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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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흥 8장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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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거룩한 부흥 제 8장 진리를 아는 지식 부흥과 지식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창세기 35장 11절 12절 이처럼 부흥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주어 그 지식의 빛 아래 그 지식에 붙들려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약속이 깃든 이름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베들로 올라가도록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들은 것이 야곱의 영적 각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베들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부흥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시기 위하여 베들에 오신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라는 말을 겪고 있습니다.
(00:39)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내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내 이름이 되리라 하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세기 35장 9절 본을 대할 때 좀 이상한 느낌이 않 이스라엘로 개명된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형인 에서를 만나게 앞서 복당 가에서 사와 시름하자가 한가되는 징계를 받은 후 통곡하며 회개한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 비었기 32장 25절 호세야 12장 3절 4절이 사건은 지금 야곱이 베드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시간적으로 최소한 10년 가까운 생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01:21) 따라서이 사건은 계명 사건이 아니라 이미된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상기시켜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하신 일은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임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 이스라엘. 그 이름은 하나님이 야곱과 맺으신 언약의 이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다시 만나는이 부흥의 현장에서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계명 사건을 반복하듯이 되풀이하셨을까요? 이것은 어떤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앞에 사건의 전설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계명된 이름을 상기시켜 주심으로써 그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01:55)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그와 특별히 언약을 맺으셨던 분에서의 계명 사건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 세계에서 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던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창세기 33장 20절. 그는 자기의 신앙 고백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새롭게 계명해 주신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약속이 깃든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런 그림들이 깃뜨려 있었습니다. 장남이 못되고 동생으로서 무능한 형 밑에 태어난 찾아 컴플렉스와 아버지를 속여 취한 축보 그로 인하여 사랑하는 어머니와 생리별를 하고 헤어져 도망가야 하는 비극 바다 나람에서의 그 극심한 고생 형의 보복이 두려워 홀로 밤을 밝혀야 했던 야복강 강변에서의 위기 상황 등이었습니다.
(02:41) 그러나 나쁜 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통하고 그분의 긍휼히 여기심을 얻음으로써 이제 이런 일은 다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명해 주신 것은 그 니다.이 사건을 통하여은 하나님과 새로운 독한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처럼 아름다운 언약이들에서 하나님이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신까지 쳐진 명분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은 이처럼 쳐집니다.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고 영적인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산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오늘날 전도가 잘되지 않는 가장 하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참된 기쁨을 보여주님의지를 받아 들는에 대하여 같 사람들이 즐겨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03:31) 그것은 그것이 도움이 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미친듯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왕국을 자기의 백성들을 통하여 확장해 가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회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일들 중 어떤 일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기독교적인 삶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기독교인들은 불행하고 슬프며 병적이며 기쁨이 억제된 고생스러운 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그런 영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영적인 침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정체성을 잃은 채 살아가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04:06)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인지를 말해도 실제로 세상에서 부데끼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삶 속에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파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과 하나님의 백성된 축복으로부터 먼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이는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빌던 그 기도를 우리는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론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04:54) 에베소서 1장 17절로 19절.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새롭게 계시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야곱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야곱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비록 세계 땅에서 이방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왔지만 거기서 일생을 마칠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그분을이 세상에 알려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세계 사람들과 올려 물건이나 매매하고 목중이나 하면서 세상적인 안락이나 본영을 주구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05:24) 이것이 바로 베들에서 다시금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 주셨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계 땅에서의 안락한 삶이 좋아서 하나님을 잊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처럼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 주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습니까? 그것은 야곱과 그 집안 치구들이 같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위롭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참된 부흥은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보여주고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은 언약 관계에 기초합니다.
(05:55) 부흥만큼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긍휼과 은혜를 풍성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은혜와 긍휼를 쏟아 부어 주시고 교회는 비로소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이 이 점을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가 현조하게 부각되지 않고도 부흥이 일어난 적은 없다.이 교리는 우리의 선함이나 선행, 도덕성이나 행위의 의로움에 대한 모든 관념의 종식을 구하는 것이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라. 그러면 사람들이 절망감을 가졌던 것을 발견할 것이다.
(06:22) 그들의 모든 선이라는 것이 누의 옷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모든 의가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들은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갈망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쉽게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녀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부흥을 주십니다. 따라서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보여주는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마땅히 되어야 할 자기 존재와 현실적으로 있는 자신의 존재 사이에서 고민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부흥에 대한 갈망은 이러한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06:54) 엘샤다이 하나님 야곱은 베들에서 다시 만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는 사건을 통하여서 여호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진리를 깊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롭게 주어진 엘샤다이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러한 언약 관계를 상기시키신 후 그에게 평생 잊혀질 수 없는 위대한 경험을 하게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다시 한번 새롭게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내게서 나고 왕들이 내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내게 주고 내가 내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세기 35장 11절 12절.
(07:34) 주님은 이전에 베들에서도 나타나셨고 또 분일에서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언약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들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그 부흥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 모든 체험들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내용에 있어서도 이전에 베들에서 있었던 것보다 더욱 발전된 것입니다. 이전에 베들에서 만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은 땅을 내가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니 내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선남복에 편만할지며 땅에 모든 족속이 너와 내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08:07)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18장 13절로 15절. 그리고 그것을 지금 우리들이 주목하고 있는 다시 베들에서 만난 하나님이 주신 언약과 비교해 보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내게서 나하고 왕들이 내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내게 주고 내가 내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세기 35장 11절 12절. 보다시피 호자의 언약은 앞에 언약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시킨 것입니다.
