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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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자.
벧엘로 올라가자.
거룩한 부흥 05 260102_191357
2026.01.29 목 오전 9:10 ・ 29분 41초
곽기욱
제5장 벧엘로 올라가자
부흥과 권위,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가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함에 창세기 35장 3절
교회의 진정한 권위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능력을 회복함으로 되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면 교회가 어떠한 원리 아래서 존재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성경적인 교리를 가진 교회는 그렇지 아니한 교회들보다 오류에 적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을 소유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실제로 누리는 영적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 약속과 진리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신앙적인 감격을 상실할 때 영적인 모든 일은 그저 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영적인 전쟁에서의 승리 없이도 세상과의 타협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정직하고 능력 있는 복음 선포 없이도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인 상태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것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일하고 감성적인 평화주의는 교회의 영성을 좀먹는 독소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가고자 하는 세상을 위하여 교회가 적절한 몫을 감당해 달라고 합니다. 교회는 거기에 야합하고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거룩한 소명을 뒤로한 채 교회를 미담이나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펑펑 우는 것보다는 한 점의 떡을 주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교회 자신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후자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교회는 그 이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 세상의 기관들은 모두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세운 기관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선엄적인, 즉 체험 이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설립이 명령된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설립의 기초부터 세상의 기관들과는 다를 뿐 아니라, 또한 그 존립 목적에 있어서도 세상의 다른 기관들과는 구별됩니다. 세상의 기관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존재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 자신이 존재의 목적일 수 없는데, 만약 우리가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중세 암흑기의 가톨릭 시대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한시적인 경륜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세상을 위하여 썩는 한알의 밀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지상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고 당신의 무궁한 나라를 세우시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섬김의 첫걸음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진리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안에서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들에게 주신 진리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복음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제시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갖게 하신 진리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게 하는 진리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자유를 잃어버리고 너희와 같이 살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진리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이러한 억압의 권세로부터의 이김과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처럼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해 주는 때는 없습니다.
부흥의 특징은 말씀을 권세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을 경험할 때 신자와 불신자들을 막론하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는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마가복음 1장 27절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이 소유하지 못한 어떤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비록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교회가 가진 그 진리가 자신들의 인생에 대하여 무엇인가 결정적인 증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알 때 자신들의 인생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16살에 애송이로서 설교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7살의 나이에는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되었던 찰스 스펄전의 목회 현장은 이러한 일에 훌륭한 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청교도였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부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19세기의 마지막 설교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영적 부흥의 영향 아래에서 강단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능한 설교자가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건축에 있어서 고등 양식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둥근 지붕 모양을 한 도식으로 지었습니다. 그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건물이 무엇 하는 곳입니까?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거기요?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랍니다.
진리의 선포,
교회가 단지 세상의 요구에 따라 봉사하는 것으로 남을 수만은 없는 것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진리로서 세상을 자유케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의 창조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잃었던 그들을 돌이켜 하나님과의 화목을 되찾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요구를 따라서 교회가 하는 행하는 일들 중에는 세상에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치 바로 앞에 선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서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고, 나일강 하수를 피로 변하게 할 때에 애굽의 술객들도 그것을 행하고, 모세의 지팡이를 잡은 아론이 개구리를 애굽 땅으로 무수히 올라오게 할 때에 애굽의 슬객들도 행할 수 있었던 것 같이 말입니다. 출애굽기 7장 11절, 22절, 8장 7절.
교회는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부름받았으며,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을 고치는 것인데, 그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단지 물질적인 결핍이나 불행한 상태 혹은 고통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미치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단정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생의 목표가 거기서 그친다면 그는 단지 잘 길들여진 짐승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하고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그 자체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죄를 피하거나 이기지 못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하게 살아가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지만, 착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의 그러한 모든 삶이 곧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도덕적인 삶이나 착한 행실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하거나 매우 적은 가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그의 인생을 고치고, 나아가 그런 섬김으로 세상을 고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의 외적 환경의 변화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에 인간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때 교회는 이 진리를 분명히 소유할 수 있으며 거기에 거룩한 권세가 깃들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능력과 권세로 굴복시킬 수 있고, 세상은 그렇게 진리 앞에 굴복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말싸움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힘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시지 않는 복음 전도는 교회 홍보에 그치기 쉽습니다. 이 모든 한계 상황을 이길 대안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거룩과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위탁해 주신 진리가 세상에 능력 있게 전파되게 하시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굴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 영적 권위를 회복하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난 후에 우선적으로 일어난 일을 살펴봄으로써 교회가 잃어버린 영적인 권위를 회복하는 일과 부흥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참다운 권위를 회복하는 방법으로서의 부흥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아울러 교회의 진정한 권위가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지도 알아봅시다.
