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2)
Notes
Transcript
<주일오후>
요나 1:1-10
“나는 누구인가?”
2026. 2. 11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친 요나가 배 위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도망쳤어요. 비상식적인 일이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말씀을 거부한 겁니다. 선지자로서 사실상 자격이 사라진 거예요. 말씀을 듣지 않는 선지자가 어떻게 선지자라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요나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서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외치라고 하셨거든요. 오늘 본문 2절을 봐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아멘.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악독을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나의 말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게 싫은 거예요. 심판 받아 멸망해야 마땅한 니느웨를 내가 왜 회개시켜야 되나? 선택받은 우리 민족도 아니고, 가축만도 못한 이방민족에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나? 요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 명령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명령을 듣자마자 어떻게 하냐면, 도망을 가요. 자, 3절 봐볼까요? 3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요나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일너나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토록이나 빠르게 거부하고 반대로 행동한 일은 없습니다. 정말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600km나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다시스가 스페인 남부의 타르테소스였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지도를 한번 봐 볼까요? 지도를 보시면, 오른쪽 밑에 욥바가 있죠. 여기서 배를 타고 저 서쪽에 있는 다시스로 가려고 한 겁니다. 지도상으로 봐도 굉장히 멀어요. 요나는 평생 저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겠죠. 저 멀리 서쪽에 다시스라는 곳이 있다더라. 그런데 지금 그 먼 곳으로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가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간다고 하면 최소한의 짐을 싸서 가는데, 요나는 그냥 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챙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즉시 일어나서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다시스로 가는 배가 상당히 배삯이 비쌌을 것 같은데, 문제 없이 배삯을 주고 배를 탄 것을 보면, 요나가 평소에 현금을 꽤 가지고 다녔나 싶기도 합니다. 아니면 계좌이체를 해줬나? 어쨌거나 요나가 배를 타고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도망을 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떨쳐낼 수 있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하나님이 가만히 보고 계시다가, 배가 어느 정도 바다 가운데 들어가니까, 그때 큰 바람을 바다에 던지셔요.
오늘 본문 4절을 봐 볼까요?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아멘.
여호와께서 바다에 큰 바람을 내리셨어요. 그래서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이상 요나에게 말씀으로 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까 말로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대신 요나의 환경을 주관하십니다. 환경을 통해서 요나를 사명의 길로 몰아가셔요. 도망가는 요나의 앞길에 폭풍을 일으키셔서 그가 그 길을 돌이켜 니느웨로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러면, 웬만하면 돌이키겠죠. 앗 뜨거라, 하고 돌아갈 법도 해요. 하지만 요나는 꿈쩍도 안 합니다. 폭풍 때문에 배가 거의 깨질 지경이 됐는데도 두려워하기는커녕 잠을 자요.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공들은 두려워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귀중한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있는데,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죠.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지금 다른 사람들까지 다 죽게 생겼는데, 무책임하게 잠이나 잘 땝니까? 이러면 안 돼요, 사람이. 그런데 요나는 이러고 있다... 사람도 아니죠.
자, 그런데 여기서 “깊이 잠이 들다” 라는 말을 살펴보면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툴”이라는 말입니다. 툴. 이 말의 뜻이 “깊이 잠들다” 또는 “기절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나가 잠이 든 게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겁니다. 실제로 잠이 든 것도 맞지만, 이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요나가 영적으로 마치 기절한 것처럼 매우 침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그런 폭풍에도 무감각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감당하기 싫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한 잠을 자듯이, 마치 기절한 것처럼, 그렇게 배 밑층에 누워있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사공들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죠. 자기가 믿는 신을 부르면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 있어요. 무거운 짐들을 바다 밖으로 던집니다. 요나와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때, 배의 선장이 짐을 옮기려고 밑층에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자고 있으니까 기가 막혀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을 해요. 6절인데요. 6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잠을 잔다는 게 이해가 안 되죠. 이 사람은 뭔데 지금 자고 있을까? 기가 막혀서 말하는 거예요.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그러면서 뒤에 명령을 내려요.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두 가지를 명령했죠. 일어나서, 구하라.
