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흥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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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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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거룩한 부흥 제 7장 하나님을 경험함 부흥과 경험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내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내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창세기 35장 7절로 10절 부흥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교회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체험이 장애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리는 이것입니다. 창세기 35장 1절로 15절은 토막의 기사로서 이것은 모두 하나의 부흥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엄밀하게 나누면 두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00:44) 적 1절에서 8절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베들로 올라가는 야곱과 그 집안의 영적 각성의 단계를 그 이후 9절로 15절은 부흥을 통해 겪게 된 더 깊은 영적인 체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각성과 부흥은 그 위대한 하나님의 일의 시줄과 날줄입니다. 영적 각성의 깊이는 부흥의 심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과 교회의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그분을 뵙기를 갈망하는 각성은 이미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거기에서 거치지 아니하고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깊이 경험하게 합니다. 또한 특별한 느낌이 없이 차갑게 읽혀지던 진리들 속에 읽기든 자유케 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01:21)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무나 자주 오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내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내가 내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내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호세야 4장 6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삶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01:53) 이것은 모두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모든 종교와 삶을 움직이는 중심적인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계속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도 신앙과 사랑을 통하여 가능하게 됩니다. 히브리들의 사유 속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경험을 통한 것이 아니면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된 지식은 반드시 그들의 삶의 영향을 기칩니다. 따라서 오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고 비난하였을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에 가까운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02:26) 하나님께서는 일찍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속에 간직되어 전수됐어야 했습니다. 그 일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추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앙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어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02:52)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전제와 성품에 대한 정확한 성경 지식과 그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지식은 은혜 안에서 성장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성장이 없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난쟁이와 같은 삶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과 신앙에 있어서의 오류는 대부분 하나님 자신을 잘 알지 못하거나 성경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을 안다는 것이 곧 진리를 안다는 뜻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부흥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언약의 관점.
(03:28)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회의를 품는 대다수의 성경 학자들은 본문 35장 9절로 15절의 기사의 진정성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이 기사가 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편집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의 본문의 기사는 단지 이미 앞에 나오는 32장 24절로 31절의 내용의 전성적인 반복이라고 보는 것이 표니다. 즉 한번 기록한 사건의 기사가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면서 후대의 사람들이 원래 대용에 참가를 하고 기사를 반복해서 편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갑자기 30 당세기 35장 1절에서 8절에 문맥과는 상관이 없는 편집이 되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03:59) 그러나 이것은 일반 문학의 전성 이론을 따라 성경 본문을 피평한 것입니다. 명백한 사실은이 본문이 하나의 통일된 기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피고 있는 장석의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런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베들에서 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사실상 베델은 세계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으며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고 있는 헤브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머물다가 떠나고자 하였을 세계 땅에서 그는 여러 해를 보냈고 결국은 디나의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야곱은 신앙적으로 깊이 각성한 가운데 다시 베들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04:30) 따라서 창세기 35장 9절에서 15절의 기사는 다시 베들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부흥의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고 계시를 받았으며 의선에 관한 언약을 새롭게 갱신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기사의 시작 부분입니다. 야곱이 바딴 아람에서 돌아오매 창세기 35장 9절라고 번역된이 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바딴 아람으로부터 그가 들어온 때에라고 읽고 있습니다. 왜 모세는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그가 바다 나람에서 돌아온 것은 이미 오래 전이고 그는 지금 세계모로부터 베들로 돌아왔는데 말입니다.
(05:00) 오늘날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에이 기사가 창세기 자료의 전승사적인 편집으로 보이는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바다 나람으로부터 그가 들어온 때에 창세기 35장 9절이 구절은 창세기 28장에서 일어나 바다나으로 창세기 28장 2절 10절 가던 장면과 대칭을 이룹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개인적인 신앙 체험으로 들어간 것은 창세기 18장 바다나으로 가는 길에서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3장 35장 9절로 15절에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언약은 근거없이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기 28장과 32장에 나타난 언약의 갱신입니다.
