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만 믿는 거룩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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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s 21:4–9 NKRV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이는 것만 믿는 거룩한 신앙보다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는 거룩한 신앙을 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전에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창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 지도 잘 몰랐을 때였기에 수업시간에 늘상 자는 것이 저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저에게 앞으로 자신의 수업시간에는 숨도 쉬지 말라는 겁니다. 공부도 안하는 데 공기만 아깝다고 엄청 맞았습니다. 그렇게 엄청 때리다가 만약에 이번 시험 때 100점을 맞으면 본인이 사과를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저는 시험 당일이 될 때까지 그 과목만 공부를 했고 시험 결과는 100점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전교생 중에서 저만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100점을 받자 잘했다거나 사과는커녕 또 엄청 때리시는 겁니다. 누구의 것을 베낀건지 말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적 없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혼자서 교무실에서 3번의 시험을 더 보고 나서야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화도 많이 나고 저의 노력을 컨닝이라는 것으로 매도한 선생님이 너무 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면 그 선생님이 보셨던 건 시험공부하던 저의 모습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자던 저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주변의 환경과 하나님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약 40년동안 훈련받는 동안의 내용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의 모든 사건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사건 중에 하나인 “놋뱀 사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놋뱀 사건의 내용은 광야생활을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사막의 맹독을 가진 독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서 죽을 지경에 놓였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놋뱀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저는 오늘 조금 더 이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본문이 시작하는 4절의 말씀에 보면
Numbers 21:4 NKRV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화면(출애굽 여정)을 먼저 보겠습니다. 화면을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갈림길에 놓여져 있습니다. 한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 또 다른 하나는 가나안이 아닌 에돔 동쪽 지역의 새로운 광야길로 들어서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눈 앞에 보이는 지름길이 아니라 에돔 동쪽을 향해 새로운 광야길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우회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다음 사진 한번 보여주세요. 저 풍경이 이스라엘 백성이 쳐다보는 풍경인데 저 빨간박스안에 있는 곳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지금 조그만 언덕 하나 넘어가면 38년 광야생활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데 하나님 말 한마디에 눈 앞에 가나안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겁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사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 생활을 한지 38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1,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38년입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태어난 아이가 어느덧 40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눈 앞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광야길을 계속 걸어가라는 겁니다.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Numbers 21:5 NKRV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신들을 출애굽이라는 달콤한 말로 꼬드겨 이 허허벌판 광야에서 죽게 만드냐는 겁니다. 자신들이 죽을 이유도 이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어서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주겠다라는 겁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다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동안 광야생활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이 하찮다라고 말했던 그 만나와 메추라기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38년동안이나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와 메추라기는 잊어버린 채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죽겠다. 당신이 우리에게 준 그 하찮은 음식 따위는 필요없으니까 어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안내하라는 겁니다.
두 친구가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심하게 불평을 합니다. “3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내게 2억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네.”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합니다. “야, 너 참 수지 맞았다. 2억원이면 어디냐.” 친구가 다시 말합니다. “2주 전에는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내게 3억원을 유산으로 남겨주셨어.” 다른 친구가 부러워서 말합니다. “아이고,5억원을 벌었구나. 얼마나 좋으냐.” 친구가 계속 말합니다. “지난 주에는 고모님이 돌아가셔서 10억원을 남겨주셨다네.” “그럼 15억원이 됐네. 부럽다.” 그런데 이 친구는 15억원을 받고도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불만이 가득하냐?” 그러자 15억원 유산을 받은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무도 안 돌아가셨잖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눈에는 지금 무엇이 보이십니까? 여러분들의 현실 앞에 놓여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하나님이 없다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그 알량한 거룩한 믿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보잘것만 없는 믿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6절입니다.
