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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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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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거룩한 부흥 제2장 말씀하시는 하나님
부흥과 회복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창세기 35장 1절
만약 우리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부흥.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창세기 35장에서는 우리에게 부흥과 영적인 각성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족장 중 한 사람이던 야곱이 등장하는이 기사는 우리에게 교회에 의해 부흥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각성을 위한 매우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00:41) 제가 여기서 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사례를 구약 성경에 있어서 첫 번째 모델로 선정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기준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각성시키신이 사건 이전에도 부흥 혹은 영적 각성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건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 노아와 언약을 새롭게 맺으신 사건이나 창세기 12장 이후에 반복되는 아브라함을 찾아 찾으셔서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으시는 사건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이미 앞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제쳐두고 바로 창세기 35장의이 사건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부흥으로 다루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01:22) 첫째로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수심판 중에 특별한 부르심을 달아 하나님을 섬긴 그 사건이 하나님께서 친히 노아를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선택된 백성과 맺은 언약을 통하여 구원의 계시를 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부흥의 맥락에서이 사건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이 경우는이 땅의 민들이 모두 홍수로 진멸된 상황하에서의 일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시는 부흥이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제대로 살펴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부흥의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금이 시대의 교회 하나님을 버린 세속 문화와 시대 정신에 둘러싸인 교회의 회복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각성을 위한 원리들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02:02) 따라서 노아의 경우는 하나님과의 인상깊은 교재를 수반하는 사건이면은 틀림없지만 부흥의 사례로서 살피기에는 실익이 적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은 전적으로 일방적인 호위로 나타납니다. 그의 선택으로부터 기업을 주심, 돌이키게 하심, 축복을 약속하심 등등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건과 조건 없는 은총을 보여줍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갱신 사건은 부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의 일방성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와 언약을 갱신하시는 사건들 속에서 그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개인적인 부흥을 통해 그의 주변 족속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02:47) 이런 몇 가지 이유에서 볼 때 야곱의 집안에 일어났던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첫 번째 모델이 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 인물로 사용하셨던이 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침체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회복과 부흥을 통한 교회의 회복의 중요한 원리들을 제공합니다.
야곱의 성장 배경
본문은 족장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이 사건은 영적인 각성의 진정한 의미와 그 경과와 결과를 보여주고 붕은 어떤 것이며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지를 알려줍니다. 구약 성경 속에서 야곱처럼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03:28) 야곱은 리브가라는 여인이 족장 이삭에게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출생에서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었고 출생할 때는 먼저 태어나려고 향의 발꿈치를 잡아당기던 사람이었습니다. 25장 26절로 28절. 야곱은 이후에도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형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것이나 아버지의 축복을 속여 취한 사건 등에서도 그의 특이한 행동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25장 31절 27장 23절. 결국 장자인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형과 아버지까지 속여서 빼앗은 사건으로 인하여 형의 보복을 피해서 부모와 헤어져 바다나이라는 곳으로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04:09) 사실이 시점까지의 야곱의 신앙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장자의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나 족장인 아버지의 축복을 갈망하는 것 등이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진정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을 취하는 그의 방법이 불신앙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은 창세기 28장 이후 아람으로 떠나기 위하여 부모와 작별한 후의 일입니다. 그부 창세기 29장에서 33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인격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04:46) 창세기 18장에는 그가 베들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는 집을 떠나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고 서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다람으로 가기 전까지 야곱의 영적 소중과 신앙의 깊이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의 소중과 영적인 깊이는 그가 하나님의 임 마주한 결정적인 순간에 응급한 바를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이 서운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05:32) 창세기 28장 20절로 22절 보십시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현장에서 하나님께 세 가지 부탁을 드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자기도 세 가지를 약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뢰를 따지는 그의 계산적인 기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신앙 수준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야곱은 베들에서와 바다 아람에서의 연단 그리고 야복강의 사건을 통하여 상당히 성숙하고 영적인 인물로 편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9장부터 31장 사이에서 나반의 집에서 약 22년 몇년간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32장에서는 이제껏 자기를 향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천사와의 씨름 사건을 통해서 야곱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성품을 크게 경험하게 됩니다.
(06:12) 그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성경 본문의 무대인 세계 땅에 이르렀던 그때에 그의 신앙 수준과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 몇 가지가 창세기 33장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창세기 33장에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 내 조상의 땅 내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에 이미 화해한 형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에서를 따라 세일 지방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세계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들을 다사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전세기 33장 20절 셋째로 그는 세계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을 엘로해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06:43) 이것이 베들로 올라가라는 음성을 듣기 전 세계에 정착하였을 때까지 야곱의 신앙 경험의 계략입니다.
절망적인 타락을 배경으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본문의 영적 각인 각성과 부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바다 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계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친 팥을 세계메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은 일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로해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띠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창세기 33장 19절에서 34장 1절 야곱이 세계 땅에 정착하는 광경을 보도하는 창세기 33장의 마지막과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창세기 34장 사이에는 짧으면 10여년에서 길면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07:29) 왜냐하면 라반의 집에서 나은 어린 자녀들이 이미 장성한 사람들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야곱의 영적 각성과 부흥의 배경이 되는 34장에서는 성경의 기록이 한 가지 사건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모의 아들 초장 세개에게 강간 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뿌리로서 선택받은 야곱의 가정이 얼마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치성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다음 장에 나오는 야곱과 그의 집안의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왜 필연적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자신과 집안의 죄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게 하셔야 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08:08) 영적인 각성의 역사에 있어서 공통된 사실은 그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은 항상 교회의 절망적인 부패와 그리스도인들의 타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역사상 위대한 영적인 각성이 있기자 직전에 교회는 반드시 절망적인 영적인 타락과 무지의 늪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성립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세계 야곱, 모세, 사무엘, 아사, 엘리야, 요시아, 스룹바벨, 학계,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요나 등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부흥을 가져온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이 땅에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사실입니다.
(08:43) 물론 그들은 특별히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특별히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부흥을 위하여 쓰임을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그렇지 못한 다른 성경의 인물에 비해 우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사건은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보여 주기 전에 먼저 민족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타락한 상황 아래에 있거나 이스라엘 백성의 여호와를 믿는 유일신 신앙이 심하게 약화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09:14)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항상 신앙적으로 어둡고 타락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실을 평가하는 기준.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게 하는 거룩한 부흥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저국 교회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이 나라의 행실을 바르게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과 교회가 누리고 있는 영적인 삶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활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입니다.