얼른 일어나서 네가 믿는 신에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명령이 사실은 이미 요나가 들었던 명령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뭐라고 명령하셨어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 외치라. 이 두 단어가 6절의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일어나라는 말은 “쿰” 이라는 말이고, 외치라는 말은 “카라” 라는 말이에요. 2절과 6절에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카라를 2절에서는 외치라로 번역을 했고, 6절에서는 구하라로 번역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셨던 명령을 선장이 똑같이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방인 선장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이 다시 한 번 들려지는 거예요.
요나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죠. 하나님의 명령을 듣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거거든요.
그런데 웃기게도 요나가 이 명령을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절반의 순종을 보여줍니다. 두 가지 명령 중에서 하나의 명령에만 순종해요. “일어나라”는 명령에만 순종했습니다. 구하지는 않았어요. 구하지는 않고 그냥 일어만 났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밑에 7절에 다른 승객들이 갑자기 제비뽑기를 하거든요. 그 제비뽑기 현장에 요나가 함께 있습니다. 제비뽑기를 하려고 “일어나서” 온 것이죠.
7절에 보니까,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어떻습니까? 현장에 요나가 있죠? 배 밑층에서 일어나서 올라온 겁니다. 뭐 할려고요? 제비뽑기를 하려고.
웃기죠. 끝까지 기도는 안 해요. 기도는 안 하는데, 그것 말고는 순종하는 겁니다. 일어나라니까 일어났어요.
그런데 사실 지금 이 모습 역시도 이미 요나가 보여줬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요나에게 명령하셨을 때, 요나가 일어나라는 명령에는 순종했었거든요.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 문제죠.
어쨌거나 요나가 일어나는 거 하나는 잘해요. 누가 일어나라고만 하면 잘 일어나요. 그래서 제비뽑기를 하러 왔어요. 이 제비뽑기는 누구로 말미암아 재앙이 임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이 생각하기에 이 폭풍이 자연적인 폭풍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왜냐하면, 다들 바다에 대해서 베테랑들인데, 지금 시기가 폭풍이 일어날 시기가 아닐뿐더러, 폭풍이 일면 뭔가 전조현상이 있을텐데, 그런 것도 없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너무나도 비정상적으로 갑작스럽게 폭풍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아, 이것은 신이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해서 내린 재앙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신의 재앙을 불러왔는가? 이것을 색출하는 겁니다. 일단 색출해서 신과 합의를 보게 하든지 해야죠. 그래서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혀요.
요나가 뽑히니까 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어봅니다. 8절에 보니까,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이렇게 요나에게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이 질문에 보면 총 다섯 가지를 묻고 있죠. 먼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하였는지를 물어봅니다.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는데, 진짜로 요나 때문인지 사실확인을 하는 거예요. 이 재앙이 너 때문에 임한 것이 맞느냐?
그러면서 또 뭘 물어봅니까? 생업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나라가 어디인지, 어느 민족인지, 요나의 신상을 물어봐요.
이런 것들을 물어보는 이유는, 겉모습만 봐서는 요나의 국적이나 민족을 짐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배를 탄 욥바는 당시 많은 외국 배들이 정박을 하는 큰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거든요. 그렇다보니까 겉모습만 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네 정체가 뭐냐? 뭘 하는 사람이며, 어디서 왔으며,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 사람이냐?
이 질문들에 대해서 이제 요나가 대답을 합니다. 자, 뚫린 입으로 뭐라고 하는지,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9절 시작,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요나가 두 가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는 민족에 대한 대답이에요. 나는 히브리 민족이다. 그리고 두 번째 대답은 내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라는 대답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것은 요나의 생업이죠.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이것이 요나의 대답입니다.
특별히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외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 라는 말인데요. 야레의 뜻은 “두려워하다” 입니다. 두려워하다. 그러니까 요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너무나 모순되죠. 여호와를 두려워 하는 자라고 하면서, 정작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사람이 여호와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어요.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킨 풍랑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말만 여호와를 두려워한다고 하고, 실상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런 반면에, 밑에 10절을 보면, 선원들은 두려워해요. 10절에 보니까,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심히 두려워하여. 여기서 두려워하다, 라는 말도 “야레” 입니다. 야레, 두려워하다. 요나의 말을 듣고 선원들이 두려워했어요. 그런데 그냥 두려워한 게 아니에요.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이 “심히” 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가돌”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크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원들이 크게 두려워한 것이죠.