(08:43)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이 댓글같이 되게 하시겠다는 언약은 국민과 많은 국민이 내게서 나하고 왕들이 내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약속으로 구체적인 발전을 보게 됩니다. 언약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여자의 후손에서 약속의 시, 선택된 백성, 세우실 왕, 다윗의 후손, 메시아, 영적 왕국,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한 마디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확장의 전환점을 이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이 엘샤다이의 정확한 의에 대해서는 각자들 간에도 해석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09:15)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우리말 성경이 이것을 그대로 엘샤다이라고 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엘시아다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한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는 엘샤다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샤다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확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엘르샤다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혹은 충족하신 하나님, 자충하신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모두이 단어를 전능하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이러한 번역들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경험한 부흥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열시하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09:53) 그리고 그러한 계시의 체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러한 지식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들에서 경험한 부흥을 통하여 야곱이 겪게 되는 중대한 신앙적인 변화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진리에 대한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야, 야곱이 자기 형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파죽 한 그릇으로 사려고 마음을 먹을 때부터 그의 삶의 모든 비극은 실로이 진리 곧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출생 전부터 형보다 큰 자로서 형의 섬김을 받을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약속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붙들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바다 아람으로 가는 길 베들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던 때에 서운하는 야곱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세기 28장 20절 21절 베들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각성을 경험하기 전 디나의 사건을 만나는 역경에서도 그의 이러한 불신앙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10:58) 창세기 34장 30절. 그는 가나안에 들어오기 직전 분위에 대해서 천사와 겨루워 징계를 받고 울며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형에서 서로부터 보복되신 따뜻한 영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하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여호와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이방 문화에 물든 채 유일 신신앙을 잃어버린 것도 결국은 이러한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베들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신앙의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11:29) 그는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당사자이신 여호와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경쟁적인 기복 신앙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그의 신앙에는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진리의 인격적인 체험 부흥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이이 점에 있어서 요점을 법핏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부흥의 시기에는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와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특이한 청사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부흥의 핵심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을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의 필요 이상으로 집착합니다.
(12:02) 그리고 그 이러한 빛나간 종교적 심리가 마귀에게 이용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특이한 영적인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에 조장 없이 이단이 성공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신비한 체험이나 이적적인 형상을 가지고 자신의 가르침이 정당하다는 방식으로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고 그분이 어떤 분인신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의 터분과 사귀는 것입니다. 그 교재를 통하여 우리의 전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2:32) 오늘날 우리는 차가운 정통이 아니면 쓸모 없이 뜨거운 성령 운동 중 하나를 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무지와 공공함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지에 기인합니다. 지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추구점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작 중요한 일에는 마음을 바치지 못하는 대신 쓸모 없고 사소한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진리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합니까? 우리가 진리를 합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경험들이 있습니까? 그 진리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까?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더 거룩한 교재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인격적인 체험을 경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3:13) 체험에는 확실히 위험한 요소가 도살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더구나 그것들이 주관적인 활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객관화되어 사람들에게 지시될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체험이 진리 안에 있는 것인지를 가음할 수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이러한 체험들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물론 우리의 체험도 정확하게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기만 하면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 주소를 판단하고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데 있어서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이게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영적인 각성을 통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3:45) 이것은 단순히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 의식으로 인한 압도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영혼의 깊은 고뇌를 경험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커다란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깨닫고 자신의 위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반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들은 죄의식 속에서 절망적으로 힘치는 영혼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면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자라는 한 포기의 들풀이 너무나 부러웠다. 이러한 체험은 좀 본연의 생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14:13) 그는 안수도 받지 아니한 평신도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땜쟁이 권연이었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존 오엔으로 하여금 저 사람처럼 설교할 수 있다면 박사하기를 모두 주고도 바꾸고 싶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말을 라이 없이 부흥이 가져다 준 설교의 능력이었습니다. 조은 뻔녀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각성한 뒤 거의 1년 반 동안 극심한 죄의식 속에서 고통하면서 차라리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였으며 심지어 들판에서 먹이로 찾고 있는 기러기의 처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는 극심한 지식으로 인하여 처살하려고 베드포드 강으로 뛰어들기도 하였습니다.
(14:44) 그는 자기가 쓴 죄인들 중 그리스에게 넘치는 은혜에서 열심히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 주음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나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경건에 관한 책들을 읽을 낳치면 그것들은 내게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셨다. 제발 나를 떠나 주세요. 나는 나를 인도하실 당신의 길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전국과 지옥이 동시에 나의 마음에 교차하였으며 이것들은 내게 있어서 구원과 저주의 최소한이었다.
(15:14)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신앙은 인체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은 뼈대와 같고 체험은 살과 같다. 그래서 지식만 가득하고 체험이 없으면 뼈만 항상한 사람과 같고 체험만 있고 성경 지식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뼈 없는 전체 동물과 같다고 말입니다. 진리 인식의 확장 창세기를 계속해서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야곱이 부흥을 통하여 깨닫게 된 진리.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진리에 대한 앎이 그 후로도 계속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야곱이 부흥을 알게 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 인식이 이후에 그의 삶을 계속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15:49) 첫째로 요셉이 자기가 꿈 꿈을 인하여 형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에 광경을 지켜보던 야곱의 모습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함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천컨데 나의 꿈을 들으시오. 내가 밭에서 곡식단을 먹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구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 즉 해와 탈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병에게 고함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꿈이 무엇이냐 나와 내 모와 내 형제들이 잠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창세기 37장 5절부터 11절 그의 꿈을 인하여 야곱은 자기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책망하였습니다.
(16:37) 그러나 그것은 짐짓 그리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도저히 현실로 이루어지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분이 전능하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그 황당한 예언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가나안의 기근이 들었을 때에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올려 보내면서 남긴 고백입니다. 내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이르리로다. 창세기 43장 13절 14절. 그는 요셉과 베냐민을 못이나 사랑했습니다.
