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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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적 예배
본문 : 로마서 12:1-2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칼럼을 읽었는데요. 아프리카의 교회들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에 아프리카에 복음이 들어가면서 교회가 정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회심자 숫자는 엄청나게 늘었고, 정말 많은 예배당이 세워지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 장면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회 속에서, 공적인 자리에서, 일터와 정치와 경제와 공동체의 윤리 안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지는 변화”가 기대만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마음의 종교’ 정도로 머물러서, 마음속에서는 뜨겁다고 말하지만, 삶의 방식과 선택과 관계의 결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대륙 전체로 보면 교회는 성장했는데,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전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칼럼을 읽으면서 이게 비단 아프리카 만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들 변화된 삶에 대한 갈망이 꼭 있습니다. 믿음이 내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그런 갈망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힘으로 죄를 끊어내고 누군가를 용서하고 품어주며 내 삶을 거룩하게 빚어간다는게 하면할수록 무엇만 자꾸 패배의식만 쌓여가는 것입니다. “해봤자 또 안되겠지” “결국 또 넘어지겠지” 이 넘어짐과 실패의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이게 점점 영적인 내성처럼 자리잡아 가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믿음과 삶이 분리되어 가고 믿음으로 뭔가를 산다는게 피곤해지고 지쳐가기도 하는 것이죠.
저도 변화에 대한 강박이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모태신앙이었고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변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지가 저의 신앙생활의 관심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 목사님께서 마음에서 정욕들이 올라올 때마다 팔을 물어뜯으라고 그래서, 물지는 못하겠고 그럴 때마다 손톱으로 꽉 꼬집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날은 제 친구랑 둘이서 같이 교회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오는 길에 그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찬석아 지금 죽으면 천국갈 수 있을까?” 그친구가 그 질문을 한 이유는 방금 회개기도를 빡세게 했거든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좀더 기도하러 갈까?”그러고 더 빡세게 더 철저하게 죄를 회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뭘 얘기하고 싶은가 하면 여러분, 우리가 삶에서의 변화를 갈망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기 위한 자기 의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깨끗함과 나의 순결함과 어느정도 정돈된 생활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 있는 것이죠. 소개팅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어요. 소개팅이 어떤 감정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짝사랑 하는 누나와 밥을 먹었던 적은 있습니다. 밥이 잘 안넘어가죠. 왜요? 그사람 앞에서 내 모습이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에 맞춰서 내 행동을 다 힘을 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대할 때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행동이 어떨까? 내 삶이 어떨까? 내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여기에서 자신이 없어지고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오늘 사도바울은 명쾌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두단락으로 나눠서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1-11장까지가 한 단락이고 12장부터 끝절까지가 한단락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12장에 들어오면, 바울은 갑자기 톤을 바꾸어서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면서 “그렇다면, 이제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11장까지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다가 12장부터는 복음이 만들어내는 ‘삶’을 요청하는 자리로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12장 1–2절은 로마서 전체의 전환점이 됩니다. 교리에서 행함으로, 지식에서 삶으로, ‘무엇을 믿는가’에서 ‘어떻게 사는가’로 넘어가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복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말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어떤 열심과 사역이 복음과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앎이 있어야 삶이 나오는 것처럼 복음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 구체적인 열매가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오늘 뭐라고 시작합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내 믿음이 복음과 온전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선적으로 내가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언어로, 내 삶으로 복음을 정리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올바른 생각과 행동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바울은 이 한절의 말씀 안에 하나님께 속한자들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오늘 바울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래요. 여기서 몸은 body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생각할 때는 보통 몸보다는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몸은 보통 가만히 앉아있죠. 끽해봐야 몸은 가끔 손을 들거나, 기도할 때 적당이 앞뒤로 흔들어주거나, 그나마 많이 사용하는게 입술이죠. 우리는 보통 예배는 하나님께 내마음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헬라 철학도 그랬습니다. 영은 고귀한 것, 육은 부정한 것. 몸을 굉장히 하찮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예배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몸을 드리라는 것은 예배의 영역을 말하는 거예요. 내 몸이 가는 모든 공간과 영역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처소가 된다는 거예요. 