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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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로마서 7:24 NKRV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세상이 말하는 교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교회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뉴스다 대충매체에서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할 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할까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목사가 무슨 사고를 쳤을까? 걱정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그런 뉴스에 나오는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고,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생활, 진짜 믿음은 무엇인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아메리카노, 카페라떼가 아닌 에스프레소 원액과 같은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 본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그것에 우리 삶을 집중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현실,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먼저, 성경이 우리의 현실,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7:24 NKRV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바울이 우리의 삶이 곤고하다고 말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비참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비참한 삶에서 우리를 건져주어야 한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 잘 공감하지 못합니다.
“내가 비참하다고? 왜? 나는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 비참함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려면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이 정말 스스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돈이 없어서 덜 행복한데, 돈만 있으면 난 행복해질거야.
명예만 있으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예쁜 사랑을 하게 되면,
남들에게 인정받는 성공을 하게 되면,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귀면 행복해질거야.
우리는 다들 행복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걸면서
그것이 나에게 채워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 모든 생각을 뒤집어준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갑작스런 자살, 죽음.
어떤 유명 그룹의 대표가, 재벌 사업가가, 젊은 유망주 CEO가
갑작스럽게 삶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생을 막 사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유명 연예인, 재벌, 성공한 사업가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행복의 모든 조건을
다 가져본 사람들입니다.
어마어마한 돈, 세계적인 인기와 명예, 업계 최고의 성공,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남긴 한 마디는 비슷했습니다.
“불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인생의 정점을 찍고 나서 외치는 한 마디가
“불행하다, 허무하다” 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우리 모두가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자, 열심히 달려 가봅시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이 길 끝에 가면 행복이 있겠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훨씬 빨리 도착한거야.
“난 행복을 더 빨리 찾고싶어. 그래서 더 빨리 뛸거야.”
“오 빠르다. 대박. 부럽다...”
그렇게 휑~ 하고 지나갔는데,
얼마 후 저 앞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거야.
여러분~ 빨리 돌아가세요. 여기에는 행복이 없어요.
오징어게임
마치 오징어게임 시즌 3에서
이미 그 게임을 끝까지 한번 경험해본 주인공이
“이 게임은 끝까지 가면 결국 다 죽어.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바랬던 목적지가
결국 불행이고 허무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456억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모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옥의 게임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일단 한 가지 결론은 얻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방법, 그 길은 아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확실히 돈, 명예, 인기, 성공, 목표를 이루는 것, 사랑
이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인생의 정점을 찍었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갈망하는 그 어떤 것을 겨우 겨우 노력해서 얻었는데
막상 그 안을 까보니, 내가 바라던 “행복”이 없었던 거에요.
그것이 바로 인생 최대의 허무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가져본 솔로몬 왕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도서 1:2 NKRV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세상의 조건이 주는 행복의 결말을
헛된 것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었는데.
그러면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건 다 가져본 자의 교만, 욕심, 자만함 때문이지
나는 그정도만 가져도 충분히 누리고 행복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앞에 달려간 이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그들만큼 돈, 명예, 성공을 얻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이런 꿈을 꾸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세상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서 꼭 성공해서 행복해 져야 한다.”
그래서 책 중에 가장 잘 팔리는 분야가 무엇입니까?
자기개발서 분야입니다.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
성공하는 습관,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돈버는 방법, 말을 잘하는 방법.
이런 제목의 책들이 항상 베스트 셀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달려가서 결국 그 모든 것을 얻어도
그 곳에 행복이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죽음을 통해서 간절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길 끝에는 너희가 찾는 그 행복은 없어.
제발 돌아가. 나도 맞는 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아니야.”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 이유를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곤고한 이유, 우리의 삶이 비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착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물론 우리가 이미 교회에서 사람은 원래 악한 존재이다.
학교에서도 성선설, 성악설이 있는데 기독교는 성악설이다.
귀로는 많이 듣고,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여러분 스스로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정말 악하다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원래 착한 사람도 있지 않나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알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착한 사람인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깊이 파해쳐보면,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 하나로 내가 악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빠르고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신 깊이 생각하지 말고,
질문을 듣는 순간 3초 안에 빠르게 답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 3가지.
남에게 대답하려고 생각하는 거 말고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떠오른 거 3가지가 뭔가요?
아마 대부분은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정도로
선한 생각이 단 한개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투명인간이 되어서 남몰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악한 사람을 혼내주고 싶은 생각을 했을까요?