(09:44) 무엇으로 우리 교회의 영적인 부요와 가난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감상이나 느낌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과 교회의 역사입니다. 똑같은 논리에 의하여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것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경과 성경 진리에 의하여 빛을 받고 해석된 결과로서의 경험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교회적인 차원에 확대 적용시킬 때 성경과 성경 진리에 의하여 조명을 받고 분석된 결과로서의 교회의 경험을 그러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처한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즐거워하였고 영화롭게 하였는지를 살피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그러한 부흥의 경험들이 어떻게 반복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0:2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 중 우리 조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러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유럽에는 성령이 이미 보다리를 싸서 떠나셨고 미국에서는 막 떠나시려는 참인데 한국에는 계신다. 물론 유럽의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심한 침체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은 제가 영국 교회를 방문하면서 충격을 받았는데 교회가 자신의 건물을 유지할 수 없어서 댄스 파티를 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료를 받고 인대를 해 주거나 심지어는 모슬렘에게 교회 건물이 팔리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10:56) 하지만 미국에서는 성령이 떠나시려고 보다를 싸고 계시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미국에도 오히려 우리가 깊이 번받아야 할 뛰한 영적인 축복을 누리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아직 성령님이 계시다는 표현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설령 그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왜 우리 조국 교회를 죽어버린 유럽의 교회나 빈사 상태에 있는 미국의 교회들에게 비교를 하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본받고 싶은 것은 유럽의 교회나 미국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본받고 싶은 것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축복을 누리던 때의 영적인 소중과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입니다.
(11:26) 비록 교회의 역사에 드물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타락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여 거룩한 세상으로 만들기에 유능하던 그 특별한 때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는 그의 자녀들의 신앙의 본성이 아닐까요? 하나님만을 사랑하기까지는 만족이 없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기까지 헐떡임을 그치지 않는 영적인 갈망을 가진 신자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들과 비교하며 자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부흥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이 갈망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1:55) 만약 우리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의도하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그 교회가 이루어지고 세워졌을 때 그 교회가 어떠 있을지를 생각해보고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대비해 보십시오. 선지자는 말합니다.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부흥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부흥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조국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식함에 있어서 널리 유포되어 있는 견해와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갖게 됩니다.
(12:28) 왜냐하면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을 때 얼마나 강력한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과거 경험을 들 대새기며 오늘 우리가 어떤 수준의 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측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함으로써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그릇된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약 성경에 제시하는 모습에 가까이가 있었던 때에는 이렇게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전파되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힘차게 역사하던 시대였습니다.
(12:55) 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부흥의 사건들을 읽어보면 그것이 거의 선교 역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이한 축복으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세상을 복음으로 효과적으로 정복하던 때가 역사적으로 너무나 자주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부흥의 때의 교회의 모습은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이상의 수준에 도달했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교회의 역사에서는 별로 관심 있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역사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는 다루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13:21) 그렇게 역사를 살피고 나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왔던 교회의 영적 수준과 상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교회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과 세상을 향한 영적 권세와 영향력이 거의 그대로 나타나던 시기가 있었는데 왜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그러한 축복들이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바로 부흥을 위한 기도의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뛰어난 영적 각성을 노리고 부흥의 능력 속에서 살았던 때가 그리 드물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 2천년은 부흥을 징검리로 삼아 전파되온 선교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3:49) 이 이 방면에 상당히 유용한 책 한 권이 있는데 영국 글래스고의 대학 교회에서 1742년에서 1796년까지에 목회하던 설교자 존 길리즈가 쓴 부흥의 역사적인 기록 모음집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길리즈 사후에 일어난 부흥의 기록은 그 후에 첨가되어 편집된 것이 1891년에 출관되었습니다. 주후 1세기로부터 19세기 이후에까지 계속되어온 각성과 붕의 역사를 여섯 권에 걸쳐서 편집했는데 다 읽지 않고 제목만 훑어보더라도 이것이 곧 교회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선교를 통한 교회 확장의 역사라면 하나님은 이러한 선교의 폭발적인 힘을 부흥을 통해서 불어넣으셨습니다.
(14:24) 교회의 역사가 세상을 변화시킨 역사라면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각성하는 위대한 영적 깨어남과 부흥을 통해서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의 부흥의 역사와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각성의 역사를 연구해야 할 이유의인 것입니다.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위대한 복음의 능력 있는 역사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죄인들이 집단적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급속히 확장되며 그리스도인들이 각성함으로써 신약 성경의 성도들이 누렸던 영적인 축복들을 소유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사도행전의 맥을 있는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예외적인 경우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4:58)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기들이 처여 있는 현실에 열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고장난 영적 상황에 대하여 탁월한 적응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거에 교회가 누렸던 영광스러운 모습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이런 것들을 그리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오신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방편인 교회의 각성과 부흥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알아도 그들은 이것을 아주 예외적이고 주변적인 사건으로 생각해 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제시하신 교회의 모습을 교회의 현실적인 모습의 한계 안으로 끌어내려 가두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15:29) 이것에 대한 정직한 접근은 주님이 제시하신 교회의 모습과 그들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권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현실의 교회가 과연 그것들을 누리는 공동체로 나타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왜 이러한 약속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회피하고 현실 교회의 가난한 영적 형편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교회가 이러한 축복과 영적인 권세를 누리는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 예외적인 경우라고 밀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의해서 우리의 현실이 조명되어야지 현실에 의해서 성경이 왜곡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통찰의 유익.
(16:00)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영적인 상황에 대한 아니란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지금은 상실해 버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들을 해야고 그러한 약속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의 현실과 선교 상황이 무엇 때문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기사를 살펴보기 전에 그 배경이 되는 34장의 보도들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기서 보도하고 있는 사건들을 몇밀히 관찰해 보면 다음 땅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의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야곱과 그의 집안에 영적인 타락과 무감각한 상태가 빠짐없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31)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야곱 집안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와 가족들의 삶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계시된 유일신 신앙을 보존하기에 얼마나 부족합한 상태가 되어 있었는가를 상세하게 보여줍니다.이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곱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던 창세기 28장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야곱이 베들에서 하나님을 처음 개인적으로 경험하였을 때 하나님께 드린 세 가지 약속을 보여 주는데 우리는 그 약속들이 어떻게 지켜지지 않고 있는가를 34장의 기록들에서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살 각성과 부흥 직전에 야곱과 그 집안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17:07) 베들에서 하나님을 만나던 때에 그의 약속이 담긴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어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하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세기 28장 20절. 야곱의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세 가지 요구 조건과 이에 상관하는 세 가지 맹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요구한 조건은 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7:35) 첫째로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둘째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셋째로 나를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옵소서.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의 문맥에서는 야곱이 아직 아비의 집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아니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베들에서 요구했던 바을 모두 들어 주셨으며 그 결과는 그가 기대하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 자신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때나 이루었나이다. 창세기 32장 10절.
