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을 자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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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축제에 참여하라 본문: 사도행전 2:37-42

서론: 당신의 신앙생활은 축제입니까, 숙제입니까?

어떤 사람이 거금을 들여서 유명한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놀이공원 정문 앞에 서서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야기합니다. "야, 여기 롤러코스터가 진짜 재밌다던데.", "여기 퍼레이드가 기가 막힌대." 그렇게 하루 종일 입구에서 지도만 보며 이야기 하다가 집에 갔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놀이공원을 즐긴 겁니까? 아니죠. 그냥 뭐 공부한 겁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오늘날 많은 청년들의 신앙생활이 이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엄청난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교리도 알고, 성경 지식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정작 그 복음의 기쁨 속으로 뛰어들어 누리지는 못합니다. 혹시 요즘 교회에 오는 것이 축제에 가는 설렘이 아니라, 해치워야 할 무거운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지도만 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장에는 복음을 진짜로 누리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원래 두려움에 떨던 자들이었지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청년들이 신앙의 입구에서 서성이지 않고, 하나님이 차려주신 복음의 축제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1: 누림의 시작 - 아픈 찔림은 초대장이다

복음을 누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의한 찔림입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포했을 때, 3천 명의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이 찔림은 고통스럽지만 축복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엄지 손가락에 아주 작은 가시가 박혔었습니다. 건드릴 때마다 따끔거리고 아픕니다. 그리고 티눈이 막 자라났습니다. 정말 엄지 손가락이 하나더 나올것 같았죠. 두렵고 짜증이 났었습니다. 계속 통증이 심했습니다. 그 통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시가 박힌 줄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살들이 트고 겹쳐서 손가락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통증은 나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여기에 문제가 있으니 얼른 빼내라"는 몸의 구조 신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내 양심을 찌르고, 나의 숨겨진 죄를 건드리는 것은 나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도 닭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이 찔려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아픈 찔림이 있었기에 그는 가룟 유다처럼 떠나지 않고, 썩은 살을 도려내어 다시 수제자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신을 '괜찮은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뼛속까지 죄인인 존재들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마음의 보좌에 '나 자신'이라는 우상을 앉혀 놓고, 돈과 명예, 내 안락한 삶만을 위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탐욕스럽게 "내 것, 내 영광"을 외치며 왕 노릇 하려 할 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종처럼 발가벗겨지셨습니다. 우리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 예수님은 그 교만의 대가로 십자가라는 처형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명령,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피곤하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이유로 생명 같은 예배를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았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귀찮아하며 등을 돌릴 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며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우리의 불성실함이, 우리의 게으름이 예수님을 그 처절한 고독 속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앞에 떳떳하십니까? 겉으로는 효도하는 척하지만, 뒤돌아서서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짜증 내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부모와 권위자에게 내뱉은 그 독 섞인 말들이, 가시관이 되어 예수님의 머리를 찔렀습니다. 우리의 거역하는 눈빛이 예수님의 이마에서 피를 쏟게 만들었습니다.
"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자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 난도질하고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 용서하지 못하는 그 악독한 마음이 예수님의 손바닥과 발등에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여러분이 누군가를 미워하며 주먹을 불끈 쥘 때마다, 골고다 언덕에는 '캉, 캉' 하는 망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못은 로마 병정이 박은 것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미움'이 박은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또 어떻습니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니 죄가 아닙니까? 주님은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우리의 눈과 생각은 얼마나 더럽고 음란합니까? "아무도 모르겠지" 하며 즐겼던 그 추악한 상상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발가벗겼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쾌락을 씻기 위해, 주님은 살점이 뜯겨나가는 채찍질을 견디셔야 했고 옆구리에 창을 맞으셨습니다.
우리는 탐욕스러운 도둑들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요?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교묘한 말로 이웃을 깎아내려 그들의 평판을 도둑질하고,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정죄하고 험담하는 입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그 순간에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토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우리는 이웃을 죽이는 말을 내뱉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우리를 위해 용서를 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찢긴 살과 흐르는 피를 보십시오. 그 상처 하나하나가 바로 내가 지은 죄의 증거입니다. 내가 뱉은 거짓말이, 내가 품은 음란함이, 나의 교만과 혈기가 예수님을 저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내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뼈저린 찔림과 통회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프다고 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너는 이제 그 죄의 가시를 빼고, 내가 주는 진짜 자유를 누릴 때가 되었다"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초대장입니다. 이 찔림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됩니다.

본론 2: 복음을 누리는 방법 - 비움과 채움

사람들이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복음을 누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회개: 탕자처럼 비참함 속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 회개는 내 힘으로 멋지게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비참함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아시죠? 그가 집을 나갈 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떨어지고 친구도 떠나고, 돼지 쥐엄열매조차 없어서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 비참한 현실이 그의 뼈를 찔렀습니다. 그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에 가서 종이라도 되자." 여러분, 만약 우리가 부산행 기차를 탔는데, 목적지가 서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온 게 아까우니까 끝까지 가보자"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다음 역에서 당장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편 열차를 타야 합니다. 그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회개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기차를 탔음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내려 아버지께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는 것입니다. 비참함이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돌아갈 타이밍입니다.
세례: 죄 씻음과 새 생명의 공개적 선언 회개가 마음의 결단이라면, 세례는 그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한 자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출교를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숨지 않았습니다. 축구 선수를 생각해 봅시다. 국가대표 선수가 가슴에 태극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섭니다. 그 유니폼을 입는 순간,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됩니다. 관중들은 그 유니폼을 보고 환호합니다. 세례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세례는 "나는 이제 예수님 팀의 선수입니다"라고 내 영혼에 유니폼을 입히는 것입니다. 물로 씻는 예식을 통해,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세상 앞에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관중석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라는 영적 유니폼을 입고,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입니다. 이 공개적인 선언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누리게 됩니다.
죄 사함: 간음한 여인처럼 정죄함이 없는 누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은 죄 사함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과거의 실수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100억 원의 빚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평생 일해도 못 갚을 돈이라 절망하고 있는데, 어느 날 누군가 그 빚을 전부 다 갚아주고 영수증까지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더 이상 빚쟁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돌을 들고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감싸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100억 원보다 더 큰 죄의 빚을 다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 사함입니다. 세상은 "너 그때 그랬잖아"라고 정죄하지만, 주님은 "다 갚았다. 너는 자유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은혜를 믿을 때 우리는 죄책감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결론: 누림의 완성 - 홀로 말고 함께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캠핑장에 가서 모닥불을 피워본 적이 있나요?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에서 숯 하나를 집게로 꺼내 따로 두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뜨거웠던 숯이라도 금방 식어서 새카만 재가 됩니다. 하지만 식어가는 숯도 다시 불타는 장작더미 속에 던져 넣으면 금세 다시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 신앙도 똑같습니다. "나는 혼자서도 잘 믿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세상이라는 찬 바람이 불면 혼자 있는 신앙은 금방 식어버립니다.
복음의 누림은 공동체 안에서 완성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인 장작이 되어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 패역하고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혼자 버티려 하지 마십시오. 탕자처럼 주님께 돌아와 죄 사함의 자유를 얻고, 모닥불 같은 공동체 안으로 깊이 들어오십시오. 함께 떡을 떼며 웃고, 서로를 위해 울어주는 그곳에서 복음의 축제를 매일 누리는 행복한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는 입구에서 지도만 보듯 복음을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우리의 찔림을 통해 죄의 가시를 빼내게 하시고, 잘못 탄 기차에서 내려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또한 혼자 신앙생활 하려 했던 교만을 버리고, 따뜻한 모닥불 같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며 복음의 축제를 누리는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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