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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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안에 흐르는 물줄기
성경 안에 흐르는 물줄기
거룩한 부흥 1장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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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흥 제1장 성경 안에 흐르는 물줄기
부흥과 역사
우리는 부흥을 일으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부흥을 일으키겠는가? -찰스 스펄전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 전체가 이런 부흥을 징검다리로 하여 전개되어 왔습니다.
조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점으로 가는 90년대는 실험의 시대였습니다. 교회를 활성화시키고 전도를 적진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론들이 실험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교회는 제임스 페커의 지적대로 즐거움에 대한 열심으로 타락한 기독교가 되었고 자신이 믿는 신앙의 내용을 대중화하려다가 스스로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00:37) 오늘날 복음에 낯선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참된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 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영적 상황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길지 않은 조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지금처럼 복잡하고 바쁘게 기능하던 시대도 흔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속에 일반적인 기능은 있으나 영적인 생명력은 급격히 색쾌하고 있고 교육 프로그램들은 많으나 삶의 변화는 드물며 교회의 문제점은 수없이 토론되나 그 토론의 결론들에 교회 변역의 기대를 걸기는 어렵습니다. 사회를 변역시키는 방법으로서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기보다는 시대 정신을 따라가는 교회의 형편에 조항감 없이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부흥에 대한 오해.
(01:13) 1989년도에 서울시내 유력한 신학 대학 중 한 학교에서 발관되는 교지에 같은 대학 신학 대학원에 공직하고 계신 어느 교회사 교수님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한 논문이었습니다. 당시 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해 쓰임받은 사실들이 그의 시대적 정원과 함께 상세하게 논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수님의 논지 중 하나는 한동안 저를 경악하게 했는데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 뉴 잉글랜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심히 타락해 있었고 교회는 무기력하고도 부도덕에 빠져 있었으므로 참다 못한 에드워즈가 이것을 타게하기 위해서 내 각성과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이었습니다.
(01:49) 이것은 실로 영적 각성과 부흥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흥의 시발에 대한 기발한 오해에 대해 경탄할 뿐입니다. 또 영적인 인물들의 전기를 발관하는 어느 출판사의 시리즈에서는 에드워즈와 같은 시대를 영국의 부흥의 도시가 되었던 칼빈주의적인 메서디스트 설교가 조지 휘필드의 전기를 번역하면서 표지에 영적 대각성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 아마 위필드가 자신의 전기에 이러한 부제를 단 것을 보았다면 몫이 고통스러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각성을 위한 집회라는 슬로건이 붙은 모임에서 부흥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영적 각성이 일어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02:32) 이 이 모두 부흥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흥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이는 운동이 아닙니다. 영적 각성과 부흥은 결코 인간들이 주도하는 운동의 차원에서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입니다. 부흥은 사람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종교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영적 각성이나 부흥이 있기 전에 수수의 사람들이 간절한 열망으로 애통하며 기도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흥은 열렬한 기도에 메이는 것도 아닙니다.
(03:05) 일반적으로 열렬한 기도 없이는 부흥이 오지 않지만 간절한 기도가 부흥을 자동적으로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서 부흥은 조건을 통해서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조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지만 부흥이 찾아올 때 조짐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조짐을 식별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제가 부흥의 조건이라는 말 대신에 부흥의 조짐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도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부흥 운동 이러한 표현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표현이니 독자들이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03:37) 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부흥을 운동화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성령 운동이라는 신성 모독적인 표현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부흥 운동이라는 표현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소위 이런 부흥 운동을 목회의 성공과 교회의 성장을 위한 여러 방법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성도들을 열렬한 신자들로 만들고자 하며 기도를 강조하고 전도의 열심을 보입니다.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고 열렬한 기도와 찬양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합니다.
(04:09) 그러나 제가 살펴본 바로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부흥 운동과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부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 불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성령 운동은 성경이나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참된 부흥 즉 조지위드나 조나던 에드워즈, 윌리엄 스프레그, 제임스 북캐논, 혹은 마틴 로이드 존슨나 제임스 패커 등이 말하는 성경적인 부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조국 교회에서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고 있는 방향은 크게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은사주의 성격을 뛴절적인 부흥운동이고 둘째는 보다 더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뛴 불건전한 부흥 운동이며 셋째는 요즘 기존에 무기력해진 교회의 활기를 불어넣는 강한 교회 만들기 작업과 함께 거론되는 부흥 운동이고 마지막으로 개혁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영적 유산으로서의 부흥입니다.