이처럼 우리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악함’의 본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기회와 권력이 생기게 되면
나조차도 옮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에 대해서
불쑥 불쏙 욕심이 생기고, 그것들을 마음대로 얻으려고 합니다.
로마서 3:10 NKRV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1. 죄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가
바로 이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다 죄 하나씩은 짓고 사는데.
아무도 모르는 내 속의 작은 악함이 나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든다고...”
과연 그럴까요?
아마 우리들 마음 속에 각자가 바라는 꿈, 미래, 비전,
삶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 꿈이, 내가 바라던 목표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꿈을 이루게 되면, 대부분 우리에겐 힘이 생기게 됩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아랫사람은 두는 힘’이 생기고,
주목 받는 일을 하게 되면 ‘명성’이라는 힘이 생기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명문대생’이라는 힘이 생깁니다.
돈을 많이 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 힘을 얻으면
그 힘을 정말 올바른 곳에만 쓸 수 있을까요?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가 당당하게 “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이미 우리는 수많은 뉴스와 사건들을 통해서
이 힘에 취해 자신의 죄를 마음껏 내뿜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투명인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악한 생각부터 떠오른 것처럼
우리 안에는 죄를 향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결국 그렇게 내 안에 가득했던 죄악들이
세상의 권력과 힘을 통해 발산한 기회를 얻게 되면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함부로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꿈을 이루었다가
그 꿈으로 생긴 힘을 주체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가 더 행복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꿈과 목표마저도 독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 욕심이 우리의 삶을 죄의 구렁텅이로 계속 몰아 넣습니다.
소유욕
서두에 사람들이 행복을 말할 때, 소유와 조건을 통해서
행복할 것이라고 많은 기대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내가 돈만 있었어도, 애인이 있었으면,
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지금처럼 불행하게 살지 않을텐데...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인간의 이 욕심을
완전히, 행복해 질때까지 다 채울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얘기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을 보면
누가 뇌물, 횡령, 비리를 저지릅니까?
오히려 돈 많고,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저지릅니다.
우리가 볼 땐, 저정도 가지고 있으면 충분할텐데. 행복할텐데.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더 가지려고 난리들일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같은 하찮은 시민들은 말입니다.
먹고 살만한 양반들이 도대체 왜 저럴까?
내가 쟤만큼 돈이 있었으면,
나는 저렇게까지 욕심 안 부릴 자신 있는데.
목회자도 사례비 욕심이 난다
근데 저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저는 정말 돈 욕심이 없었어요.
제가 처음에 전도사 시작할 때 거의 15년 전인데
그때 제가 65만원 받고 파트전도사를 시작했어요.
그때 전담전도사님들이 150만원 정도 받았고,
부목사님들이 250만원 정도 받았어요.
그래서 저는 전담전도사님만 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물론 부모님 댁에 얹혀 살아서 생활비 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혼자 살면 월세내고, 아껴 쓰면
조금씩은 남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때는 호봉이 있어서 매년 5만원씩 올려줬어요.
그래서 제가 파트전도사 졸업할 때 85만원까지 받았어요.
그리고 전담전도사가 되니깐 처음에 140만원을 주더라고요.
처음 1-2년은 진짜 돈이 남더라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 댁에 살았으니깐.
그런데 결혼하고, 생활비 내면서 교통비, 식비, 통신비, 관리비
다 내 월급에서 나가려고 하니깐 쉽지 않더라구요.
그러다가 부목사가 되서 처음에는 230만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물가도 같이 오르니깐 이 돈도 쉽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자녀가 생기니깐 더 들어갈 돈이 필요하고,
부목사라고 전도사 때랑은 다르게 무슨 회비, 교역자 연금
이것 저것 다 오르더라구요.
그래서 요즘에는 돈 욕심이 정말 많아졌습니다.
전도사 때는 부목사만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돈 많이 주는 큰교회 부목사가 부럽고,
안정적인 중형교회 담임목사님이 부럽고 그래요.
목사인 저도 이렇게 직급이 올라가도 더 높은 사람이 부러운데
1억 버는 사람은 10억 버는 사람이 부럽고
10억 버는 사람이 100억 버는 사람이 부러운게 바로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래서 대회를 해도 3등은 2등이 탐나고,
2등은 1등은 탐나고, 1등은 안정적으로 유지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심은 마치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목이 마른데, 눈 앞에 바닷물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 물이 분명 짠물이어서 먹으면 안되는줄 아는데
욕심에 너무 목이 마르니깐 나도 모르게 본능에 이끌려
바닷물을 한번 퍼마시니깐, 계속해서 갈증을 느껴
바닷물을 퍼마시다가 결국 그 물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가 경고한 죄의 원리입니다.