꼭 이 하늘홀이나, 어떤 특정 공간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말하는지,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참는지, 어디에 시간을 쓰는지, 내 욕망을 어떻게 다루는지, 내 삶의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같은 것들이 다 몸을 통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 모든 영역에서 네 몸을 통째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예배는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시작되는 거예요. 눈을 딱 떴을 때, 어떤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준비해서 삶의 자리에 나갈 것인지가 진짜 예배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이 일과 은혜라는 책에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세요. 일요일은 월요일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월요일부터 시작될 삶의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 그랬는데 수식어가 붙었죠? 산 제물, 영어로 하면 living sacrifice입니다. 비록 살아있기는 하지만, 죽어서 바쳐진 짐승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팀켈러 목사님은 “살아있는 죽임”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이 어렵죠?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 이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드라마 본사람? 거기에 김선호씨가 주호진이라는 역할로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주호진이라는 캐릭터에 맞게 통역사의 역할, 그리고 고윤정의 상대역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이 배역 안에서 김선호라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겉으로 볼 때에는 김선호이지만 인간 김선호는 없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기 마음대로 대사를 바꾸지 않아요. 자기 취향대로 장면을 새로 쓰지도 않습니다. 작가가 쓴 대본과 감독의 의도에 자신을 맞추고, 그 역할이 원하는 감정과 동선과 말투로 살아냅니다. 살아있습니다. 숨 쉬고 움직이고 말하고 울고 웃어요. 그런데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대로”는 죽어 있는 겁니다. 그 장면에서 살아 있는 건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배역에 충실한 나’예요. 이게 ‘살아있는 죽임’이 주는 감각입니다. 살아있는데, 이전의 ‘내 중심’은 내려놓는 삶.
우리가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옛사람이 정리되었다는 뜻이에요. 죄를 사랑하고 죄를 추구하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을 때,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죽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 제물이란, “내가 죽고 끝났다”는 허무가 아니라, “내가 주인으로 살던 삶이 끝났고, 하나님께 속한 새 생명이 시작됐다”는 복음의 선언이에요.
예전의 나는 내 인생의 작가였습니다. 내가 기준을 세우고, 내가 방향을 정하고, 내가 원하는 결말을 쓰려고 애쓰며 살았죠.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작가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그분의 뜻과 목적과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말하자면 ‘하나님이 쓰신 대본’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배우가 된 겁니다. 시간, 관계, 말, 습관, 선택, 모든 영역에 있어서 원래의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
바울은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그랬어요. 이 내용만 나누고서 마치겠습니다. 우리 번역은 보통 ‘영적 예배’라고 옮기지만, 원문의 표현은 단순히 ‘영적인 느낌’이나 ‘신령한 예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에 합당한 예배라는 의미인 겁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과 어떤 긍휼과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그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내 전부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과연 합당하지, 마땅히 그래야지, 이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은혜를 알면서도 여전히 내 인생을 아까워하며 드리지 못하는 것을 더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서 2장 17절에 보면 바울이 기가 막힌 표현을 합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린다고 합니다. 전제는 뭐냐면 번제를 드리면 마지막에 포도주를 그 위에다가 붓는 겁니다. 그 포도주를 다 쏟아 부으면 모든 제사가 향기롭게 마쳐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전제로 드리겠다는 건 자신의 남은 모든 것을 다 소진하고 부어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를 하나님 앞에 다 부어서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할지라도 뭐래요? 나느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울의 영적 예배였던 겁니다. 그렇게 함이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것이죠그러면서 18절에 이렇게 말하죠.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예배는 어떻습니까? 거룩한 기쁨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마땅하지, 합리적이지,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해야지 라는 기쁨과 자발성이 회복되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성경의 요구가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기보다 비합리적이라고 느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하는가? 왜 예수님은 내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가, 왜 내 인생에는 채찍만 있지 당근을 주시지는 않는가? 내가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나만 헌신짝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건 불합리하다는 마음이 불연듯 찾아오죠. 하나님이 참 너무하다는 감정과 정서가 파도처럼 밀려들 때가 많은 겁니다.
마태복음 20장 예수님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새벽 일찍이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할 사람을 구한 겁니다. 그리고 주인이 일을 한 댓가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유대 돈으로 환산하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정도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인력시장에 나간 사람들 입장에서는 너무 감사한 일인 겁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하나 뿐입니다. 만약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으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오전에도 나가고, 정오에도 나가고, 오후에도 나가고, 거의 해 질 무렵, 6시가 퇴근인데 5시에 또 나간 거예요 그리고 그때까지도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불러요. “너희도 들어와.”