(04:53) 오히려 오늘날의 소위 부흥 운동이나 성경 운동은 거의 모두 전화 에드워즈가 참된 부흥이 아닌 것이라고 부른 범주에 가깝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이것을 리바이벌과 리바이벌리즘으로 구분합니다. 전자는 성경적이고 거룩한 부흥을 지칭하며 후자는 부흥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앞에서 거론한네 가지 관래 중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흥이 아니라 부흥주의입니다. 심지어 인간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집회를 여는 것을 부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오인는 찰스핀이 이래로 복음 전도 활동이 마치 부흥인 것처럼 잘못 알려져 옴으로써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05:30) 오늘날 부흥회, 7년 축복 대부흥성회 등의 용어 역시 이러한 활동을 부흥과 혼돈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흥이 교회 성장에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부흥주의로 말미암아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부흥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들이 부흥에 대하여 갖고 있는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떠들썩한 집회 요란한 박수 소리 푹치는 소리 성령 체험을 하려는 무리들 병든 자들의 기도 소리 병고치는 현장 방언의 체험 통성 기도 성도들에게 축복을 간증하는 설교 헌금 걷는 시간 아멘하는 함성 등등 조국 교회의 지성인들이 부흥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갖는 것도이 때문입니다.
(06:10) 무엇이 참된 부흥인가?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은 앞서 말씀드린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가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말은 사용하는 말은 성경에서는 소생 다시 살림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는데이는 죽은 자와 같이 무기력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살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부흥을 구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이런 강력한 부흥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영적으로 심히 세퇴하고 도덕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그들을 살아나게 하시고 죄인들을 회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06:47) 따라서 부흥은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나 활기 없이 죽은 것과 같은 자들을 소생시키고 영적인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입니다. 부흥의 때에는 다른 때에 볼 수 없는 특이한 영적 체험이나 신비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흥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직업적인 부흥사나 전도자들이 사람들을 종교적인 흥분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부흥이 반드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체험을 동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적인 흥분이나 황홀감을 느끼는 것이 곧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징표는 아닙니다.
(07:22) 참된 부흥의 특징은 영적 각성입니다.이 영적 각성의 깊이가 깊을수록 부흥의 심도도 깊어집니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부흥이 심도를 더할수록 더 깊은 영적 각성을 낳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적 각성이라는 말과 부흥이라는 말은 너무나 밀접하기 때문에 거의 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18세기에 뉴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부흥을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구부하자면 영적 각성은 영적으로 이전에 인식하지 못하던 것이나 희미하게 인식하던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을 가르키는 말로서 부흥을 인식의 측면에서 본 것이고 부흥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내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외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08:01) 부흥의 사례에 따라서 영적 각성이 먼저 오고 부흥이 뒤따르기도 하고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넓은 의미에서는이 모든 과정을 합쳐서 부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부흥의 시기에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들은 다른 시기에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와 세상을 향한 태도에 관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전에 문제로 삼지 않았던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깊이 각성하게 되고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심히 애통하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들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로서 느끼며 삶이 그것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08:34) 그러나 이것은 모두 스스로 교회에 대한 어떤 개혁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변역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이 가져오는 각성입니다. 오늘날 부흥에 있어서 우리가 입고 있는 또 하나의 핵심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이 거룩에 대한 열심을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부흥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거룩해 주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됩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부흥이라고 불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 그 부흥이 참된 것인지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 거룩에 대한 열심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09:07)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특별히 경험하는 것이고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담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부흥이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회개를 동반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거룩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우시아 왕이 죽던 때에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선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말합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배웠음이로다. 부흥을 말하면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부흥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09:46) 다시 말해서 부흥은 사람들이 부흥을 위한 집회라는 간판을 걸고 시작할 때 오게 할 수 있는 인유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의 노력과 프로그램에 따라 메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흥을 주십니다. 그러나이 일은 우리를 실망시킬 정도로 드물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이 부흥은 인간의 범죄나 불순종으로 끝날 수도 있으나 부흥을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부흥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부흥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고 기도하며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10:24) 나는 왜이 책을 쓰는가?
