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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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서라
하나님 앞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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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거룩한 부흥 제 3장
하나님 앞에 서라
부흥과 영광 일어나 베들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내가 내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장 1절
세상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당신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부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불행을 도구로
야곱의 집안의 영적 각성과 부흥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야곱으로 하여금 디나의 사건에 맞닥뜨리게 하심으로써 그의 잠들어 있는 영적 상태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현실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이처럼 뜻밖에 사건이나 보행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00:45) 야곱은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적으로 더럽혀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한 마음이 되거나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각성하거나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 같은 마음의 변화를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자녀와 가족들에게 거룩한 독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신앙적인 지도력도 상실하였습니다. 혈기 충천한 두 아들 시몬과 레위의 경고망동을 인하여 야곱의 집안은 가나안 족속과 보리스 족속들에게 산육을 당할 위기에 증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인생에 있어서 가진 략을 다 더득한 야곱조차도 대책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01:18) 이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환난의 큰 위험과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환난과 두려움과 고통은 종종 인간들을 각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떡으로 사용되는데이는 하나님을 만날 가장 중요한 준비가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고합니다. 절망하기 전까지는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에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이 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야곱은 돌이킬 수 없이 빠져주치게 된이 위기 상황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알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01:54) 그는 이제껏 인생을 자신의 제치와 기재를 따라서 살아왔습니다. 형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을 때도 그러했고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를 속일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품싹쓸 빼앗기는 부른을 겪기도 하였으나 그때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치고 단원하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지금 디나의 사건을 통하여 그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가나한 원주민들에게 도육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자기를 이런 위기에서 건져 주실 분이 없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02:26) 개혁과 부흥,
하나님에 의한 커다란 각성이 필요하던 시기에 야곱과 그의 가정의 불신앙과 도덕적인 황폐함은 어느 부분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가지 기초에 다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야곱의 침체된 신앙의 중심부에 자리한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이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집안의 잘못 한두 가지를 구짖 지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영적 각성과 부흥의 특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처럼 조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많은 때도 흔치 않느냐였을 것입니다.
(02:59)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과 논리들을 가지고 명쾌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갈기를 제시해도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이 점에 있어서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교회 계획을 위한 처방들을 보십시오. 여러 사람들이 조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시하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의 잘못된 교회 정치적인 관행이나 덕적인 불람리를 말하고 좀 더 나은 방안을 따르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진리가 분명하게 지시하지 않는 행정적인 관행과 의사 결정은 합리적해야 합니다. 불합리한 관행이나 기독교의 정신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교회 운영 방식들은 개선되어야 합니다.
(03:34) 필요하면 이러한 개선 방안에 대한 여러 교회의 경험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들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결정적인 일들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대에는 도덕성과 합리성 이상의 그 무엇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거칠 수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교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교회가 상식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과 합리성을 무시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 때문입니다.
(04:05) 그리고 그러한 문제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구조적인 문제 모순으로 고착됩니다. >> 한번 자리잡은 구조적인 모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구조 안에서만 사모를 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조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없음을 비난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공경에 처한 것이 단지 인식의 부족 때문입니까? 인식이 바뀌고 교회의 문제들이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따라 풀리고 나면 교회의 영적인 상황은 개선될까요?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종교 개혁과 마르틴 루터에게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그는 종교 개혁을 성사시킨 후 신자들의 사회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약 성경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명령에서 제시되는 윤리를 그 당시의 시대의 상황 속에서 신자들이 적용할 수 있도록 새롭고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04:48) 예를 들어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할 때 그는 이것은 결코 단순한 생명의 연장을 위한 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교육을 받으며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는 것도 포함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하지만이 일용할 양식 가운데는 귀금속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그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길을 열어 줌으로써 고리 대금업을 하는 사람들의 탐력을 경고하는 한편 건전한 경제 활동을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 개혁과 부흥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영적인 부흥과 개혁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05:22)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돌이킴이 없이는 부흥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3절 역대아 7장 14절 부흥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동의하실 수 없는 악한 삶을 고치려고 하는 개혁의 욕구를 가지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역사에서는 구체적으로 삶을 돌이키는 개혁이 영적인 부흥을 알리는 예고편이 되기도 하고 커다란 부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악함을 고치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혁을 위한 활동들이 항상 부흥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와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이 항상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경외심으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05:56)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개혁과 부흥의 미묘한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섬