(18:09) 결국 야곱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기와의 약속을 신실하셨던 결과를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시각에서이 시대 조국의 교회와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극복할 수 없게 놓여진 현실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빛나가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인식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백성들에 대하여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18:36) 시편 73편 1절. 조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고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기대하는 우리는이 사실을 믿고 붙들면서 모든 문제들을 풀어가야 합니다. 복스로운 영적 각성이 이르기 전에는 언제나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과 교회 역사의 축복된 경험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저한 상황이 너무나 깊은 공경에 처해 있고 이대로는 하나님이 교회를이 땅에 세우는 순교적인 목적을 온전히 이루기 힘들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에는 이미 부흥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가 바로이 때문입니다.
(19:08)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저한 영적인 상황이 너무나 공공하여 우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변화시킬 수 없는 총체적인 위기 가운데에 있다는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영적 상황과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신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진정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대대적인 운동이나 회원 모집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도이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시대의 교회가 완전히 피폐하여 참된 교회의 표지를 거의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같이 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많았습니다.
(19:41) 한 시대의 교회가 복음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리고 나면 신앙에 대한 진지함과 심각함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교회 역사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부흥에는 반발도 뒤따른다.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는 두 번의 관목할 만한 부흥이 영적인 각성을 동반하여 일어나는데 1736년과 1740년에서 41년 사이에 있었던 부흥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뉴일랜드 잉글랜드의 교회가 경험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얼마나 악의적이고 광범위한 반발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834년에 편집된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에 그 당시 상황이 아주 자세히 괴롭되어 있습니다.
(20:18) 참된 부흥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조나단의 도지의 저작 중 두 가지 자료를 지나칠 수 없는데 한 자료는 그의 전집 제1권에 실린 뉴잉글랜드의 신앙 부흥에 관한 곧찰이라는 글과 제 2권에 실린 참된 성령의 역사인 징표라는 글입니다.이 두 자료를 읽어보면 존나던 에드워즈가 쉽게 속지 않는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종종 흥분하는 부흥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부흥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각성된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황이 심각한 위기 상황 아래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인 부패나 타락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49)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에 많은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고 심지어 그들은 설교할 기회조차 받지 못하도록 강단이 봉쇄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부흥을 판대하던 자들을 향하여 에두워지는 담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막고 있는 부흥 운동에 아개를 품고이 부흥이 다만 사단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아주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양심의 질림을 받고 죄를 깨닫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부흥을 대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공식적으로 반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제법 심중한 태도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21:18) 하지만 위대한 붕괴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이 중차대한 시기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사수의 사람들에게 특히 목회자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내리는 저주가 임하지 않을까심이 염려됩니다.
베푸신 사랑을 회상하라.
구약 역사의 한 핵을 겪는 위대한 각성이 바벨론포로 귀한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에스라 때의 영적 각성과 부흥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스라가 그 시대와 죽이 하나님을 떠난 풀 신앙의 위기를 바라보며 통곡함으로 기도할 때 그가 개인적으로 깊이 묵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 베푸심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시는 우리를 그 거룩한 조소에 박힌 목과 같게 하시고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송하게 하셨나이다.
(21:54)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격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송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우리에게 우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어 이제 무슨 말을 하오리까? 에스라 9장 8절에서 10절.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에 너무나 골물에 있는 나머지 예전에 우리를 향해 베푸신 은총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누렸던 지난 시대에 교회의 복수로움에 대한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22:24)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영령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망의 어두운 역사를 지내오는 동안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베푸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백성들의 불신앙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영적인 각성에 증면할 수 있었고 그러한 마음을 죄인들에게 전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이 이 결례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기억해 보십시오.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개화하였지만 복음은 우리 나라 땅에서 고피었습니다. 우리가이 나라의 근대사를 말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특별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일제 시대의 그 질곡과 시련의 역사 속에서도 교회는 수많은 사상가들을 배출하였고 민족의 전기를 이어가게 만들었습니다.
(23:01) 동족 상자의 비극 속에서도 핍박을 견디며 무실론과 싸웠던 핍박의 피흘림 위해 복음의 가치를 하는 교회들을 연단하여 세우셨습니다. 지금도이 세상 사람들이 정비꿈을 가지고 통일을 말하지만 진정한 사람과 용서에 대한을 가진 측은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조국 교회입니다. 소 상인적인 사람들이 통일의 비용을 계산하며 득시를 따지고 있을 때 물리적인 통일을 넘어선 진정한 민족 화해와 일치의 대안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앞으로도이 민족은 교회가 아니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경계적으로 부강하기만 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는 국민들로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23:30)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민족은 하나의 혼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갈등과 밥목 속에서 대립과 두정의 시대를 지나온 상처받고 조각난이 민족을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은 단지 휘전선을 허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동포들을 하나의 혼으로 묶을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은 오직 교회와 복음으로부터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처럼 다가오는 통일을 대비케 하시려고 우리를 분단의 아픈 역사 속에서 연단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남만의 교회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복음의 본질을 붙들고 역사의 영향을 미치던 선조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이 모든 일에 대한입니다.
(23:59) 하나님은 신실하시나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이 내걸었던 세 가지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하게 행하셨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지켜듣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그 하나님께 자진에서 약속한 사항도 역시 세 가지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둘째로이 돌들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며 셋째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의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바는 그가이 서원들 중 단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4:27) 당시 야곱 어 집안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논위의 일관성을 위해서 그가 베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행한 세 가지 서원에 비추어서 당시 영적인 상황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한 첫 번째 약속은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인데 히브리어 원문은이 부분을 그가 야외께서 나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며라고 읽습니다.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야곱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안에서도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또한 야곱 자신의 삶 속에서도이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25:01) 야곱일가의 영적 부패.
먼저 그의 집안 사람 식구들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약속에 의하면 여호와는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야 했으며 여호와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한 야곱의 집안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일신 신앙 가운데 살아가야 했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하나님이 되셨다면 마땅히 그 집안 직구들에게도 여호와는 하나님이 되셨을 것입니다. 야곱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 가장 최근에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분열에서였습니다.이는 이는 온이 사무쳤을 형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말할 수 없는 긴장과 초조 속에서 홀로 남아 있던 야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시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사건입니다.
