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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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두려움

거룩한 부흥 06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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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거룩한 부흥 제6장 하나님의 두려움 부흥과 권세 하나님이 그 사면 고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거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부흥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경건한 두려움을 동반한 권세입니다. 부흥의 핵심. 일반적으로 부흥은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특별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영적 임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부흥 아래 있을 때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영적인 실제가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이한 영적 체험이 부흥의 핵심은 아닙니다.
(00:39) 부흥의 시기에 이러한 특이한 영적 현상과 특징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오히려 부흥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흥을 통하여 나타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또 하나는 깊은 회심의 역사입니다. 한데 우리나라에서도 금세기의 마지막 부흥 현상이라고 일을 걸어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이한 영적 현상들이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조국 교회에서도 많은 지도자들이 곳에서 개최해 되던 불받으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훈련을 바꿔 와서 자신들의 교회에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적으로 미숙하고 성경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미혹되었습니다.
(01:13) 예배 시간마다 진리를 전해야 할 설교자들이 교인들을 세워놓고 넘어뜨리려고 기도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무지한 성도들은 속았으며 경건한 성도들은 아픔 속에서 자기들의 교회를 떠났습니다. 당시 캐나다에 방문하여 그 현장을 본 자는 즉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던 거짓 부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단정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참된 부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과 회개의 부대였습니다. 그 운동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모임 가운데 일어나는 폭소 현상이나 졸도 현상을 18세계에 일어났던 조나던 에드워즈 시절의 부흥과 관련시퍼하였습니다.
(01:48) 그때에도 영적 각성과 부흥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당신들이 부흥이라고 부르는 영적 현상이 많이 일어나는 여기에 죄에 대한 심한 각성이 없느냐는 질문 앞에서 애매 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글쎄 우리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그것이 의문이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부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오늘날 조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교회 만들기를 위한 작업들을 깊이 있게 깊이 우려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모두 부흥일 것이라 놓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에 힘입은 바 큽니다.
(02:23) 이러한 목회적인 분위기가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 사이에 구별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교회의 부흥이 찾아올 때면 교회가 여러 가지 특이한 영적인 경험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미명한 것입니다. 왜냐면 부흥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역사가 반드시 성령으로만 말미암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흥의 현장은 우리들에게 악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에드워즈의 회고로을 보면 제일 자대각성 운동이 일어난지 이때 뒤인 1742년부터이 부흥의 역사가 얼마나 교묘한 어려움에 부딪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부흥의 역사와 함께이 역사를 혼란케 하여 부흥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에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역사가 간섭하게 해야 됩니다.
(03:01) 이러한 교회의 역사에 경험을 살피면서 발견하게 되는 재밌는 사실은 사탄의 역사는 성령에 대한 무지와 부흥의 상황을 다루는 성경적인 원리에 대한 무지의 틈세를 빚집고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지식은 부흥의 순도를 높인다.이 논의를 위해서 예비적인 살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력한 붕이 일어났던 18세기의 뉴잉글랜드 교회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이 논위에 유익할 것 같습니다. 노샘프턴에서 바라된 뉴잉글랜드의 제1 자태 각성은 1740년 보스톤과 그 밖에 여러 곳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그후 3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1744년에는 메릴랜드와 버진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03:39) 그러나 부흥과 함께 일어나는 현상은 항상 감동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대각성이 시작된지 불과 2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부흥의 혐오를 느끼게 하는 잘못들이 노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교회의 의편치과 무질서였습니다. 예배 도중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쓰러지거나 어린아이들이 스스로 예배를 위해 모임을 갖고 인도하거나 거리에서 찬송으로 고성 광하며 다니거나 길바닥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행동들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당시 대표적인 풍 설교자 조지비 필드의 흉내를내는 신도들의 무절 지한 거리 설교 행위 자신들과 동참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무능하다는 이유로 목회자를 내쫓는 일 이로 인해 교회가 갈라지는 분열 현상 등이 있었습니다.