(17:07) 요셉은 없어졌고 이제 남은 베냐민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베냐민과의 이별을 앞두고 늙은 야곱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자기의 아들에 대한 처분을 맡기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잘 사용하던 인간적인 방법을 리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대신의 말입니다. 셋째로 그가 야 애굽에서 공무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을 받고 그것으로 가리는 때에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앞이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느니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되 나는 하나님이라 내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령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내 눈을 감기리라 야곱과 그 사손들이 다 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창세기 46장 1절로 6절 그는 꿈에도 그리던 요셉을 만나기 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내
(17:59) 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내 조상의 땅 내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창세기 31장 3절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자신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임종할 때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창세기 48장 21절 그는 죽음에서도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하신 땅에 있었습니다.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이 자기의 후손들을 그 신실하신 언약을 따라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18:33) 자신은 그 일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심으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도록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지성과 감성의 진자 운동. 교회의 역사는 신앙에 있어서 지성을 중시하는 경향과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진자 운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중심축으로 시작해서 신학과 이지와 교리를 중시하는 경향과 신비한 재형과 생명력 있는 신적 교재를 중시하는 경향이 시계 주처럼 진자 운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생명력 있는 성령의 불길이 식어가고 로마 제국의 사상 박해에 대한 대안으로 많은 편증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 교회는 생명이 시어가고 이에 대하여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몬타누스 운동이었습니다.
(19:07) 조세기 중협에 시작된이 운동은 극단적인 신비 체험과 열적 그리고 감성을 중시한 운동이었습니다. 몬타누스 자신을 통해서 보회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교리를 내세운 대표적인 이단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이 운동은 얼마 못 가서 세퇴하였고 이번에는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지성주의의 이단을 불러 주었습니다. 교회는 주후 2, 3세기 동안에 인간의 구원을 지식에 둘 정도로 이성을 중시하는 영지주의라는 커다란 이당과 마주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신앙에 있어서 수도와 개인의 체험, 열정, 감성, 내적 광명 등을 중시하는 수도원주의로 흐르게 되었는데 이러한 수도원 운동은 주 3세기에서 시작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42)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지성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스콜라 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14세기까지 계속된 수콜라주의는 히라의 철학 체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영적 은사들과 체험을 무시하게 되었고 신앙적인 열정을 합차는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주교의 관라하에 교회의 권쟁이 더욱 철저해졌고 성경 해석은 아주 엄격하게 교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 14세기와 15세기에는 다시 체험과 열정 내적인 교통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중세 이후에이 시비주의는 요한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헨리 수소, 공동생활 형제단의 창립자인 레이스 브레이크 등에 의해 후일 데보치오 모데르나라는 새로운 경건주의 운동에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20:23) 그러나 결국에 에크하르트는 정제되고 교황 요한 22세는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얼마를 이단적인 것으로 공부하였습니다.이는 모두 이성을 중시하고 체험을 무시하는 강하게 빠진 차가운 스콜라 철학에 늪서 신앙을 붙잡고자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동은 점차 또 다른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16세기 이후에 일어난 종교 개혁에서 실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신앙에 있어서의 지식과 열정 그리고 체험의 문제에 대해 중심을 잡게 됩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 강단의 복음이 회복되고 참된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제조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후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교파 간의 치열한 교리 논쟁은 그 변증의 과정에서 또 다른 번수의 철학적인 요소를 중시하고 생명력 있는 신앙을 교회가 잃어버리게 되자 또다시 화석화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21:07)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7세기와 18세기에 유행하던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독일의 판례 대학을 중심으로 진도루프와 프랑크 프루트의 목회자이던 필립페너 등에 의하여 일어난이 운동은 교회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그들의 주장의 기치는 그들 자신의 처음 순수했던 의도와는 달리 후일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인류 평화주의의 추구에 의한 보다 좋은 세상 건설의 차이를 구분지 아니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셈이 되었습니다.
(21:43) 이것이 바로 19세기 이후 20세기까지의 일입니다. 이제는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을 통해서 계시의 친적인 기원을 부인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 안에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와 함께 우리는이 역사의 한 흐름 앞에서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강조하고 은사를 운동화하는 새로운 신앙의 경향이 되두되고 있는 것도 바로이 시대의 그림이기도 합니다. 체험 중시 신앙의 패단 해 아래새 것이 없듯이 조국 교회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진자 운동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1900년대 초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본격적인 선교의 장을 열게 된 것을 중심으로 해서 1920년에서 30년대 경까지 비교적 능력 있고 순수한 복음 선포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22:21) 그러나 그 후 감성에 의한 체험을 강조하는 설교가 당시 민족적인 상황과 연관되어 유행하였습니다. 설교는 한의 종서 염세정 대세주의 현실도적 신비 체험의 치중 등 그릇된 경향에 부동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잘못 흐르기 시작한 체험 중심의 경향은 1950년에서 1960년대에 유행하던 소위 부흥회에서 가장 극심한 문제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신비에 대한 체험과 은사에 대한 체험 경험 강조는 그 후 불건전한 부음적인 운동 어 부흥의 운동을 타고 주정주의적인 성경을 넘어 성경을 떠난복음적인 운동으로 지달았습니다. 성령을 무슨 폭발물처럼 이야기하는 성령의 복발이라는 구원나 성령이 마치 부흥사 개인의 전이 모인 것처럼 성령을 주원히 받으라는 등에 망언이나 방언의 교습 성령의 열매에 의한 은사의 겸증보다는 불건전한 친비감을 조성하는 비성경적인 집회 성경 본문을 떠난 이상한 설교 감정적인 충동을 위한 비정상적인 집회 등이 만연되었습니다.
(23:17) 이러한 비복음적인 체험주의는 일반적으로 1970년대 중협에서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서서히 외면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교육 수준의 향상과 다소관의 정치, 경제적인 안정 그리고 그리스도인 고력 고학력화 등이 이때부터 번지기 시작한 평신도 성경 공부에 활성화 등과 함께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진술한 하나님의 경험에 대한 교회의 어류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운동들은 이지적인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반감지후원 회의주의도 그들이 무슨 신학적인 발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반권위주의적인 시대 정신의 영향과 불경 건전한 신비주의적 체험주의 시대에 있었던 설교단의 횡포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바가 컸습니다.