(25:33) 은들 야곱이 시름한이 부분을 읽으면서 야곱의 믿음의 승리 혹은 기도의 승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전혀 잘못된 시각입니다. 야곱의 실름 사건은 그의 교만한 고집과 아집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이후의 기록은 그가 이러한 교만과 아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환도뼈를 상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이 사건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지만 후일 호세야 선지자는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야복강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머리가 됩니다. 호세아는 야곱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자와 실험한 것은 그가 못돼서 형과 싸운 것과 같이 그의 악한 소행이라고 보았습니다.
(26:02)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꺾으신 것은 야곱에 대한 큰 징계였습니다. 그는이 같은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이웃고 회개의 통곡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야 선지자는 또 작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베들에서 저를 만나셨고 호세야 12장 3절에서 4절이라고 적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이 사건은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특히 인간의 혈기와 질약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접근할 수 있다는 육신적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26:33) 그리고 진실한 회개와 눈물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지름길임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은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분열에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던 회개와 화해의 결단을 새롭게 새기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물론 그의 집안 식구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여호와는 하나님이 되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도착한지 직후에는 얼마간 경건했을 야곱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나 디나의 강가 사건을 통하여 나타나는 야곱 집안 식구들의 모습은 결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27:05) 일찍이 그의 아내 라헬은 라반의 집에서 드라빔을 훔쳐오므로써 야곱의 집안 안에 있는 부정직과 물질에 대한 탐력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 말을으로 여기며 만족해야 할 야곱의 가정에서 발생한이 이방 신상 드랍의 절도 사건과이를 음폐하기 위한 라헬의 기만적인 사기 행각 그의 집안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최근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깊은 경험을 분이해서 목격하였으면서도 이들의 가정에는 여전히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5장 2절 구약 히브리어 성경 중 모세 오경을 의역한 본역서로서 아람어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탈곰이라고 불리는 성경인데 원역자의 부연적인 설명이 많이 제재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27:38) 거기에서는 법문에 기록된 이방 신상을 너희가 세계의 우상들의 집에서 취하여 내 온 우상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만약이 부연적인 설명이 믿을 만하다면 지금 야곱과 그의 집안이 처에 있는 영적인 위기와 우상숭배는 세계 땅에 들어와서 그들과 접촉함으로써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집안에서 지금 발견되고 있는이 이방신상들은 상당히 오래도록 그의 집안에서 간직되고 송상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야고보은이 같은 이방 신상들과 우상이 가정에 있었고 가족들이 그런 가증한 이방의 부피한 습속에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통제하고 고치는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28:07) 구약의 족장들의 가정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가정 그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세상의 구원을 위한 구속의 계시가 그 가정을 통해서 보존되고 전파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가정은 이스라엘의 모체였습니다. 구속을 위한 계시가 그들을 통해서 보존되고 발전되며 더 명백히 드러나고 결국은 그 가정을 통해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교회 이전에 계시 보존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상으로 가득한 고대 근동의 땅에서 여호와의 계시를 보존하시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인류가 구속될 계시를 전승하심에 있어서 그 도구로서의 야곱 집안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기대와 그들의 신앙적인 삶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그의 가정은이 땅에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리기 위하여 선택된 공동체였으며 후일 신정 국가를 세울 민족의 못자리였습니다.
(28:44) 야곱은 일찍이 하나님께 여호와가 자기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집안은 영적으로 극히 극심히 부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는 거룩한 가정이 되는 대신 이방신을 섬기는 일에 증인이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국의 현실을 집시하라.
오늘날 조국교회는이 민족의 갈 제시해 줄 안내자로서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 자체가 이미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에게 가장 커다한 위험은 이전에는 이단들이었지만 이제는 향락입니다.
(29:15) 우리 사회 전체가 건강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이 나라 청소년들의 앞날에 어두운 전망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합의하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어떤 시사 만평가가 전해주는 다음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중고동부 중고등학교 폭도에 붙은 구호 변천사 60년대에는 증산 수출 건설 70년대는 유신으로 번영하자 80년대는 나라의 중성 부모에게 효도 90년대는 애는 삐삐는 진동으로 경제 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생각하며 달려온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얻은 것도 많지만 소중한 유산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그동안 너무나 개인 주기적이 되어 버렸고 민족적인 따뜻한 연대감이 이제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29:51) 미쳐 소화해 내지 못한 소고화가 전통적인 가치관들을 쓰러뜨렸으나 우리는 아직 서구 사람들처럼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예조상들처럼 공동체적이지도 않습니다. 도덕적으로는 너무나 심각한 위기를 맡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자마 입에 오르 내릴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이제는 흔히 볼 수 있는 범죄들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으며 이제는 어둠 속에서 행해지던 부끄러운 일들이 이제는 밝은 때 낮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 부끄러워 숨던 사람들이 이제는 거리를 활보하며 자신의 죄를칠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국의 사회는 이제 정신적인 스승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30:18) 가난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부의 불균형은 보다 심각한 계층 간의 갈등을 불러왔고 보다 철저한 이기심을 가져왔습니다. 동일 문제를 둘러싸니 2년 논쟁도 여전히 세대 간의 깊은 고를 보이고 있으며 부패한 관행으로 알록진 사회는 이제 성전을 위한 공정한 게임 법칙이이 사회에 존재하는지를 되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의 한가운데는 무능력한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에게 교육이 있지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어떠합니까? 과연 교회는이 어려운 시대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드러냅니까? 조국 교회는 과연이 민족의 장례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갈길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조국의 장례를이 교회에 맡겨도 되겠습니까? 과연 이런 공경에 빠진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회를 변시킬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된 교회가 마음을 다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결례가 고민하고
(31:04) 아파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조국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까? 비록 적금 방법은 다르더라도 교회가이 시대의 조국 상황 우의 상황과 결례를 자신에게 맡겨 주신 기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가난하고 무기력한 교회 의시대를 살면서도 이러한 현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영적인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나 현실 상황에 대하여 대한들을 강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국 교회에 조라하고 무기력한 상황은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계절마다 현수막이 바꾸어 걸리고 거창하고 커다란 모임을 알리는 광고들이 기독교 신문의 지매를 가득 매워도 세상은 교회의 그러한 시도를 비우는 것 같습니다.