그러니까 이 주인의 행동을 보면 자기 포도원을 위해서 일꾼들을 쓰려는 마음이 아니예요 오히려 일꾼들을 위해서 자기 포도원을 내어주는 겁니다.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이유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죠.
저녁이 되고 품삯을 나눠주는데, 주인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부터 줘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줘요. 그걸 먼발치에서 보던 ‘새벽 일꾼’들의 마음에 기대가 확 올라갑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저 정도면, 우리는 더 받겠네.’ 그런데 막상 자기 차례가 되자, 받은 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에요. 이 사람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1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
말하자면 이건 불합리하지 않냐는 겁니다. 맨처음 이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맡겨진 일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남들보다 더 바쁘게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꾼은 그 주인의 처분이 부당하고 자신이 불합리한 처분을 받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 일꾼의 마음이 어디서 꺾였을까요? 포도원 주인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었을 때, 이 포도원은 “은혜로 들어온 자리”가 아니라 “내가 땀 흘려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언제요? 주인이 어떤 분이신지 주인이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었을 때, 오히려 주인을 위해 열심히 포도원을 가꾸는 일로 바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서 이건 불합리해,, 이럴거면 나도 안했지.. 주인의 보상이 열심의 동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번아웃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마음이 지치고 내가 가엾어지고 이렇게 헌신하는 내가 불합리한 처분을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뭔가 주님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내 인생을 갈아넣었는데, 하나님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한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뭐라고 진단하고 있나요? 너가 주인을 생각하기를 멈추었을 때, 모든 헌신이 긿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인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주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생각을 멈추게 되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기쁨이 아니라 바쁨이 되는 것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그 전체의 일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우리에게 복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너를 참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걸 좀 우리 말로 와닿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내가 너를 참 예뻐한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얼마나 예뻐하시고 사랑하실까요? 그런데 복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그렇게 예뻐하시고 사랑하신다. 모든 천군과 천사가 부러워할 그 사랑과 애정을 너를 향하여 아낌없이 쏟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천사도 부러워할정도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요. 저는 그렇게 와닿지 않는걸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연애하다보면 환장할 것 같은 순간이 언제입니까? 오빠가 날 사랑하는지 잘 안느껴진대요. 물론 오빠가 요즘 좀 소홀하셨으면 그냥 조용히 사과하면 돼요. 그런데 진짜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는데, 그정도로 나는 모든 걸 다 내줄 수 있는데, 그 때는 마음을 꺼내다가 보여주고 싶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여러분에게 무엇까지 내줘야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겠습니까? 희생이요? 목숨이요?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중에 청대부 사역자들끼리 회의를 했습니다. 화요일이었는데,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시간과 청대부 사역을 하는 시간의 비율이 몇대몇정도 되느냐? 그랬어요. 그런데 전부다 2:8, 3:7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청년대학부 사역을 하는 그 비중에 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영적인 독서를 하고 보내는 시간은 너무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요즘 우리의 입술에서도 “아 바쁘다” “너무 바쁘다” 얼굴에도 피곤함이 감추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모든 것을 잠깐 멈추고 우리를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길 때, 기쁨보다 바쁨으로 잠식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며 저희들끼르는 이 비율을 5:5로 맞추자는 결단을 했습니다. 청년대학부를 생각하고 사역하는 만큼이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복음을 묵상하는 그 시간을 채워나가자고 그랬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지칠 거예요. 보상이 없으면, 사역에 열매가 없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길을 잃게 될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무엇을 시작했냐면 새벽기도 때 저를 위해서 기도할 때면 시편을 켜놓고 기도를 합니다. 말씀을 따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시편을 읽으면서 기도를 했는데 다윗이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시편 51: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 시편 51:12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시편 52:9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우러러 기리렵니다.
대부분이 어떤 기도예요? 나를 사랑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나는 주님이 하신 일들을 늘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일에 대한 비중과 하나님께 대한 비중이 몇대 몇이었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또 그것이 합리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반드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로 충만했던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지금도 이미 많이 맡고 있는데, 이것도, 저것도 더 헌신하려고 했던 여러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놔도 불합리해..라는 마음이 있는거라면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그 마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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