(23:59) 그리고 그 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국 교회는 단속한 부속기와 어 급속한 냉각기를 맞았습니다. 이전에 교회 성장을 주도해 오던 기도운 운동과 잘못된 부흥의 운동이 더 이상 사람들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한 오해. 제가 조국 교회의 이러한 진자 운동과 관련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소그룹 운동들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교회들은 성경 공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명력을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건조한 지식주의를 낳았습니다. 결국 평신도 성경 공부의 학과는 마치 신학 교회의 필수 과목을 촉소해 놓은 것 같은 신학 강좌들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24:4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한 인식의 대단한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훈련을 먼저 받았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과 동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농무해졌습니다. 진리의 내용을 아는 것은 곧 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진리의 내용이나 교훈에 대한 실전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성경 공부 및 훈련에서 강조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의 본받음은 그러한 목회 패턴이 단순히 지식의 성장이 아닌 인격의 성숙과 삶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5:17)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 공부나 신자 훈련이 삶의 실청과 아무 상관없는 공리 공담의 지성 노름에 흘렀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한 오해를 만연하게 하였습니다. 성경이 진리를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진술된 진리와 교훈을 실천에 옮기는 것만을 가르키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대한 전 인격적인 경험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슨은 그의 책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이라는 책에서이 점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1960년 웨스트민스터 종교도 연구회에서 강연한 내용인데 고린도전서 8장 1절로 3절의 본문을 가지고 참 지식과 거짓 지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6:02) 그는 배교에 관한 존 오연의 가르침을 해석하면서 진리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기억하라. 진리가 첫째이고 다음에 경건이며 그 후에 예배가 온다. 우리는 모두 그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것에 관한 어떠한 문제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다. 지식과 이해의 은사는 여러 방면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의 은사 다음으로 고귀한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더치되어 영적 생활에 실질적인 위험을 줄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지식관의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
(26:35) 지금이 문제를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원인들과 특별한 원인들로 나눌 수 있다.이 모든 일의 배우에는 반드시 원수가 있다. 마귀는 우리가 믿음을 갖지 못하고 무지와 어둠 속에 머물게 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그는 우리를 혼자 예쓰는 사람으로 만드는 분주한 행동의 위험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략을 갑자기 바꿨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가정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지식의 문제의 극단에 빠지도록 한다. 기독교 신앙이 스스로 무엇을 분주의하여 공덕을 쌓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소홀이 여기고 행함에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공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27:07)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알고자 할 때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이지적인 지식의 축적이 곧 진리 자체를 아는 것과 동일시 여기는 지식주의의 극단적인 오해에 흐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설교를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인격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독서와 강연과 교육을 통해서 이것들을 지적으로 흡수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지식의 습득은 언제나 위험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슨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으로 만나는 설교 가운데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27:45) 인격적으로 사랑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경험함이 없이 그분이 사랑이라는 진리를 붙잡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런 식으로 인식한 진리를 따라서 사는 일이 가능할까요? 오늘날 우리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처절한 목마음에 마음이 타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기 아닐까요?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진리를 경험함 없이는 그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알게 될 때 그것은 종교 생활에서 흔히 있는 감정적 체험과는 다른 수준의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격렬한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28:15)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스포츠 중계 방송을 관람하면서 열렬히 응원하던 사람들이 감정적인 쇼크 때문에 죽은 경우를 봅니다. 종교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진리를 하는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경렬한 체험을 할 수 있고 신비한 경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격렬한 체험이라고 할지라도 진리를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의 경험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그의 삶의 일순간 사라지는 종교적인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경고한 일을 해냅니다.
(28:42) 그가 알게 된 새로운 진리가 지속적으로 그의 생애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위험 확실히 기독교의 지위를 마치 학문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습득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생각들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행하게도 이러한 오해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신학교에서 봅니다. 사람들은 신학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의 차이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는 유아의 상태에 있어도 신학을 많이 공부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성경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29:11) 신학교에서는 해 바뀔 적다 급변에 가는 학문적인 조류와 신학 사조의 발걸음에 맞춰서 기독교의 교리를 변증할 새로운 신학적인 지식들을 가르칠 교과목의 개설 필요를 느낍니다. 새로운 과목이 신설되고 어 새속 방문의 기독교 진리에 대한 공격을 변증하기 위하여 과목들이 증설되고 분리됩니다. 잘스페니는 말하기를 신학교의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질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교수는 자기의 전공 분야에 있어서 정통한 학자이어야 하며 인격적으로 학생들에게 존경받을 만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 비하여 뛰어나야 합니다.
(29:41) 그 지식이 그리 스승의 마음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애통하게 하는 진리의 힘을 신학생들이 그 사람 안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 후보생들을 길러내는 우리 조국 교회의 신학교를 보십시오. 대부분의 신학교는 운영하는 사람들부터 심지어는 철없는 학생들의 이르기까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자격을 결정하는 요인이 단지 얼마나 학문에능한 사람인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자격 요건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교수를 선정하는 기준과 무엇이 다릅니까? 좋은 목회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선생을 통하여 길어질 수 있습니다.
(30:15)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그분을 위한 거룩한 열심과 사랑을 불러일으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학생들의 이룬적인 신학의 목 교습은 신앙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 속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론적인 지식을 쌓는 것이 신학 공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축적은 세상 학문을 공부하는 것과 동일한 태도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신학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미적분 교과서를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헌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비교 헌법을 다루고 있는 이론서들을 읽고 정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과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이러한 신학 교육은 진리를 비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설교자들을 낳습니다.
