
(26:43) 그런 것이 1980년대에 와서는 나라의 충성의 효도 화자가 되었고 1990년대에 와서는 진동으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에는 모든 글자가 지워지고 하얀색 감상만 남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기록하여야 할 사회적인 합의은 이런 부호가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구호를 채택할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 때는 니다. 저는 지금은 대학교 3학년된 딸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시계가 보았던 대학급의 그분을 기억합니다. 당극은 이것이었습니다. 경쟁은 엄연이 존재한다. 따라났죠. 이제 현대인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별에 봉사하며 부모에게 표도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자는 부모는 후도력을 잃었습니다.
(27:11) 사연의 행복에 입하지 않은 것이 훌륭한 삶이라는 의전의 가치관 역시 낡은 생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현생이 추구하는 친구의 가치는 개인의 평안과 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시간도 더 부드러지고 있습니다.이 두 가지가 성취될 수 있다면 그거 자체가 도덕이고 같이라고 믿는 사례가 된 것입니다. 기름주의 폐해 미국에서 들어온 주위 윌리엄 제임이스 찬스 샌더스퍼스 올리버 웨드 홈슨 등에 의하여 전개된 신용주의가 그 영향력을 확 확산하고 확산하고 있을 때 그들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였습니다. 그들이 확산하고자 하였던 신념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절대적 가치와 모든 사람이 따 절대적 가치와 모든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안 돼.
(27:41) 항부적 도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명 어떤 가치와 도덕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정적 감정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용주의 등장 실용주의자들은 보다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론을 구축해 갔습니다. 다원주의를 기초로 철학적 실용주의를 학파 실용주의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은 찰스 다위의 자연주의를 기독교의 유신적 세계관을 예치할 완전한으로 만들고자 하는 동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당대뿐 아니라 후일 미국인의 사고 방식과 사회제도 형성에 커단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진리는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서위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법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8:13)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를 어떤 하나의 생각이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서의 가치라고 하는데이는 어떤 생각이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면 그것은 진리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리버 웬들 혼스의 다음 언급은 이러한 사상을 잘 대려하며 법은 정확하게 축정된 사회적 욕구들에 의해 채워져야 하며 기존의 법이 가지고 있는 정당권은 예를 들어 정의와 납된 영원한 원칙을 대변하데 있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적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가 있다. 피주의 폐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의 사상을 희용주의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용주의의 인간으로서 하여 피용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한다라는 질문을 박탈해 버렸습니다.
(28:46) 실용주에 따르면 인간이 부들어야 할 절대적 기준 같은 것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령주의적 도덕관이 학교 교육에 관영된 결과였습니다. 내시 표시는 자신의 책 완전한 제에서 실용주의 교육 철학자 이존의 상적 구덕 학습 방법을 실제 적용한 한 교사의 경우는 이렇게 제합니다. 교육학교 토마스 리포하가 파랑 12일 학생들을 배상으로 가치가 명령화 전략을 제시했다 한 교사의 이야기를 보관했어 학생들은 서론을 통하여 자율적으로 자신들이 가장 같이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정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된 것들이 섹스 마약주 결석이었다. 그 교사는 그런 교육 방법으로 그들이 선정한 활동들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설득할 수가 없었는데이는 과거에 도덕적 이상들을 가르치는 대신 학생들이 자신의 기관적인 감정과 가치관들을 훈련시킨 교육이 결과했다.
(29:27) 이것은 절대적이 기준을 거부할 때 결국 인간이 무엇을 바라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진리라는 절대 기준을 버린 데서 기록됩니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가? 오늘 사회에 자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빛을 버리고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 진리가 놓고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동질적 정신은 새로운 가치관을 성상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게 신각한이라면 용납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철학은 절대 가치와 도석 기준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논리적 근본과 사상적 무기를 제공해 주었고 그 결과 이전에는 못한 인간의 악행들이 한 세상되었습니다.