저는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이 조국 교회와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정직하게 눈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와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깨닫고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부흥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의 부으심이기 때문입니다. >> 개인적으로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하고 조국 교회의 가난한 영적 현실을 인하여 마음의 통증을 느낄 때 두 가지 일이 제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10:56) 그리고 거기서 저는 일생에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두 가지 가르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무기력하고 쓸모없으이 많해도 그분이 버리시지 않는 한 여전히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언제나 성경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그 시대의 교회에게 전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자의 깨달음은 저로 하여금 비판하던 조국 교회를 아픔까지 사랑하도록 만들어 준 동시에 붕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 주었고 후자의 깨달음은 저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깊이 탐구하고 묵상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제가이 책을 통하여 시도하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전능적인 부흥인 야곱 집안의 영적 각성을 소재로 부흥의 성경적인 원리들을 찾아내어 오늘날의 조국 교회에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11:36) 저는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성경 본문인 창세기 35장 1절로 15절을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입각해서 충실히 주석하고 본문의 뜻을 해석해 나가면서 영적 각성과 부흥에 관한 진리나 교훈들이 발견되면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따라서이 책은 자연스럽게 성경 본문과 영적 각성과 부흥의 원리 그리고 조국 교회의 현실 사이를 삼각형으로 오가며 주제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의미 있는 작업들을 통해서 일차적으로는 조국 교회의 문제를 2차적으로는 개인의 영적 생활에 중요한 원리들을 다루고 영적인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12:15) 아울러 이러 이러한 영적 각성과 회복의 맥락 속에서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서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여 하나님을 구하게 하는 것이이 책의 집필 의도이기도 합니다. >>
교회를 향한 요구.
교회를 향한 오늘날의 요구는 개혁입니다. 교회 자신도 개혁하고 세상도 고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개혁 이것은 문자 그대로 형태를 바꾼다 혹은 틀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구조를 거쳐서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점자는 복음적인 타 이름으로는 세상에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교회를 고쳐보자는 고전적인 시도가 쉽지 않은 때에는 더욱 마음이 끌리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13:00)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가 보수적인 교회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정지가들의 각성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감아라. 경제적인 불균등을 시정하기 위한 기독교적인 접근들과 모임의 형성, 사회 윤리의 실종을 고발하는 기독교적인 단체들의 발응 등은 모두이 같은 맥락에서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교회에 대해서도 오래된 건습이나 전통들의 불합성을 지적하면서 계획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교회 안 밖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목소리들이 마치 교회의 이러한 무기력함이 마치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논리의 무리가 다소 느껴지긴 해도 우리가 기담아들어야 할 많은 고통스러운 진실들을 담고 있습니다.
(13:4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활동들과 섬김을 통해서이 시대의 조국 교회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그러한 시도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회 개혁가들도 세상을 도덕과 사랑의 지배하는 평화로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고 교회도이 세상이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장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점은 사회 개혁가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이 목표 그 자체이고 교회에게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교회에게는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결과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취는 분명히 도덕적이고 사람과 평화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경건으로부터 흘러나온 결과입니다.
(14:30) 오늘날 널리 공감대를 얻고 있는 개혁의 바람에 대하여 한편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부흥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는 새 관점.
우리가 이제껏 성경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흥이라는 관점입니다. 성경 역사 전체를 부흥의 맥락에서 보아야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연약한 인간들을 들어서 위대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떠나는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불변하는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라고 할 때 그것은 당연히 시간이 창조되던 천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시대 이전까지를 가르킵니다.
(15:11)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적장들의 시대와 애굽 생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보, 그리고 사사 시대, 왕정 시대를 거쳐서 본열 왕국 시대,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 후, 유다 단독 시대를 거쳐서 바벨론 포로 시대, 그리고 귀한까지가 구약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태가들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포로의 귀한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구약 성경의 역사를 보는 관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수성.