야곱이 이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배달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내가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창세기 35장 1절. 하나님께서 야곱을 각성시키시고 만나 주시기 전에 주신 첫 명령은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이 명령을 주신 때는 야곱에게 있어서 실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항상 우리의 삶 전체가 뒤틀리게 됩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적받아야 할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06:33) 그렇지만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다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내가 이제는 내 앞에 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단은 제사를 위한 단이었습니다. 제사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기에 좋은 시간들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본질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이는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천지하심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국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알려질 수밖에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계신 분으로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07:06) 이와 유사한 일은 우리의 반복되는 회개의 경험에서도 일어납니다. 늘 해오던 일이고 늘 보아오던 상황인데도 어느 순간에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되는 것을 듣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각성이고 지금 야곱에게 너는 내 앞에서 서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위대한 영적 각성과 하나님의 부흥이 있었던 시대를 돌아보면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탁월한 경건 속에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처럼 힘에 넘치는 수고와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헌신 속에서 살면서도 구별된 경건의 삶을 이어갔던 것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신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07:42) 신앙 부흥의 친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섰던 경험은 별로 기록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서술한다는 것은 마치 천국을 글로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 카톡 >> 경험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던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령한 경험이나 성전에서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던 이사야의 하나님 임재의 경험 이후 선지자들의 소명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경험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08:17)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교재에 있어서 영적 경험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구약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들이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은 바로 이러한 경험들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건조하고 척박한 신앙 생활의 원인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한 신령한 경험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 세계에서 경험될 때에 비로소 그 진술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드러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이 일어나는 때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노출된 것 같은 신전 의식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은 마치 커다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며 큰 권세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08:52) 부흥 가운데 일어나는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행복감이나 환의가 아닙니다. 거기서 먼저 느끼는 것은 깊은 두려움과 영적인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분이신지를 말하는 것이 그분의 영적인 깊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하듯이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부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09:24)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영적으로 우리와 가족 관계에 계신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이 땅의 아버지들과의 존재에 있어서 구별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도로 배우고 실천하는 중에 늘 잊지 않고 빨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분은 절대자이시며 우리는 그분에 의하여 지음받된 존재들을 따름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지만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의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존재에 있어서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임을 알고 그 어미의 하심에 엎드리게 되는 깨달음 없이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만을 함부로 누려서는 안 됩니다.
(10:00)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 속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 살다가 땅에 묻히는 존재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한없이 어미로우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는 비천한 죄인들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느끼는 처음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죄인들에게 주는 자연스러운 영향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 선지자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두려워하였으며 출굽기 3장 6절 잘못하면 죽을 위험을 느꼈고 출굽기 19장 21절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 자신들에게 큰 재앙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려움에 떨기도 하였습니다.
(10:36) 이사야 6장 5절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실 때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평소와는 다른 아주 두렷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모임 가운데 행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 지극한 거룩과 엄위와 영광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핫차하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와 기도에는 눈물이 마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은 기쁨으로 혹은 죄에 대한 슬픔으로 흐느며 집으로 돌아가기 일수입니다. 기도회에서는 사회자를 제치고 성령께서 직접 모임을 인도하시는 증거가 현재히 느껴집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한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몸서 체험하게 됩니다.
(11:11) 부흥이 일어나는 그 장소에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이어서 그 두려움은 변하여 찬양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자신을 모두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광대한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를 듣는 일에 기쁨을 느끼며 이것이 예배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왜냐면이 말씀의 선포 속에서 그들은 전에 없이 큰 권세를 느끼며 그 설교를 통해서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부흥은 항상 말씀과 함께 다가옵니다.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11:42) 그들은 더 이상이 세상의 축복을 약속하는 설교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다 더 많이 알기를 원하지 자기들의 죄로 지친 삶을 위로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자아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함므로 하늘로는 하나님과 더욱 변화된 영적인 유대를 공고의하고 밖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분명히 느끼게 되는 것은 모든 육체는 불과 같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들의 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이 육체를 위해 힘쓰고 했으며 그 육체의 영광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12:15)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들의 풀의 꽃과 같은 인생을 통하여 드러날 것을 소망합니다.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이 왜 분리될 수 없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특권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들은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영령이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믿게 됩니다.