(04:11) 극히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이 점에 있어서는 위필드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힘이 넘치도록 수고한 겸손한 설교자였으나 뉴잉글랜드에서 그를 주정하는 자들에 의하여 일어난 몇 가지 상황들에 있어서는 그가 다소 경소를 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모임의 변칙성과 무질서들을 상당히 펑넓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때는 1741년 범위였습니다. 미필드가 뉴잉글랜드에 방문했을 때 조나던 에드워즈같이 집표에 있어서 충동의 문제와 다른 사람들의 회심 여부를 판단하는 문제에 대하여이 일을 제기한 것도이 때문이었습니다. 빌드 자신은 부흥이 가지고 있는 초질서적인 성격을 존중함으로써 성령의 자유로우신 역사를 소멸치 않으려는 의도에서이 첫 번째 문제에 대해 너거로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부 잘못된 광신자들이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셈도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04:54) 뿐만 아니라 그의 일기가 생전에 출판됨으로써 문제를 이야기하였는데 그것은 교인들이 목회자의 회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회심치 못했다고 판단될 경우 교인들은 마땅히 그 목사를 내쫓아야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교인들이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물론 전단에 두어지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논의하는 목적은 두 사람의 교인 해 중 어느 것이 옳른가를 논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을 때는 특이한 영적 경험에 영역으로 들어가고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무지와 연약함 때문에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은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충분히 활용하려고 합니다.
(05:27)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맡기 전에 혹은 먼저 부흥을 경험하면서 얻게 된 진령한 지식금 이러한 사단의 교묘한 책략을 퇴치하는데 매우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제1차 대각성 당시 노세부턴의 부흥의 역사는 다른 지방보다 더욱 강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런 오류들에 의한 방해를 적게 받았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이 1736년에 첫 번째 각성에서의 경험과 조나던 에드워즈의 지도를 통해서 순수한 부흥의 원리가 정착되어 있었으며 부흥의 시발과 본질 다루워져야 할 방법들에 대한 이해가 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진리를 앎으로써 성령의 자유스러운 역사를 따라 부흥의 불기를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06:01) 이러한 원리는 다른 지방에서도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러한 오유가 발생하는 동안에는 능력 있는 성령의 역사가 회방받고 잠시 구원의 역사가 지체되는 것 같았으나 이러한 오류가 시정되자 곧 성령의 역사가 속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드워지 사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이 부흥은 6년 전 우리가 체험하였던 그 부흥보다 훨씬 더 순수합니다. 오늘의 부흥은 과거의 부흥보다 영적으로 더욱 순수할뿐 아니라이 부흥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행실 또한 과거보다 >> 훨씬 바람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부흥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사람들 하나님음 사람들 앞에서 더욱더 겸손해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06:37) 6년 전에 부흥과 오늘의 부흥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차이점이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과거 부흥이 일어날 당시에는 환의와 감격에 취하였던 사람들은 그 자체에 취하여 하나님의 위험을 완전히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경망스럽게 자랑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과 같이 환일을 체험하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단정하고 경건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환의가 그때만 못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지난번에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위대하게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조용하고 경건한 자세를 갖게 된 것은 6년 전에 부흥을 통하여 신령한 체험을 맛본 사람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더 신령한 체험들을함으로써 그만큼 영적인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07:12) 부흥의 현장에서 얻는 교훈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들에게 아주 커다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수단으로서 부흥을 대망하는 것은 단순히 간절한 소망만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먼저 부흥의 본질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기억하는 성경적인 원리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꼭 우리의 바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지만 더 바람직한 것은 온범위한 부흥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조국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부흥의 현장을 부분적으로 남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부흥의 시기에 처한 교회들이 직면하는 어려움들을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미리 확장시켜 주시는 것이며 그런 바람이 제게에 있습니다.