(30:52) 지식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으나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설교자를 낳아서 강단에서는 느끼지도 못한 진리가 선포되고 교인들은 능력 있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장 오해하는 단어 중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말의 뜻으로 볼 때 신약 히라버의 성경과 구약 성경의 히라버의 번역인 지인경에서 기노스코 에이도 등으로 번역된이 단어는 사실 혈압적인 사유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사유로 기록되었습니다. 왜냐면 7인역 힐라버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고 또한 히라버 성경 신약 성경도 그 기록자들이 대부분 히브리언인들이었으며 구약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맥락에서 당신의 공용어이던 헬라를 빌렸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31:28) 그래서 신약의 본문을 연구하는데 있어 구약의 히브리어에 대한 이해는 매우 필수적입니다. 신약의 어떤 단어의 속뜻을 이해하고자 할 때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그 헬라어의 의미와 함께 반드시 히브리어 구약 본문에서 그의 상하는 동치어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단어의 히브리적인 의미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히라버에서 알다라는 뜻을 가진이 단어들의 히브리어 어원적인 배경은 야다입니다. 이것의 명사향은 다아트인데 지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가지게 되었습니다.이 알다라는 동사는 구약 성경 본문에서 아주 많이 쓰였습니다. 내게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인지하다지지 얻다 알다 친해지다 등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32:04) 히브리들의 사유 속에서이 알다라는 단어는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많은 용네들이 있지만 동사 야다와 명사 다트를 사용한 대표적인 용내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지식을 가르키는 말인 명사 다트가 사용된 첫 번째 용내를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상 가운데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히브리어 원문을 지격하면 선과 악의 그 지식의 나무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이 어떤 것일까요? 결코 경험을 동반하지 않는 이지적인 동의를 통한 지식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32:36) 알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인 야다가 처음 사용된 용네도 창세기에서 나타납니다. 아담이 그 안에 하와 동침함에 그이 구절을 지격하면 그리고 그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의 야단는 후일 영어에 알다라는 단어의 동치마다 선교하다의 의미를 만들었습니다. 아무튼이 앎의 역시 경험을 통한 앎입니다. 히브리들에게 있어서 단지 이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였던 것은 결코 이지의 자원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지에 머무는 지식이 어떻게 인격을 사로잡고 영혼을 해방시키는 진리의 힘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경험을 타고 오는 지식.
(33:10) 제가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비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 조차가노라 빌립보서 3장 10절로 12절 그래서 사도 바울이 알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식의 주가 과연 오늘날 신학생들의 신학 공부를 대하며 기대하는 그런 지식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33:44)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그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립보서 3장 7절로 8절.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면서도 새롭게 알기를 원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매진하던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이 점에 대하여 제임스 백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이 자기가 버린 것을 외술물과 같이 여긴다고 하였을 때 그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그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산다는 뜻이다.
(34:15) 정상적인 사람이던 그가 어찌 벼설물에 대하여 향수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지식의 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지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지식은 조금도 그 지식의 소유자를 거룩하게 하지 못할뿐 아니라 그를 경건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위대한 영적인 거성들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 정보를 참뜻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34:42) 저는 역사적으로 갈빈주의의 교리 체계가 가장 성경에 가까운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이 교리의 책기는 단지 신학 이론에 있어서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신학 지식을 습득하는 그런 방식을 따라 수립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관하여 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더 잘 경배하려는 정신으로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며 교리의 체계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3대 칼빈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헤르만 바빙크의 교리서를 읽을 때 그가 다른 교리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리를 진술하고 있다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리한 신학적 통찰력으로 종교 개혁을 마무리한 개혁자 바짝 마르고 콧나리 고뚝한 그 차갑게 느껴지는 초상을 가진 존칼빈은 그의 부류의 명 기독교 강요 제일 신지식의 문제를 논하면서 이렇게 잘라 말했습니다.
(35:29)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단지 쓸데없는 사변으로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번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분의 번성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 안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의 지식.
(36:03) 우리는 지식에 문제 있어서 이러한 통차를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이 일치하게 공유하고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칼빈의 심정을 이해합니까? 그가 성경을 주석해 나가다가 탄식거린 기도로 장문을 이어가게 했던 것은 어떤 종류의 지식이었을까요?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지식이 어떠했기에 요즘 복이 드은 방식으로 주석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한 가지 예정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마르틴루터의 생애는 이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귀중한 예정이 됩니다. 에르프루트로 돌아가는 길에 서도성이 되겠다고 성원한 후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36:31)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자신의 구원 문제였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밤 펠라기우스 주의 신앙도선에서 있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루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나님이 용납하실 만한 존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그렇게 스스로 의롭게 사는 것만이 진노하시는 의의 하나님과 죄인인 자신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도원의 일과의 몸과 마음을 다 쏟아 바쳤습니다. 새벽 2시에 시작하여 하루에 여섯 번 있는 예배 시간 사이에 그는 기도 명상 그리고 영적인 훈련을 끼워 넣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금식하였고 뼈를 깎는 극기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37:01) 습찬 동굴 속에서 담료 한 장 없이 여러 날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었던 학자들은 이때의 심한 육체적 고생이 그의 남은 생애를 끊임없는 질병 속에서 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는 스스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관념 아래에서 스스로 그 거룩함을 성취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하여 언제나 괴로워하였습니다. 루트는 당시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의 죽음이이를 정도로 금식을 했다. 물 한 방울 나달 한 돌 입에 대지 않고 사이 굽는 일을 거듭했다. 나는 대단히 그 일에 열중했다. 루터의 처절한 고행 생활을 보다 못한 수원장은 그게 더 이상 금식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37:30) 그 수도원을 떠나 대학으로 보내진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주의의 배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비텐베배를 그 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거기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513년에 시편을 1515년에 로마서를 1516년에 갈라디아서를 그리고 1517년에 히브리서 등을 강의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이러한 성경 연구의 과정에서 로마서 1장 17절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그 성경 구절이 부는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급적인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앞낮으로 명상하는 가운데 나는 본문의 앞뒤 문맥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37:59)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인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인 이런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의하여 계시되었으니이 의는 이름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신 수동적인 의인데이는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았다. 여기서 나는 나의 존재 전체가 다시 태어나 활짝 열린 낙원으로 들어갔다고 느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전혀 다른 얼굴의 모습을 나는 볼 수 있었다.
(38:29) 격을 더듬어 성경을 관통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다른 수로로 표현된 하나님의 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 우리를 강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우리를 설교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힘 구원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일 루터는 교황의 교사를 불살라 버림으로써 1521년 4월 16일 보름스 의외에 소환되어 젊은 황제 가을 5세로부터 그의 개혁적인 주장을 처리해하도록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미 집필한 개혁 사상을 담은 책들의 정당성에 대하여 시문하는 에크의 지배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는 가운데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신앙을 토로하였습니다.