(05:30) 그리고 그 언약은 베들을 중심으로 해서 바딴 아람으로 갈 때 이루어졌고 바딴 아람으로부터 떠나오는 가운데 갱신되었습니다. 행로상으로 보자면 그가 베들로 간 것은 분명히 세계으로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 나타난 언약의 행신과 창세기 32장에 나타난 언약의 제확인이라는 언약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이 행로는 바딴 아람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바담 아람으로부터 그가 들어온 때에라고 되어 있는이 부분은 언약의 관점에서 본 야곱의 행로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원자료를 가지고이 부분을 편해 가는 모세의 관심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06:00) 그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이를 위하여 그 백성이 어떻게 자기의 조상들과 관계를 가졌는지에 주목하는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언약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창세기 28장에서 35장에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다음과 같은 순서와 의미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18장 밭 아람으로 가는 길. 창세기 32장 바딴 아람으로부터 돌아오는 길. 창세기 35장 밭 아람으로부터 베델로 들어옴.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은 분명히 다시 야곱에게 나타났서라고 기록함으로써 전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신 사건이 전세기 32장의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06:32) 다시라고 되어 있는 본문이 이러한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뒷받침해니다. 회복된 유일신 신앙.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나안 땅 루스 곧 베들의 이을 얻고 그곳에 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35장 6절. 그리고는 그 땅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여 엘베델이라고 불렀는데이는 베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한글 개혁 성경은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베들이라 불렀으니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창세기 35장 7절. 그러나 우리들의 논의를 돕기 위해서는 좀 더 정확한 번역이 필요합니다.
(07:00) 이 부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을 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한 단을 세웠다. 그리고 그 장소를 엘베들이라고 불렀는데 왜냐면 그가 그의 형제의 낮추로부터 달아날 때의 그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전세기 35장 7절.이 이 부분에 대한 원문 사역이 보여주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첫째로 35장 7절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기사는 28장에서의 기사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말 개혁 성경은이 기사가 마치 반복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말 번역은 법문의 안에 있는 논리로 보더라도 모순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 위해서 이리로 온 것이 아닙니다.
(07:30) 또이 7절 앞부분은 그곳 이름이 베들에서 엘베들로 새롭게 명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저의 지적은 이것입니다. 그가 지금 배대를 열배들로 부르는 것은 우리 말 성경이 보여주는 것처럼 옛날에 그의 향의 낮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형의 낮으로부터 달아날 때의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다시를 의미하는 부사 오두가 쓰였습니다. 그가 베들을 엘베델로 부르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며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낯을 피하여 받아나라으로 도망할 때 나타났던 언약의 그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08:02) 둘째로 그 하나님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정관사를 생략하여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라는 의미를 가진 정관사를 반드시 번역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는 경우가 매우 희귀하기 때문입니다.이 작은 정관사 하나가 나설게 사용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일 신앙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따라 가나안 나비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세계에 머물러 삶으로써 거의 상실한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부흥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재은근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다시금 잊혀졌던 조상에 그 하나님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 자기를 나그네 길에서 인도하여 오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된 것입니다.
(08:36) 가난한 마음이 하나님을 부른다. 결국 야곱은 베들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이 영광스러운 부흥을 맡기 직전에 다시 한번 큰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 엘리브가의 유모였던 드보라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드보라가 경건한 부인이었으며 야곱의 가족은 그녀를 어머니처럼 존경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숨을 거둔 뒤 그를 매장한 장소에 붙여진 이름은 알론바은 곡캄의 상수리라는 뜻인데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커다란 애통 가운데 장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장 8절 야곱이 아직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드보라가 그들의 일행이 되었으며 또고 그 고령의 리비터스라는 학자는 당시 드보라의 나이를 최소한 170세로 초장한다.