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 앞에 섬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단을 싸을 하나님의 명령은 야곱을 각성시킴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12:46)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는 제로서의 제사 형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하는 영적인 의미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의 영적인 상태와 신앙생활이 너무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야곱의 어느 잘못된 사항을 지적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셨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하나님이 야곱의 도덕적 혈함이나 종교적인 불교를 구체적으로 한두 가지 지적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결코 이와 같은 생애적인 영적 각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은 지금 어떤 도덕적인 불결이나 종교적인 오류를 지적받는 대신 영적인 상태가 완전히 새롭게 회복됨으로써 여호와를 섬기는 유일 신신앙과 구속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13:20) 지금도 원리는 그대로입니다. 프란시스 셰포의 지적처럼이 시대의 복음주인은 이름만 거장할뿐 사실상 불가진 등불이요 맛이든 맛은 소금입니다. 전 세계 복음주인은 현실적금과 타협의 수환자가 됨으로써 주님께서 계시하신 신앙의 외진 외기로 배진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쉐퍼는 자신의 책에서 미국에서의 복음주의가 처한 이러한 위기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종교 개혁이 황금 시대를 연출하였다든가 종교 개혁을 한 나라들 안에 살던 신자들이 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통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것과 성경의 절대적인 가르침들이 문화 전반에 광범하게 하고들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3:58) 여기서 진전된 자유는 엄청난 것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함이나 합이나 풍토의 근거를 둔 규범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는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60년 동안에 무언가가 일어났다. 일찍이 성경적인 합의와 기독교적인 풍도 위에 자리잡고 있던 자유가 이제는 모든 통제를 벗어난 자유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이 시대 정신을 보는데 곧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 및 도덕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무시해 버리고 인간 스스로를 신격화한 자율 인간의 주연이 그것이다. 솔직히 기독교의 복음을 여러 나라에 전해 주었던 기독교 국가들 가운데서 아직도 복음의 영향력을 간직한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14:29) 어느 나라에도 부분적으로 그러한 영향력이 전적으로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러 나라에서 심각하게 쇠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처럼 화석화되어 가는 영적 상황은 단지 미국이나 유럽 일각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부흥의 여명을 밝히는 기도.
한 시대의 교회의 잘못이 고쳐지는 것은 결코 세상의 교회는 이어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요구 앞에 삼으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변역이 이러한 기초 위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는 세상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15:00) 그러고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보게 하십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영적인 회복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십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마음 아파하게 하시고 자신들을 통해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과이 땅에서 신적 여임을 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교회를 가슴으로 쓰러고 흔느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기도로 한 시대의 영적 각성과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은 전혀 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태평하던 시대에도 위기를 느꼈던 사람들이고 남들이 노래 부르던 시대에 허느끼며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5:34)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믿던 낙관적인 시대에 자기 시대에 교회와 동행하시기를 거절하며 돌아앉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를 구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2절 그들은 먼저 각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영적인 각성과 교회의 부흥은 대체로 한 사람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각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각성이 기복제가 되던 사람들의 헌신적인 기도는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섬으로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단을 쌓으라.
오늘 성경에서는 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곁뜨린 몇 가지 부과적인 설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06) 먼저 하나님은이 단을 쌓을 곳이 베들리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이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의무를 갖게 합니다. 그에게 쌀 것을 요기하시는 제단은 이미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베들의 탄을새롭게 쌓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왜 세계에 이미 있는 제단이 아닌 베들에서 새롭게 쌓는 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세계의 단이 어떻게 쌓아졌습니까? 그 단은 결코 이방 종교와의 혼합 속에서 만들어진 제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단은 하나님 앞에 재물을들을 만한 단이었습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세계의 단이 세워진 경를 생각해 보십시오.
(16:37) 그다는 가나안으로부터 바딴람 바딴 아람으로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먼 인생의 여정을 걸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쌓은 단입니다. 그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단으로서 쌓아 올려졌고 더욱 야곱이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최초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한 유소깊은 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금 단을 싸우라고 요구하시는 장소인 베델은 야곱의 가족들과는 상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들은 그가 홀몸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여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에 혼자 하나님을 배웠던 곳이었습니다. 그에 이루어진 자기의 가족들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17:09) 그러나 세계의 제단은 야곱이 자기의 가족들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겼던 곳입니다. 더욱이 세계는 지금도 그들 가까이 있어서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 주시기 전에 베들에서 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절이 명령은 곧 너는 베들에서 내 앞에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명하셨을까요?
베들에서 만나 주셨던 하나님.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생각나게 하기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을 쌓도록 명하시는 베들이 어떠한 곳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창세기 3장 35장 1절.
(17:46)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었습니다. 행의 축복을 속여 취한 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동반자도 없이 외로운 낙근의 길을 떠나던 위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도움으로 나타나셨던 곳입니다. 그때 야곱은 일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위기 상황 가운데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도울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에게 지극히 우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야곱에게는 그 하나님이 아직 자기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조상으로부터 전능하신 분으로서 소개받은 여호와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절망 가운데 있었고 그를 도와주겠노라고 자증하여 나타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18:20) 그때에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을까요? 절망적인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막막한 여행길에서 바라고 의지할 유일한 구원자로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그에게 은총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형에서가 고향에서 그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적대감으로 칼을 갈던 바로 그때에 나타나셔서 은혜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당시에 야곱의 신앙이 깊은 경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절박한 상황에서 미뤄볼 때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은 간절하게 그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것이 바로 야곱이 세계이 아니라 베들에서 단을 쌓아야 하는 첫째 이유였습니다.