(31:34) 노력을 많이 들여서 초라한 결과밖에 못 거두면서도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또 다른 아이디어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막대한 물질과 시간과 인력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습니다. 파격적이고 혁기적인 진전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이나 선교적인 상황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를 변역하고 선교 상황을 열어 가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주체측이 되고 하나님의 후원 하나님의 후원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코하지만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박함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신령한을 받기를 마다한 다수의 무력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 애매 모하거나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복음 사역자들이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리가 없습니다.
(32: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서 친히 강림하사 교회를 그렇게 만든 대적들을 못 지으시고 그 시체들 위해 여호와의 깃발을 나쁘게 끼게 하실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위대한 역사를 통해서 무기력한 교회가 영적 위기를 타게하고이 땅을 속히 복음으로 정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오히려 그런 기대를 신앙적인 미성숙이나 영적인 불안정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럼 안타까운 상황에서 우리가 부흥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편에서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신앙적인 미성숙의 탓입니까? 혹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수시로 일으키신 부흥의 역사가 우리 눈앞에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데 우리가 어찌하여 부흥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까? 부흥을 기대하지 않는 소심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묻었습니다.
(32:55) 부흥을 기대하지 아니냐 하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착실하게 조금씩 하나님을 섬기다가 세상 세상은 변화시키지 못한 채 감동적인 일화 말을 몇 도만 남기고 죽고 교회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앙상한 가르침을 붙들고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세속화되어 복음의 진정한 의미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찬 것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선교적인 사명에 대한 책임 있는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조국 교회가 이렇게 공경에 처치한 상황에서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분명한 약속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직무기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33:22) 우리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자신들의 힘으로 벽도를 놓듯이 이루어가는 작은 성취들이 조국 교회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요행주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과 같은 초자인적 역사로 개입하심으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세상을 변역시키신다고 하는 사실은 교회 역사에서 너무나 자주 입증되어 왔지만 하나님의 이러한 부흥의 간섭 없이도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고 세상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편만히 경배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서 입중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 세월 굳게 다쳤던 세계의 미전도 종족들을 향한 선교의 빗장을 누가 여십니까? 어떻게 그런 세상에 불신앙이 타파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구세주이심을 그들이 인정하게 됩니까? 오래도록 섬기던 토착 종교를 버리고 우상을 불사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선교의 위대한 감격이 영적인 전쟁 없이 이루어집니까? 우리가 부흥을 구하지 아니하고도 조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낙관할 무슨 대안들을 가지고
(34:10) 있습니까? 이것이 혹시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하고 세상과 함께 안락한 종교적인 삶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거짓된 만족과 집착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교회.
과연이 시대의 조국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낸 바된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며이 땅에 여호와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일을 위해 사용되기에 충분합니까? 교회는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으며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사명을 받아이 세상에 보낸 바된 사람들임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결는 죄악의 낙에 잠들고 백성들은 세속의 물결의 걸기를 몰라 하는데도 교회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확신하며이를 인하여 말할 수 없이 우리의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풍조는 당시 세계 땅과 같이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섬기며 그것에 맞추었 재편된 그릇된 가치관을 따라 살고 사회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에 불편함을 못 느끼는데도 세상이 잃어버린 가치와 세상이 줄 수 없는 거룩한 소망이
(34:57)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충만합니까? 과연 조국 교회는이 민족의 장례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세상이 없으면 교회도 없고 불신자들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명도 없습니다. 조국의 역사는 우리 조국 교회의 분기십니다. 저는 애국 주의자도 아니고 국수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저는 선교사로 나가는 형제들에게 조국을 잊어버리라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선교지로 가는 형제들에게는 선교지가 그들의 조국이니 이제이 한반도의 조국은 영원히 잊으라고 일러 줍니다. 안식년도 될 수 있으면 조국에 돌아와서 갖지 말고 거기서 지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어서 거기서 묻이라고 말합니다.
(35:25) 자신들의 이름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를 기대하지 말고 선교주의 백성들의 가슴에 남기를 기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자기가 행한 선교의 역사를이 나라에다 쓰지 말고 선교지 교회의 역사 안에 쓰라고 말합니다. 저는 국수의자 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한 시대의 역사는 한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소명의 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위하여 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있으며 세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되어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35:55) 우리에게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따라 살아야 할 진리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교지로 가지 않는 한 여기이 조국에 남아서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절망적일 때나 희망적일 때나이 민족의 아픈 역사를 끌어앉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 변역과 동떨어진 교회의 영성은 거짓이며 삶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신자의 영적 경 체험은 종교적인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가 이처럼 중요하게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정이 이방에 발달된 문화와 선진동경 민족들의 우상숭배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처럼이 시대의 교회도 그러합니다.
(36:28) 부패한 사회 풍조와 불리와 속임수로 가득한 정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빈부의 갈등 같은 것들이 가득한이 땅의 교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무실로나 되어가고 있으며 민족의 정신을 결집시키는 국민적인 관심의 일치점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국조 단군의 신상이라도 건립하자는 망령된 발상이 유행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민적인 결속을 위한 합의점을 찾을 수 없으면 그런 발상까지 나왔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교리적인 주장은 빛발 구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 개인의 영혼을 죄와 사망과 형벌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이 세상의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사람들은 더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37:06) 우리가 한 시대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편만하게 나타나는 부흥과 영적 각성을 소망하면서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우선적으로 깊은 근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불행은 신앙을 투영한다.
또한 야곱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여호와는 하나님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건 역시 디나의 강간 사건을 통해서 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디나가 세계에 의하여 욕보임을 당한이 사건을 강간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말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뒤 문맥이 그러한 인상을 갖게 만들어 주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법문 자체에서는 간간 사건이라고 단정질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37:40) 다만 본문을 읽으면서 전통적으로 우리가 받는 느낌이 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주장 세계이 그를 보고 끌어들려 간간하여 욕되게 하고 창세기 34장 2절 그러나 강간하여라고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저 그녀와 동침하고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디나의이 사건은 간이라고 속단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려 그 사건이 정말 간간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세계과의 정력적인 결혼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는 디나를 보면 야곱의 딸 디나의 개인적인 신앙 속에서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지 못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38:12) 더불어이 사건은 야곱의 아들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떠나 있는가를 모두 드러내었습니다. 역사에 있어서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발생한 어떤 큰 사건을 단순히 행불행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현실의 배우에서 그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별 수 있게 하는 안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정으로 하여금이 큰 불행한 사건에 맞닥뜨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이 사건에 직면한 야곱의 아들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38:41) 창세기 34장 7절은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이오하였으니라고 보도하고 있고 13절에서는 세계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으며 15절에서는 세계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했고 29절에서는 세계 성에서 노약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할 거룩한 족장 야곱의 아들들의 신앙의 현 주소였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자기 집안에 일어난이 불행한 사건 배우에 계신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이 의미심장한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대신 서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이 큰 불행 앞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깨닫는 대신에 육신의 혈계를 따라 심히 노하고 있었습니다.
