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08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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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11:20–30 NKRV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설교문] 익숙함이라는 함정, 그리고 참된 안식

본문: 마태복음 11:20–30 (개역개정)

1. 서론: 예수님께 가장 가까웠던 도시들의 비극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고, 그분의 기적을 체험하면 믿음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의 그 상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예수님이 거명하신 고라신,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 이 세 도시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모여 있는, 소위 **‘예수님의 사역 본부’**와 같은 곳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고, 가장 많은 말씀을 전하셨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수도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평가는 충격적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도대체 왜 예수님은 당신을 가장 많이 접하고 경험한 이들에게 이토록 무서운 경고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20절)**입니다.

2. 본론 1: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눈물 흘리며 죄를 뉘우치는 감정적인 반응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회개, 즉 **‘메타노에오(metanoeo)’**는 감정의 영역이 아닙니다. ‘메타(바꾸다)’와 ‘노에오(생각하다, 인식하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생각을 바꾸는 것’, ‘인식의 틀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기존 생각과 기준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 저 예수가 기적은 일으키네. 그런데 내 생각엔 메시아라면 로마를 정복해야지.” “말씀은 좋은데, 율법 해석이 우리 전통이랑은 좀 안 맞네.”
그들은 예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판단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라는 틀 안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하지 않음’**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십니다. 구약 시대 가장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인 소돔조차도, 너희가 본 이 기적을 봤다면 벌써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너무 익숙해서’ 자기 의와 편견에 갇혀버렸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3. 본론 2: 지혜로운 자와 어린 아이의 차이

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5절)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성경 지식이 많고, 종교적 열심이 특심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태신앙, 직분자,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가 정해놓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해’라는 기준이 너무나 확고해서, 눈앞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는 무식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판단을 유보하고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가 말하면 “내 생각엔 아닌데요?”라고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입니다.
목사님, 성도님 여러분,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앎이 내 자존심을 세우고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진짜 성경을 아는 사람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내 고집이 깨지고 예수님의 생각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그것이 ‘어린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4. 본론 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은 이런 맥락에서 그 유명한 초청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8절)
우리는 이 구절을 단순히 “인생이 힘들지? 와서 위로받아라”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앞선 문맥을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짐’은 삶의 고단함 그 이상입니다.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율법적, 종교적 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613가지의 조항을 만들어 백성들의 어깨에 지웠습니다. “이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저것을 해야 복 받는다.”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내 의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 하는 그 짐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판단의 짐, 증명의 짐을 내려놓고 그냥 내게로 오라.”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 ‘온다’는 것은 교회 건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항복입니다.

5. 결론: 멍에를 메고 배우라

예수님은 쉼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역설적으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쉬게 해준다면서 왜 또 멍에를 메라고 하실까요?
당시 농경 사회에서 멍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멥니다. 힘세고 경험 많은 어미 소와, 아직 서툰 어린 소가 짝을 이룹니다. 그러면 어린 소는 방향을 잡거나 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어미 소 옆에 붙어서 발만 맞추면 밭은 어미 소가 다 갑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이것입니다. “네 인생의 방향과 무게를 네가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나랑 같이 멍에를 메자. 내가 방향을 잡을 테니 너는 내 옆에서 나를 배우기만 해라.”
목사님, 그리고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는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는 드리고, 설교는 듣고, 봉사는 하지만, 정작 내 생각과 고집은 하나도 꺾이지 않은 채 예수님을 ‘관람’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보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태도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쥐고 있는 판단의 짐을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빈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영혼에 참된 쉼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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