(29:58) 그러나 지렁주의자들이 이러한 판에 대하여 상황이 반문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율적 존재이다. 우리가 왜 이러하지 행동을 하면 안 되는가? 누가 무슨 권위로 궁으로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을 누가 필요하였는가 그러한 실험 부위의적이고 같이 선해주의 사상이 광범 위하게 유보됨으로써 인간은 무엇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끊어붙는 죄악과 방동 방황과 도덕 고독 표적한 소회로 돌아왔습니다.이는 인간이 다윗 악에 있는 대관적 진리를 거절하고 자기 안에 만 진리의 빛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0:31) 인간은 단기 빛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그 빛을 따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자녀를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 사실 이러한 신용주의 사상은 이미 17, 18세기의 사회 개혁 사상에서 예고된 바입니다. 토마스 호스, 존로크, 장자크루소 등에 의하여 주창된이 사상은 사회나 국가의 성립 근거를 구성원들의 계약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역사상 인간이 이룩한 사회나 국가는 구성원들을 강제할 질서 수립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구성원들의 동의와 협력을 통하여 도덕과 법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1:08) 그들은 그 도덕과 법이 상호 이익을 기초로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로는 사회의 도덕과 국가의 법 재정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될 수 있었지만 도덕 근거 자체를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도덕의 근거에 대하여 길버트 체스터는 그 책 그의이 책 정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치지 않는다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도덕에는 이러한 거래 관계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 같은 흔적은 있다. 우리가이 신성한 장소에서 서로 치고 받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종교를 수호함으로써 도덕을 얻은 것이다.
(31:38) 그들은 용기를 기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전을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보니 자신들이 용감한 자들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정결하게 되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단에서 제사하기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동결하게 하다 보니 자신이 깨끗하게 된 자들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물질주의의 그림자. 18세기의 용국을 지작으로 산업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산업혁명은 이미 15세기 유럽 국가들이 해양 진출과 식민지 개척에 열어 올릴 때부터 예고된 사회 변역이었습니다. 식민지에서 두려온 갑싼 원료들을 이용한 재화의 대양 생산은 국가적 구의 축적 수단이 되었고 이것은 약소국 지배국에 대한 경제적 소탈과 외국인 근로자들의 임금 착지로 이어졌습니다.
(32:16) 이제까지 1차 산업을 기반으로 하던 사회의 안정성이 무너지며 사회생활의 익명성을 유행시키는 도시화가 바쁘게 이루어졌고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 왜 왜 이런 변화가 되냐면 예전에는 어 모두 그이 어 뭐라고 할까 이렇게 자급 자족하던 시대에는 어 사람들이 각기 자기 할 일이 고유하게 전해져 있고 다른 사람과 별 특별한 관계가 없었어요. 그래서 신발 만든 사람은 신발 계속 만들고 감자 신는 사람은 감자 계속 쉬고 그다음에 어 조소 저소를 기르는 사람은 저소를 기르고 그래서 그거를 가지고 각이 그 무건을 가지고 와서 시장에 와서 사람들과 바꾸는 거예요.
(32:58) 물물 교환이라 말는데 그런 그러던 깨닫 그렸었단 말이죠. 이게 이제 나중에 이제 어떻게 되냐면은 이제 어 남북에서부터 시작이 되기 시작하는데에 공장 수공업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 최근에는 이제 어 산업 혁명이 일어나 어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산업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도 이제 그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면은 어 사람들이에 집단적으로 모여서 어떤 제품을 생산해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그게 빨리 빨리 만들 수 있겠죠.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제 기억이 나는데 보면 사과 같은 것들을 이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괴담을 어 그때는 박스 같은 것도 없었고 나무로 박은 나무로 두들겨 박은 그 사과 개장이 있었어요.
(33:50) 그렇게 개장으로 팔았고 어 그거를 좀 소량화 해 가지고 한 12개쯤 담을 수 있는게 이렇게 우리가 인도네시아 같은 데서 가면 구할 수 있는 배낭으로 만들 거기다가 넣어 넣어 바라 수 있어. 그런 걸 만드는 것도 이제 혼자서 만들면은 별로 생산성이 터지는데 분어파해 가지고 사람들이 대나무 쪼개는 사람은 그것만 쪼개고 그다음에이 있는 사람은 그것만 있고 하면서 하면은 이제 엄청난 양의 그 생산 물들이 쏟아 나올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근데 그렇게 되면은 어떻게 되냐면 이제 개인적으로 자기가 공장을 안 가지고 그냥 신발을지 자기 혼자서 신발을 만들어서 살던 사람들은 공장에서 만들어 나오는이 신발의 가격과 맞출 수가 없는 거야.
(34:30) 그러면서 이제 어떤 자본주의의 어떤 그 그 자본주의의 모습이 이제 서서히 이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모습. 그러다가 이제 산업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산업 혁명이 일어나게 되 결정적인 계기는 이제 뭐와 관련이냐면 에너지와 관련된 거죠. 그래서 그 증기 증기의 기관 증기 기관의 발견 어 그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은 예전에는 에너지를 얻으려면 어 물래방학관 옆으로 가거나 아니면은 뭐 풍차 옆에 있거나 이래야 되는데 그래서 이거는 이제 말하면 그 물을 떼워서 물을 물을 불을 피워서 물을 끓여서 그것으로서 이제 그 기계를 돌리면서 에너지가 생산이 되니까 이제이 에너지가 어 모빌리티 이동성이 이동성화가 된 거니다.