(39:12)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해야 할 본을 차버리고 선택된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의 표인 신상한 할례를 지난 고백도 없는 이방인들에게 행하도록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의식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끝내 그들은 세계 사람들과의 약조를 어기고 성중에 있는 남자들을 다 살육하고 재물과 그들의 자녀와 아내까지 약탈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참아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집안에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있기 직전에 그의 자녀들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어 그들의 영적인 형편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39:43) 사실 이것은 그들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의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필요로 하던 때에 모든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이 속에서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 아래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섬기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신앙생활을 아르바이트처럼 세상 사랑은 혼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말입니다.
야곱의 영적 침체
뿐만 아니라 디나의이 사건은 야곱 전 자신에게도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시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당시 가나안 지경까지 와서 정착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4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불행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팔례받지도 않은 이방인에게 정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이 침통한 사건 앞에서 야곱을 야곱의 반응을 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들에서 목축함으로 그들의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창세기 34장 5절이 침통한 사건에 증면했으면 그는 마땅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고 그저 아들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이 의미깊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장상한 자녀들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40:43) 이 불행한 사건을 맞이하고서도 동원하여 우리와 함께 거하자는 세계 사람의 제를 제의 비굴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창세기 34장 9절. 아들들이 빙물과 예물을 받고 그들에게 디나를내어 주겠노라고 하는 불신앙적인 거래를 들으면서도 야곱은 그 정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정도로 가족을 통설할 신앙의 지도력을 잃고 있었습니다.이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신앙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불행석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갖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가 당한 불행을 한 단계 더 심화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시모과 레위가 세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는 사건을 통해서 다가왔습니다.
(41:15) 살육은 저질러졌지만 순간 야곱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즉 세계 사람들과 같은 혈족인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족속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족은 소수였을뿐만 아니라 남의 땅에 들어와 우구하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원주민인 세계 사람들을 무참하게 사육한 것입니다. 인근의 많은 종족들이 보복할 것이 뻔했습니다. 야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세기 34장 30절 그는 불행 속에 깃들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장정의 수에 의지하였습니다. 보십시오.
(41:45) 야곱은 자기 집안에 힘센 남정내들이 더 많으면 그 불행한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우는 사람 남자의 수요의 비례해서 가문의 세력을 재던 이방 사람들의 척도를 가지고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을 생각했고 자기 집이 망하지 않고서 있는 것은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깊은 수면 아래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힘과 대안들을 더욱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 속에 교회들이 다시 한번 충만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영적 부흥을 경험하기 직전에 그 겪는 현상은 어떤 뜻밖에 사건 앞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42:21) 이 두려움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위협이나 전재 지변, 다른 사람들의 죽음 같은 것을 통해서 평소와 다른 특별한 공포의 감정을 느끼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만드십니다. 지금 여기서 야곱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으로 주신 두려움이었습니다. 야고은 시몬과 레위의 만왕에 의해서 약이 될 결과를 생각할 때 깊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디나가 더혀진 사건 때문에 단지 마음 아파하고 분노하기만 하였을 야곱에게 이젠 그 일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42:50) 자기와이 가족들이 모두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려움 느끼는 순간에도 야곱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 있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이 모든 정황으로 보아 야곱의 삶 중 어느 한 부분에서도 여호와는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아니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는 족장인 아버지였습니다. 아브라함 이후로 그 족장의 권위는 가히 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족장이란 이스라엘이 아직 민족을 이루지 못하고 신정 국가가 되기 전에 시절에 그 가족을 돌보던 가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족장들은 그 이후의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총체적인 권난을 부여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후일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서 구체화된 세 가지 권난으로 지배악됩니다.
(43:20) 그에게는 가족을 다스릴 수 있는 왕적인 권세가 있었고 그들을 위하여 제사드리고 축복을 내릴 수 있는 제사장적인 권난이 있었으며 또한 자손들의 미래를 예언하고 가르칠 수 있는 선지자적인 특권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의 생사 여탈권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2장 37절. 그러나 이제 야곱은 자기 자녀들에게 쫓아 족장으로서의 그 신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하게 되자 자녀들에 대한 신앙적인 지도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세계에서 만행을 저지른 자녀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아버지 야곱 앞에서 그 자녀들이 도전적으로 대드는 모습을 보십시오.
(43:48)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까. 창세기 34장 30절에서 31절. 그는 하나님께서 족장으로서 주신 모든 영적 권위를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신령한 교재를 누리지 못하며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지 못할 때 세상을 향해서는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영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이 세상의 모든 거룩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 거룩하며 교회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하실 때에 드러나게 됩니다.
무엇으로 교회되는가?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자신의 교회됨을 무엇으로 드러냅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깨 있는 것이 무엇을 통해 입증이 됩니까?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기부들과 비슷하게 기능하기를 강요받는 때에 무엇을 통해서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신령한 기관임을 보여줍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44:31)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한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애굽기 33장 16절. 그렇습니다. 주께서 교회 가운데 친히 함께 행하시는 표정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인들은 삶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교회가 교회됨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은 하나님이 그들의 통치자이심을 보여주고 그분의 통치를 기뻐하고 그분의 다스리 말 안에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영해 나가는 것을 통하여 그분과의 교재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5:07) 그것을 통하여 그러한 삶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돌아가도록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복음입니다. 어떤 분은 이제 조국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개혁에 대하여 토론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토론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적들은 명쾌하고 개선의 방향을 제시하는 논리도 분명하나 실제로 개혁되는 부분은 크이 없거나 있어도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2년 전에 조국교회의 현실을 비판했던 글들을 읽어 보시고 오늘날에 그런 종류의 글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45:37) 작성된 연도가 다르고 제목은 같지 않아도 그 내용은 거의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개교회의 이기주의 성직자들의 수준 저하 교인들의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삶의 부제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등이 무수한 지적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똑같은 문제들을 인하여 어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해결될 방법은 있지만 그 모든 것들 중 최선의 대안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지적과 도덕 회복 운동이나 교회 정화 운동을 통해서 조국 교회가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사실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46:05) 첫째는 교회의 영적 특성에 대한 무지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에 대한 무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아니하고는이 모든 문제들의 근극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하면서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기대하는 바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병든 교회와 회역한 땅에 거룩한 각성과 부흥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강림하셔서 당신 자신이 친히 교회의 주인이심을 보여 주시는 부흥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일을 통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46:32) 부흥과 선교의 원리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시편 67편 1 2절. 그렇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빛을 자기 백성들에게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악인을 멸할 때 그들에게 향하시는 진노의 얼굴이 아니라 지극한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들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고 자기의 영광과 광체를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택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심이다.
