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러리의 기쁨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제목: 들러리의 기쁨
본문: 요3:22-30
[서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조연’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잠든 새벽을 깨우는 환경미화원분들, 현관 앞까지 물건을 배달해주시는 기사님들, 건물의 안전을 지키는 경비원분들,
이 분들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빛나는 침묵의 조연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생 ‘주연’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주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거대한 조직의 부품 하나처럼 느껴지는 ‘조연’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 두가지 역할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늘 1등과 주연에게만 환호하지만, 정작 주연이 빛나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연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마라톤의 페이스 메이커나 골프의 캐디, 연주회의 반주자가 없으면 기록도, 감동도 완성될수 없습니다.
스포츠계에는 아주 유명한 조연이 한명 있습니다.
바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캐디인 스티브 윌리엄스입니다.
그가 우즈의 옆을 지키는 동안 우즈는 15번의 메이저 대회 중 13번을 우승했습니다.
얼마나 그의 영향력이 컸던지 방송사에서 우즈가 아닌 캐디인 그를 따로 인터뷰할 정도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입니다.
우즈와 결별한 그가 애덤 스콧이라는 선수의 캐디가 됩니다.
그 후 우즈는 슬럼프에 빠졌고, 윌리엄스가 새롭게 맡은 애덤 스콧은 마스터스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윌리엄스는 단순히 골프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연의 능력을 극대화해주는 결정적인 조연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연이 등장합니다.
바로 침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과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그 분을 위해 기꺼이 무대 뒤로 사라지기를 자처한 조연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열등감이 아닌 기쁨으로 조연의 자리를 지켰던 요한의 삶을 통해 주인공을 빛내며 살아가는 조연들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1]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린 시절 연극을 해도 왕자나 공주가 되고 싶지, 뒤에 서있는 나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주연의 자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조연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직장에서는 마치 큰 기계의 작은 부속품 하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있으나 없으나 회사는 별 상관없겠지”하는 허무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집에서조차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때 더 서글퍼 집니다.
“그냥 나는 남을 빛내 주기 위해 사는 들러리 인생인가?”
“이런 삶도 가치있는 인생이라고 말할수 있나?”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상은 주인공이 되어야 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끊임없이 부추기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침례 요한은 어떨까요?
이 사람은 원래 독보적인 주인공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대 지역에서 ‘슈퍼 스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줄을 지어 사람들이 그에게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26절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 분이 침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협력자’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입니다.
그 불안함은 곧 양 진영의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25절에 ‘씻는 예법’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침례 요한과 예수님중 누가 원조이고, 누가 정통인지, 누가 더 급이 높은지 다툰 것입니다.
자존심 싸움을 벌인 것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봉사하신 훌륭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어느날 세상적으로 유능하고 열정적인 새가족이 들어옵니다.
그 분이 교회에서 점차 주목받기 시작하고, 심지어 중요한 직분까지 맡게 될때 어떨까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분의 마음은 서운함과 배신감이 들수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헌신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비교와 경쟁이라는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침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27절입니다.
“침례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은 자기 인생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얻었던 인기와 명성도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잠시 맡겨주신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도 뺏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침례 요한이 자신의 자리가 자신이 애써 얻은 것이라고 여겼다면 그 역시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질투의 늪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서글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능력, 내 지위가 모두 내가 이룬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니까 빼앗겼다고 여기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님이 내게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비교와 경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늪에 빠져있으면 잘 안되면 주눅들고, 잘되도 불안해집니다.
어느 방향이든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또한 내가 조연의 자리에 있는 것이 반드시 무능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살았어도 조연의 자리일수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에서 내가 조연으로서 해야할 일이 있는 것 뿐입니다.
내게 주신 건강, 재능, 직분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할때, 우리는 비로소 빛나는 조연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도 인생의 무대에서 조연으로 밀려난 것같은 생각이 드십니까?
그럴때 우리는 침례 요한의 고백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모든 역할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우리의 마음가짐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조연이니까 참아야지하며 억지로 버티는 게 아닙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연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쁨에 눈을 떠야 합니다.
[본론2]
우리가 조연의 자리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감정은 ‘허탈함’입니다.