(35:16) 그래서 그 역사를 보면은 로마 시대 공업 단체가 있었어요. 지지 어떻게 하냐면 대단해 큰 물기를 어 물기를 이제 그 산 위로 이렇게 물길이 지나가게 만든 다음에 그다음에 거기서부터 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흘러 내려오게 하는 거야. 그리고 거기에 물 흘러나오는 곳에 계단식으로 공장을 짓는 거야. 거기 거기 물래방화가 그러니까 한번 물이 때 떨어지면서 더 높은 곳에서 제일 낮은 곳에서 이르기까지 수십개의 공장의이 그 저기 물레방을 돌이는 거예요. 그 에너지를 가지고 이제 사람들은이 그걸 가지고 이제 영상을 만들고 뭐 방학관도 하고 뭐 다양한 그 에너지를 가지고 그때 이제 하는 거죠.
(36:01) 그런 에너지의 혁명이 이제 그걸 가져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은에 [음악] 이제 개인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경쟁력이 없어지는 거야. 근데 이제 공상제로 공공상제 공업이 이루어지다가 보니까 어떤 일들이 변화되냐면은 이제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뭐 예를 들어 책 하나만 만든다고 하더라도 여러 업체와 관계를 맺어야 되잖아. 무슨 종이를 사워야 되고 그다음에 어 인쇄 인쇄를 할 수 있어야 되고 편집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다음에 이런 거를 이렇게 재본할 수 있는 회사도 필요하러잖아. 인프라 생산을 위한 인프라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36:40) 그런가? 그 그런 것들은 도시만 도시만 그 그런 인프라를 갖출 수 있는 거죠. 지금 현재 전 세계 인구 가운데 95%가 다 도시에 살아요. 5%만 도시 아닌 곳에서 사다는 그러니까 81억의 인구라고 하지만은 최소대형으로 걸려 하면은 충북도 안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어 절대 인구가 가는게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땅 자기가 이제 그 수련 생활을 하지 않는 하는 도시에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죠. 그런 인프라가 이제 평성이 되면서부터 어떤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냐면 제품과 그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 차이에 반대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은 이제 어 대장장이 디암무게가 만든 어 칼입니다.
(37:30) 이런게 의미가 없고 이제 익명화가 되는 거야. 그러면서 이제 인간관계에 커다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면 단절이에요. 단절. 특히 이제 그 어 폰드 시스템이라 그래 가지고 이제 이렇게 컴퓨터가 벨트로 따라가면서 이제 한 사람은 나사 띄우는 사람은 나사만 계속 띄우면 저 쪽에서 유리창 타는 사람하고는 서로 소통을려 봅니다. 여전히 이제 농사를 찍기 때에는 같이 농사를 지으니까 뭐 예를 들어서 비료 뿌리는 사람이 다르고 그다음에 밭는 사람이 다르고 씨뿌리는 사람이 다른게 아니라 다 같이 하니까 소통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도시가 고독의 상징이 되는 거. 그리고 이제 또 어느 역사를 말하자면은 이제 그 농업 가지고 이제 출근한 생활이 안 되니까 농기에는 사람들이 이제 도시로 몰려두는데 어 일자리보다 일을 하겠다는 지망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거야.
(38:20) 그다음에 이제 노동력의 착취가 이루어지게 되시간 내고 18시간씩 근무하고 실제로 영국의 역사를 보면은 역여 여관이 있었어요. 여관 빨래줄 여관이 있었어. 말씀은 뭐냐면은 가장 각산한 속박 없어요. 그럼 그럼 어떻게 되냐? 이렇게 커다란 방에다가 이렇게 구분 밥줄을 쭉 매달아 놓고 거기에 빨래처럼 자기가 이렇게 기대고 자는 거야. 그리고 수방으로 가는 거야. 아시지? 근데 그게 실제 있었던 거 인간이라는 것이 이제 그러면서 이제 자본와 노동자의 괴리가 생겨나고 그런 어 사회주의 이념이나 공산주의 같은 것들이 등장을 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없어속에서 시험이 되면서 어 수원만의 사람이 그 사생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그런 것들이 일어나게 된 거죠.