야고보서 1:15 NKRV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은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성취욕
소유에 대한 욕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취욕도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최고가 되어야 해, 더 크게! 더 높이 올라가야 해.
남들보다 더 많이 키워야 해.”
뭘 키워요? 근육을? 스펙을? 실력을?
그래서 우리는 작은 성취가 주는 보람이라는 마약 때문에
때론 스스로를 끝없는 목표로 몰아갑니다.
물론 성취감을 통해서 사람이 발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 성취감이 작은 행복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확행”을 추구하자고 많이 이야기 합니다.
너무 큰 욕심 말고,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소소하고 확실한 작은 행복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발전하고, 성장하는 목표 지점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 성취의 끝도 욕망의 끝과 닿아 있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성취하려고 하는 욕심.
그렇게 해서 결국 끝까지 도달했는데, 1등 했는데,
누구보다 더 멀리, 높이 닿았는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앞서가려는 내 욕심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
그런데 죄의 결과는 욕망, 욕심만이 다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죄책감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는 어쩔 수 없이 본성적으로 악함, 죄성이 있기 때문에
평생 죄를 짓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순간에 늘 잘못된 선택,
실수, 악한 생각과 행동들이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실수들은 우리에게 죄책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그 일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떡하지?”
“아직 피해자가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 일 때문에 갑자기 나에게 피해가 오면 어떡하지?”
이런 뒷감당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 자신에 대한 수치와 실망감 때문에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때로는 그 실패와 죄책감에 대한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삶의 모든 행복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죄 때문에 생기는 결과가 내 안에 있는 욕심과 죄책감
이것 뿐일까? 아닙니다.
관계의 문제
각자 죄를 품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사회 속에서
빈번하게 다툼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면서
지켜야 될 선을 넘는 일들도 발생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의 우정이 깨지고, 부부가 서로 이혼하고,
서로의 약점을 비방하고, 해서는 안될 말로 상처를 주면서
관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회 구조적인 악
거기에 각자의 죄들이 모여서 때로는 구조적 악을 만들기도 합니다.
유튜브 숏츠를 보다가 영화 <더 킹>에서 정우성이 조인성한테
자신의 조직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하면서 했던 대사를 보았습니다.
<영상 - 더킹 정우성 조인성>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원래 다 그렇다면서
구조적인 악은 오래 전부터 항상 있어왔기 때문에
그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 흐름을 잘 타야 성공한다.
혼자만 고집부려봤자 바보가 되는 것이다.
사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구조적 악 속에 숨어서 다같이 죄를 짓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자신의 죄책감을 합리화 합니다.
그래서 수치와 실망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낀 죄악은 단순하게 부정적인 면을 넘어서
우리의 삶 자체를 비참하게, 참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인지 부조화입니다.
당연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합리화해서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죄보다
더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까요?
2. 죽음
여러분, 만약에 어느 날 집에 왔는데
항상 그 시간에 계셔야 할 엄마가 보이지 않는거에요.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보세요?” “아… 엄마 어디야?”
“응, 병원에 잠깐 왔어.” “병원? 병원은 왜?”
“응, 검진 좀 받으러. 요즘 아랫배 쪽에 뭔가 단단한게 만져지네.”
“뭐라고?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에이 설마, 별거 아니겠지 뭐. 집에 콩나물국 있으니까
우선 그거 먹고있어. 끊을게.”
이 통화를 마친 여러분의 기분은 어떨까요?
그때부터 아마 굉장히 무겁고 심각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두번째 원인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을 처음 알게 된 아이
어느 날, 6살 된 아이가 갑자기 울면서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왜 우냐고 묻는데, 대답도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합니다.
계속 달래서 겨우 진정된 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엄마도 죽어?”
이 6살 된 어린 아이가 죽음이란 존재에 대해서
처음 인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 누구나 죽지. 엄마도 언젠간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아직은 아니니깐 너무 걱정하지마.”
아이는 그 다음 날까지 밥도 먹지 않고 엄마만 보면
훌쩍 훌쩍 울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가장 큰 크기의
공포와 좌절을 느껴서 그랬겠죠.
아이에게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보이는 엄마도
결국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연히 평생 나와 함께 할 줄 알았던 엄마와
언젠가는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어린 6살 아이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
그런데 이런 죽음의 공포와 좌절을 어린 아이에게만 있을까요?