그런데 이 “가돌” 이라는 말이 위에서 이미 세 번이나 등장을 했습니다. 2절에 보면, 큰 성읍 니느웨라고 했고, 또 4절에 보면, 큰 바람, 큰 폭풍. 이렇게 총 세 번 크다는 말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헌번 등장을 했는데, 이번에는 뭐가 크다고 말합니까? 선원들의 “두려움”이 크다는 것입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만큼, 또 바다에 던져진 큰 바람만큼, 선원들이 큰 두려움에 빠진 겁니다.
아이러니하죠. 정작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이 두려워해요. 지금 입장이 너무나도 반대로 돼 있죠.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도 선지자스럽지가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두려워 떨면서 열심히 자기 신을 부르면서 기도하는데, 요나는 잠이나 자다가 이방인에게 기도하라는 책망이나 듣고. 이런 사람을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름만 선지자고 알맹이는 선지자가 아니에요. 하는 일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고, 알맹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선원들이 보기에, 요나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미친 사람으로 보였겠죠. 여호와를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을 간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을 겁니다. 여호와를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간이 배밖으로 나온 거죠.
우리는 이 시점에, 요나의 심리상태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자신이 정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말만 그렇게 한 걸까요?
이 질문을 주일날 담임목사님 설교말씀과 접목을 해서 다시 하면 이런 질문이 될 겁니다. 요나는 팬이었을까, 제자였을까? 팬과 제자 모두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반응이 나눠집니다. 하기 싫은 일에 순종해야 할 때, 혹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켜야 할 때. 그럴 때 팬은 더이상 따르지 않고 돌아섭니다. 반면에 제자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끝가지 따라갑니다. 이것이 팬과 제자의 차이점이에요.
요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모습만 보면 제자가 아니라 팬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특별히 요한복음 8장 31절을 보면, 제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인데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아멘.
여러분,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말씀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닌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요나는 제자가 아니죠. 말씀 앞에서 도망쳤으니까.
자기 입으로는 제자라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지만, 지금 그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 앞에서 도망쳐서, 큰 폭풍 가운데, 이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도 않아요. 바람을 던지십니다. 그런 가운데, 이방인들도 다 기도를 하는 마당에, 혼자 구하지 않고, 마치 로봇처럼 ‘나는 히브리인이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아무 영혼 없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이런 사람을 누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여기겠습니까? 아무도 안 속아줍니다. 오늘날에 뉴스를 보면, 교회에 대해서 좋은 사건은 없어요. 횡령, 간음, 갑질, 교회당에서 멱살을 잡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저게 교회가 맞나? 저기에 예수가 있나? 말만 교회고 신앙인이지, 하는 행동은 세상사람들하고 똑같네. 아니, 세상사람보다 더하네.’
이것은 제 말이 아니에요. 당장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보면, 다 그런 댓글이 달려 있어요. 처참하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목사님이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고, 다른 사람은 다 법을 어겨도 목사님만은 법을 지킬 것 같고. 그런 인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뉴스에 무슨 목사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기사가 나와도, 목사님도 사람인데 실수 할 수 있지, 이러고 넘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요. 그런 기사가 나면, ‘그러면 그렇지. 목사가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목사가 범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에요. 전체 교회, 전체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뭐, 극우다, 광화문집회다, 신앙인들이 정치에 관여를 하고, 신문 1면에 나면서 사회적으로 너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입혀졌습니다. 안 그래도 안 좋던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까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 거예요. 세상이랑 똑같이 돈을 탐하고, 세상이랑 똑같이 정치싸움을 하니까 누가 신자고, 누가 불신자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세상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20절에,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 칭송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아멘.
교회의 시작은 칭송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그 중에 칭송을 받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마치 멸종위기동물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를 통하여 저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입으로만 제자라고 하지 말고,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방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지 않아요. 이방인들로부터 기도 좀 하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아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우리가 교회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로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믿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절반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온 백성에게 본이 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