열심히 누군가의 일을 도왔는데, 정작 일이 잘되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위해 평생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었는데 자녀가 성공한뒤 달라진다면 어떨까요?
“엄마가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라고 따진다면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겠습니까?
회사에서 궂은 일은 내가 다 했는데 칭찬받고 승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특별한 비유를 들려줍니다.
29절입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식에서 신랑의 친구는 오늘날 들러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친한 두 친구가 들리러를 섰습니다.
그들은 결혼의 증인 역할을 하며 결혼식이 잘 진행되도록 모든 과정을 도왔습니다.
특히 혼인 첫날밤에 신랑을 신부에게 안내하고, 그 신방 밖에서 첫날밤을 마친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랑이 주인공이고 친구는 들러리, 조연입니다.
친구는 신부를 차지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행복해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들러리는 침례 요한입니다.
이처럼 침례요한은 주인공인 예수님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타이거 우즈의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자신이 직접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않습니다.
상금도 우즈가 90프로 자신은 10프로를 가져갈 뿐입니다.
하지만 우즈가 우승하고 환호하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캐디입니다.
왜 일까요?
주인공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내 삶의 무대에서 내가 박수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통해 절망하던 누군가 위로를 얻는다면 의미있지 않을까요?
나를 통해 우리 교회가 평안해진다면 어떨까요?
나를 통해 예수님이 좀 더 알려질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조연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아닐까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이런 조연의 기쁨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놀라고,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조연이지만 기뻐할수 있는 비밀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가 조연이 되어야 한다고 허탈해하거나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이미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소리가 들릴 때, 주님의 들러리로서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론3]
내가 누리는 것들이 주님께 온 것임을 인정하고, 조연의 기쁨을 누릴수 있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조연 영성의 정점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 증명’을 요구합니다.
자기 계발에 몰두하고, 목표를 끊임없이 이루어나가도록 닥달합니다.
그래서 내가 작아지는 것, 내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조연의 자리에 머무는 것을 넘어 그 자리마저 내어주고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한다면 어떨까요?
마치 사형선고처럼 여길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더 작아지면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거 아닐까?”
이런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고백 하나를 남깁니다.
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단순히 조연의 자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을 위해 완전히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는 것입니다.
작아져 아에 없어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전도사 시절, 해외 선교를 가서 마음이 깊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교팀 모두가 멋진 춤 공연을 준비하는데, 당시 목사님이 저만 쏙 빼놓으셨습ㄴ다.
제가 춤을 못춘다는 이유였습니다.
명색이 전도사인데, 다른 대원들이 땀흘리며 연습할 때 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옆 방에 홀로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며 제 마음은 몹시 상했습니다.
그 춤을 통해 사람들이 전도되는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내가 무시당했고, 내 존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괴로움만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교를 갔지만, 결국 ‘나’라는 주연 배우가 무대에서 퇴장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름답지 못한 퇴장을 자주 봅니다.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주신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설교를 너무 잘하셔서 설교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최근에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셨습니다.
자신이 세운 교회 원로목사로 계시면서 너무 목소리를 많이 내셨습니다.
원로목사는 담임목사에게 자리를 내주고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점점 작아져서 사라져야 예수님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커지십니다.
우리가 비워진 만큼 그 자리를 주님이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흥하면 주님은 가려지고, 내가 쇠하면 주님은 드러나십니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향해 ‘루저’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작아지는 그 때가 바로 주님이 흥하실 때입니다.
그것이 조연 영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입니다.
셋째, 내가 작아질 때 주님이 커지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빈 자리에서 주님은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우리는 새벽을 여는 환경미화원, 배송기사님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은 잘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야 말로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필수적인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단 한분의 주인공,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받은 아름다운 조연들입니다.
침례 요한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에 자신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순간에도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 우주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조연이 되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낮고 작은 자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했던 요한의 고백처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쇠하여 지다 못해 죽으신 주님의 그 비움 덕분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들러리의 영성, 기쁨을 바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낮아지고 작아지려고 할 때 주님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해볼만한 일입니다.
이번주 직장 동료나 친구가 나보다 더 잘 될때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아무도 보지 않고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섬겨 보십시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여겨주실 것입니다.
그런 우리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