(18:52) 하나님은이 단을 쌓기 위하여 쌓게 하기 위하여 그를 베델 땅에 서게 하심으로써 자기가 어떠한 때에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그와 맺은 약속에 신실하였는지를 생각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세겜을 떠나게 하시려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세계이 아니라 베들의 단을 쌓도록 명령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야곱으로 하여금 세계 사람들과 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의 영적인 형편은 여호와를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릴 위기에까지 다 달았고 야곱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존하고 전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잃어버릴 위기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19:24) 야곱과 그의 집안이 이렇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심이 떠났기 때문이었지만 그 신앙심이 사라져 버리고 그들이 이방 사람들과 다름없는 백성들이 된 것은 세계 사람들과 동화된 삶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할 때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교회 안에 신자들을 위해서이고 셋째는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은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원을 얻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진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19:58) 세상은 교회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투쟁하여야 할 대상인 동시에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장적인 탄원으로 중보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도록 부름을 입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세계 사람들과 교육을 하면서 살아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세계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일신 신앙의 영향을 끼치는 대신에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신앙이 세속화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중요한 요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교회의 특징은 세속에 대한 사랑입니다.
(20:29) 교회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기 직전에 교회는 항상 이런 부정적인 영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내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깊은 침체에 떨어지게 되면 세상에 신령한 영향을 끼치는 대신 세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을 사랑으로 깨우치고 책망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대신 세속과 야합하게 마련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얼마나 영향을 주느냐는 것은 또 그들이 얼마나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0:57) 세계 사람들에게 유일 신앙의 영향을 미치는데 실패한 야곱과 그의 집안은 잠시 그 땅 사람들과 결하고 배돌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들에게 부흥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들을 세계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베들에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베들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전세기 35장 1절. 하나님께서 야곱을 베들로 올려 보내시는 것은 단지 한번 그곳에 들러서 의식적인 제사를 지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상당 기간 동안 거기 거하며 세계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불신앙의 찌꺼기들과 도덕적으로 불결한 습속들을 털어내 버리는 일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세겜을 떠나던 야곱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의 조국 교회는 어떠합니까?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대신 영적인 영향을 미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으로서 끊임없이 영혼을 그리스도께 안겨 드리고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물결을 따라가는 대신 하나님을 떠난 시대 정신을 꾸짖고 있습니까? 교회는이 세상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들이 교회의 선포를들을
(21:49) 때 이처럼 방종한 자신의 삶에 대해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까?이 이 시대의 교회가 증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세속과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이 일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버리도록 도전을 받았던 세상의 기준과 가치들이 교회에 의하여 다시 모아지고 자신은 변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교회는 거듭난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실로이 시대의 조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잠시 일상적인 기능에 대해 대한 기대의 회의를 느끼는 일입니다.
(22:18) 잠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면서 불결한 세속의 물결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빛이시는 하나님의 얼굴 빛을 받기를 사모하면서 이것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증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자기의 존재 속에 내제하면서 일상적으로 계속되온 습속에 들어붙은 세속주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으려는 갈망들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 심어 줍니다. 위대한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탁월하게 높은 수준의 경건을 실전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영적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22:49) 이것은 단순히 훈련에 의해 체득되고 하고 실천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경건을 실천하며 살기를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고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데 고통을 느낀다면 교회는 마땅히 자신 속에 깊이 들어온 세속의 물결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야 할 필요를 인식하여야 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필요합니다. 세계과 같은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을 따라 복음으로 영향을 끼치며 변화를 가져오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살던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은밀히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23:17)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을 위하여 세계을 떠났다는 야곱처럼 우리에게도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너무나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소수로부터 시작함.