(39:18) 그래서에 결국 공간 소변이 해체될 때도 마찬가지였었어요. 그 아을 생산하는데 홍을 생산하는데 공동 농작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이제 조금 자유를 주어서 자기네 집안에서는 그 약간의 채소를 기르는 것이 허락이 되는 것습니다. 그런데 어 생산량이 공동 농장에서 들르는 건 1이라면 개인 농장에서 들르는 건 8이 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북한도 마찬가지예요. 그 똑같아요. 그러니까 공동장에서 기한 호박은 아 이렇게 참여 많은데 참회나 멜론한데 그대가 자기네 집 지붕에서 필는 호박은 막 어 수박많은 거야 이게.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이 어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이 완화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는 것을 원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잘 보여주는
(40:23)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그러기에서 이제 어떤 것들이 나오냐면은 상대주의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들어. 왜냐면은 어 종이 한장 종이만 만드는 사람이 어 너 나만 있으면 최근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 거야. 왜냐면 잉크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인수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다 필요한 말이야. 서로서로 놓으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상대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거다. 그것이 이제 도덕을 생각할 때도 그런 사고 방식을 적용하는 문제가 되는 거죠. 사람들은 생산과 생활을 위한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진 도시로 보여들게 되었고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은 인간의 가치관에 커다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41:03) 즉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물적 요소들과 인적 요소들 가운데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들이 없으며 또 동시에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산업 혁명과 함께 발단한 기계의 공업은 대량의 제화들을 갑싼 가격에 생산해 냈고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상상해 보지 못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부한 물질 생활을 위해서 인간이 지불한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혈령과 지연으로 얽힌 사회의 해체, 지족과 부족, 그리고 가족들 간의 공동체적인 유대함과 책임 의식의 상실 이웃들과 익명의 존재로 섞여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의 단절,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격차감이 사라지고 소통이 쉬워졌으나 오히려 그 어디에서도 소속범을 느끼기 힘든 인간의 모습 등은 이러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41:40) 오늘날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려졌습니다. 발달한 통신 수단으로 말미암아 정부와의 유통은 빨라졌으나 인간관계는 더욱 비상적이 되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인격적 관계 없이 정보 교환과 감정적 교류가 이루어지다 보니 관계의 폭은 넓어졌지만 관계의 깊는 얄팍해지고 말았습니다. 최근 1년 동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소 관계가 피 한이 그 사람 >> 어 사회 여론이 형성됨에 있어서도 예전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직적이고 충동적인 의견이 계세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42:23) 이것은 끔찍한 집단 위기주의와 따돌림의 문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이는 점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낮추고 섬기고 양보하고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할 도덕의 근거를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이유와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의무도 없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인간의 사고는 물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사회는 익숙해진 물질의 풍요로움을 지속하거나 더 누리기 위해 더욱 치열한 경쟁 구조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하는 어 가치만을 상실한 것이 물질주의의 가장 큰 폐어입니다.
(42:57) 오늘날 현대사에서 중상층이 누리는 물속 소비 생활이 17세기에 왕족이 누리던 것과 왕먹는 수준이라고 하고 하니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곧 현대인이 더욱 행복해졌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발달한 의학 기술들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지만 그 삶의 정식적인 질까지 포함하여 고려한다면 반드시 인간이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 당인 핵가족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노인의 소유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의입니다. >> 물질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각종 육체적 질병들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과당한 자원의 개발과 산업 시설 및 과도한 소비로 말미암아 지구 원화와 공해를 비롯한 환경 오염 거기서 비롯되는 각종 질병이 인간들에게 더보고 있습니다.
(43:35) 그러나 이런 물질 만능의 사회 현상 역시 이미 산업 혁명과 실용주의 안에 예고된 비극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사회에 경험하는이 모든 비극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하기 때문이라는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이는 인간이 자기 밖에서 빛을 받음으로써 비로써 사물들을 올바로 보고 그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인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질서는 곧 가치의 질서입니다. 어떤 존재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고 그 질서를 올바로 세울 때 그것은 곧 가치관일입니다.
(44:05) 그래서 인간이 무엇을 하든지 올바른 가치의 질서를 세우고 살아가다면 진리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도 일체를 이루며 도아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기준을 버리고 제못대로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 뒤에 인간의 삶은 고단하고 비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쟁 같은 건 어떻게 여기 >> 경쟁 그리스로부터 점쟁 다른 사람 경쟁이 되거든요. 그 어 경쟁은 안 할 수가 없지. 경쟁 자체가 도덕적이냐 어 부도덕하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에 문제는 뭐냐면은
(45:08) 그 평생이 언연히 존재하지만 평생에서 진 사람들이 인생을 포기할 정도의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 그래서 결국은 어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경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경쟁을 먼저 배우기 전에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냐. 그거를 먼저 어린아이 쪽부터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비록 경쟁에서 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어 그 병장에서 진 사람들을 이렇게 세울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대한 어 경쟁에서 진 사람들에 대한 어떤 구조책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러면 이제 어려웠을 때에 훈련이 굉장히 중요해요.