아니죠. 사실 우리에게도 죽음이란 문제는
너무나 무겁고 두렵게 다가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그 어떤 행복과 계획도 죽음 앞에선 허무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앞에서 죄와 욕망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렇게 큰 욕심은 없어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라면 행복해요.”
“정말 내 옆에 소중한 사람만 함께할 수 있다면 전 행복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란 존재가 있다면
그 행복의 마지막이 얼마나 가슴아픈지도 알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한 만큼 죽음의 이별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뿐 아니라
순식간의 나의 모든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아마 오늘도 누군가는 교통사고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목숨을 잃었던 사람 중에
어느 누가 오늘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있었을까요?
그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계획, 꿈, 관계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오늘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이유는
어떻게 올지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죽음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NKRV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래서 죽음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마주할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우리 영혼 깊은 곳을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회피하는 우리의 방법
그래서 우리는 이 큰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일부러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줄 알면서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삶에 집중하면서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어지겠지...”
그런데 아까 나눴던 예화처럼
갑자기 엄마의 건강검진 소식을 들으면서 죽음의 인기척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잊고 살았던 죽음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되고,
이 공포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몰라하며 허덕이게 됩니다.
사람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죄와 죽음이 존재하는 한.
여러분, 가수 GOD의 “길”이란 노래를 다 아시죠?
이 곡은 지금도 가끔 유튜브를 찾아보면,
많은 가수들, 일반인들이 부르면서 계속 회자되는 명곡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참 희한합니다.
대중가요인데, 보통의 가요들 가사는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길”이라는 곡의 가사는 우리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이 가사를 누가 썼고, 누가 불렀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가수와 작사가의 고백입니다.
결국 이 곡에 담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깊은 고민을 하게 하고,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서 엄청난 주목과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가요프로그램 7주 연속 1위.
KBS, MBS, SBS 방송3사 2001년 대상.
2001년 골든디스크 음반 대상.
이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 솔직히 지금 너 행복하니?
우리가 지금 꾸는 꿈을 모두 이룬다고 행복해질까?
인생은 정말 그냥 이렇게 달려가도 되는걸까?
사실 행복은 도달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진짜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모두가 마음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비밀 같은 두려움을 드러내고, 이야기 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였던 유명 가수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왜 저는 오늘 이렇게 수련회라는 중요한 시간에
여러분을 한자리에 다 모아놓고,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예수님을 보내야만 했으며,
예수님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분이라고 말해도,
여러분이 그 필요를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면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도 잠시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기쁨을 주는 가치과 의미들이
결국은 죄와 사망 안에서는 온전한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여러분에게 있어서 취업, 결혼, 연애, 진로 이런 주제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여러분이 바라는 꿈, 비전, 목표를 다 이룬다 해도
결국 그 인생의 끝은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 이루고, 성취하고, 성장하고, 성공해도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
죄와 사망을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과연 그 방법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가장 이상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격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언제 느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을 외모, 능력, 소유, 성격과 같은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를 사랑해줄 때, 그 사람의 존재.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때,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느낍니다.
자매들이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오빠는 내가 왜 좋아?”
이때 형제들, 대답을 잘해야 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될까요?
“오빠는 내가 왜 좋아?” “너라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자매들은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멘트는 그럴싸하게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너의 조건을 보고 사랑한게 아니야. 그냥 너라서 좋은거야.
너라는 존재 자체를 나는 사랑해.
그런데 사람이 정말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랑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우리는 사실 그 사람의 내면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외면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박스,
아직 뜯어보지 않은 택배박스를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장된 박스를 받고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난 널 사랑해.
넌 이제부터 내꺼야. 오늘부터 우린 1일!
그래서 그 박스, 그 선물을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내꺼 하기로 결정하고, 박스를 뜯었는데,
그 안에 벽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조건적 사랑
연인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웃는게 너무 귀여워. 그녀는 늘 밝아서 좋아.
그 오빠는 옆에 있으면 늘 든든해.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야.
친구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에요.
쟤랑 함께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 그냥 기분이 좋아.
쟤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줘. 쟤한테는 속얘기를 다 말해도 될 것 같아.
쟤는 기타를 정말 잘쳐. 쟤는 돈이 많아. 그래서 잘 사줘.
여러분, 심지어 반려동물도 예쁘고 귀여운 동물이 사랑받습니다.
못생기고, 무섭게 생긴 동물들은 집사들에게 잘 간택되지 못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는
부모님의 사랑조차도 외모와 조건을 봅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다른 부모들에게 칭찬하기 바쁩니다.