(09:14) 그렇게 먼 길을 어떻게 여행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리브가가 자기 아들을 맞으러 출령을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종칼빈는 드보라가 야곱을 길렀으므로 어려서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가 추방되다시피 집을 떠나자 그의 추방의 이유를 알게 되어 신앙에 대한 존중심에서 야곱을 따라 나섰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야곱에게 있어서 드보라의 죽음은 디나의 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큰 불행이었습니다. 온 가족은 슬픔에 잠겼고 야곱은 마음에 의지할 일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애곡하였습니다. 왜 이처럼 삽입된듯한 데보라의 죽음의 기사가 그가 베들에 올라간 각성의 때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부흥 사이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장세기 기록자인 모세가 왜 그녀의 죽음의 사실을 영적 각성과 부흥을 보여주는 기사 한가운데 실었을까요? 저는 이것이 우연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09:55) 이 사건은 야곱으로 하여금 베들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데 필요했다고 믿습니다. 그가 세계에서 황급히 도망치듯이 떠나올 때는 세계 사람들과 가나한 족속으로부터의 보복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 땅을 벗어났고 한 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죄를 경험하게 하시는 영적인 부흥을 주시기 전에 그의 마음을 더욱 거전하게 하시고 그래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시는 일에 드보라의 죽음을 사용하셨습니다.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머니 같고 할머니 같은 드보라를 데려가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경험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10:21) 창세기 13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노복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내 자손으로 땅에 티끌 갖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내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행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내게 주리라. 창세기 13장 14절 57절. 그러나 아브라함이 일처럼 크고 영광스러운 언약을 받았을 때의 아브라함의 정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방금 아들처럼 사랑하고 곁에 두던 좆롯이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기를 배신하고 멀리 떠나가 버려 홀로 남은 외로운 때였습니다.
(10:50) 그 아브라함이 99세에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을 예고받은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잘못된 권고를 쫓아 불신앙으로 이스마엘을 낳고 그는 16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영적인 어둠 속에서 지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으로 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가혹할 정도로 긴세월 동안 영적인 밤을 지나게 하십니다. 창세기 22장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도 아브라함이 사랑하던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고 외로워하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려야 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날 만한 때에 나타나시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배웠게 됩니다.
(11:21)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과 환경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경과 가난한 마음의 밀접한 관계는 부흥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것도 바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에게 이르기 전에 이미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빛을 자기 시대에 교회에 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11:49) 부흥을 구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긍휼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긍휼를 구하는 자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사역을 위한 시간 계획을 세우고 행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함으로써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 하나님께서 참된 부흥을 주실 때에는 먼저 가난한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죽은 세상 한가운데 잠든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통하며 기도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준비시키십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아무 소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세우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의 은총을 회복시켜 달라고 열렬히 타운하는 마음입니다.
(12:19)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러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아니하면 살아갈 아무 희망이 없다고 믿는 믿음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질 때에만 우리는 거룩한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도 자신의 불교를 알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 아무 소망이 없다고 믿는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부흥은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고 교회를 깨끗게 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임재와 마주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며 그런 가난함 속에서 그의 심령은 거룩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12:49) 부흥을 위하여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아 우리의 마음은 왜 일이 부요한지요 우리의 속사람은 그분께서 한없는 은총을 주시고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시며 심지어 우리를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부르시기 전까지는 더무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데 우리는 이러한 영혼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게 일수입니다.이 영혼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가슴에 들리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것들에 과도에 집착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13:18) 현재에 이루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애통함이 없는 사람의 입술로 고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진실일 수 있을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인하여 보통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처절하게 자기와 외면하면서 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힘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아니라게 하는데 과도히 마음 쓰지 마옵소서. 우리의 겉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사모하는 우리의 속사람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릴 수 없을 정도로 부여해지거든 날 야곱과 같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게 하시거나 탐하던 것들을 빼앗쓰셔서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옵소서.