(38:59) 강제폐와 귀족 제후 각하카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기 숨겨 먹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이상 나는 교황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이 양자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표고 있습니다. 내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양심이 끝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옳지 않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이 이 답변을 담은 맨 처음 임세물에는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이는 효율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39:31) 나는 여기에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로 하여금 비질리의 위협 앞에서 자신이 이미 말한 것을 처리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연기 있는 개혁자의 혁명 정신이 가져다 준 헌신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움직여서 거기에서 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복음 진리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이었습니다. 지식에 대한 오류.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경험을 동반하고 그렇게 습득된 지식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헌신을 불러일으킵니다.
(40:04) 그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열심에 자신을 다 드리게 합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을 동반하고이 땅에서 사랑하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로 하여금 그 지식을 갖지 못했을 때와는 비유가 될지 않을 만지 하나님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을 위하여 살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지식의 내용이 그릇된 것일 때만 거짓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내용이 아무리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의 영광을 위한 열심과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거룩한 연민과 우리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다루는 내용에 관계없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41) 지식에 대한 이러한 오류는 성경을 대하는 데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다분히 바리새적이거나 율법사적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의 오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을 대해도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하는 지성주의적인 접근입니다. 성경 공부와 설교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어도 차가운 문자 이상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기다리던 시대에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기록한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고 경건한 필사자들에 의하여 성경이 베겨 씌어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오류의 한 예입니다.
(41:20) 성경 읽기에 관한 위대한 조지위 필드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나의 반석이요 내 터이다. 내가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35년이 지났다. 나는이 성경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한다.이 책은 약속의 기록을 내포하고 있다.이 이 책에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섭리와 우리 영혼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고 신자로 하여금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게 하시는 성령께 대한 것이다. 만일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 자체로만 만족한다면 마귀는 교리만을 말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에서 칼빈 주의로 넘어가고 충분히 전동적이 되면서도 당신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만족하게 여길 것이다.
(41:55) 둘째로 어 말씀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오류인데 그것은 적용의 위험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하면서 행동주의적인 사고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수한 적용들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문을 읽고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무엇인가 행동을 결심하기에 연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단지 마음의 위안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런 행동 지향적 적용의 우리를 새로운 율법주의로 흐르게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에 대하여는 많은 것을 알지만 정작 우리의 경건의 궁극적인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됩니다.
(42:31)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을 읽다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율법과 교례들의 뭉치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식의 적용주의는 율법사적인 태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소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 혹은 진리의 체계를 지키는 일입니다. 교리는 성경에 제시된 진리 체계의 종합이며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니다. 마르틴 루터나 종 칼빈에 의하여 이루어진 종교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세없기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43:03) 그러나 14세기 르네상스 이후 고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개혁자들은 기독교 고전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의 또 다른 주역인 존칼빈은 탁월한 어학 실력과 전재적인 암기력을 바탕으로 교부들이라면 벌벌 떨로 추종하던 가톨릭 신학자들도 미쳐 다 살피지 못한 교부들의 문헌을 이잡듯이 섭렵했고 그 방대한 양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였습니다. 그는 고전을 섭하면서 교회가 당시하는 사무른 교리를 붙들고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교부들의 신앙이 자기 시대에 왜곡된 채로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43:34)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탐구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자전적인 기록이나 전기를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단지 이러저러한 진리에 동의한다는 고백 하나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하여 무엇이 참 기독교 신앙인지를 알기 위하여 자기의 전 존재와 생명을 걸었습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수많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끝없는 투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학문적인 고집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한 자기의 확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44:00) 존갈비는 자신의 고백과 같이 천성적으로 수줍을 잘 타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발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써 제네바의 종교 개혁에 합류하면서도 일체 특별한 직무를 맡기를 스스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런 소심함과 수음을 잘 타는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불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들은 영 있게 모든 것에 대하여 도전하고 세상의 모든 권력과 영광과 고성함을 말씀의 어미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게 하며 최고에서 제하에 이르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리스도의 집을 세우고 사탄의 왕국을 전복시키고 양들을 먹이며 여우를 멸하고 성도들은 훈계하고 가르치며 반역하고 왕구한 자들은 꾸중하고 책망하고 견책하며음 천둥 번개를 손안에 넣고 풀었다가 잡았다가 하하다가는 마침내는 벼락을 내리치는 것이다.
(44:43) 그러나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 계획을 위하여 헌신하면서 두 방향으로 얼마나 처절한 도전과 시련 속에서 살았는지 아십니까? 한편으로는 엄격한 신앙을 떠나 무도덕하게 살려는 시민들의 불신앙의 도전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가르치는 교리에 도전하는 무리들과의 저절한 싸움이었습니다. 동역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에 남달리 많이 헌신했던 그의 서신 속에는 죽음을 그리워하는 사연이 자주 나옵니다. 그는 오히려 사는 것보다 죽음을 그리워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이 옥이 오직 거기에만 있다고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45:11) 그들이 왜 그렇게 힘겹게 진리를 파수하여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처럼 진리를 위하여 특별히 헌신하였습니까? 성경 진리와 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들이 진리를 붙들고 살았다기보다는 진리가 그들을 사로잡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경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진리에 의하여 자유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격적으로이고도 영적인 깊은 체험을 통반한 진리를 앎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치 무엇을 믿든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식의 태도들이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45:41) 이제는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돌리인 교리를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히려 교리를 중시하고 고소하려는 교회들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신앙 고백에 있어서 자문과 하나를 하여서 순교자들까지 생겨났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교리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인지이 문제에 있어서 호양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기독교회 더전이요 기초가 되는 교리들이 가볍게 취급되고 또 그렇게 취급되어도 교회는 이렇듯 진리에 대한 그릇된 취급에 너그러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진리가 그들에게 영적으로 체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6:10)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진리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세계에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바로 그런 상황에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거기에 생명을 건 그들이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진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체험하고 발견한 진리들이었기에 그것이 그들에게 성경 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 루터의 다음과 같은 자전적인 고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살아가는 일을 통해서 죽어가고 저주받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독수하고 명상하고 이해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46:40)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 참다운 의미를 알았을 때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에 눈 뜨게 되었고 회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이 신칭의 교리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사도적인 신앙을 중세 교회 시대에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의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의로워지는 능동적인 의미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수동적인 의로서 이해되어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십자가 사건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교회의 영광의 신학과 결발 결별하고 십자가의 신학 속에서 광대한 복음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47:10) 그리고 거기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들이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어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그는 신학을 연구하에 있어서 십자가 체험의 중요성을 다한과 같이 말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마치 실제 일어난 일들 가운데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눈으로 볼 수 있고 명백한 하나님의 일들을 파악하는 사람은 신학자라고 인정될 자격이 있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한 것을 선하다고 부르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말한다.