(46:01) 특히 이제 브럼스 같은게 이제 어 태어난지 어 태어난지 두 살 두 살 정도 되면은 그때부터 이제 애 마르텔이라고 하는 그 어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거기서부터 이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협력이에요. 경쟁이 아니라 어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을 훈련시켜 줍니다. 그렇게 설략을 많이 시켜도 실질은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하면 아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을 온몸으로 최급하 근데 그런 사람들을 어 한번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완전히 주장하지 않고 다시 어 일어설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법을 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학력고사 같은 것도 큰 문제라고 보는게 저렇게 주목이나 우리나라처럼 한 번 시험에 인생 전체를 올인하고 못방하는 거는 비 인간적인 거 같아. 2년 전고
(47:06) 그냥 내 생각보사 어 사람이 매년 치르기 하는 것 같아. 1학년 때, 2학년 때, 3학년 때 이렇게 치료 해서 그래서 어 그중에서 그것들을 합상해 가지고 어 성적을에 매긴다면은 그러면은 어 지금과 이렇게에 문제 한 문제 인생이 막 나락으로 가고 천국으로 가고 하는 그런 상황은 되지 않겠데 어 학교에서 보 시험이 어 엄미라고 난 그런 어 일제고사 같은 것들을 보게해서 6개월에 한 번씩 본에 전국이 똑같은 시험주로 일제고사를 보고 일제고사 여섯 번 본 거를 합산을 해서 평균을 내서 그래서 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학력이 어느 정도 된다고 평가를 하신다면 어 지금 이렇게 한 번에 못방을 해서 거기에다
(48:11) 모든 거를 거는 그거보다는 훨씬 더 나은 상황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 생각 어떤 말이죠 꾸준히에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작업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게끔 만들어서 그래서 어 몇 개나씩 시험을 보면서 그래서 여섯 번 학진 점수를 가지고 대학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하는 그런 것들이 자리를 잡으면 훨씬 좋지 않겠 그 많은 문제를 뭐 어떻게 출제하고 할 것이냐 그건 뭐 어, 돈 지금 들어가는기에 여섯 개를 드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들 어, 그 호텔 딱 가져 놓고 그다음에 그렇게 일대다 만들게 되면은 어, 그러면은 어, 그렇게 뭐 180 사람들 가도 될 필요 없어요.
(48:59) 한 두 정도면 가능하다고 부서 시험 문제를 내서 배송을 해서 그 수가 되어야지 될 생각 뭐 뭐네 살짜리를 갖다가 시험을 봐 가지고 뭐 유치원에 어 그 아주 그 평양 유치원이 들어가는네 살부터 심 뭐 어 일본은 더 심해서 뭐 아예 두 달 두 살 때서도 가를 시킨다고 그래서 이게 돈 이런 거지 같은 사회가 있는 1년에 우리가 지금 사교에 쓰고 있는 돈이 20조이 20조 그 돈이 공공교육으로 넘어오면은에 학교를 학교가 잘 가르쳐요. 쉽게 얘기하면 실력이 없는 교사들은 공급을 많이 주고 실력이 없는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되지 어 교육치를 아주 높히고 그렇게 해가지고 뭔가 사회를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49:50) 이런이 책을 공부하는 동안에 이제 계속해서 우리가 사회 문제를 으면서 어떻하면 이제 이게 그런 사회를 개선하데 있어서 우리의 그 어 관심이 쓰여질 수 있겠다. 그런 >> 그래서 이게 경쟁이라고 하는 이게 본성이 창조시에 구여받은 분성인 거야. 다이 부여 생 >> 그렇게 딱 이야기할 수는 없고 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음 도덕하면 상관이 없는 거거든.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데 어 우리 모두 그림을 그리면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고 그다음에 그리지 못했을 때는 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 잘 그렸을 때는 보람을 느끼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 점에서 그것은 타락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어 그런 경쟁의 동기 자체가 이기적으로 죄 때문에 이기적으로 변하고 타락 때문에 그것이 붙틀어진 욕망으로 나타나고 그다음에 그것이
(50:55) 이제 사람에 대한 미움까지 동반하게 되는 그런 것들을 타락으로 말미암이라고 볼 수 있지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어 오늘부터 그리스도인의 빛으로 산다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합니다. 그런 면에 우리의 눈을 지성의 눈을 열어보셔서 새로운 어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기를 원합니다. >> 아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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