(07:48) 이처럼 교회가 부흥을 맞이할 때는 일반적으로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기하고 영적인 특징들이 교회에 나타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과 방불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고 나태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을 말씀으로 새롭게 만들며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뿐만 아니라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님을 심각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고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을 불러 불러일으키며 신령한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냉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여 복음사에게 헌신하게 하고 등비였던 교회를 사람으로 가득차게 하며 교회를 가득 매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만듭니다.
(08:25) 이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세상이 영향을 받고 사회의 도덕적인 수준이 고향됩니다. 우리들은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 나오는 부흥의 현장들을 담고함으로써 이런 자료들이 현재 우리 조국 교회에 던져주는 의미를 되새게야 합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거룩한 부흥이 교회에 미치는 신령한 영향력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이 이 장에서 우리가 특별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영적 각성과 어 부흥을 경험한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즉 부흥을 통해 회복되는 공동체의 영적 권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러한 주제의 주의를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부흥에 있어서 공동체가 영적 권세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09:02) 영적 권세의 기관 베들로 올라가서데 내게 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하여 야곱은 온 지방 식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베들로 올라가기 전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야곱의 집안 사람들의 반응을 성경 본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뒤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임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잠들었던 야곱을 깨우셨고 >> 그의 심정 속에서 부흥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 보세요.
(09:33) 어 야고 개인에게 일어났던 각성은 그의 집안을 일깨웠고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가지고 생활해 왔던 이방 신사들과 값진 담당품들을 제거하였습니다. 후에 세계을 떠나 베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이어서 일어난 일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명 고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거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이 법문의 보도는 좀 이상합니다. 지금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어떤 상황에서 세 땅을 떠나고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세계 사람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떠난다기보다는 도주하고 있는 중입니다.
(10:01) 그들은 불리스 족속과 가난한 족속으로부터 보복을 당해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도망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세계은 시도자인 추장과 그의 아비까지 살해당하였고 많은 남정내들이 피살 당하고 자녀와 여인네들이 끌려갔습니다. 세계 사람들은 분노하였을 것이며 동적인 가나안 족속과 보리스 족속에게 이스라엘의 가족의 보복해 주기를 요청하는 파발를 이미 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면의 모든 거울들이 야곱의 집안을 그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틀림없이 평소에 수가적은 야곱의 집안을 경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두려워하는 사명 고울을 지나서 유유히 베델로 올라갔습니다.
(10:34)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들은 야곱의 집안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더욱 그들은 적게심이 불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느낀 두려움은 단순히 야곱의 아들들이 휘두르던 칼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야곱의 집안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 가져다 준 힘이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그 집안은 수가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1장 30절. 따라서 세계 사람들과 사면의 고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결코 그들이 가진 무력에 의한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느낀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두려움일까요? 부흥이 오면 교회에 부흥이 올 때 세상은 교회로부터 어떤 권위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11:03)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한 권위와 두려움들은 다소 막연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와 두려움의 기원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흥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두렷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 세상은 그 교회를 보며 자기들에게는 없는 어떤 권세를 의식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근본적으로 고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의 필요성에 대하여 세상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영적 권세입니다.
(11:31) 오늘날 조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죄인의 교만한 심령을 압도하는 영적 권세가 있습니까?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그곳이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 장소임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자연적인 성품이 예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경건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거룩한 영광이 깃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재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족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간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12:09)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역대아 7장 1절로 3절. 교회 안에 이러한 영광이 있습니까? 우리가 증거하는 말씀의 선포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압도하는 진리의 권세가 느껴집니까? 하나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경배의 현장이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단지 설교 안에 깃했든 정현한 논리나 치밀한 교회의 조직만으로는 이러한 권위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등진채 살아가는 죄인들의 마음에 경건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게 만들어 줍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줍니다. 영적 권세의 예증 성경은 부흥을 맞는 공동체에 변화된 모습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2:42) 교회가 부흥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영적 권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적인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개인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 개혁가들을 어떤 특별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나 운동가로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운동과 사상과 설교가 이전에 개인적으로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마르틴 루트가 비베르크 대학에서 시편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면서 신약 성경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눈은 단순히 이전에 몰랐던 성경의 정보를 찾아내는 이화가 아닙니다.