(13:51) 이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도무지 없나이다.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다면 야곱과 같은 스디슨 불행을 통해서라도 가난하게 되어지기를 소원합시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부요하여서 조국 교회와 자신의 가난한 영적인 형편을 보며 탄식할 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위적으로 부흥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만들어낸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진정으로 부흥을 갈망하지 않는 것도 바로 가난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요한 마음 이야말로 우리가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복음적인 시각을 갖고 있고 부흥을 바란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현재적으로 부흥이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흔느낌이 없다면 부흥을 위한 우리의 기대는 오기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14:25) 기대한다는 것과 갈망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례를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으로 기울어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빛 길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스가랴 7장 12절 에스라 7장 12절으로서 그 결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읽게 부흥의 도구로 쓰여졌던 에스라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그가 아닥사스다 왕 때에 바벨론으로부터 올라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윤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기 에스라 7장 10절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기적적인 은총으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까지 건축하게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가증한 일을 행하며 할례 없는 이방 백성들과의 자폰을 일삼았습니다.
(15:06) 그들은 한때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성전 건축을 위한 거룩한 신앙의 감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런 가정한 일을 서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한 에스라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내가이 일을 듣고 소옷과 겉옷을 짓고 보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수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의 침이니이다.
(15:44)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저소에 박힌 목과 같게 하시고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상하게 하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 9장 3절로 10절.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바라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부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대신 일상적인 교회의 기능으로서 매우 적은 열매 밖에 거두지 못하는 사역에 더 많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조국 교회를 신령한 능력으로 무장시키시고이 세상의 모인과는 다른 거룩한 기관임을 인정해 주셔야 할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조국 교회를 보십시오.
(16:21)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차지도 않고 덮지도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거룩한 선교의 소명에 불타는 마음이 없이 단지 교회의 규모를 유지하는 일만으로도 확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그러한 지지부진한 선교 상황을 축복해 주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행하실 때 교회가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의 가난한 영적 현실을 인하여 애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중생케 하는 역사의 무능한 현실에 대하여 아파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부요한 마음 때문입니다.
(16:51) 야곱이 베달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부흥을 경험하기 직전 하나님께서 그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드보라를 데려가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 말을 갈망하는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함. 야곱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다시 베들에 나타나셨습니다. 1절에서는 베들로 올라가서 간을 쌓으라는 명령을 주시기 위하여 위해서 나타나셨지만 9절로 13절의 사이에서는 야곱에게 새롭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언약을 갱신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일찍이 없었던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수준의 신앙으로 진하게 됩니다.
(17:21) 부흥의 가장 두렷한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깊은 체험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성령의 강한 임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하나님을 새롭고 깊게 집단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는 부흥이라고 부릅니다.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저는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 왜냐면 저의이 말을 듣는 순간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렇 주관주의에 흐른 체험주의나 은사파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말할 때 신비 체험이나 은사 체험을 연상하기 싶습니다. 물론 그런 체험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범주 안에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7:49) 그러나 부흥의시기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말함에 있어서 보다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인격 체험입니다. 그분과의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영광과 능력에 대한 체험은 신비한 경험을 수반할 수 있지만 신비한 체험이 곧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에 대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비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약점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험보다는 능력에 대한 경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을지라도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힘쓰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거룩의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8:18) 이런 거룩의 갈망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인격을 경험함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거룩. 우리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할 때 그 거룩은 두 가지 신학적인 개념을 내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만물 위에 초월에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의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인식을 가져다 주는데 첫째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인간은 단지 가치 없고 댓글 같은 비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고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도덕적으로 불결한 죄인을 따름이라는 인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이나 시인들, 신약 시대의 사도들이나 거룩한 교부들, 종교 개혁자들이나 종교도들, 그리고 이후 시대에 거출한 영적인 인물들의 글들에서 공통된 특징을 발견합니다.
(18:53)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완전하심에 대한 마르지 않는 찬사와 인간에 대한 철저한 비하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그들의 설교뿐 아니라 기도에도 나타나고 심지어 편지나 요원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무엇 때문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의 발과 글 속에 이러한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도덕적인 성품이 얼마나 눈부시도록 완전하고 아름다운 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을 때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19:21) 그러나 그 두려움은 파괴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속된 사랑과 구별되게 만드는 경건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부흥을 경험하기 직전에는 종종 무서운 두려움을 회심의 기도으로 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부흥의 때에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사랑의 치밀함을 가로막지 아니하는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는 깊은 회심의 뜻을 기도합니다.이 점에 있어서 회심을 경험한 이후에 자인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신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조나단의 네두워지의 담과 같은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이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점차로 더욱 강해져서 점점 더 활발하게 되었고 그러한 내적인 달콤함을 더 많이 경험했습니다.