(47:39)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 진리의 경험. 기독교에 관한 복음에 관한 주상적인 진리들을 수집하고 철학적인 전제들을 모으는데 있어서 세상 학문이 주고하는 방법과 똑같이 진리를 어 탐고하고 그들이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안다고 말해서는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가지고는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수도원의 차가운 돌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리며 피흘리는 고행 속에서도 구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루터의 영혼을 자유케 하고 향방 없는 자기 학대를 불타는 헌신으로 바꾸어 하나님만을 바라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그가 얻게 된 새로운 진리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48:18)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알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거룩한 신 하나님을 담고 싶은 열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싶은 소망에 불타게 합니다. 그분 안에서 구속받은 자신의 처지를 즐거워하며 거룩한 성김을 위한 열심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교재를 사모하고 그래서 보다 깊은 경건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생활이 분리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들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이러한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48:44) 즉 진리를 깊이 경험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진리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되지 못한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차가운 문자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된 영혼의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씻어 주지도 못합니다. 제가 여기서 진리를 경험하는 문제를 이처럼 상세하게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부흥의 축복. 부흥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위대한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에 대한 깊은 앎을 가져다 줍니다. 온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진정으로 한 공동체가 되게 하십니다.
(49:15) 교회의 공동체는 서로가 예의를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연합 운동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의 공동체성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부흥을 통하여 경험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의 공동성 공동체성에 대한 논의는 다분히 그 관심이 밖으로 드러나는 외면적인 활동이나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가 공동체에 대하여 느끼는 만족감에 집중되어 있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즉 교회가 공동체라는 사실을 강조할 때는 사회에 대한 봉사나 혹은 교회 속에서 어떤 구성원들의 소회의 문제를 논의할 때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사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라는 사실과 또한 그 공동체는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49:50) 즉 신자들의 모임은 하나님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공동체성을 갖게 되고 그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교회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부흥이 가져다 주는 가장 영광스러운 축복은 진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부흥의 시기에 강단을 울렸던 설교들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에게 환영 받고 있는 설교가 도무지 그들의 설교와 어깨를 결룰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약 1500년 전에 설교들이 지금도 읽는 우리의 가슴에 감명을 주는 것은 진리의 힘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 속에 역사하고 있던 진리에 대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50:22) 주 5세기 콘스탄틴노폴의 주교 존 크리스토스톰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접속사 한 단어를 법문으로 하는 설교에서도 그 문맥에서 이탈되지 않으면서 한시간 이상의 설교를 남겠습니다. 짧은 법문에 대해서 아주 깊고 긴 긴 설교를 남기면서도 그의 설교는 채택한 법문을 끝까지 붙들고 증거한 설교였습니다. 긴 법문을 택하고 짧은 설교를 해도 도무지 설교 내용이 법문에 발을 붙이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게 하는 오늘날의 설교와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이것은 바로 설교자들의 진리 인식의 차이가 얼마나 강단을 다르게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납니다.
(50:55) 하나님을 대면하는 부흥의 영광이 있는 광야에서 거룩한 고독 속에서 설교자가 빚어져 가는 것을 안다면 교회의 부흥의 경험 없이는 설교자가 없다는 교회 역사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만나는 부흥을 통해서 이미 맺으셨던 언약을 확장하시고 구체화하시는 한편 그에게 자신의 성품에 관해 다시 한번 새롭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이 부흥을 통해서 갖게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생애에 두고 두고 그의 신앙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부흥에 관해 흥미를 갖는 사람들 중에는 위험한 오해가 있습니다.
(51:25) 그들은 부흥을 자기들의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채용해 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 운동을 통하여 이룬 외적인 성과들에 대하여 만족해 하면서 그런 부흥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싶어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흥의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흥에 대한 전적인 오해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결코 무엇인가이 땅에 일을 남기는 것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온 땅의 백성들이 그분의 이름을 그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꾸리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51:55) 이러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우리의 본분 때문입니다. 우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한없이 순수하게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 우리는 성경의 권위가 도전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몰아낸 그 자리를 인간 철학과 사상에 내어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의 초보로 여기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도 못한 자들의 이성의 판단을 성경 위에 올려놓기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52:22) 조국 교회에서조차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한 복음은 세상과의 부조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인간의 사상이라는 물에 희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며 그 진리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제는 종교의 매인 너무 펑좁은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이는 이는 거룩한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리므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변해 버린 하석화된 교인들이 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슴을 지으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스스로 세운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으로 교회 자신을 유지하기 급급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52:49) 우리들이 아무리 수고할지라도 그 수고가 하나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부흥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 심각한 죄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자신과 세상이 그동안에 우리의 수고 가지고는 안 된다고 말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복음에 확장된 역사를 돌아보면 여러분은 조국 교회에서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고하며 살아봤는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지나 지금의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복음 사역자들은 근대와의 과정에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노동하였던 근로자들만큼이나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53:16)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혼을 변화시키기에 너무나 무능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고치기 위하여 예쓰지만 성경과 영광스러운 교회의 역사가 말해 주는 권세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고치는 대신 무엇인가 편법을 통해서 그러한 일에 기여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편만한 복음의 역사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하고 했으지만 결과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암스트롱이 인용한 제럴드 맥더모트의 글은 우리가 공감할 만합니다. 그들이 실름한 사회가 미국이지만 말입니다. 미국의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문화를 변화시키려고 하였던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한 듯이 보이자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53:51) 세 명의 대통령과 수백명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워싱턴으로 보낸 후에도 그리고 수많은 투서와 로비스트들을 동원하여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화된 미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찰스 콜슨이 최근 크리스천니티 투데이지의 기고한 글에 의하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쇠퇴하고 공공 생활이 미치는 신앙의 영향력이 너무나 철저히 제거되어 왔으므로 솔직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가르쳐 포스트 크리스천 문화라고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갤럭 조사는 너무나 난처한 역사를 보도합니다. 종교는 늘어나는 반면 도덕성은 저하되었다. 우리는 기업을 지켜왔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를 잃었다.