그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베들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는 명령문의 인칭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도 명령 2인칭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이 대목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신앙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깊은 늪에 빠져 있는 것은 야곱뿐만 아니라 그게 지방까지도 포함되는데 베들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
(23:46) 곧 하나님 앞에 살라고 명령을 받은 것은 야곱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흥의 원리 중 하나를 보여줍니다. 원리는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부흥을 주시는 도구는 항상 소수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의 역사는 결코 사람이 주도하는 커다란 개혁 운동이나 대규모의 집회를 통하여 이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각성된 소수의 사람들의 헌신적인 기도와 갈망을 통해서 부흥을 주심으로써 선교의 역사를 이어오셨고 살아 있는 교회의 역사를 이어오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정의 유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야곱의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고 행동 강령을 결정하는 것 같은 부산함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24:20) 하나님께서는 야곱 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한 사람을 하나님 자신 앞에 홀로 세우심으로써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특이점입니다. 흔히 교회가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합의가 필요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부흥은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그 일의 주인이심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고 복스러운 일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부흥이 우리를 통해서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24:47) 이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최초로 불러내시는 사람들은 항상 한두 사람이나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들에게 하나님 앞에 서도록 명하십니다. 그리 그리고 그러 그리고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남들이 갖지 못한 시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현실을 보게 하십니다. 그 특별한 시각을 통해서 그들은 교회와 자신들의 영적인 현실을 보게 되며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심정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시는지를 아하리게 됩니다. 이때 그들은 진정으로 진체된 교회의 회복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중부자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완벽한 부흥은 없다.
(25:18)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흔히 전개되는 상황은 이렇게 각성된 시각을 가진 개인 혹은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 사이에 시각의 차이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의 출연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지체들 사이에 소녀를 가져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결제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사단의 역사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며 그대로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역사하실 때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두 가지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부흥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목욕물이 더러워서 그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25:52) 이에 존나던 에드워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문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부흥을 일으키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들에게는 늘 문제가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잡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낯설며 이해하기 어렵고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항상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광스러운 부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세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같이 이슬 같은 존재가 되시는 부흥을 일으키실 것이며 그 가지가 널리 퍼지는 놀라운 신앙 부흥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26:27)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세야 14장 9절.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선지자적인 각도에서 현실을 조망하고 그 시대에 다락한 교회와 권세를 잃어버린 가난한 교회의 영적 현실에 대해 제사장적인 나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통하시는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구속 시의 공동체를 각성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너는 창세기 35장 1절으로 시작되는 2인칭 탄수의 명령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7:03) 하나님의 율신 신앙을 전파하고 구속의 계시를 보존하는 일이 어려울 정도로 타락한 것은 야곱과 그의 집안이 모두 포함되는 집단적인 불순종이었지만 이들을 깨우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야곱 한 사람을 부르시는 부르심과 각성애의 촉구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수의 움직임에 유의하나 하나님은 소수를 자기 편에 서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로이드 존스가 말했듯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사람 그가 곧 다수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야곱의 집안을 깨우는 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은 야곱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세우심으로써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27:32)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이 민족의 역사의 주인이 오직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일제의 아빠가 아래 있던 조국은 성도들의 신하는 기도로 광복을 맞았고 동국가는 회개의 중보의 탄원으로 금세기에 다시 없을 처절한 동족 상잔의 전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조국의 백성들이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까? 하나님을 떠난 결례의이 모습은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부흥하는 삶입니까? 교회는이 민족의 다음 세계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조국 교회에 어떤 달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채 계속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이 결례의 역사를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계속 흘러가도 교회는 때가 되면 저절로 잃어버린 생명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혹시 조국 교회의 현실이 장세기 34장 마지막에 놓인 야 야곱 집안의 형평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
(28:23)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은 모임을 결성하고 구원자를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으로서 위대한 부흥의 새벽을 여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으로이 위대한 일의 출발점을 삼으시지는 않습니다.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형평과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과 참담하도록 가난한 그들의 영적인 현실과 무력함 사이에서 애통해야 하는 사람 혹은 소수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부흥과 신전 의식.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단을 싸우라고 명령하실 때 덧붙이신 말씀이 또 하나 있습니다.