Numbers 21:6 NKRV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순간에서도 그들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불뱀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분노를 못이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살시켜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해져 있는 상황들을 이용해서 지금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새로운 백성을 선택해서 다시 그들을 세워나가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불뱀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한 말은 틀렸다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눈 앞에 현실에 무너져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너무나 많습니다. 어릴 때 교회의 권사님들을 중에 기도회 할 때 “나 좀 살려달라고,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누구보다 뜨겁게 기도하시면서 나올 때는 “어이구 내가 죽어야지”말을 하며 기도회를 나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과 저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기도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보이니까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확신이 생기다가도 세상을 보니까 다시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앙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조금만 한눈팔고 다른 생각을 하면 이 신앙은 우리에게 교만과 불평불만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긴장하며 신앙생활을 해도 늘상 우리는 시험에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가 죄임을 알려주실 때 우리는 즉각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Numbers 21:7 NKRV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연애를 하다보면 여자친구에게 잘못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잘 선택해야 합니다. 사과를 할껀가? 아니면 해명을 할껀가? 해명을 했다가는 공감하지 못한다고 더 혼날꺼고 사과를 하면 그때부터 게임은 시작됩니다. 사과하면 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뭘 잘못했는지 아냐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계속 말할지 아니면 자세하게 뭘 잘못한지 나열할지.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 뭘 잘못한지도 모르겠는데 사과하는거야? 라는 대답을 듣게 될 꺼고 그렇다고 너무 자세하게 잘못에 대해서 설명하면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냐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이 상황이 참 난감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진짜 사과는 막연한 미안함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분명히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불뱀으로 인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자 그 자리에서 바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그냥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가 무엇을 잘못한 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진정한 회개는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지금 눈에 보이는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한번만 도와달라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회개하는 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명확하게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할 때 우리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스스로를 속이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모르고 지은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모르고 싶었던 죄인거지요.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척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룩한 척, 회개 하는 척, 하나님만 바라보는 척 이제 이러한 척들은 모두 내려놓고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척하는 신앙을 가진 자인지 아니면 진짜 신앙을 가진 자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본문 8-9절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Numbers 21:8–9 NKRV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사진 한번 보여주세요. 이 본문만 보면 굉장히 단순합니다. 놋뱀을 본 자들은 살았고 보지 않은 자들은 죽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놋뱀을 봐서 살았다라는 모습을 연상할 때 다음과 같은 사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봣던 놋뱀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다음 사진 보여주세요. 가까이서 보면 안볼래야 안볼 수 없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놋뱀을 보지 않고 죽었던 자들은 도대체 얼마나 고집스러웠을 까? 그거 하나보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봤던 거리는 어느 정도 되었냐면, 다음 사진 보여주세요. 이정도 거리였습니다. 아마 거리가 이쯤되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생겼을 겁니다. 놋뱀이 있다고 하니 그 놋뱀을 찾기 위해 주위를 최선을 다해 둘러 보는 사람들, 주변에서 놋뱀을 보고 산 사람들이 생겨나니 놋뱀을 본 척하는 사람들. 놋뱀을 보는 척을 했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는 놋뱀을 봤다라고 하며 살아날 꺼라고 확신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들 중에서는 사실은 놋뱀을 본척 했지만 스스로를 속여가면서까지 정말 놋뱀 봤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입니까? 보이지는 않지만 놋뱀을 보라고 하는 하나님 한마디의 말만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의 자세로 나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함께 했던 동역자들이 봤던 놋뱀을 나도 봤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죽어가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속에 섞여 신앙을 가진 척 하며 보이는 것만 믿으며 살아가시겠습니까?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23세에 혼자 되신 어머니의 유복녀로 태어난 딸이 있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수고로 유학도 하고, 나중에는 저명한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났던 딸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교회를 둘러 보는데, 실망이 컸다. 여자들이 모여서 남자들 험담을 하고, 장로가 다가와서는 처음 본 자신에게 아들 대학 입학을 청탁하고,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너무 화가 난 딸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 때 조용하기만 하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와서는 참 많이도 봤구나." 이 말에 딸 교수는 무너졌다 생각없이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보는 수준과 자기의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보다 큰 것이었다. 누구든 자기의 수준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삽니다. 그런데 대게 내 눈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먼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자꾸 거짓이 보인다면 내가 거짓에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교만이 보인다면 내가 교만에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의 눈에는 사기꾼이 가장 잘 보이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 옆으로 가 보십시오. 섬김만 보입니다. 기도의 사람 옆으로 가 보십시오. 기도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믿음의 발걸음에 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며 신앙을 가진 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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