산이 높으면 굴도 깊다.
(47:09) 내가 기둥으로 세운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창세기 28장 22절. 야곱의 두 번째 서원은 자기가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두 번째 서원 역시 그의 삶 속에서 지켜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베들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자기의 길을 인도해 주시면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서원했지만 그의 집안에서도 그의 자녀들에게서도 그 자신에게서도 여전히 여호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디나의 사건은 10여년 이상 감춰진 야곱과 그의 집안 직구들의 영적인 부패와 하나님 앞에서 잠들어 있는 신앙 상태를 여지없이 드러내었습니다.
(47:38)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펴본 것은 그의 잠들어 있는 신앙 속에 깃뜨려 있는 영적인 부패와 영적인 깊은 잠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창세기 34장은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무관심에 대해 더 풍부한 증거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 집안의 영적 형편이 이처럼 최악으로 기운 것은 결코 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한 때는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살자는 형의 권유를 물리치고 가나안까지 들어온 신실함이 있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여호와 앞에 단을 싸운 신앙적인 충성이 있었습니다.
(48:08) 하나님은 더 이상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엘로해 이스라엘이라고 부름으로서 그분을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나 개인에게 있어서나 영적인 쇠태는 영적인 흥함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것은 한때 영적으로 깨어 있던 때가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헌신되어 있던 신실함, 그처럼 진지했던 충성스러움, 그처럼 확실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도 불구하고 지금 야곱과 그의 가정은 최악의 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48:40)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그분에 대한 경험이 가져다 준 지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가 쌓은 단도 아직 그대로 있고 자신이 그 단에 붙여 준 엘로헤 이스라엘이라는 명칭도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야곱과 그의 집안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파해 줄 수 있는 신앙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때는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설교단이 있고 또 교인들은 거기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될 수 없고 교회는 제대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49:0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로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한때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감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앙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지 않도록 한적으로 보호해 주지는 않습니다. 산이 높으면 고리 깊은 것 같이 오히려 하나님을 그게 경험한 교회들이 더 많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 한번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영원히 지키는 보증이 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깨어 있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우리 하나님 되심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9:38) 신앙을 무너뜨리는 사월의 힘.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야곱이 이처럼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결코 어떤 특별하게 악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분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경험은 참으로 오리로서는 형제도 못 내볼 엄청난 것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위대한 신앙의 체감 이후로 1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경은 그 10여년의 세월 동안에 야곱 집안에 이러한 영적인 퇴락을 가져올 만한 어떤 회개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가나안에 도착하여 세계의 단을 쌓는 신앙 고백의 기사를 적은 다음 말 없이 10회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서 디나의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50:09) 만약 기간 그 기간 동안에 야곱 집안의 신앙 상태를 이처럼 황폐하게 만든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성경은 아마 그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저 그렇게 세계성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갔던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사 식구들이 별다른 큰 변화 없이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세월은 지나갔습니다. 야곱의 집안은 목축과 함께 매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 10절. 따라서 이방 사람인 세계 사람들과 인연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문화를 함께 나누며 풍속을 받아들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50:39)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일차적으로는 그가 완전히 조상의 땅 그 족속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1장 3절. 그러나 그가 아직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분을 모르는 세계 땅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세계 사람들과의 교본이 두터워지면 두터워질수록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리신 신앙은 점차 희박하여져 갔습니다. 그의 식소들과 자녀들은 가나안의 발달한 농경 문화와 그 속에 깃든 종교적인 우상숭배에 젖어 들어갔고 야곱 역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족장들에게 있어서 그때로 종중받던 가장으로서의 신적인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51:14) 이러한 영적 형편에서 베들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베들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고 한 서원을 지키는 것은 처음에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나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아온 재산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신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점차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하는 요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야곱과 그의 집안의 신앙적인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베들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약속을 지키는 이상의 일이었습니다.
(51:43) 본질적으로 그것은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과 그의 집안의 마음과 삶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의 주대심 앞에 복종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베들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는 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더 이상 절박한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위해서 섬기고 영적인 위대한 사건들을 개념하기 위하여 관심을 갖는 일은 각성된 교회 의시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나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52:11) 하나님의 이름을 즐거워하고 그 이름을 온 땅의 족속들로부터 찬양받게 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는 대신이 땅에 속한 것들을 위하는 일에 자신을 모두 소모해 버리기에 급급하게 됩니다.
11조의 언약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 일을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장 22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10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것은 야곱이 베들에서 행한 세 번째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드리겠나이다.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은 강조 구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서는 반드시라는 말을 삽입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한 방 한글 번역보다 좀 더 강한 오조를 나타내줍니다.
(52:40) 내가 정령코고 그것을 11조로 드리겠나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11조를 드리되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그일을 막아도 제가 정령코 11조를 드리고야 말겠나이다라는 결단이 깃든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구한 대로 평안히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3장 18절. 그는 거기서 자신이 살 땅을 위하여 세계 사람들에게 은을 일곱 개나 지불하였습니다. 창세기 33장 19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아니었다면 원한을 품고 칼날로 자기를 맞이하였을 형사를 위해서는 더 많은 가축들을 예물로 준비해서 바쳤습니다. 창세기 32장 14절로 15절.
