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in actu(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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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in actu
마태복음 14:22–33 NKRV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1. 이론적 신앙에서 실천적 '오직 성경'으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면서도 정작 삶의 기준은 나의 경험과 이성에 둘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결코 완전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유일한 경계이자 기준으로 삼아 행함으로 옮기는 실천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나의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믿고 고백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합니다.
이론적 ‘오직 성경’이 아닌, 실천적인 ‘오직 성경’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의 생각과 경험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사는 문제(농사)보다 더 우선적인 사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미쉬나
하지만 나의 경험과 생각과 이성은 신뢰할만한가?
사사기 21:25의 말씀에서는, 사사기 시대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사사기 21:25 NKRV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신의 삶의 기준을,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이성에 두고 살아갔습니다.
자기 생각에 옳으면, 그것이 정답이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올바르고, 합리적이라면, 그들이 가진 이성이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되었어야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사기 시대는 결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흉악범죄를 저질렀지만 증거 불충분이나 심신미약으로 아주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난 가해자가 있습니다. 한 '정의구현 유튜버'가 이 가해자의 신상(얼굴, 주소, 직장)을 공개하고 찾아가 망신을 주며 응징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까?
비슷한 종류의 고민을 하게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살인자 리포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극중에는 연쇄 살인을 저지른 정신과 의사와 기자가 등장해서 인터뷰를 합니다.
정신과 의사가 연쇄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자신에게 상담을 한 내담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살인을 당한 자들은, 모두 내담자들에게 끔찍한 상처를 안긴 사람들이지만, 법적인 처벌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내담자들은 고통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지만, 가해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정신과 의사가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죠.
이에 기자는, 그렇다고 살인이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누가 옳은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을 겪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의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대립이 서로를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 오늘 이 시기가 성경에 기록되었다면, 성경은 이 세상을 이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런데, 사사기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정말 왕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8:7 NKRV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은, 단 한순간도 왕이 없었던 순간이 없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었을 때, 세상은 혼돈과 혼란이 가득한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2. 혼돈의 세상 속에서 질서를 세우는 말씀

창조 이전의 세상이 혼돈과 공허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곳(포스트모더니즘, 사사기 시대)은 각자의 소견대로 행하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과 어둠, 땅과 바다의 경계를 나누어 질서를 잡으셨듯, 우리 삶도 말씀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질서가 회복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 NKRV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먼저 본문, 1절의 말씀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 말씀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 NKRV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먼저 있었고, 이후에 혼돈과 공허, 어둠이 있었습니다.
혼돈, 공허, 어둠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우시기 전에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3절 첫 시작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리고 하나님께서 6일동안 하신 주된 사역 중에서, 가장 주된 사역 하나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루고자 하는데, 그 사역은 바로 ‘나누심’입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 궁창 위에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셋째 날,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여 땅과 바다를 나누셨습니다.
넷째 날, 광명체를 만들어,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다섯째 날,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짐승들을 나누셨습니다.
여섯째 날, 땅의 짐승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짐승들과 인간을 나누셨습니다.
나누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것에는 각자의 경계가 정해져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은 어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고, 반대로 어둠이 빛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땅을, 땅은 바다를 침범할 수 없고, 낮은 밤을, 밤은 낮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말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유지하고 경계를 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계가 지어질 때,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이 경계지어질 때, 그 말씀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 세상이 구분되어질 때,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잠언 8:29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8:29 NKRV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하지만, 오늘 날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사상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없고, 각자가 가진 기준이 진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셨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그건 너의 진리일 뿐이고, 나의 진리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진리와 거짓, 남성과 여성, 선과 악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죠.
포스트모더니즘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반신학적 세계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도덕적, 영적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이를 본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예레미야 4:23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23 NKRV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말씀이 우리의 삶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계를 짓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삶의 절망이 찾아오고, 공허와 허무함이 찾아오는 줄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절망이 찾아온 이유는, 그에게 경계 지어진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에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질서 잡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자신의 삶에 기준이 된다면, 세상은 다시 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과 혼란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나의 삶의 유일한 기준이 되도록 해야만, 진정한 삶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24–27 NKRV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4-25절과 26-27절을 나눠서 보겠습니다.
24-25절에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6-27절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집은 24-25절이나, 26-27절에서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변했냐면, 집을 지탱하는 지반이 변했습니다.
하나는 반석이고 하나는 모래입니다.
자 그러면, 조건이 뭐가 변했는지도 볼까요?
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고, 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반석’과 ‘모래’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차이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하는 것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진짜 자신의 신앙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22 NKRV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출애굽기 14:15 NKRV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 말씀이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여라”
하나님은 모세가 부르짖는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부르짖기만 하는 것을 꾸짖으신 것이다.
그렇게 기도했으면 이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오직 성경의 정신은 이론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정신은, 실천이고 행함입니다.
우리의 입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직 성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으로 오직 성경의 삶이 드러나는 것이 오직 성경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3.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보고 계시는 주님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고난당할 때, 예수님은 산 위에서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주님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밤(사경)일지라도, 주님은 혼돈의 바다를 짓밟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은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신성을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오늘 본문, 22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뭐가 그리 다급하셔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보내야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본문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 6:15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15 NKRV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사건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 했을 때, 사람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그들을 억누르던 로마를 제압할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에 휩쓸릴 것이 염려되셨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을 무리들로부터 급하게 분리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따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의 배는 이미 육지에서 떠나 수리나 떠난 상태에서, 자신들이 나아가고 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역풍을 만나고, 거센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것은, 8장에서는 예수님이 그들 곁에 계셨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놓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신 것일까요?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6:48의 말씀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6:48 NKRV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서 어떤 표현을 볼 수 있냐면, ‘보시고’입니다.
깜깜한 밤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고난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냥 보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벽 3-6시 사이 정도되는 깊은 어둠 속에서, 역풍과 물결로 인해서 고통받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그 상황 한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물 위를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것이죠.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한 상황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창세기 1:2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2 NKRV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지만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두 가지 명령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니”
‘에고 에이미’
에고 에이미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4. 물 위로 발을 내딛는 '모험'의 신앙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이성을 버리고 주님의 **"오라"**는 말씀에 삶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보고 의심하여 잠시 빠지기도 했지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셨습니다. 신앙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말씀에 의지해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님을 알아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요구합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죠.
“오라”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혼돈과 흑암의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 바다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이 베드로가 가진 이성과 생각과 경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이성과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어 오직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몸을 그 상황에 던집니다.
생명을 건 도전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 같이 그 혼돈과 흑암의 세력을 짓밟고 그 상황을 걸어나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얼마 못가 순간 느껴지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주님만 보고 나아갔던 믿음이, 혼돈과 흑암의 상황을 의식하는 순간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향해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소리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이죠.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미래는 높은 권위와 명예가 아니라, 폭풍과 풍랑 속에서 힘겹게 노를 젓게 될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반드시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은, 폭풍과 풍랑 속에서도 힘겹게 나아가야만 하는 고난의 삶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세상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세상을 등져야 하고, 오병이어 사건의 그 영광스러운 장소를 등져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증오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계가 허물어져가는 저 혼돈과 흑암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주님조차 보이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조차 버거운 현실 앞에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의 고통과 고난의 상황 한 가운데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은 네 스펙이 너라고 말하고, 네 연봉이 너라고 말하지? 아니, 내가(하나님이) 여기 있다. 네 존재의 근거는 나에게 있다."
우리가 그런 세상 한 가운데서도,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말씀으로 경계지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력을 무찌르고, 질서있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세상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세력을 짓밟고, 나아가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잠시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우리의 손을 붙잡아줄 주님이 계시니까요.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걷는 이 신앙의 여정에서 잠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잠시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쓸어져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신앙의 여정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삶을 내어 던져보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이, 어느 한 순간 믿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골리앗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목동 시절부터 사자와도 싸워보고, 곰과도 싸워보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 쌓였던 그의 믿음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자신의 발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리더라도, 올려놓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수도 없었을 것이고,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성경으로’의 참된 정신은, 이론이 아닙니다.
바로 행함이며 실천입니다.
내가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할 때에만이 비로소 내 믿음과 내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혼돈과 흑암의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믿고 나아가십시오.