(28:58) 그것은 하나님께 창세기 35장 1절는 9절입니다. 세계에 있는 제단도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이었습니다. 창세기 33장 20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베들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 하실 때에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단을 싸우라고 말입니다. 흔히 스쳐 지나가 버려도 종일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표현에서도 우리는 깊은 진리를 기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그 모든 기록들 중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성령께서 선택하신 최상의 언어라는 사실과 기록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의미가 담겨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9:30) 이 본문도 그러한 마음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을 하여서 하나님께라고 기록된 표현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계시키고 싶습니다. 왜냐면이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기 위한 조건과 부흥의 결과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이 문제를 몇갈래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각성과 부흥을 위한과 관련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 공동체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신앙적으로 부흥하기 전에 먼저 한 사람 혹은 소수의 무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의 마음과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30:00) 하나님께 창세기 35장 1절이 말씀은 영적인 부흥과 보편적인 각성에 앞서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어떤 비전이나 계획 같은 것들이 그에게 있어서 일차적인 관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관심을 지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다 허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의 사역의 목표나 교회 의선교의 비전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30:31)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는 이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을 위한 것일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영적 각성과 부흥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르심을 받은이 소수들의 뚜렷한 특징은 그들의 관심의 특이성입니다. 그들 속에는이 세상에 사는 세속적인 자연인들은 물론 거룩한 부흥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부흥을 걸망하는 까닭은 종교적인 모험주의나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선교적인 목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31:04)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을 갈망하는 것은 그 부흥과 영적 각성의 때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높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국이 갈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뜨거운 열망입니다.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일린 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증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 온건데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삽을 사으며 불이 물을 끓림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악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들은 자도 없고 비록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31:49) 이사야 63장 18절로 64장 4절 또한 그것은 주님 자신의 열망입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 2장 1절로 2절. 선지자들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들은 뭔가 불 같은 거룩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활동하던 시대도 달랐고 출신도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도 여러 가지 다른 강조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3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의 글을 읽을 때 우리가 받는 피할 수 없는 인상은 그들의 마음이 불같이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열정이 너무나 뜨거워서 그들의 글을 읽는 우리의 마음에까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때로는 핏빛 통곡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선포가 수많은 세계를 뛰어넘어 불같은 감동으로 우리의 마음을 때려오는 외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유리한 문제 때문입니까? 아모스의 강렬한 문제를 보십시오. 그들의 선포가 정의를 증거하는 강함이 있기 때문입니까? 호세아는 하나님과 고멜 사이에서 약한 자가 되어 눈물로 그를 쓰고 있습니다.
(32:52) 장마다 그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의 높은 신분 때문일까요? 그들 중에는 목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고한 믿음 때문일까요? 하박국의 회의 질문들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의 선포가 힘을 지니는 이유는 그들이 선포한 여러 가지의 메시지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글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이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 모두 한 가지 열망에 불붙는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전은 선교도 아니었고 성전을 짓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33:23) 그들의 소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가장 큰 열망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종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열망이 그들 모두를 불덩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서를 통해 받는 가장 공통적인 감화입니다. 사람들은 자마다 자기의 사역에 열심을 내며 살아갑니다. 어찌하든지 목표를 이루기를 원하고 성장에 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에 대한 열정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아님은 말할 나이도 없습니다.
(33:52) 우리가 가장 시급히 되찾아야 할 열정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불같은 열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에 대한 열정은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위한 열심보다 뛰어나게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피로읍을 건설하며 불리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권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내전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각각 2장 12절로 14절 보십시오. 주님의 가장 큰 소망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4:24) 그분이이 세상의 역사에 간섭하시는 것도 우리를 불러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보내시는 것도 심지어는 독생자를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도 당신 자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러한 열망을 그분과 함께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만 공유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열망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
부흥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종 동료들에게 우울한 비관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34:54) 왜냐면 그들이 경험한 영적인 각서는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다 달아야 할 교회의 표준과 어림도 없는 표준에 머물러 있는 교회의 현실 사이에 제사장의 마음으로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비관주의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낙관이 무엇인지를 아는 비관 주의자들입니다. 신앙 부흥은 결코 교회의 성장을 이루는데 이용되어야 할 방편이 아닙니다. 부흥은 사람들이 기부를 조직하고 모임을 계획하며 부흥을 일으킬 시간표를 작성함으로써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부흥에 대해 매력을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35:23) 어느 사람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부흥이 이런 세속적인 부흥과 비교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부흥을 바라는 혹은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무치는 열망 때문입니다. 독자들 중 어떤 분들은 저의이 말을 의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오늘날 소위 부흥 운동을 목회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열심히 부흥 운동을 하게 하였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35:51) 그러나 참된 부흥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그런 것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부흥의 특징인 영적 각성은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의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거룩한 부르심 앞에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이전에 없던 특별한 열망이 경험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하는 소원입니다. 이것을 위한 그들의 소원은 너무나 강렬하고 이것을 위한 그들의 열망은 너무나 뜨겁게 타올라서 그의 생각과 사역과 온 삶을 지배해 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이처럼 모욕을 받으시는 현실 속에서 고통하지 않고 살아 있는지 스스로 의하해야 합니다.
(36:26)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현실을 보며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사라져 버린 교회의 영광스러운 말씀의 권세를 인하여 통합니다. 그들의 슬픔은 자신들이 살아숨쉬는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고 그들이 우는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이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십자가 아래로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아깝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소원은이 땅에서 무슨 자기의 비전을 이루고 목회에 성공하데 있지 아니합니다.
