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그리고 부르심(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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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1:1–5 NKRV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찬송가:496장, 새벽부터 우리
John 1:35–51 NKRV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전형상화 (말씀)
요한복음 (공관복음 ,마태 /마가/누가), 영적인 관점으로 기록한 복음서, 기록년대 80년대 중후반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이 작성함. ( 사두개인이 등장하지 않음- 성전소멸, 이스라엘의 멸망후)
마태복음의 시작은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인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이야기 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혈통은 생략하고 예수님의 신적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면서 시작하죠! 막1: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또한, 누가복음은 로마의 역사적인 정황을 의식하여 예수의 출생과 아담까지 포괄하는 예수의 가계도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2)요한복음은 오늘 본문과 같이, 공관복음이 취하는 역사적인 서술 방법과는 달리 시간 이전의 태초라는 관점에서 이야기의 진술이 시작됩니다. 이는 (3)귀납법적 방법이 아니라 연역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의 핵심은 1장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4)공관복음은 갈릴리 사역 중심이라면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하였고 유월절에 대한 3번의 언급은 요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말씀으로 이해하고 말씀을 복음서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의미중심의 역사관 때문입니다. 시간의 역사가 가시적인 인간중심적 역사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말씀 중심적인 역사라고 요한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3절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선언 합니다
창세기를 큐티 하다가 뜸금 없이 요한 복음으로 넘어 온것이 아닙니다. 창조와 새창조, 그 사이 타락이 있고 앞으로 그려질 구속의 성취가(십자가) 가 있습니다. 그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창조된 세상을 죄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우주를 구원 하기 위해서 창조의 말씀, 본질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땅에 오십니다. 요한은 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1–2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3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12장 표적의 책, 13-21장 수난과 승리의 책으로 구성됩니다.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목적)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12제자중 5명이 나온다. (안드레,요한, 베드로, 빌립,나다나엘) 그리고 중요한 동사 ‘보라,보다’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에이돈’ 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것을 보는 것이지요~~
민수기 21장8-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빛과 어둠의 관계, 그래서 사용 하신 세례자 요한 (저와 여러분 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마치시고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님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형상화(현실)
현대사회는 자기주도의 시대라고 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바로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은 나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문제를 당신이 해결하시고 청구서를 우리에게 내미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불순종과 반역의 죄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의 근원과 채어지지 않는 허무함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이 믿어지든 믿어지지 않던 이것은 진리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와서 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그 초대에 순종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46절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사실 기독교는 보는것이 전부 입니다. 언제부터 말로 다 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성경은 삶의 의미가 어떤 추상적 합리체계가 아니라 한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그 인격체는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한 인간 예수를 말합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 한 인격체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은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다나엘은 그분의 초대에 이렇게 최악으로 반응 합니다. 나사렛?그 후진 동네에서 그리스도라고? 지금으로 실감나게 말하면 ‘초졸에게 대입과외’를 받으라는 말처럼 어이없다는 반응이 아닐까요? 용인에서 무슨 사람이 있다고?여러분 그런데 나다나엘도 보면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거죠! 그런데 무시를 합니다. 멸시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도 멸시할 사람을 찾습니다. 나사렛은 그렇게 낙후된 곳입니다. 옳고 똑똑한 부류에게 당신도 그들 편이라고 신호를 보내려면, 그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이나 지역이 언급될 때 함께 조롱의 눈빛을 보내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눈에 유능하고 똑똑하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정체감은 정중하고 탄탄한 논증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를 통해 얻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갈릴리에 유력한 자들의 시선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사렛을 무시하고 조롱의 시선으로 본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세상에 이런 시선으로 보여 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사렛’이라고 불려집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면 내가 이미 경험해 봐서 아는데 너무 뻔해! 이러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나 버리거나 아니면 심하게 조롱을 합니다.기독교가 그저 구식이거나 지적으로 세련되지 못하다는 생각에 속아 기독교에 담긴 진정한 보화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우리는 우리의 교만과 편견을 늘 주위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나다나엘은 그 내면 깊은 곳에 영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빌립의 와서 보라는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믿을 만한 증거를 조금 보여 주시자 즉각 충성의 대상으로 받아 들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욕구를 채워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고 다가오는 상대방에게 예수님은 온유함으로 대하십니다. 그의 좋지 못한 태도속에서도 그의 마음 중심을 보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의 대단한 점은 49절에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실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모두 알아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다나엘의 이 고백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사역의 시작 시점에서부터 성육신 하신 당신의 목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케 하십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재형상화(적용)
팀 캘러 목사님의 책 “인생질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라는 스코틀랜드 기독교 윤리학자이자 도덕 철학자는 그의 유명한 저서 [덕의 상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의 존재 목적을 모르고 서는 그 사물의 좋고 나쁨을 결코 분간할 수 없다”예컨대 시계가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입니다. 시계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시계로 못을 박으려다가 망가지면 ‘나쁜 시계’라고 불평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계의 목적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인간에도 적용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지 모르고서 어떻게 특정인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에게 삶의 목적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선악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1문이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웨스터민스트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인 무엇인가? 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규정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내어 주시고 이르시되 요20: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선언 하신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14절은 증언 합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가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사랑하고 보고 또 봅시다. .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신 말씀을 즐거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 갑시다.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탁월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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