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리즈 : 시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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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의 창 끝에서

찬송가 585장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본문 : 시편 3편

시편 3 NKRV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서론

비언어적 표현 = 마음의 언어

혹시 이 노래를 아십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저 바라보면~ 음~ 마음 속에 있다는 걸~”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 같네요.
네, 이 노래는 초코파이의 광고 음악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마음들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살포시 전하는 초코파이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직접적인 말로 전달되는 마음보다 표정이나 말투, 태도와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서로의 깊은 속 마음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 성도들의 비언어적 표현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요?
처음 우리 교회에 오면 만나게 되는 주차 안내팀의 성실함, 입구에서 만나는 안내팀의 미소와 환영 인사, 성도들을 바라보는 목사님의 표정과 찬양팀의 열정, 그리고 매일 새벽 이곳에서 여러분이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모습
저는 우리의 그 모든 비언어적 표현이 우리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확신합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저와 제 가정을 사랑해주시는 성도들의 마음을 느낄 때마다 얼마나 기쁘고 평안한지 모릅니다.
혹시 제 착각인가요? (웃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상대가 품고 있는 마음을 느끼고, 그에 반응할 수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악의

그렇다면 악의, 그러니까 상대에 대한 악한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혹시 살면서 누군가의 악의를 마주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괜히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고, 내가 잘못되기를, 심지어 다치고, 죽기 까지 바라는 그런 불쾌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마음 말입니다.
때로 이런 악의들은 사랑이나, 우리의 좋은 감정들보다 더 강렬하고 날카롭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악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마치 날카로운 창 앞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을 겨누고 있는 창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긴장감에 온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리고, 심장은 고장난 듯 쿵쾅거리며, 식은 땀이 날 것입니다.
창 앞에 선 마음은 두려울 것이고, 한편으로는 왜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지 억울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나에게 창을 겨눈 그 사람을 향한 원망, 나의 악의가 또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는 것보다, 악의는 더욱 쉽게 악의를 자라게 합니다.
제가 지금보다 더 젊고, 그러나 더 성품은 못났을 때 제 주변에는 항상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 혼자 저를 싫어한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어느날 어느 예배에서 기도회가 있었는데,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오늘 이 자리에 혹시 그동안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함께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용서합시다.”라고 이렇게 인도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기도하면서 내가 그동안 용서하지 못했던 선배 한 사람을 떠올리며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떴는데, 제 앞에서 두 명이 서로 저를 양보하고 있는거에요.
진짜입니다. 제 앞에서 서로 먼저 하세요 하고 양보하는데 진짜 와…
처음엔 기분이 얼마나 상하던지.
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나 생각했는데, 진짜였구나. 싶어서 제 속에도 서운함과 미움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하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한 사람씩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시간이 진짜 얼마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은 벌게지고, 도망치고 싶던지.
물론 차근차근 원인을 들어보니 결국은, ‘아, 그럴만 했더라.’
그들이 품었던 미움이 절로 끄덕여지는 이유여서 잘 사과하고 마무리 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잠깐이지만, 저를 용서하고자 왔던 사람들이 저를 향한 미움,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마치 창 끝에 겨눠진 것 같았던 그 순간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은 단 두 명이, 그것도 제 실수로 인해서 가졌던 그 미움,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악의라고 부르기도 힘든 아주 사소한 미움에서 비롯되었었습니다.

악의에 둘러쌓인 다윗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3편은 다윗이 이러한 악의에 둘러쌓인 채 쓴 시입니다.
그것도 말이나 행동으로 끝내는 그런 요즘 시대에 젠틀한 악의가 아니라, 언제든 기회만 오면 죽여버리리라!하고 노려보는 악의였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편 3:1–2 NKRV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단 한 사람의 악의도 우리를 창 앞에 선 것처럼 긴장하게 하는데, 다윗은 자신에게 악의를 보내는 대적들이 많다, 치는 자가 많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다며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악의들에 대해 탄식합니다.
하나하나 세어보면, 다윗의 대적이 많다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 말인가 싶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이스라엘의 가장 첫 번째 왕 사울이 다윗에게 악의를 품었습니다.
다윗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그를 죽이려 창을 던지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이웃의 모든 나라의 군사들이 다윗에게 악의를 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적을 가장 많이 죽인 장군이자, 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 앞에 쓰여진 표제처럼, 그의 아들 압살롬도 그에게 악의를 품었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다윗을 모함하고, 악의를 가지고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합니다.
다윗의 인생은 단순히 밉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윗을 정말 간절히 죽이고 싶어하는 악의로 둘러쌓인 인생이었습니다.
이 창을 쥔 자들이 다윗에게 뭐라고 소리칩니까.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무슨 말입니까?
“너는 이제 내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악의에 찬 외침이며, 조롱이었습니다.
언제든 기회만 오면 죽이고 말리라는, 다윗을 향한 악의의 창인 것입니다.
아니, 이건 진짜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진짜 뭘 그렇게 까지 잘못을 했습니까?
이건 다윗도 마주 창을 들고 가까이 오기만 해보라고 휘둘러도 정당한 것 아닙니까?
폭력에 대해 가장 자비가 없는 현시대의 법에서도요, 이런 상황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정당방위”라고 합니다.
나를 향한 악의, 나를 향한 공격에 대해 나를 지키기 위해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해주고, 때리려는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욕하는 사람에게 더 강한 모욕을 주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복수극을 보면서, 사이다처럼 시원하다며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사랑 얘기가 빠진 드라마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복수 얘기가 빠진 드라마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창 앞에 선 자들이여, 너도 창을 들어라!”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세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본문에서 무엇을 그의 손에 들고 서 있습니까.