“우리 아들은 있잖아… 공부밖에 몰라. 그래서 순해 빠졌어.
그래서 삼성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여자친구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래.”
그런데 지방대 나와서, 중소기업 다니면서 적응 잘 못해서
여기 저기 회사 옮겨다니면서 결혼도 못하고 집에만 있으면
“아이고 속터져. 저놈의 자식은 언제 철들어서 장가갈까?
“내가 동네 창피해서 옆집 순이 엄마 얼굴을 못보겠어.”
사랑이란 것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좋은 사랑, 진정한 사랑이란 것은 알지만
사실 그런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사랑조차도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주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결국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한번 우리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면밀히 살펴볼까요?
만약에 내 삶을 365일, 24시간 일거수 일투족을 다 촬영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심지어 이 카메라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모두 기록해 놓습니다.
오전 10시 31분 29초.
(사무실 컴퓨터 책상 앞에서) 나를 괴롭히는 김대리가
이번 프로젝트 실수해서 부장님께 엄청 깨졌으면 좋겠다.
오후 12시 3분 54초.
(김대리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처먹으니깐 살이 찌지.
먹다가 체했으면 좋겠네.
저녁 6시 11분 37초.
(퇴근 길에 회사 앞에서) 와, 몸매 죽인다. 우리 회사 직원인가?
몇 살일까? 남자친구 있을까?
여러분은 이렇게 기록된 카메라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친구, 가족, 연인, 직장동료…
그 누군가에게도 이 비밀을 들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를 다 이해하시는 부모님은?
더 안되죠.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나에 대한 기대가 크신데.
그런 부모님께 이렇게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죠.
페르소나, 나와 다른 정체성의 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내 자신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척, 좋은 사람인 척 살고 있지만
내 안에 나만 알고 있는 악한 마음이 정말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스스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전문 용어로 “페르소나”라고 말합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연극 배우가 쓰는 가면”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우리의 악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
매일 ‘페르소나’라는 나와 다른 정체성의 가면을 씁니다.
음란하지 않은 척, 화가 나지 않은 척, 욕심을 내지 않는 척,
질투를 하지 않는 척, 죽이고 싶지 않은 척, 상처를 받지 않은 척...
사랑받을 만한 가치있는 존재처럼 보이기 위해서
매일 가짜로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진짜 나를 꼭꼭 숨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문득 진짜 나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내 진짜 모습을 들키면 어떡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
내 더러움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내가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이런 내가 사랑을 받아도 되는 존재일까?
예수님의 사랑
그런데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 불가능한데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심지어 그분은 감추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니가 더럽다고? 이기적이라고? 정말 나쁜 놈이라고?”
“응, 알아. 그래서 뭐, 그게 왜?”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까?”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8 NKRV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추한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우리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채찍은 끝에 갈고리와 쇳조각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휘두른다기보다 갈고기를 살에 꽂아서
살점을 뜯어내는 방식의 채직질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미 채찍질 때문에 시체에 가까워진 사람을
십자가에 매다는데 손목과 발꿈치에 못알 박아 나무에 고정시킵니다.
그 상태로 높이 매달아서 죽을 때까지 내버려둡니다.
이때 아래로 쏠리는 몸의 무게 때문에 어깨는 탈골되고
장기는 짓눌려서 정상적인 호흡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흘린 피 때문에 쇼크를 계속 겪게 됩니다.
그렇게 수백번이 넘는 기적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런 죽음을 선택하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우리 삶에 있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불행으로부터 건져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우리 안에 있는 죄, 그리고 죽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선택의 결과, 죄와 죽음의 원인
우리가 이 관계를 파해치기 위해서는
먼저 죄와 죽음의 원인, 이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우리에게 왔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미움과 증오는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이 교제를 나누고 싶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없이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없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을 선택할 권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말인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나의 의지가 아니라, 너희의 의지로 날 사랑해 줄 수 있겠니?
이렇게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탁을 해야할 분이 아닙니다.
그냥 명령하시고, 그렇게 하도록 만드시면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배려해서 주신 선택의 자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죄입니다.