(13:11) 그것은 바로 루터의 영혼 속에 일어난 영적 각성과 부흥이었습니다. 그는 복음 진리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계획에 헌신했던 존낙스의 생애는 이러한 사실의 한 예정이 됩니다. 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생애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조직적인 주종 세력이나 후원이 다른 개혁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던 고독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토록 큰 권세 속에서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부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생의 말련에 그는 매우 연약하였습니다.
(13:39) 그러나 그의 설교 장면에 대한 제임스 멜빌이라는 필사자의 다음과 같은 보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열정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처음에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강대에 기대와 설교를 하였으나 설교의 힘을 쏟을수록 마치 강대를 산산이 박상될듯이 내리쳤고 또 설교단에서 날아오를 것처럼 힘 있게 설교하였습니다.이 위대한 설교자에 대한 또 다른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낙스의 설교를 듣고 법민하던 메리 여왕은 어느 날 펑펑 울면서 그에게 당과 같이 오사했습니다. 당신은 나 자신이나 나의 아저씨들에게 매우 혹독하고 엄격하게 말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14:10)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어 그대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칭찬을 받을 때마다 많은 선물을 그대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그대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대는 또다시 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으려고 합니다. 메리 여왕은이 말을 하면서 너무나 격하게 우울음을 터뜨린 나머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래서 그녀의 시종 마른 옥이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물을 닦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교 낙스는 담과 같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왕이시요 나는 당신과 많은 논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인신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14:38) 하지만 참된 신앙의 도리를 모르는 무지 때문에 빠져 있는 어둠과 오류의 사슬에서 구원해내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폐악께 계속하여 옳은 길을 제시할 것이며 또한 폐악께서도이 사실을 아신다면 이러한 나의 말이 인신 공격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여왕이시여 나는 스스로 나 스스로 나의 행할 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로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이 같은 성경에도 자주 나타납니다. 성경을 무심히 읽지만 않는다면 부흥을 맞은 교회가 갑작스럽게 영적인 권세를 소유하게 된 예들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15:08)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에서 두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를 사용하신 부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 와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령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은 금폐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배웠더라. 지록 11장 1절로 3절. 하나님은 애굽에 내리신 10대 재앙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여호와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15:39) 일반적으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10대 재앙의 사건은 부흥의 맥락 안에서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월터 카이저나 토마스도 성경 역사에 나타난 부흥 사건들의 목록을 작성하면 있어서 이것을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부흥 사건이었습니다. 바로와 그의 백성들은 전대 미문의 재앙을 아홉 번이라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의 강팍한 마음 때문에 여호와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이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부흥한 가운데 있는 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6:07)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배웠더라. 이것이 바로 각성과 부흥을 맞이한 영적 지도자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 그가 도대체 바로 앞에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모세는 가죽이나 몰고 다니기에 적합한 지팡이 하나와 가난하고 남루한 목부의 옷을 걸친 고령의 노인내였습니다. 그가 맨 처음 바로 앞에 섰을 때 어떻게 취급받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개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굽기 5장 1절.
(16:37)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바로의 대답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누구 간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야 하리라. 주럽기 5장 2절. 오히려 바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모세를 인하여 백성들의 벽돌를 만드는 부역을 더욱 힘겹게 하여 보복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재앙을 거듭시므로 모세를 더욱더 권세 있게 하셔서 자신의 위대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침내 모세는 바로의 신하들과 애굽 백성들에게 권세를 느끼게 하는 두렵고 큰 인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7:03)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응금을 얻어 가지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부흥이 가져다 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는 끔찍한 재앙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지도로 주자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보이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부흥을 경험한 그들에게 있었던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공동체 권세 있는 공동체 오늘 성경 본문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울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거로 창세기 35장 5절 우리 원문은이 본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17:40)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 있는 그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두려움이 임하였다. 이것이 바로 부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대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림을 경험함으로 부을 맞은 초기 기독교 회의 모습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창세기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능력 있는 설교를 통해 하루에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고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모여서 교재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에 힘썼습니다.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정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이 폐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의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18:15)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행전 2장 40절로 42절. 이때 세상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참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친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43절로 47절.