(19:53) 만물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거의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욕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전에는 천둥과 번개처럼 나를 무섭게 만드는 것은 없었습니다. 전에 나는 천둥 소리를 들으면 소술하치게 놀라곤 했습니다. 그리고 전둥치고 부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전둥 관계가 나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회심 이후에 나는 처음 천둥치고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죄를 놓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구름을 쳐다보고 옮겨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만드신 천둥의 위험 있고 두려운 목소리를 듣고 했습니다.
(20:23) 전하다 에드워지의 글 속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관한 표현은 그의 거룩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경험하게 될 때 성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신앙 고백 속에서 언급된 교묘사들의 의미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제껏 사람들의 입에서 오른데리는 진부한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 속에서 지각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새로운 단어들과 비유들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도어제시한 고백을 읽으면서 유난히 자주 보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줍니다.
(20:51) 정확한 본역은 힘들지만 특히 아름다움이나 달콤함, 기쁨 같은 단어들은 그렇습니다. 아 이런 표현들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도 아주 빈번이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제 1차 대각성의 영향이 계속되던 1743년 3월에 쓴 그의 일기 중 두토막을 예로우듭니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되고 싶은 갈망으로 그분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은밀히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과 최근에 내면적으로 시련을 받고 고통하여야 했던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달콤한 기쁨으로 소생하는 것을 느꼈다.
(21:21) 1743년 3월 7일 정호가 되면서 나는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영적으로 죽은 것 같아서 도저히 설교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 기도할 때는 너무나 연약해진 나머지 거의 일어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창세기 5장 24절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설교했을 때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셔서 달콤한 자유와 분명함 그리고 어떤 부드러운 힘을 가지고 한시간 반이나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살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였고 그 말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백세로 남기고자 하였다. 1743년 3월 14일 칼빈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 아는 것만큼만 인간 자신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21:55) 갈빈이 인간에 대한 가혹할 정도의 평가자라는 인간에 대한 무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그의 경험이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게 일도로 만들어 준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뿐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움직인 걸줄한 신학자들이 이러한 거룩의 경험을 통해서 신학적인 입장을 수정하게 된 이해는 너무 많아서 일일히 매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적인 은총의 빛 아래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나 가톨릭 신자였던 종 칼빈이 종교혁자로 들어한 것이나 자기의 의에 의하여 구원을 얻고자 머물림치던 마틴루터가 인간의 절망적인 죄인됨과 이신층의 교리를 주장하는 종교 개혁자로 돌아선 것이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을 주장하던 교리에 반감을 갔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칼빈 주의자로 사회한 것도 모두 거룩의 경험이 가져다 준 결과였습니다.