“죄”라는 단어의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으로부터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벗어나니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니깐
그로 인해 죽음이라는 결과를 떠안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결과, 지옥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히 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의 근거인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선함”이 흔적조차 없는 상태로,
“악함”이 가득한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옥이라고 하면, 불구덩이, 시체, 아픔, 고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진짜 지옥은 내 안에 있는 죄성, 더러움, 잔인함, 비열함, 추함
이 모든 것들이 지옥 자체인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육체에 갇혀서 잠시나마 느끼지 못해서
잠깐 잊고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없이는
죄와 죽음 때문에 지옥을 살고 있는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지옥이니 외면적으로, 육체적으로
아무리 행복을 추구해도 본질적인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냥 우리의 잘못을 없던 걸로 해줄 순 없나요?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그것도 못해주시나?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해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면,
결국 또 다른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법에서도 죄를 묵인하는 것, 방관하는 것도 죄에 포함됩니다.
묵인하고, 방관했다는 것은
결국 그 죄를 인정하고, 동의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대신 치른다는 것은
예를 들어, 형과 동생이 길을 가다가
동네에 아주 사나운 개 한마리가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마침 장난기가 발동한 동생이 개에게 장난을 쳤습니다.
그러다 동생이 맹견의 뼈다귀를 훔친 순간
갑자기 맹견의 줄이 풀리고 말았습니다.
줄이 풀린 맹견을 형제를 격렬하게 쫓아왔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뼈다귀를 던지라고 소리쳤지만
너무 놀라고 긴장한 나머지 뼈다귀를 쥔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맹견은 거의 뒤꿈치까지 따라붙었습니다.
그러자 형이 동생이 쥐고 있던 뼈다귀를 빼앗아
동생과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맹견은 형을 격렬하게 쫓아갔고,
결국 형은 아주 사나운 개에게 사정 없이 물어 뜯겼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면
그 죄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옮긴 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죄의 처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그런데 그 죄 값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죄가 아닌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 값이 대신 지불되었고,
드디어 우리는 죄인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우리는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는데,
다시 부활하시면 무효가 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은 이 땅의 육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 늙고, 퇴화되어 사라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얻은 부활의 몸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갈 때, 얻게 되는 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죄와 죽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신 치러졌고,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불행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죄악이 남아있어
아직도 연약하고 매일 넘어지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다 받아주셨기에
이런 내 모습을 용서받지 못할거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육체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쁨과 평안의 나라로
다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이상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NKRV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죄와 죽음이라는 절망의 길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찬양 -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사랑하는 이룸청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생의 화려한 포장 뒤에 숨겨진 비참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소유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를 죄와 죽음이라는 바다에 계속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함께 고백하는 가사처럼
우리가 깊은 절망의 수렁 가운데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주님이 먼저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이미 십자가 지시기로 결정하시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통과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제 더이상 죄와 죽음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산 소망 되십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다.
함께 믿음으로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기도제목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세상의 조건들이 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내 안에 숨겨진 죄를 외면한 채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리화하며 위선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가면을 벗어버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임을 고백하며, 진정으로 회개하며 돌이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알고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여전히 내가 그 은혜를 누릴 자격이 되냐며 속삭이는 사단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사랑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관계의 상처와 죄악들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안에 여전히 추악한 모습들로 인해 증오하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깨어진 가정,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의 문제들, 그로 인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의 무게와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실패자라 여겼던 마음들을 만져주시옵소서. 우리를 온전히 품어주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며 함께 죄의 문제들을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의 비전과 진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나를 창조하신 목적, 나를 이 공동체에 부르신 목적을 발견하게 하시고, 내가 원하는 성공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부르심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취업과 진로의 문턱에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시옵소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며, 갈급한 심령, 상한 심령을 부어주시옵소서. 식어버린 예배의 열정이 다시 타오르게 하시고, 기도의 간절함이 회복되고, 온전한 삶의 제사가 드려질 수 있도록 성령님 내 안에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조별로 모여서 함께 기도합시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를 셀별로 묶었는데요. 조원들을 위해서, 셀원들을 위해서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힘과 지혜, 용기와 믿음의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넘어질 때 함께 손잡아주고, 일으켜주라고 올해는 이 셀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이 자매가 이 형제가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너무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이 형제 자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에는 조장을 위해서, 셀리더를 위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 리더에게는 믿음의 공동체를 잘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함께 영적전쟁을 싸우라고 셀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만큼, 사단은 셀이 단단하게 뭉치고, 모이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만큼 사단의 유혹이 강합니다. 수련회를 하다보면 별 일 아닌 일로 마음이 무겁고 상처가 될 수 있고, 작은 일도 큰 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을 붙잡아주셔서 조원들을, 셀원들을 끝까지 잘 이끌고, 기도해주고, 격려할 수 있도록 주닙께서 붙잡아 주시옵소서.
셀러브레이션 - 찬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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