야곱과 그의 집안에 영적인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야곱을 먼저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시각에서 그가 디나의 사건을 통해 당한 위기와 그것을 가져오게 했던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현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 결단을 자기 집 사람들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공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35장 2절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함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창세기 35장 2- 4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명하신 것은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받들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단순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 각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본문에서 비치는 야곱의 모습이 창세기 34장 마지막에서 보이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거기서 야곱의 모습은 꾸짖는 책망에 대해 자기 자식들까지도 되될 정도로 권위를 잃어버린 모습이었는데, 지금 여기서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 속에는 그런 나약함 대신에 어떤 영적인 권위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하의 본문에서 이런 그림을 봅니다. 드디어 그가 집안 식구들과 하인들까지 모조리 불러 모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결단이 서려 있습니다. 이전에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음을 그들도 알았습니다.
야곱이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하고 함께 벧엘로 올라갈 것을 명령합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떤 권위를 그에게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곱의 말에 순종하여 자신들이 오래도록 간직했던 우상과 단장품들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영적 권위를 잃어버린 설교단.
오늘날 우리 사회의 위기는 권위의 상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질서의 권위와 거룩한 직분에 대한 존중심의 상실, 나아가서는 말씀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회의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만연한 이 시대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교회 안의 풍토는 사회에 팽배한 반권위주의적인 분위기의 소산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도무지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인간의 이성이 제일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모든 권위를 인간의 자율에 대한 도전으로 봅니다.
오늘날 교회 사역 중 이러한 권위에 대한 회의 내지는 도전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는 것은 설교입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한 회의적 경향의 팽배는 이와 같은 시대 정신을 반영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설교학 분야의 책들을 살펴보십시오. 불행하게도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와 같은 설교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에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입니다.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설교학 교재가 서가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가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최상의 방편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의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설교자들조차 이 세상의 철학이나 사람들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 동의를 표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권위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에 자기의 사상이나 신학적 논리의 권위를 호소하는 것은 현대 지성에 못 미치는 초보적인 학문의 태도로 받아들여집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주의는 곧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직분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특별히 종교 개혁 이후 오늘날처럼 설교단이 권위를 상실해 버린 때도 없을 것입니다. 조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강단의 권위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한편으로는 비성경적인 제사적 접근이고, 또 한편으로는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라는 사실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구약의 제사장과 오늘날의 설교자들을 동일한 맥락에서 보는 신학적인 오해에 기인합니다. 오늘날 강단을 섬기는 사역자들에게는 구약의 제사장적 권한이 없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제사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하여졌고, 제사장의 직분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에게 제사장적인 성격이 있다면 단 하나, 양떼들의 아픔과 죄악을 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그들을 위해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제사장적인 탄원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설교자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의 옥체를 깨뜨려 하나님이 찢으신 휘장과 물과 피를 뿌리신 핏길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한편에서는 강단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회의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고 위대한 영적 각성의 물결 속에서 복스러운 부흥을 누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복종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0절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 중에 놀라운 회심에 관한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위대한 영적 각성의 현장 중앙에 있었던 설교단의 영광스러움을 말하면서 그들이 깊이 회심하였을 때 도시 전체에서 설교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교회에 있어서 설교단이 마땅히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이처럼 성경적인 내용이 부실한 설교와 영적인 권세가 느껴지지 않는 몸이 건조한 설교가 만연해 있는 것은 조국 교회가 얼마나 깊이 잠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제도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진리의 내용들에 대한 냉소주의는 오늘날 조국 교회가 얼마나 심각할 정도로 영적인 권위를 잃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흥으로 회복되는 말씀의 권위,
교회의 역사가 부흥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면, 부흥의 역사는 곧 설교자의 역사와 한맥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곧 걸출한 설교자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고 위대한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덮던 시대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종교개혁 시대 중 일부를 비롯하여 부흥이 있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매일 교회에 모였고, 설교는 2시간 내지 3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진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듣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고, 그들의 일상적인 직업 활동은 예배 시간을 기준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들은 설교단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광대한 복음의 선포를 들으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신령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설교자 스트라스부르의 요한 타울러는 이 같은 일의 한 증인입니다. 