구약 성경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단순히 중동 지방의 한 소수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51)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성경 시대 그들과 문화와 생활 습관이 전혀 다른 우리가 그토록 작은 소수 민족의 역사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역사 속에서 태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시의 말씀이 묻어 있는 매겟죄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그 무수한 나라들의 역사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바로 그들의 역사에 묻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가치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에 특별히 간섭하신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 구원의 계시를 보내시고 또 한편으로는 이미 주신 계시들을 잘 보존하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16:29)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과 그가 주신 계시들을 보존함으로써 이방 민족들을 향하여 창조하신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만 바빙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신 현실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민감함과 그 계시를 보존하기에 적합한 종교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역사를 읽는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구원을 얻게 될 위대한 인류 구원의 계시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보존되고 발전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17:0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구원 계획에 대한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신앙에 의하여 현재적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항상 경고하고 열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 때문에 원해진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한편으로는 추가적인 계시를 전달해 주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계시를 보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일깨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비록 그들의 신앙의 순수함과 열렬함을 유지하게 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방평과 은혜의 수단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7:50) 때로는 그들의 신앙이 크게 용성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열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를 잘 받아들여 순수하게 보존하고 전승하는 일에 열심을내는 적도 있었지만 어떤 때에는 신앙이 거의 사라져서 이스라엘이 참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보존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삶을 거의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떠나는 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거치시키시고 그들의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일로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짓는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18:20) 그리고 부흥을 주심으로써 인간적인 노력으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불신앙의 늪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
그러면 왜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부흥의 역사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토록 무지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망각의 특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당장 눈앞에 적힌 일들에 분조하고 모든 마음은 현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당장 눈앞에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고 감당해 내느라고 과거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 일에 골물하여 다른 사람의 일이나 다른 나라에서의 복음 사역의 상황을 돌아볼 결이 없습니다.
(18:52) 뿐만 아니라 과거에 교회가 겪은 경험이 오늘날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 가는데 별로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과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일들의 대부분은 성경 역사 안에서 경험되었고 교회 역사 안에서도 경험되었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 안에 창고한 인본주의는 바로 성경 진리의 보편성보다는 자기 시대에 교회가 처한 상황의 특수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스말은 그의 말이 생각납니다. 밀어난 자는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지혜로운 자는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 그의 변을 빌자면 우리는 밀어낸 자 축에도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19:25) 왜냐면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못 배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 현 해설에 한 토막을 들어보십시오. 백성이 여호수아에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에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의 죽음에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딥낫 페라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또한 사람도 다 열쪽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까지 여호와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보았던 사람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부흥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0:10)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 경험하였고 또한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태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한 분만이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라는 유일신 신앙이 거의 사라지고 불신앙의 시대로 잡아들면서 그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전 세대가 경험했던 부흥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이스라엘을 무정부 상태에 방불한 사회가 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결국은 이러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속견에 오른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만을 섬기는 참된 지식과 하나님 자신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쫓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한 계시를 주시고 보존하게 하시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는 때가 있었습니다.
(20:54) 선지자들이 지적하던 신앙적인 위기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에서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일하고는 하셨습니다. 하나는 심판하시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부흥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미로움을 보이시고 남은 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앙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부흥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지를 일시에 깨닫게 해 주시고 그들에게 그분과의 친밀한 경외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항상 죄에 대한 심한 각성과 회개를 경험하였고 하나님은 사제와 은총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백성임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21:35)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부흥은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편 67편 1절로 2절. 하박국 3장 2절. 또한 부흥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긍휼의 초자인적인 부 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일시에 유일신 여호와의 신앙을 민족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부흥.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때 이것은 우선적으로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교회 의신자들을 향한 부흥입니다.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22:08) 하나님께서 교회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이 단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자신들 안에 계신 분이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들이 실로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공경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떠나 있었던 죄악을 회개하고 자신들이 그분의 친히 다스리시는 백성된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한 민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맺으셨던 언약에 충성할 것을 다시금 맹세합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주인 되심을 인하여 만족하고 기뻐합니다.
