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으로 다시 정체성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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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으로 다시 정체성을 묻다.
팔복으로 다시 정체성을 묻다.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2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이 세상이 말하는 복과 전혀다른 팔복으로 제자들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팔복을 설교하신 시점과 이 팔복이 쓰여진 시점은 아주 많이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주후80-90년경에 쓰여졌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보다 더 늦게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제자들이 당시에는 이 설교를 기록해야 겠다라고 생각을 못했겠죠. 그저 자신들의 삶의 대한 고민이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마이클버드, 엔티라이트가 신약성경과 그 세계라는 책에서 고증하듯이 예수님시대, 1세기 유대땅은 로마의 “팍스로마나”제국주의식 평화가 진행중인 때였습니다. 기원전27년부터 아우렐리우스 죽은 180년까지 거의 200년가까이 팍스로마나, 즉 제국적 평화시기였던 것입니다.
이 팍스로마나, 제국적평화는 전쟁이 없고 우리가 아는 평화가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힘으로 모든 적들이 패배하여 저항 할 힘을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진정한 평화라고 말 할 수 없겠죠. 오히려 힘에 굴복당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억지스러운 평화상태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식민시민으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로마의 가치관인 힘과 명예, 부와는 거리가 먼, 한마디로 전혀 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나마 복이라고 한다면 황제의 은덕을 받아서 세금을 감면 받거나, 권력자 옆에서 수종을 들며 안전을 보장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복을 선언합니다. 이 팔복은 다가올 복이 아니라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예수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이제 50-60년정도를 지나갑시다.
흩어져 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의 공동체 중에 마태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왜 마태공동체는 시간이 한참 흐르고나서야 마태복음서를 쓰고 이 팔복을 기록했을까요.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혁명적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곧 종말이 오고 이 어둠의 세계가 끝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굳이 당시 성경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1세대 제자들이 이제 나이가 들고 순교하기 시작합니다. 주후 70년경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버립니다. 당시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교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회당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생긴것입니다. 바로 온 유대교를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던 예루살렘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사라지면서 유대공동체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던 제자공동체들은 서서히 회당 중심의 유대교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제 :경계 밖의 사람들이 되어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제자공동체는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더이상 위로가 되지 못했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태공동체에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우리가 예수를 따르며 살아온 이 길은 과연 옳은 길인가?
우리는 왜 시간이 갈수록 삶은 더 어려워지는가?
이 질문앞에서 마태는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현재를 다시 붙들기위해서 복음서의 중앙에 예수님의 가장 길고 핵심적인 가르침인 산상수훈놓고 그 첫시작에 팔복을 배치합니다.
팔복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 있을때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여전히 예수의 세계관이 무엇을 제자들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지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누가 복된 사람인가? 이 기준에 따라 제자들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실패가 아니라 삶자체가 증거가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눈총받는 삶이 바로 예수께서 복이라 말한 삶이라고 믿게 됩니다.
팔복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복의 기준이 흐려진 이때에 적용이 되며 공동체가 흔들릴때마다 돌아가야 할 출발점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계신 저 언덕으로 우리도 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호명은 절대적인 결핍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5:3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자, 여기서 가난은 조금 부족하고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프토코스”라는 말로 절대적인 가난. 타인의 자비가 없이는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절대빈곤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고 시장에서 외면당해서 늘 텅빈 주머니와 텅빈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d.a카슨이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파산을 인정하는 상태”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주어진 상황과 상관없이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2. 마태복음 5:4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두번째 호명한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슬퍼하다. 애통하다의 의미를 가진 “펜테오”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때 터져 나오는 통곡입니다. 마태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로 가족과 갈라져야 했고, 동족에게 침 빝음을 당하고,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슬픔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갈등했을것입니다.
주님은 이 눈물을 복되다 하시고 주님이 위로해 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날은 능력주의 사회입니다. 파산당한 청년, 자영업자, 어려운 이웃들의 애통을 세상은 무시합니다.
주님은 오히려 “세상이 너를 실패자라 부를때 나는 너를 내 나라의 백성이라 부를것이다”말씀합니다.
이 슬픔에 우리도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두번째 호명은 정의를 향한 굶주림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5:5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복음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을 타인과 사회로 돌리게 하십니다.
로마의 군화앞에서 온유함은 바보같은 짓입니다. 온유하다는 의미는 연약하고 힘이 없어서 그냥 착한 심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힘있고 무언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힘이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길들여진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하나님의 통치에 길들여진 힘”입니다. 내 힘을 과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신뢰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주장할 힘이 있지만 끌려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태공동체와 오늘 우리가 경쟁과 비교, 폭력의 한 복판에서도 세상처럼 날카로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부탁입니다. 온유함으로도 충분하다라고 말이지요.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때, 큰소리치며 감정을 쏟지 않고 정직하게 차분하게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생존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 목숨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미가 6:8 “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사에서 불합리한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침묵하면 아무일 없습니다. 말을하게 되면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의에 굶주린 사람은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해도 의를 향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호명은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공동체의 얼굴입니다.
마태복음 5:7–9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자비, 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고통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방향성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완벽함이 아니라 복잡하지 않은 아주 단순한 한 마음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갈등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회복을 위해 기꺼이 상처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를 따지지 않고 함께 가야 할 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지막 팔복은 박해로 끝이 납니다.
마태복음 5:10–12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하나님의 의, “디카이오수네” 법적인 올바름을 넘어 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자 사회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더글라스 하링크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다보면 세상의 질서,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스토트목사는 이것을 크리스챤 카운트 컬쳐, 기독교적 반문화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시대를 초월해서 박해받는것이 당연합니다. 박해받지 않고 있다면 이미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었든지 아니면 우리가 세상에 굴복을 했던지 둘중 하나입니다.
마태공동체가 왜 이 설교에 주목했는지 좀 감이 오시죠.
마태공동체는 유대공동체로부터 배척당했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반체제 세력으로 감시받았습니다.
마태복음을 받아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격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소외된 이유는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너희가 이미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8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팔복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이미 제자들도 마태공동체도 우리도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보고 이렇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예수 세계관으로 살게 되면 그냥 이렇게 살게 돼 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선언하신것은 이것이 “예수의 세계관”이다 라고 말해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세계관의 사람이야.
남들보다 앞서지 못해 애통합니까? 주님을 위해 애통하십시다. 내 권리를 챙기지 못해 억울합니까.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