그는 중세의 에크하르트를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흔히 흔히 신비주의자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당시 그는 오히려 스승인 에크하르트에게서 볼 수 있었던 명상적인 요소를 버리고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에크하르트뿐 아니라 어거스틴 그레고리, 대제, 디오니시우스 안셀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자주 인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친숙했고, 설교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깊이 통찰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니콜라스로부터 의문의 메인 바리새인 같은 설교자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후일 그 비난이 정당함을 깨닫고 이틀 동안 설교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그가 훗날 다시 강단에 서서 마태복음 25장 6절 을 붙들고 설교할 때 50명의 사람이 죽은 자처럼 절도해버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아주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설교를 말씀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지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설교 내용에 책망하는 지적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세상을 향해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가 땅에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고 세상을 구원하는 유용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권세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복의 지름길은 설교단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결한 설교단 안에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의 차가운 논리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인간의 교만은 갯가의 포말같이 흩어져 버립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존 낙스가 설교자로 지명을 받을 때 임한 성령의 은혜도 역시 이러한 사실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산 개혁가답지 않게 설교자로서의 존스의 생애는 매우 소심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이고 신앙적인 견해 때문에 세인트 안드레 성에 은거하고 있는 작은 집단의 개혁자들과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섬기던 개혁자들 가운데 존 라프라는 매우 걸출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낙스를 설교자로 지명하는 자리에서 행한 설교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그대에게 이 사명을 맡긴다고 해서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대는 이 거룩한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며 그대의 형제들을 교화하여 나에게 위로가 되어 주어 그대는 내가 많은 노고에 시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바라건대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오.”
이 설교를 들은 존 낙스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이 엄숙한 명령에 온 영혼이 압도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떤 피할 수 없는 권위가 자기를 설교 사역계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되었고,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말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권능 있는 부르심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으면서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조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권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의 안목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영적 권위를 회복하고 권세 있는 복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교회 지도자들이 영적인 권위를 회복함으로써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앞둔 위기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만남
본문은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줍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새김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창세기 35장 4절 야곱의 지시를 받은 그의 집안 식구들은 위기를 풀어나가는 야곱의 신앙적인 결단을 따르기 위해 모든 우상들과 단장품들을 제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존 스키너라는 구약학자는 본문에 나오는 귀에 있는 고리는 부적과 같이 미신적인 행위에 쓰여지는 물품으로써 이교적인 예배에 사용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집안의 영적 타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 결단하는 야곱의 지시에 따라 온 가족들이 순종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은 집 안에서 가지고 나온 큰 우상들과 자신이 휴대하고 있던 작은 우상들뿐만 아니라 귀고리까지 모두 가지고 나와서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들을 받으면서 야곱은 그동안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상수리 나무 아래 땅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혼합주의적인 신앙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식구들은 오직 야곱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혼란 가운데서 그토록 부산을 떨던 그의 자녀들도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들이 디나의 혼사 문제를 두고 새겸 사람들과 대화로 흥정하는 장면을 미루어 볼 때 그들에게 신앙은 없었지만 아버지를 뺨치는 모사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벧엘로 올라가자고 명령하는 야곱의 선포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입니다.
도대체 디나의 사건을 담고 있는 본문 바로 앞장의 마지막과 벧엘로 올라가자는 야곱의 권위 있는 선포를 기록하고 있는 본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처럼 야곱이 다른 모습이 되어 권위를 가지고 자기의 가족들의 갈 바를 지시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내가 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장 1절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0여 년 만에 말입니다. 그는 세계에 안착한 이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까지 영적인 암흑 길을 지났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셨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명령과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는 단순한 말씀은 그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모든 대안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처럼 영적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에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원천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특성은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을 맺고 있는 한 거룩한 것이며, 우리의 모든 도덕적인 삶이나 경건한 특성도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지식의 뿌리를 받고 있을 때에만 권위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10여 년 이상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과의 약속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현실과 타협한 안일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선택받은 거룩한 족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 대한 영적인 감화력을 잃어버렸고, 자식들에게조차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결단하게 되자 그의 족장으로서의 영적인 권위는 회복되었고, 선택받은 백성들의 모체가 될 자기 가족들을 이끌어갈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부흥을 향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교회가 권위를 회복하는 길.
오늘날 조국 교회의 가장 시급한 것은 교회가 구원의 진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신적 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신앙적인 권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영적 지도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권위를 회복한다는 것이고, 핵심적으로는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권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증언과 삶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의 참된 권위는 자신이 진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권위를 회복하고 사람들이 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의 불행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