(22:42)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리워지고 형식뿐이던 종교 의식들이 신비한 내용으로 가득찬 은혜의 수단으로서 그들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선택과 구원의 감격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고 공동체적으로는 언약적 연대로 말미암는 지체적 결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도덕적인 특성들이 두렷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윤리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어난 당신의 백성들을 인하여 기뻐하시고 이들은 자기들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기까지 감격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23:15) 이때 다른 나라 백성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전능자가 특별히 함께 하심을 두렷히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적으로는 적어도 매우 중요하고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권세를 가진 공동체가 되며 이방 백성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 공동체 속에 들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흥의 시기에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풍부한 계시 속에서 살게 하시는데 이것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새로운 말씀들을 주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의미들이 영적 체험 속에서 장음하게 다가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23:45)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많은 땅처럼 건난 황해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들이 수장되는 광경을 보면서 노래하던 내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여 신중의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의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험이 있으며 귀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까? 지록기 15장 11절. 부흥은 규모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부흥은 개인적으로 경험될 수도 있고 집단적으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역사 사건으로서의 부흥을 말할 때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구약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교회의 선교 역사 가운 전체가 이런 부흥을 증검다리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4:24) 그런 점에서 부흥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읽는 가장 중요한 관점 중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약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불변하는 주권과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연대를 보게 하는 신학적인 유익이 있다면 부흥의 관점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황을 보게 해 주는 신앙적인 유익이 있으며 또한 이러한 영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부흥을 갈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약 열 번 정도의 커다란 부흥을 징검다리로 하여 신약 시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24:56) 구약에 나타난 부흥.
이스라엘은 왕국 설립 이후 이전에 약네 번 정도의 커다란 부흥을 경험하였다고 봅니다.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야곱의 집안이 경험한 부흥과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부흥. 출굽기 7장에서 15장. 그리고 출굽기 32장에 나타난 부흥과 마지막으로 사무엘 선지자를 사용하셨던 부흥 사무엘상 7장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신앙의 부흥들은 회수로는 몇 차례 되지 않지만 구약 역사 속에 구속의 계시가 간직되어 온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후 왕국이 분열되고 포로들이 귀한하기까지 여섯 번 정도의 부흥과 이로 말미암은 종교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스러운 부흥은 대부분 남한국 유다에서 일어났습니다.
(25:39)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왕국의 분열보다 더 큰 위험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가 되는 당시 중근동 지방은 수많은 종교의 종합 전시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각기 자마다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 이방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인근의 백성들을 부러워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풍부하게 등장하는이 방신이 바로 바알입니다. 원래 바은 남편 혹은 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농경 사회의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적부터 유리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출애굽일에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떠오드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6:17) 따라서 그들에게는 문명 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원래 발달된 문명은 정착된 생활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오래도록 정착해 살아온 민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로서는 고도의 물질 문명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문명 생활 뒤에는 농경 사회라는 배경이 있었는데 그 농경 사회의 중심에는 다산을 주관하는 농경신인 바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이 지지하고 있던 신과는 지역 신의 개념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들은 각히 자기가 권할하는 지역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지역 안에서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26:50)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여호와는 결코 한정된 지역에서 관할 주권을 갖는 지역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땅을 다스리시며 만물리에 비교할 일이 없이 뛰어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이방의 다른 신과 겨루고 비교될 상대적으로 우월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온 땅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 그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우며 그의 음성은 온 땅에 들리고 세계의 끝까지 그의 통치가 닿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시편 8편 1절 9절 19편 4절. 그리고 이러한 신앙 고백이 바로 유일신 신앙에 중심에 있었습니다.
(27:24)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약화되는 것과 비례해서 이러한 외신 신앙은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여호와가 전통적으로 자기들의 신이지만 그러나 이제 새로운 지역에서 농경문화에 정착된 삶을 살아야 하는만큼 그 땅에서 오래도록 풍년을 주관해 온 바신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자기들의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 가운데 여호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종교적인 혼합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부흥 즉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영적 각성들을 통하여 유일신 신앙에 들어온 이런 오염의 요소들을 제거하셨습니다.