(53:11) 그러나 하나님께 정령 드리고야 말겠다던 11조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값진 교훈을 전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깊은 잠에 들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가나안에 도착할 때만 해도 그는 여호와께 단을 싸울 정도로 헌신하는 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고 11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물질로 섬기는 헌신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버렸습니다.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지 아니하고 있는 야곱의 영적 상태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53:37) 그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보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말할 수 없이 커다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가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온통 자기들만을 위하는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부흥은 이기심을 깨뜨리고
영적으로 큰 각성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자기 말을 위하는 이기심입니다. 오늘 야곱의 실패는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경건에 보이는 일상적인 종교적인 모습 뒤에는 자기만을 위하는 온갖 탐욕스러운 이기심들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54:07)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은 땅을 개인이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한 구약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자신들의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이기심에 가득한 족속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경건을 흉내내던 바리새인들의 정체가 끌어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던 방탕한 고린도시에서 보림받은 교회가 분쟁과 다툼에 빠져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자기만을 위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이 이러한 일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진리입니다. 한 시대 속에서 교회가 각성하거나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될 때에 비로소 선교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54:37) 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빨랫감을 짜는듯한 인색한 선교가 아니라 넘치는 헌신으로 복음의 불모지에 자신의 삶을 드리고자 하는 일꾼들이 힘에 넘치도록 헌신을 자원합니다. 미국이 대각성 운동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선교에 대하여 범 교회적인 관심이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각성 운동과 한 번의 기독 부흥의 부흥을 통해서 그들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되자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하였고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아무의 땅에 자신들의 피를 뿌리며 순교하기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조국 교회의 영적인 각성과 공동체의 영적 부흥을 위하여 자신의 귀한 것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이 보기 힘들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서도 우리의 영적인 상황을 진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55:13) 이 말씀 앞에 우리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영적 상태의 인식.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베들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그 자신과 집안의 영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그 영적 수면 상태를 드러내고야 마셨습니다. 깊이 잠들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조차 잃어버린 야곱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야곱을 뼈를 깎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디나가 정조를 잃는 사건에 증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이 사건을 통해서 그동안 별다른 큰 계기 없이 서서히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살아온 가나안에서의 10년 세월이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적 위기를 안겨다 주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55:42) 그리고 깊은 잠속에서 부패해 버린 야곱의 영적 위기와 불신앙을 들추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속에서 선택된 백성들을 영적인 각성애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복스러운 영적 각성을 가져다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굶주인 배를 움켜지고 돼지 우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아직 그곳이 견딜 만하다고 생각하는 한 영적인 각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각성으로 깨어나게 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과 오동체가 처한 영적인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떠나가 버린 하나님의 복스러운 은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현실에 아파하며 그분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56:14)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정직하게 시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무리 예정으로 들어도 치료하지 않은 역사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전 586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아래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유다 왕국이 바벨론 의에 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성경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는 곳이라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제는 그들의 말발에 회파되었고 제사까지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늘에 닿을 듯할지라도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르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토로 돌아오게 하셨고 더욱이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낸 역대하 36장 21절 예루살렘 성전의 자리에 다시 지대가 놓이게 하셨습니다.
(56:50) 그러나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 자리에 놓여진 제2 성전의 기초 공사는 그 규모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이 성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이 성전 지대 노임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기초 공사가 이루어진 기공시 현장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거로 이제이 전 지대 노임을 보고 대송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에스라 3장 12절에서 13절 성전 공사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무슨 가닥이었을까요? 어째서 성전 지대가 노인는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두 번째 성전이 건축되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날를 바라보며 기쁨의 환호성을 외쳐될 수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하염없는 눈물로 적시며 가슴이 찢어질 듯 통곡하는 것일까요?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는 사람들은 포로시대 이후에 출생하여 솔로몬 성전을 보지
(57:37)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발이 성한 노인들의 골깊이 주름진 얼굴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 그들은 그 첫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이후에 전후 세대들은 그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토록 사모하던 제사가 드려줄 수 있는 성전의 기초가 놓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족하며 탄성을 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이 성전 기식에서 통곡하며 가슴을 짓고 슬피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했던 첫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노인들이었습니다.
(58:06)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이 무엇이며 그 위험이 어떠한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환호하는 젊은 이들 틈에서 성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반각해 버리는 데에는 뛰어난 존재들입니다. 항상 자신의 시대 오늘의 일들의 열중에 있기 때문에 지나온 역사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이 시대의 교회가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 그리고 지나온 기독 교회의 역사를 읽어야 합니다. 구약의 각성과 부흥의 역사뿐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1세기 교회의 출발과 복음 전파의 역사와 2세기와 3세기까지의 탁월한 설교가들의 전기와 종교 개혁 시대의 개혁가들을 움직였던 진리의 힘을 기록한 역사와 변역의 물결과 교회의 변화사 그리고 17, 18, 19세기 동안에 생명을 일어가던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을 새롭게 하시던 역사들을 읽어보면 우리는 조국 교회에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8:51) 우리는 고민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기독교 고장난 교회에 익숙해져 있습니다.이 이 시대의 조국 교회가 지금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가 대단하고 하나님의 큰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거짓된 자기 만족에 빠진다면 희망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부흥을 위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건강을 잃은 교회일수록 거짓된 자기 만족에 빠져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필요를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분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생애적인 경험을 가지고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야곱과 그의 가정을 보십시오.
(59:21) 하나님께서 디나의 사건을 통해서 거룩한 족장으로 부름받은 야곱의 영적인 가난함을 드러내실 때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집안에 우상이 굴러다니고 집안 사람들이 그것을 섬겨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자 죄에 대한 무관이 함께 자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제와 같은 의식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금년에 경험하는 교회의 형편는 작년에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로 모이고 조직들은 움직이고 예배는 드려집니다. 교회들은 계절마다 종교적인 행사로 품비고 사람들은 만족해야 합니다.
(59:50) 공동체를 뒤는 감격은 없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금은 생깁니다.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은 기대감 없이 모이고 또 아무 일 없이 흩어집니다. 적어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치 창세기 33장과 34장 사이의 시간을 살았던 야곱의 가정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처지를 바로 알고 고민하지 않아도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고 교회는 자기들 자기에게 약속된 거룩한 특권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지를 성경과 교회의 역사가 보여줍니다.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이 총체적인 어려움 아래 있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와 복음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00:21) 우리는 상한이 땅을 고치는 일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를 고치는 하나님의 거룩의 능력에 낯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셔서 공경에 처한 교회를 살리시고 교회를 외워산 악한 원수들을 친히 무찌르시며 당신의 거룩과 영광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심으로써 본질적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부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을 받은 조국 교회가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1:00:48) 오랫동안이었던 복음의 영광을 다시 부어 주시고 죽은 자처럼 잠들어 있는 교회들을 일깨우시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냉담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물붓듯 부어 주시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러한 부흥이 없다면 조국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나 세상을 고치는 성김에 있어서나 별로 진전이 없을 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