방패되시는 여호와 뒤에 선 다윗

시편 3:3 NKRV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자신을 둘러싼 악의들에 대해 창을 마주 들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로 여깁니다.
창이 아니라 방패를 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실제로 보여줬던 삶의 태도였습니다.
사울이 미쳐서 다윗에게 창을 던졌을 때, 그것을 피한 다윗은 그 창을 주어 다시 사울에게 집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군대를 끌고 다윗을 쫓아왔을 때, 몇 차례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압살롬에게 빼앗긴 왕위를 다시 찾으려 할 때는 모든 장군들과 병사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해 살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에 대한 자비는, 보호는 그 적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만약 다윗이 적들의 악의에 대해 방패가 아닌 창을 드는 자였으면 어땠을까 한 번 상상 해봅니다.

골리앗을 이긴 전쟁 영웅이었을 때, 사울의 질투와 악의에 대해 참지 않고 죽여 왕이 되었다면.
사울이 다스리는 시기가 없으니, 나라는 더 부강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반역이나, 왕에 대한 모욕에 대해 용서하지 않으니 아마 왕의 권위도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감히 왕의 죄를 들추어 가르치려드는 나단 선지자? 처형!
감히 아버지의 왕좌를 탐내는 압살롬? 처형!
이웃 나라는 무력으로 통일 시키고, 당시 근동의 가장 강력한 패권을 가진 이스라엘 제국이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도 성경에 다윗은 사울에 이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두 번째 왕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으로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말하는데로 너도 창을 들어 세상의 왕이 될 것이냐
아니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방패로 삼아 그의 보호 아래 있을 것인가.
다윗은 대적을 향해 창을 마주 쥐고 선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패 안에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정당한 방위라는 이름에 창입니까? 하나님의 방패입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선택합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합시다. (아멘)

하나님을 향한 목소리, 단 하나의 응답

다윗이 하나님의 방패 아래 숨었을 때, 여전히 적들은 다윗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구원이 되지 못한다구요.
다윗이 믿고 있는 방패, 하나님의 구원은 죄다 허상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할 때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병에 걸렸으면 더 열심히 병원 다니고 치료 받아야지 기도한다고 나아?
대학을 가려면 그 시간에 책을 한 자라도 더 봐야지, 예배 드린다고 붙나?
우리의 믿음을 허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말들입니다.
저도 사역자의 길을 처음 선택할 때 이런 말들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는 어쩌고 무책임하게 그 길을 선택하냐고 수도 없이 걱정과 우려가 담긴,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제 믿음을 허상으로 여기는 수많은 충고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는 것을 기도하고 기대한다는 제 말에 철 없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진짜 열심히 그 말들에 반박했습니다.
최대한 그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제가 사역자로서 얻을 수입과 가정의 지출이 어떤지 세부적으로 설명해가며 제가 선택한 길에 대해 변호하고, 제 믿음의 합리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아시죠? 그런 설명들이 얼마나 헛수고인지.
여러분 우리가 선택한 믿음은 그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리 포장해도 바보 같은 짓이 맞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 우리의 천국환송의 기쁨이 어떻게 이해되겠습니까? 미친거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의 보호하심이 어떻게 설명이 되겠습니까?
그래서요, 이러한 비웃음과 조롱에 대해 우리는 그들에게 반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너를 구하지 못한다”는 적들에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하고 반박하고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나를 보호하신다, 너희들이 틀렸다며 변호하지도 않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시편 3:4 NKRV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부릅니다.
4절에 부르짖다는 말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뭔가 간절함 심정처럼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이 단어가 본래 가진 의미는 훨씬 심플합니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야 너를 구원할 하나님이 어딨냐?’라고 하는데,
다윗이, 응? “하나님”하고 부르고, 하나님이 “그래”하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명확하고 단순한 부름은, 애타게 외쳐야지만 얻는 어떤 구원이 아니라, 계시는 것도 너무 당연하고, 응답하시는게 너무 당연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다윗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만 하면 끝나는 일입니다.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어딨냐며 모세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앉혀놓고 설명할 필요 없이 홍해가 갈라짐으로 증명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때까지 설명하고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명하셨듯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만이 그들의 모든 말이 틀렸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많고 많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고 거짓이 참이 되겠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변호하고 반박하고 큰 소리를 낸다고 참이 더 참이 되겠습니까?
천만이 아니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수십억이 부정해도 하나님의 보호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보호를 요청하는 우리의 믿음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안전합니다. (아멘)
시편 3:5–6 NKRV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아멘)
“악의의 창이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어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를 더이상 두렵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보호를 신뢰한다면 말입니다.
그들의 악의가 내 안에 새로운 악의로 싹을 틔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 안에 세상의 악의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로 담담하게 들어갑시다.
그들은 우리의 육체는 죽일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악의로 인해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려 한다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로 들어갑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의를 떠나게 하시고, 원수들을 향한 긍휼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아멘)
악의의 창 끝에서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악한 자들의 침묵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우리를 향한 모든 원수들의 악의에 찬 말들이 침묵하게 되는 때가 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는 주님의 날입니다.
시편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인 다윗은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빰을 치시고 이를 꺾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전체적인 죄에 대한 심판이라기 보다 2절에서 그들이 입으로 지었던 죄,
즉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불신의 말을 한 입은 다물어지고,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인내함으로 기다리며 끝까지 이렇게 간구합시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편 3:8 NKRV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아멘
이 시간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악의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 마음의 악의가 자라지 않도록 보호해달라고, 우리의 방패되시는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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