(18:44)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자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순전한 삶과 사랑을 인하여 그들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었고 교회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창세기 35장에 야곱의 집안에 일어난 부흥이 그들로 두려운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는 묘사와 짝을 이루는 기사가 사도행전 19장에도 나타납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각성과 부흥입니다.이 이 부흥은 바울이 예배소에 와서 주님의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도전함으로써 발단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 여기서 성 석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을 하던 중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악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19:20) 사도행전 19장 8절 스계와의 아들 아들들이 귀신을내어 쫓는 바울의 역사를 흉내다가 봉변을 당하는 것을 모두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바라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서계와여 일곱받을 또이 일을 행하더니 악기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기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 빠서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구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그건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허망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장 13절로 20절 를 여기서 우리말 개혁 성경이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20:08) 헬라인들이 다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라고 번역한 부분의 힐라버 법문을 지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한 두려움이 그들 모두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주 예수의 이름이 들리어졌다. 사도행전 19장 17절. 이것은 부흥의 시계 임하는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권세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지방의 선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의 그런 두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악령의 세계의 실제를 보여 주셨습니다.
(20:39) 바울을 통해서 이한 등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영적인 세계의 실제를 보이셨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 아니하고도 귀신을내어 쫓고자 하는 스계와의 일곱받들의 봉변을 통해서도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경험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것은 거룩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함으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권세 있는 존재로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이이 오만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의 죄를 자복하게 하며 마술책을 불사르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떤 눈물 어린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사도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마술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변론이 가져다 준 승리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1:15) 이것은 부흥이 가져다 준 권세가 이룬 일이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에 대한 오해들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로 하여금 영적 각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교회가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한 감상주의적인 발상들입니다. 신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윤리나 사도들이 서신서에서 권면하고 있는 성도들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안에서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로 16절, 빌립보서 2장 15절로 16절 등 특별히 평화의 대헌 현장이라고 일컬러지는 산상 수원을 살펴볼 때마다 그분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하여 기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21:51)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기대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 그러나 주님은 우리로 하게 빠지지 아니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그 붙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윤리를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 그리고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권면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으로까지 나아갑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와 자유와 사랑의 윤리를 모두 말씀해 주신 후에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말씀은 엄숙합니다.
(22:25) 나의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느리고 장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장 26절로 2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날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비상적인 사고 속에 깃든 위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중 좋은 예가 전쟁과 평화에 관한 생각들입니다. 금세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종교와 종교간의 갈등이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에도 끔찍한 동족 상잔의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금세기 전처럼 전쟁을 두려워한 적도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22:55) 한동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어왔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성심도 전쟁의 위협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없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금세기에 발달한 가공활 무기의 위력들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직세계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와 화학 무기의 파괴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평화학뿐입니다. 미국을 비롯녀학는 핵폭탄을 일본에 투화함으로써 그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시켰습니다. 그래서 한때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같은 마저도 핵폭탄이야말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위대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발언을 섬지 않았습니다.