(54:20) 이제 우리 동포들은 교회를 점점 대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인 삶의 형패는 형편없이 낮아졌고 신학 교회는 소명 의식이 불분명한 많은 수의 목회자 고생들이 교회에 취업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일 교계 시문에 보도되는 신학교의 소요 사태와 고소 고발 사건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일상적인 수고를 비웃고 있지 않습니까? 왜 성도들이 많이 늘어났고 그토록 많은 목회자들이 수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국 교회의 초창기 선교 시대를 회고하며 그려워하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수고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54:47)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일들의 행하심이 조국 교회 안에서 거의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목마른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든 교회, 잠든 설교단. 우리가 참된 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고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하시는 위대한 일을 그리워하고 그 일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탄원하는 대신 거짓된 부흥으로 교회의 성장이나 도모하려는 인간적인 야망에 불타고 있는 동안에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비차말이 많지 쇠퇴하였고 교회 안에는 회심의 경험이 없는 교인들로 분비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프로그램 만들기에 골모라는 동안에 원수막귀는 교회의 영성을 흐르게 만들었고 세상의 편의주의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사랑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55:22) 교회는 거룩한 진리를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는 대신 수시로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이벤트 회사처럼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큰 교회의 목회자는 제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 목사님 나는 교회 가면 내가 목사인지 대기업의 회장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우선 결제할 것이 그렇게 많고 만나지 않은 사람도 사람들도 그렇게 많도록 많은지 라오디기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매우 심각한 경우가 되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내 공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55:54)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내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기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마땅히 교회 안에 계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그의 자녀들을 다스려 주셔야 할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교회 문 밖에 사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게 만들었습니까? 왜 라우디게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지도 않는 교회에 모여서 문을 닫고 있을까요?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저는이 자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56:37) 라우디기아 교인 교회에서 이런 일들을 행한 장본인들은 다수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책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채택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아일란한 신앙 생활을 하려는 나태한 교인들과 그들을 적절히 다루지 아니하는 복음의 일꾼들의 합작품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도시 한가운데는 잠든 교회가 있고 잠든 교회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광을 잃어버린 설교단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처럼 화속화되어 버린 교회의 영적 상태는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가 자기의 거룩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사고와 손잡은 것은 언제나 강단 위에서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57:07) 19세기 이후 유럽의 교회들이 복음 신앙을 떠나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성경을 설교해야 할 사람들이 성경의 신적인 기원을 비평하며 자기들이 시대에 뒤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고 성경의 진리보다는 사람들의 철학을 염모하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을 전해야 할 설교자들이 이러한 기독교의 진리들에 대해 회의를 떠벌리는 것으로 지성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설교의 제목들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도 강단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지 아니하는 설교자들의 그릇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회중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부채질하였습니다.
(57:39) 이 이 점에 있어서 18세기 독일의 교회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아시다시피이 시기는 합리주의가 평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이 시기에는 세계의 경향과 학파가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초자연적 명상주의가 그것입니다. 세 번째 경향은 곧 신비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다시 번세적으로 기울어가는 난이한 철학적 스타일의 설교로 말미암아 교회가 화석화되어 가자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건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합리주의 운동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이 운동은 철학적인 회의주의와 성경 연구와 강해를 위한 새로운 비평적인 방식의 발응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58:12) 그러나 이러한 사상을 조종하는 설교단의 합리주의적인 태도는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설교 속에서 잘 정의된 설교자 자신의 확신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비평적인 태도만 만연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중심이 되는 위대한 진리들은 다뤄지지 않고 오히려 도덕들을 취급하기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비평적 합리주의 설교가 후기 경건주의적인 설교의 경향에 대하여 새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합리주의 운동은 원기 왕성한 사역을 계속하였고 설교단는 자기가 마땅히 선포할 진리를 자버리고 여기에 가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설교단이 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58:43) 설교자가 사라지자 설교단은 말 무너졌고 교회는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조국 교회에서도 이미 중중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상업주의와 손잡은 축복 신앙. 뜨거운 열기는 가득해도 십자가는 없는 집회들. 부흥이라는 구원을 만나도 참된 부흥을 만나 보기 어려운 조국 교회의 상황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옵니다. 저는이 시간 기도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강단을 섬기는 설교자들이 야곱과 같은 신앙의 부흥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들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경험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59:09) 하나님의 성품과 그 능력에 관한 성경의 진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조국 교회의 진리가 울려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 사이에 심각한 격차가 없이는 결코 그가 설교단에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면 설교자 임무는 종교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의 빛 아래에서 야곱은 다시 올라간 베들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부흥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땅에 있는 교회들이 비상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59:36) 야곱에게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의 영혼 속에 쉽게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시아다의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였습니다. 그 지식은 이후로 남은 그의 생애를 그 지식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야비한 기회주의자에서 거룩한 믿음의 족장이 되게 하였던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흥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주어 그 지식의 빛 아래에서 그 지식에 붙들려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1:00:07) 그리고 우리는이 세상도 우리가 갖고 있는이 지식을 소유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온 세상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한 때를 꿈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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