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이라는 이름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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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증인이라는 이름의 무게
본문: 요5:31-47
[서론]
제가 대학 졸업후 일반 직장에 갓 입사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이었기에 잘해내고 싶은 의욕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참 많았습니다.
사실 학생 시절 저는 소위 ‘신앙 좋은 청년’으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이라는 정글에 던져지자, 그 화려했던 신앙의 이력들은 저를 격려하기 보다 오히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저를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식기도를 꽤 길게 하는 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짧게 눈만 깜빡이고 수저를 드는 것을 보며 안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보란 듯이 대표기도하듯 길게 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식기도를 통해 은근히 제 신앙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눈을 감고 정적을 지킬 용기가 제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식기도는 점점 짧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눈 뜨고 마음 속으로 ‘주님, 잘 먹겠습니다’만 외치게 되었습니다.
마음 한켠에는 늘 무거운 정죄감이 돌덩이처럼 얹혀 있었습니다.
회식 자리는 제게 더 큰 고역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당당히 밝히면 될 것을, 저는 그저 술잔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였습니다.
오죽했으면 회사 동료들은 제 결혼식장에 와서야 제가 교회 리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학생회관 앞에서 돗자리 위에 앉아 무릎꿇고 방언기도하던 그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왜 이리도 힘든 일일까요?
어제까지는 포효하던 사자같던 믿음이 왜 세상의 문턱만 넘으면 도망치는 쥐처럼 작아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때문에 증인으로 살아가는게 이토록 힘든 것일까요?
[본론1]
우리의 신앙을 세상 속에서 드러내놓고 산다는 게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흔히 신앙은 드러내면 냄새가 나고, 드러나면 향기가 난다고 말합니다.
향기는 감추려 해도 배어 나오는 것이고, 냄새는 요란하게 피워 올리는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향기처럼 배어 나와야 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다른게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세상만 나가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버리고 침묵하는 자가 될까요?
단순히 용기가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요?
아마 그것도 맞는 말일것입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는 소외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미움받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유별난 사람으로 찍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크게 다가올때 우리는 증인의 자리에서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44절입니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메시아를 누구보다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눈 앞에 있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그들의 진짜 관심은 사람들이 주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자기들끼리 칭찬을 주고 받고, 사람들 앞에서 거룩해 보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제 과거의 경험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학생때 식기도를 길게 했던 것과 직장에서 짧게 했던 것은 사실 그 뿌리가 같습니다.
둘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중 하나가 바로 타인의 시선과 평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참된 자아’를 찾으며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에게 집중해 봤자 선한 게 나올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증인으로 회복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시선을 이기고 하나님께 집중할수 있을까요?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본론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통독도 하고 묵상도 합니다.
그 열심 자체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흔히 ‘성경을 아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을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단순히 종교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어떤 가치관으로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 입니다.
즉, 성경은 삶의 변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39-40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의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그 내용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이 과연 누구를 증언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본질을 놓쳤으니 그들의 열심은 잘못된 방향을 향한 헛된 열심일 뿐입니다.
성경의 지식 자체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삶은 변화되지 않은채 종교적 머리만 커진 상태, 이것이 증인의 능력을 상실한 두번째 이유입니다.
주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성경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성경은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을 책으로만 아는 것과 직접 사랑하는 사람과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최근에 한 유명 상담가의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 남편의 사연이 나왔는데 매우 뼈 아픈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사연을 신청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가 청소를 안해 집이 쓰레기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2명이 있는데 한 아이가 아빠를 닮아 유전병으로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편도 아이도 더 잘 먹이고 집안 환경도 깨끗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아내가 왜 이런지 상담을 해보니 문제는 자기가 무슨 문제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냥 자기는 청소하는 것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 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아내가 일주일에 4-5일씩 교회에 살다시피하며 온갖 봉사는 다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거죠.
이것이 바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없는 종교적 열심의 무서운 실체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 좋은 집사님인데, 정작 삶의 현장인 가정과 일터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성경을 지식과 종교적 의무로만 배웠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의 본질은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주님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어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기 힘든 이유는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주님을 어떻게 세상에 전할수 있겠습니까?
증인은 내가 공부한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만난 분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본론3]
그렇다면 앞서 말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고민은 마음은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압니다.
묵상과 기도, 증인의 삶이 우리가 해야할 마땅한 일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압니다.
결단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그 결단이 힘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행동하기가 힘든 것일까요?
단순히 의지 박약이라서 일까요?
42절입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입니다.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성경을 연구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화려한 종교적 행위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증인으로 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증인의 삶은 ‘기술’이나 ‘훈련’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랑하고 싶어 견딜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증인으로 살기 힘든 본질적인 이유는 전도 훈련을 덜 받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열심이나 용기,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엔진이 꺼진 자동차를 뒤에서 밀고 가려니 신앙생활이 고역이고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은 ‘의무’로 짜내는 억지 쥐어짜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반응하며 터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열심보다 내 마음의 사랑의 온도계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제 직장생활 이야기가 우리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왜 나는 믿음이 이렇게 없을까?”
“왜 나는 용기가 이렇게 없을까?”
스스로 자책하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의무감을 가지고 억지로 되는게 아닙니다.
내 안에 식어버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엔진이 다시 뜨거워질때 증인의 삶은 숙제가 아닌 축제가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납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두는 훈려이 필요합니다.
또한 성경 묵상이 단순히 우리의 의무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우리 신앙의 엔진입니다.
엔진이 꺼지면 다른 어떤 것도 제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증인의 삶은 어찌보면 그리 어려운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면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삶입니다.
증인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넉넉히 견뎌낼수 있는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