(36:58) 그들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만 그들의 궁극적인 열망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며 십자가에 나타난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목을 통해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 되기를 사모하는 열망입니다.이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아니한다면 자신들의 비정과 교회의 모든 목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너무나 강해서 그 시대를 향해 선지자처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불같은 언어로 하나님을 떠나버린 그 시대를 책망하지만 돌아서서는 제사정적 제사장적장적인 단원으로 가슴을 찢으며 제 위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회복을 영혼들의 구원을 간구하는 자입니다.
(37:32) 진정한 부흥은 이처럼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의 동기를 정화하여 줍니다. 살아 있는 이유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순수하고 열렬한 열망을 지닌 존재가 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기도 제목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장 9절 제자들에게 가르쳐 어 주신 첫 번째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하셨을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첫째로 드려야 할 간절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가장 간절한 열망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38:06)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 이것은 신앙 부흥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필요 충분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그분의 부르심에 대치할 수 없는 목표임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이 그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내가 스스로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내게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38:39) 이 이 말씀을 하시면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치심이 이러라. 요한복음 21장 15절로 19절. 베드로는 자신의 지난 날들을 회개하면서 자신의 존재 속에 주님만을 위하여 살이 있음을 세 번이나 간절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인 응답은 그가 띠우고 끌려가 죽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이 말씀을 하시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치심이로라. 요한복음 21장 19절. 주님의 관심은 당신을 사랑하는 베드로를 통해서 받으실 영광에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베드로로 하여금이 땅에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는데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39:16)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의이 예언대로 순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영혼을 춘사들이 받들어 올리던 날 하늘에는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려나고 주님은 베드로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하여 보좌에서 일어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당신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하여 위대한 부흥을 준비하시면서 당신의 진정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일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화의 능력.
(39:46) 그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부흥 속에 깃든 놀라운 정화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가련한 약점 중에 하나는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뭘 또한 나머지 맨 처음 그 일을 수행하여야 했던 원래 이유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점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쉽게 쳐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성김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김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처음에는 자기에 행하는 모든 봉사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다 있음을 느끼면서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이러한 분명한 섬김의 도전을 주었던 동기는 사라지고 성김은 단지 일로서만 존재하게 해야 됩니다.
(40:16)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섬으로써 복음의 진리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속적인 인식에 확장 없이 단지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순수한 섬김의 동기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의 순수함은 얼마나 훈련 받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였는가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훈련은 사람을 일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삶과 섬김의 동기를 정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언저리를 돌리는 도는 부도덕한 사역자들이나 중성을 다하지 아니하는 나태한 일꾼들이 무엇을 통해서 순결한 하나님의 종으로 진리의 생명을 건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다시 태어납니까?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40:54) 진리에 대한 경험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18세기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순해 설교자 조지 휘필드는이 일에 있어서 훌륭한 증인입니다. 그가 무어필즈와 켄닝턴 공원에서 설교하였을 때 그는 야비한 반대자들에게 썩은 달걀 세례를 받았습니다. 미쳐 옷을 닦아낼 수 없을 정도로 추척한 오물을 뒤집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저한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무어 빌지에 있을 때 켄닝턴의 공토에서 설교할 때 특히 썩은 달걀들이 비오듯 날아오고 미쳐 씻어낼 수 없을 정도로 저의 겉옷이 더럽게 되었을 때가 더 안락하였습니다.
(41:29) 그는 엑서터에서 받은 핍박을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엑서터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돌멩이 하나가 나라와 제이마를 때렸고 피가 흘렀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또 다른 돌에 맞아서 상처를 입은 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말씀이 갑절이나 능력 있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돌에 맞았지만 그가 더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러자 그 노동자도 제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제게 상처를 주었으나 예수님께서 저를 고쳐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서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가 이처럼 악한 박해를 받아야 했던 것은 그 자신이 복음적인 회심을 체험했고 그 교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2:04) 그는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사탄과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르고 속박의 영 아래 여러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험들을 겪고 난 후 일곱 주가 거의 지나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나의 무거운 죄짐을 벗겨 주셨으며 나로 하여금 그의 독생자를 살아 있는 신앙으로 붙들게 해 주셨으며 나를 양조로 삼으셔서 내가 겸손히 소망하는 것처럼 영원한 구원의 날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치셨다. 보십시오. 그가 회심의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당시에 저적하고 있는 회심의 교리를 목숨을 걸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42:38) 우리의 섬김 속에 교묘이 들어와 앉은 온갖 이기적인 욕심, 세속적인 욕망, 인간적인 바람과 같은 것들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헌신의 동기가 순수하게 정화되고 우리는 소명을 따라 죽고 사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부흥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만약 우리 조국 교회에 1907년에 평양대 부흥을 비롯한 그 시대에 크고 작은 부흥들이 없었다면 일제 시대와 공산 치하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도 이러한 부흥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움직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43:11)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잘 훈련된 사람으로서 산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이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삶과 섬김의 동기가 정화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부흥에 대한 경험이 일평생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보증을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들이고 부패한 성품에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패한 성품에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43:42)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도 바울도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베드로 사도 역시 육체의 정욕을 피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한 거룩한 긴장을 누추지 말도록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4장 2절. 