(27:59)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된 후 포로 귀안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 정도의 대대적인 민족적 강성을 동반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은 거의 남한국 유다에서 일어납니다. 이러한 영적 각성과 종교적 개혁이 증검다리처럼 이어지면서 구약서 전체를 달려갑니다. 아사, 여호사밧, 요스, 히스기아, 요시아로 이어지는 이러한 징검인는 포로 시대에서 한 번 더 나타나게 되는데 에스라를 통한 신앙 부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온왕국 기간 중 유다 왕국은 평균적으로 약 70년 만에 한 번 꼴로 이러한 민족적인 영적 각성과 부흥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부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아수루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곳을 국제화하려는 아수루의 이주민 정책으로 유대인들의 통화는 물론 진화니기조차 꺼려하는 혼혈 인종의 거주 지역으로 바뀌어서 신약의 사마리아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28:45) 그때를 기점으로 구약 신앙의 전통적인 전승도 함께 금액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부국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종교적으로 방종한 성격을 지닌 같은 나라였던 남한국 유다가 그러 약을 딛고 비록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라도 구약의 전통 종교의 전통을 개승하고 인류 구속을 위한 계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부흥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부흥
부흥을 징검 다리로 하여 건너오는 구원의 역사는 신약 성경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우선 우리가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경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 사건은 구약 시대로부터 계속되어온 약속의 성취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름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련이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레어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9:34) 사도행전 2장 1절로 4절 무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천으로 이어지는 1년의 사건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회사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 시대로 접어들게 하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부흥을 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부흥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함께 시작된 신약 시대 그 자체가 이미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께서 오셨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심으로 그를 힘입어 선교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30:08) 반면에 부흥을 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점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원사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단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러한 특별한 성령의 부으심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으며 그러한 예가 바로 신약 시대의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이방인 코넬료의 집안에 성령 부으심의 사건을 보도한 성경 본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주을 금하리요 하고 사도행전 10장 44절로 47절 말씀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 후에 일어난 성령 부심이 곧 이전에 자신들이 경험했던 오순절 성령 사건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30:55)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말입니다.뿐만 뿐만 아니라이 사건 직후 오순절 사건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방언을 말한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 것이었습니다. 고넬르의 집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와 함께 이만 부흥은 유대인들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축복과 복음의 혜택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8절.
(31:26) 이러한 붕의 역사는 에베소 지방을 복음화할 때도 나타납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이를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구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은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허황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장 17절로 20절.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부흥을 기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흥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사람들이 호소하는 성경 본문이 대부분 구약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이는 부흥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함께 성취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32:01)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흥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신약의 전 시대를 흐르는 영속적인 실제라는 것입니다. 즉 신약 시대 자체가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교회가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오순절 성령 사건은 이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회사가 이미 오셨기 때문에 오순절 이후에 교회가 할 일은 부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씀을 통하여 제시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수능 순종하는 것이라고 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징수를 가지고 교회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특별한 영적인 축복의 때와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교회의 은대를 설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32:32)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선교의 역사조차도 부흥을 징검다리로 하여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러한 원리는 신약 성경 기록의 기록 이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소생시키시고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어 가시는 것입니다. 부흥이 없이 이루어지는 선교는 성공하면 문화만 남기고 실패하면 당시에 유행하던 다른 이대올로기와 융합되어 종교적 혼합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흥을 구해야 하는 이유.
만일 교회의 역사가 선교를 교회 확장의 역사라면 그 교회의 확장을 주도하신 분은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33:04)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부흥과 영적인 각성을 통해서 불모의 땅에 복음을 심기도 하셨고 잠들어 있는 부패한 교회들을 일깨워 권세 있는 증인으로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교회는 항상 세속에 둘러싸여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분리는 불가능합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곧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 있는 한 세상은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너무나 심각하게 침체되어 죽어 있는 자들과 다름없이 되었을 때에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고침으로써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가 나라 되게 하는 일에 매우 무능하게 됩니다.
(33:38) 그리고 그런 시간들이 오래 흐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게 됩니다. 교회가 더 이상 자신에게 약속한 신령한 특권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세상을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적인 의도를 이제껏 호소해 오던 자신들의 섬김과 변역에 대한로는 성취하기 어렵다는 무능을 절감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종종이 땅의 교회에 부흥과 영적 각성을 주심으로써 교회의 생명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선교하는 일에 무능한 때일수록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참된 부흥을 구해야 합니다.