(22:34) 그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임스 브케의 나음과 같은 지적은이이 점에 있어서 전곡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역사는 융성과 세태에 있어서 개인의 신앙 경험과 매우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6세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교회의 개혁은 그 원천과 기원이 특별히 선택된 몇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에 있는데 독일과 스위스 영국 등에서 동시에 성령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에 빛이 있었다. 이처럼 부흥은 항상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23:06) 거룩의 경험을 중반하지 않는 부흥이 참된 부흥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부흥이라고 부르는 영적 현상을 동반한 여러 가지 운동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부흥을 경험하는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는 것도 결국 거룩의 경험이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거룩의 경험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다만 티끌릴 뿐임을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기를 원하는 갈망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교만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감히 자신들을 하나님의 파트너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23:35)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반없이 더러운 죄인의 불과하는 인식이 반복되지 않으면서도 익숙해지는 성김에 있어서 하나님 말을 인정하고 높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흥은 우리의 현실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증거를 보이시면서 개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경험하게 합니다. 부모 가운데 있는 죄악을 불사르며 대적하는 원수들을 위해 교회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그분이 천히 세우신 신적인 기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격적이 있기 때문에 감정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24:02) 일반적으로 붕이 오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새롭게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심으로써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이전에 자기의 행복밖에는 모르던 사람들이 자기의 죄악과 더러움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이전에 자기가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전에 도저히 기도 제목이 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자기의 성결라면 물론 교회의 거룩한 변화를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24:29) 왜냐면 이렇게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은 자기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교회와 자기가 아는 모든 사람들 나가서 온 땅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게 되기를 처절하도록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열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 일들을 이루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크고 자기이 자신은 너무나 작다는 사실을 합니다. 자신들을 여어싸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나 크고 그것들 앞에서 자신들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이것은 때로 깊은 절망을 동반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거룩한 외로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24:54) 그래서 부흥을 구하는 일은 항상 현실에 대한 자기 한계를 온전히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라.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던 시대의 교회마다 거짓된 만족에 빠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적 각성 없이는 교회와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시각에 서서 교회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되고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열정 혹은 정념을 동반하여 전해집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차갑고 냉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하여 냉담해지고 세상은 죄에 대하여 더욱 담대해져 가고 있습니다.
(25:24) 이 문제에 관하여 조국 교회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쓸데 없이 뜨겁거나 너무나 냉담하다는 것입니다. 매주를 회심하는 예배자들이나 영적 회복의 감격에 빠지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예배에 익숙해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차가운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그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보다 힘들고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석구상에서 그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을 정도로 냉담해져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쓸데없이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조국을 교회 일각에서 볼 수 있는 열정 주의는 부흥의 특징이라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령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25:52)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에 서서 시대와 교회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데 여기서 비롯되지 않는 열정은 기질적 흥분의 차원을 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경과 교회의 역사 기록을 통하여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정령과 감정 이입의 문제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는 열정은 길적인 흥분에 그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우리는 기질의 상관없이 열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고 그 마음을 전수받을 때 그것은 결코 인간적인 기질 같은 것으로 가두워 줄 수 없습니다.
(26:22) 물론 그것은 개인의 기질과 성품에 따라서 다소 조절되기도 하고 다른 양식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냉담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가 다시 타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 속의 감정 이와 같은 예는 성경에서도 수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로 비롯되는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생애에서 너무나 일반적으로 나타난 일이기 때문에 일일이 예를 들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만 예를 돕고 제 견해가 성경적임을 보여 드리기 위해 대표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 세 개를 인용하겠습니다. 각각의 예에서 소개되는 인물은 모세와 사도 바울과 예레미야입니다.
(26:52) 첫째로 모세의 경우입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자오되 슬프도 소이다.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금범죄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근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굽기 32장 31절로 32절.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반역해 오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걸고 중보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모세 자신 속에 기질적으로 내지하는 사랑이나 정렬이 아닙니다. 둘째로 꼭 같은 장면이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반복됩니다.
(27:2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답으로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권력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조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장 1절로 3절 새로는 예레미야의 경우입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지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류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7:47) 예레미야 20장 8절로 보자. 그런 자신 속에 일어나는 정이 이미 자신의 육체의 통제로 감당기 어려울 정도에 불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열정의 기원이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부어진 이러한 정념의 특징은 그 같은 열정의 발동 동기와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에서 기질적인 흥분주의나 정렬과는 뚜렷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조국 교회는 주일날 예배에는 나오지만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이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28:13) 이 사람들이 결국 교회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참된 부흥을 기대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면 결국 그 부담은 교회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교훈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세 해보너어가 참된 부흥의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소위 주일 아침 예배에만 참석하는 기독교 신앙이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게 하시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식의 밝은 빛을 주셔서 오늘날 널리 유포된 오류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8:40) 그리하여 교회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는 지식에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곧 부흥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