(23:25)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무기를 통한 공격을 담보로 하는 평화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곧이어서 수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 국가들과 자유진영의 여러 국가들이 다투어 원자 폭탄을 개발해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복지전이 있었지만 그 엄청난 개발비를 들여 제일작한 전략 핵무기들은 사용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발발하는 전쟁을 억제하지도 못했습니다. 인류가 아무리 평화를 원해도 세상이 추가하는 평화는 이런 것입니다. 즉 나라 간의 무력이 균형을 이루어 서로를 해칠 생각을 못하게 하며 그러다가 서로 군비를 축소하여 마침내는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려 해도 그럴 능력이 없기에 전쟁을 포기해 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24:00)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알림으로써 인명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양심에 호소하여 고통받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펴게 하며 사회 윤리 의식을 재무장하여 도덕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제항하고 있는 바는 바로 인도주의입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이 점입니다.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착하게 살라는 예수님의 당보를 따라 살 때 이루어지게 될 세상의 모습과 바로 앞서 말씀드린 인도주의 실천이 가져올 세상의 모습은 외관상 매우 유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이 혼돈을 겪는 부분이 바로이 지점입니다.
(24:29)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적인 결과만을 중시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지중해서 생각합니다. 평화와 샬롬의 구분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인도주의가 지향하는 평화에 추구하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두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본질적으로 변화받게 만들어서 인간의 공급적인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는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를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진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유능하지 못하다면 그들은이 세상에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일이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24:58) 세상을 향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등진 채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여 하나님과의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함으로써 싸움이 없는 상태를 평화 공존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웃을 향한 행악이 금지되어 그 법이 지켜지는 사회를 평화로운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들이 작업을 거부하지 않고 고용주들이 세대에 정해진 임금을 지불하는 한 우리는 그 노동 현장에 산업 평화가 정착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은 다만 투쟁이 거치는 것이 아닙니다.
(25:23)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함으로 샬롬을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이상은 사람을 고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이 어리석을 정도로 높아 보이는 이상이 어떻게 실현됩니까?이 이 모든 일의 출발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 여기서 전부가 아니라 출발이라고 한 점을 주목해 주십시오. 한 영혼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일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없습니다. 그동안 조국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과도의 힘을 기울인 것이 마치 중대한 무슨 중대한 과오나 되는 것처럼 반성하는 논리들이 유행하고 있는데이는 옳지 않습니다.
(25:55) 물론 한 영혼에 대한 사랑보다는 물량주의로 치다아온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조국 교회는 이전보다 더욱더 열렬한 구령의 열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더 많은 범포들을 구원하여 복음이 아니면 아무 희망도 없는 저들을 건져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악한 세상은 반드시 인간의 죄악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불행 이면에는 언제나 보다 궁극적인 세력인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오히려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26:26)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이 어둠의 세상 중간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심 갑자를 취하라.이는 이는 악한 달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베서 6장 10절로 13절. 교회는 육체와 보이는 세상에 섬김을 위한 창원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서 교회가 어떻게 이러한 소명에서 숭실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소유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구별되 세워진 기관임을 보여줍니다.
(26:55) 모세는이 점에 있어서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이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찬아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굽기 33장 16절. 그렇습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의 믿음을 제공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상의 것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기관으로서 자기의 사람들을 천국 백성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도 존재합니다.
(27:21)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믿음을 남기는 일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상의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육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고 이사야 40장 5절 온 세상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세상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와 동행하시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교회가 이러한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필수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교회와 친히 동행해 주시는 일 외에 무엇이 더 필수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번질상 하늘에 계신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27:51) 그분은 영광의 지존이십니다. 주님은 능력의 근원이시니 그분에 비하면 세상의 능력과 권세는 치푸하게 와 같고 그림자 같을 뿐입니다. 하늘에 계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위대한 능력이시며 사랑의 원천이시며 지극히 와미로우시고 좋을 자이신 그분이이 땅에 있는 교회들에 임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잠시 매우 특이한 능력을 보이시며 교회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때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이 그 위에 있고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때 교회에 찾아오는 변화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감추질 수 없습니다. 드러납니다.
(28:20) 하나님의 권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흥 가운데 있는 이러한 권세가 바로 야곱의 집안이 세계 사람들과 사면 고호를 지날 때 하나님이 내려 주셨던 하나님의 두려움입니다. 창세기 35장 5절 이것이 바로 야곱이 위기 가운데서 영적인 지도자로 다시 세워진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권세의 임재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그 시대가 달라도 창세기 35장과 사도행전 2장 그리고 19장은 모두이 문제에 대하여 일치를 봅니다.이 이성과 자율 오늘날 조국 교회는 능력 있는 복음의 역사보다는 사람의 지혜를 더 의지하는 선교 방식의 성부를 끄는 것 같습니다.