그러나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이 일에 있어서 훌륭한 준비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가득한 물질주의와 번영주의적인 사고 방식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정결한 헌신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한 분의 사랑으로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조지비 빌드는 헌금을 잘 거두는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사악한 반대자들에게 그가 자신을 위하여 치부한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44:20)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은 제 제가 매우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가 대단한 부자인 줄 알고 어디어디에 30파운드를 갖다 두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고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살아 있습니다. 저는 칼리나 권총에 의하여 갑자기 죽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항의 비용을 위하여 일이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가 하늘나라에 있는 저의 형제들에게 가면 여러분은 제가 어떠한 정신으로 여러분을 섬겼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제가 행한 모든 모음이 오직 다른 이들을 위한 거처를 세우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44:5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이상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거의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게 말입니다. 부흥을 경험함으로써 자신과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으로 정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까지는 양심의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흥은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거룩한 소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그들의 성김의 동기를 정화시켜 주어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게 합니다. 부흥을 통해서 교회는 깨어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45:23)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때 성김에 있어서 세속적인 동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불붙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데 있으므로 어떤 이기심은 사라지고 복음 사역을 통해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채워버리는 그릇된 성김의 동기는 설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왜냐면 그들의 즐거움이 하나님의 기쁨에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의 의무
이 의미신장한 하나님께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또한 신앙 보훈과 헌신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에게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례적인 화법입니다.
(45:52)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단을 싸움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름받았을뿐 아니라 하나님께라는 표현을 통하여 단을 쌓는 것뿐 아니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삶의 초점을 다시 찾도록 부르고 계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만 바치는 헌신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베들에서 쌓는다는 그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단이어야 했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필요한 때가 되면 언제나 교회는 일꾼의 기근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 수진이 하락하면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자기 말을 위하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있었지만 순수한 부흥의 불이 꺼져갈 때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46:27) 이제 우리는 도시마다 저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고 이러한 세상의 정신은 잠들어 있는 교회들 속에 쉽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보다는 날카로 온 이해 관계가 지체들 사이에 더 높은 장벽을 쌓아갑니다. 그러나 부흥은 그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이타적으로 서로 섬기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부흥의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되고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로 47절. 오늘날 조국 교회 만년에 있는 개교회주의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 간에서도 멀어지는 파벌주의와 동지적인 사랑을 경험하기 힘든 사역의 현장은 대부분 자기 말을 위한 이기심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47:01)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상황은 영적인 각성을 통하여 하나님 한 분의 영광과 종귀함에 집중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기억나는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도다.이는 곧 11조와 헌물이라.
(47:30) 말라기 3장 7절로 8절.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그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헌신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는 이기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자신들은 변한 환경에 살면서 하나님의 정축하기를 충단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려고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만함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학계 선지자의 외침도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러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계에게 임하여 가라사되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서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48:04) 1장 2절로 5절. 하나님의 성전을 제건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단단하게 벽을 싸 지은 집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자는 황폐하게 버려 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기심을 통해서 그들은 스스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필요로 하는 영적 상황에 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740년에 뉴잉글랜드에서 제일 자대가성이 일어나자 무수한 평신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저도 종족의 눈을 뜨게 되었고 선교에 헌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부흥을 경험하게 되자 비로소 영혼의 가치에 대하여 눈 뜨게 된 것입니다.
(48:35) 오늘날 세계에서 실패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 식어진 우리들에게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집중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기도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당신께만 단을 쌓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을 당신 앞에 홀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이 모든 영적인 어두움 아래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야곱 한 사람에게 너는 땡땡땡이라고 부르시면서이 일을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절.이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스러운 각성과 영광스러운 부흥을 주실 때에 그 시작이 바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9:06) 이제는 우리들이이 조국 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부르심을 듣고 있습니다. 오직 그분이 영광받으시는 것만이 우리의 모든 삶과 섬김의 유일한 이유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섬김의 동기를 모든 세속적인 동기와 이기심으로부터 거듭나게 하시기를 구하며 우리 시대의 조국 교회가 영광스러운 각성을 경험하도록 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원수들과 싸우시고 쓰러진 우리의 깃발을 노도와 같이 밀러오는 대적들 앞에서 세워 주시기를 예원하여야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