5. 결론: 오늘, 당신의 삶을 말씀에 던지십시오

마르틴 루터가 거대한 권력 앞에서 "내 양심은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하며 버텼던 것처럼, 그리고 가난한 시절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결혼의 발걸음을 뗐던 간증처럼, 신앙은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의 풍랑이 무엇이든, 이론에 머물지 말고 오늘 그 말씀에 당신의 삶을 던져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십시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어떤 글이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을 읽고,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힙니다.
왜냐하면, 그 글은 당시 세계를 쥐고 흔들고 있는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로 인해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 앞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앙과 저작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카를 5세 황제는 루터의 안전한 통행을 약속했지만, 앞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요한 후스는 비슷한 약속을 받고도 화형당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루터가 가지 않도록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의 지붕 기와만큼 마귀가 많더라도 가겠다”며 결연히 떠나게 되죠.
첫째 날, 심문관 에크가 루터에게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이 종교개혁 책들은 당신의 것인가? 이 내용들을 철회하겠는가?”
루터는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지만, 철회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에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황제는 하루의 유예를 줍니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휩싸여 밤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카를 5세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Hier stehe ich).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여러분, 거창한 종교개혁자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없던 가난한 전도사 시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하고싶은데, 제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용기가 안나더라고요.
그때, 제 아내가 두려워하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돈 없어.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 보고 가는거야.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 믿고 가는거야. 그러니까 결혼하자”
그 말에 엄청난 용기를 얻고, 결혼 준비를 시작했는데, 정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집을 알아보는데,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제대로 된 집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하루는, 집을 알아보다가 정말 낡은 빌라 지하에 좁은 집을 보게 되었는데, 저의 아내가 그 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여기 너무 좋은데?”
그 때 제 마음이 너무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 날 철야 때 엄청나게 울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정말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위로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인호야, 이 결혼 내가 시켜줄게”
그 때, 제가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했는줄 아세요?
하나님 나 그거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아갔어요.
저, 지금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그거 한 번 경험하니까, 아 믿음이 이런거구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나아가니까,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미래를 이렇게 경험할 수 있구나.
이걸 경험하니까, 비로소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한 번 맡겨볼 용기가 나더라고요. 지금 여러분 눈앞에 놓인 풍랑은 무엇입니까? 취업입니까? 관계입니까? 불확실한 미래입니까? 계산기를 두드리면 답은 '불가능'일 겁니다. 베드로의 이성으로도 물 위를 걷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오라 하시면, 가는 겁니다. 이론으로만 믿지 마십시오. 오늘, 그 말씀에 여러분의 삶을 던지십시오."
기도회
여러분, 결단하기 원하십니까?
주님, 나도, 내 전 삶을, 주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 한 가운데 던져보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던져보겠습니다.
나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주시고, 나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붙들어주셔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에, 간구하오니, 주님 나를 붙들어주시옵소서.
우리 이 시간 다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 크게 부르신 후에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겠습니다.
우리 이 시간에는,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고, 주님 안에서 몸된 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내 손을 잡은 이 형제 자매를 붙들어주시옵소서.
이들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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