(28:52) 교회가 진리를 지닌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독으로서의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릴 때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인간의 제도나 전통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죄를 책망하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람의 계획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은 특별히 우리 시대의 교회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시대에는 언제나 성경 진리를 파수하는 것이 편한 종파주의자들의 종교적인 독선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도마스 아 케나스 1회로 성경이 말하던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거지는 망가졌으나 지성은 아직 근제하다는 그의 주장은 인간 지성의 자율 시대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29:24) 인간의 지성이 자율적이 되었으므로 인간은 이제이 한 영역에서 많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이 자유의 원리를 근거로 철학도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성경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의 통제를 벗어난 인간의 이성과 자율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제이 세상에는 인간 이외에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 정신을 불러왔습니다. 인간은 개인의 자유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로 봅니다. 이것은 개인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자율적 자유의 주구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29:56) 진리의 권위를 세우는 부호. 이제는 교회조차 시대 정신을 거스르는 일에 매우 약화되어 있으며 계시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도 상대적 회의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가진의 권위를 옹호하는 방법은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변쟁을 통하여 진리의 권위를 옹호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진리의 권위를 입증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마땅히 기체야 할 영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교회가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고 진정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대안을 가진 기관임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30:26) 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위대한 붕사 직전의 시대를 살펴보면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권위와 진리에 의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는지를 금세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17세기 후반에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18세기 초반에는 자연신론자들에 의하여 기독교의 진리가 신랄하게 공격을 받고 있었지만 교회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로이드 존슨은 이러한 상황에서 보여준 교회의 반응에 대하여 당과 같이 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교회와 진리의 권위를 다시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선의 해결책은 새로운 강좌를 개설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결정을 보았다.
(30:55) 그리하여 소위 보일 광자라는 것을 개설하였는데이 강좌는 지금도 매년 행해지고 있다.이 강좌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 목적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는 것. 즉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논중과 변 변증하게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기간 동안에 위대한 지성인이었던 버틀러 감독은 동일한 경향과 방식에 따라 종교의 분석을 썼다.이 모든 활동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성경과 복음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그들 시대에 적합한 편증학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가진의 권위는 그러한 편증에 의하여 파수되거나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31:26) 물론 이런 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교회가 가진 진리의 거룩한 권위는 그렇게함으로써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의 지적처럼 당시 기독교 진리의 권위가 그런 유능한 지성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지 빌드나 존 웨슬리 조나던 에드워즈 길버트 테넌트 등이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를 동반하는 복음사에게 부흥을 통하여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던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의 권위는 훌륭한 지성인들의 변정으로서가 아니라 부흥을 통해 권세이 있게 된 교회의 선포를 통하여 다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맺는 말 너무지 권이라는 말을 인정치 않으려 하고 모든 진리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만연한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간이며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참된 진리임을 어떻게 믿을 수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조교회는 마치 불신앙의 세력과 회주의 물결에 보이던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32:08) 세상 풍조의 물결이 더럽게 느껴질수록 조국 교회는 점점 초라하고 외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공격이 사소할 때는 우리가 교회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엄습함이 노도와 같은 전왕에서는 승리의 깃발을 세우실 뿐이 오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각성시키심으로써 진리를 위한 우리의 진구를 확신 있게 하시며 부흥을 주심으로써 교회를 권세 있는 공동체로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이 너무나 절실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행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그르고 우리가 버릴 수 없는이 세상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임하게 하며 진리를 위한 진분의 나팔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32:37) 부흥은 이러한 교회의 다급한 외침 앞에이 세상을 굴복하게 하는 거룩한 권세를 가져다 줍니다. Д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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