(34:10) 진정한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적으로 크게 각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고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이 세상에 세우심을 입은 신적인 기관으로서의 영광스러움을 되찾기를 구하여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중국 교회가 영혼들을 구원하고 불신앙으로 가득한 도시 정신의 아성들을 허물어 온 땅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는 본래적인 부르심에 얼마나 중실하고 있는지를 되물며 열렬히 기도하여야 할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한 가로에 노래하는 대신에 조국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하여 애끌른 눈물과 제사장적인 탄원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닙니까? 세속의 물결이보다 엄청난 류가 되어서 도도히 흘러가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거슬러 살아갈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는 시대 정신을 대항하여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전투적인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이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은 부흥입니다.
(34:55) 조국 교회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아주 점진적이고 느린 걸음으로 섬기는 봉사만으로이 비관적인 상황을 뒤집고이 땅이 진정으로 복음화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렇게 일상적이고 평범한 노력을 통하여 얻는 아주 작고 미미한 진보를 인하여 스스로 만족케 하는 섬김으로도 언젠가는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고 함께 경배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 위에 높이 들려지는 영광스러운 날이 이르게 될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여러분의 그 탁월한 낙전주의에 탐복하겠습니다. 우리는이 점에 있어서 무 개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흥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이며 그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35:35)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있어서 보다 느리고 고요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찾는데 길들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갑작스럽고 정체적으로 역사하시는 소식에 접할 때 놀라며 심지어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생각하며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통상적인 복음 사역을 통해서 권찰되는 것보다 더욱더 획기적이고 급속한 변화가 교회와 세계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특별한 이유로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매우 특이하고 관목할 만한 방법으로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36:14) 그래서 무기력에 빠진 교회를 깨워 일으키시기도 하며 그러한 일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확신시키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을 주심으로써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주관과 능력입니다. 참된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는 부흥이 일어났을 때 아무리 지역이고 일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영혼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하였다면 그 사건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기뻐하고 구속주이신 주님 자신이 만족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각성 운동에 쓰임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36:49) 인간이 타락한 때부터 오늘날까지 효과적인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성령의 특이한 교통을 통해서 완수되어 왔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성령은 언제나 교회의 제도와 어느 정도 함께하시지만이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언제나 특별한 긍휼의 때에 특이한 쏟아 부으심을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새로운 종교적인 이념들을 발견하고 교회의 현실 적응을 위한 새로운 방금론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이러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편만한 복음의 능력이 조국을 뒤덮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때에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이 땅에 있는 죽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살리시는 부흥을 주십니다.
(37:25) 이때 교회 안에 잠자든 많은 신자들은 참된 복음을 듣게 되고 그 선포와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되고 교회는 세상을 고칠 진리를 소유한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권위를 회복합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가치를 새롭게 알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위대한 증인들이 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되찾고 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핍박과 시련 앞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자기들이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들의 증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자극하게 하고 이들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만들어 줍니다.
(37:57) 매주 형식적인 예배로 모이고 흩어지던 사람들은 예배 중에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구별된 시간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들이 티끌과 같은 존재들이며 더러운 죄인들임을 고백하게 되는데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부흥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별로 깊이 의식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새로운 경험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자이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들의 가슴에 가득하게 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전혀 끌지 못하던 강단의 선포가 갑자기 그들의 모든 삶의 가장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르며 많은 사람들이 그 선포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38:35)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 도리를 묻는 도움을 청해오고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지내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어미와 영광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과 복됨을 동시에 깨달으며 경악하게 될 때 그것은 단순히 예배의 회복이 아니라 유일신 신앙의 회복입니다. 예배와 기도에는 눈물과 환의가 마르지 아니하고 예배와 기도를 마친 사람들은 기쁨으로 혹은 죄에 대한 슬픔으로 흐느게 어울며 돌아가기가 일수입니다. 교회는 사람으로 충만해지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그 충만은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충만입니다.
(39:07) 그리스도인들의이 같은 변화는 결국 교회 밖에까지 허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세상을 거칩니다.
오실 길로 삼으소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이 시대 속에서 있는 조국 교회의 영적인 위기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부 능력을 고백하면서 주께서 친히 간섭하시사이 땅에 부흥을 주시기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임하사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시고 조국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갚추고 사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과 거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 주시도록 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주는 하늘로부터이 땅에 친히 강림하옵소서.
(39:41) 이 이 조국 교회 위에 임하시기 위하여 길이 필요하시다면 나의 육체를 가르사 당신이 오실 길로 삼으시옵소서. 나의 마음과 마음을 드리나이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