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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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가?”
“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예시로 시작하겠습니다.
전도할 때 사람들의 반응
전도할 때 사람들의 반응
우리는 금요일마다 거리로 전도를 나갑니다.
사람들을 만납니다.
짧게 묻습니다.
“혹시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그때 대답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 타입 1) “저는 착하게 살아요”
✅ 타입 1) “저는 착하게 살아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종교 필요 없어요.”
“저는 착하게 살아요.”
“남에게 피해 안 줘요.”
“저는 죄 안짓고 살아요.”
그래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죄를 한번도 안짓고 사십니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죄라고 본다면 여전히 그렇게 대답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대부분 잠깐 멈춥니다.
논빛이 흔들립니다.
말이 길어지거나 변명이 나옵니다.
왜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속으로는 압니다.
자기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 타입 2)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 타입 2)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상관 없어요.”
“저는 제 인생 제가 책임집니다.”
“간섭만 안 하면 돼요.”
멋있어 보입니다.
독립심이 강한 듯 들립니다.
하지만 사실, 속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고백이죠.
건들지 마 이런 말입니다.
✅ 타입 3) “교회는 싫지만, 불안은 커요”
✅ 타입 3) “교회는 싫지만, 불안은 커요”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좀 싫어요.”
“목사들이 싫어요.”
“그런데 요즘 삶은 너무 불안해요.”
그래서 묻습니다.
“무엇이 제일 불안하십니까?”
대답이 나옵니다.
“돈이요.”
“노후요.”
“관계요.”
“건강이요.”
“내가 쓸모없어질까 봐요.”
이 말이 무엇을 보여 줍니까?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주인은 좋은 주인이 아닙니다.
그 주인은 계속 더 요구합니다.
“더 벌어야 해.”
“더 가져야 해.”
“더 보여줘야 해.”
“더 올라가야 해.”
사람은 지칩니다. 마음이 마릅니다.
평안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이 묻는 질문은 한 가지 입니다.
“왜 당신에게 복음이 필요합니까?”
“왜 구원이 필요합니까?”
바울도 그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대답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나타난다 (18절)
1.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나타난다 (18절)
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나니.”
“언젠가 나타날 것이다”가 아니죠. 바울은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타난다”입니다. 현재형입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진노는 화난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한 반응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보고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다면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단지 행복해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진노 아래 있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2. 왜? 진노 하시나요? 당신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 때문에 (18절)
2. 왜? 진노 하시나요? 당신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 때문에 (18절)
바울은 두 단어를 씁니다.
“경건하지 않음.”
“불의.”
경건하지 않다라는 말은 수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실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는 수평 문제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와 정의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셨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바로 이것이 깨진 것입니다.
3.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지 않는다. 진리를, 마음을 “억누를” 뿐이다. (19–21절)
3.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지 않는다. 진리를, 마음을 “억누를” 뿐이다. (19–21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에 관해 들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바울은 다르게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막는다고 합니다.
진리를 억누른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다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창조 세계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핑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연을 보며 압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합니다.
너무 질서가 있습니다.
너무 풍성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양심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서 압니다.
“이건 옳지 않아.”
“이건 잘못이야.”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압니다.
그래서 변명합니다.
그래서 정당화합니다.
그 자체가 안다는 증거입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21절)
4.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21절)
21절은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감사하지 않음”은 예절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깜빡한 수준이 아닙니다.
감사는 고백입니다.
“나는 창조주께 빚진 존재입니다.”
“나는 받은 존재입니다.”
“나는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부합니다.
“내 인생은 내 거야.”
“내가 주인이야.”
“내가 기준이야.”
그래서 생각이 허망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모순 속에 살게 됩니다.
5. 사람은 예배를 멈추지 않았다. 대상을 바꿔 예배할 뿐이다 (22–25절)
5. 사람은 예배를 멈추지 않았다. 대상을 바꿔 예배할 뿐이다 (22–25절)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지혜 있다 하지만 어리석게 됩니다.
왜요?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3절이 나옵니다. 로마서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꿉니다.
피조물 모양으로 바꿉니다.
우상을 만듭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예배합니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상을 바꿔 예배하는 사람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무엇을 예배할까요?
돈을 예배합니다.
인정을 예배합니다.
성공을 예배합니다.
성적을 예배합니다.
관계를 예배합니다.
쾌락을 예배합니다.
자기 자신을 예배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바꿈”이라고 표현합니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꿉니다.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깁니다.
6. 하나님의 심판은 “내버려 두심”으로 드러난다 (24, 26, 28절)
6. 하나님의 심판은 “내버려 두심”으로 드러난다 (24, 26, 28절)
여러분, 여기서 본문이 정말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말합니다.
24절. 로마서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26절. 로마서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또 내버려 두십니다.
28절. 로마서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또 내버려 두십니다.
반복됩니다.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원하는 길로 가라.”
“네가 붙든 우상을 마음껏 붙어라.”
“네가 섬기는 그것이 너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직접 보아라.”
하나님의 최악의 심판은 이것입니다.
죄인을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이 막아주실까요?
아닙니다.
계속 거부하면 하나님은 놓으십니다.
가죽끈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상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리가 우상을 쓰는 게 아닙니다.
우상이 우리를 씁니다.
7. 성의 왜곡은 “한 죄만” 말하는 게 아니다 (26–27절)
7. 성의 왜곡은 “한 죄만” 말하는 게 아니다 (26–27절)
26–27절은 논란이 많습니다.
로마서 1: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동성애가 언급됩니다.
“순리”와 “역리”가 나옵니다.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죄만”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를 말합니다.
또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곧바로 다른 죄들을 줄줄이 말합니다.
질투도 말합니다.
분쟁도 말합니다.
사기도 말합니다.
험담도 말합니다.
교만도 말합니다.
자랑도 말합니다.
부모 거역도 말합니다.
무정함도 말합니다.
무자비도 말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것입니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만 “가장 큰 죄”로 만들면 안 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이 목록에서 완전히 자유하냐?”
“너는 정말 의인이냐?”
8. 우리의 깊은 위험: “나는 그들과 다르다”
8. 우리의 깊은 위험: “나는 그들과 다르다”
로마서 1장을 읽으면 이런 마음이 올라옵니다.
“세상이 정말 타락했네.”
“저 사람들 문제야.”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2장 1절에서 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너도 핑계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한다.”
여러분, 이 본문은
“그들”을 때리려고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나”를 살리려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9. 32절: 마지막 단계는 죄를 “옳다” 하는 것
9. 32절: 마지막 단계는 죄를 “옳다” 하는 것
32절이 정말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죄가 죄인 줄 압니다.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도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옳다고 합니다.
박수 칩니다.
장려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양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진리가 바닥난 것입니다.
10. 그럼 소망이 없나?
10. 그럼 소망이 없나?
여기서 끝이면 절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부러 여기까지를 다 보여줍니다.
왜요?
복음을 빛나게 하려고요.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선명합니다.
내가 정말 죄인임을 알수록
구원자는 더 귀합니다.
우리는 조언이 필요한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방향 수정이 필요한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가 예수님입니다.
11.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반응
11.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반응
첫째.
이 말씀이 현실 지도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세상에 선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망가짐도 있습니다.
그 망가짐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입니다.
둘째.
독선하지 마십시오.
남을 정죄하며 자신을 의롭게 여기지 마십시오.
바울은 그 길을 막습니다.
셋째.
복음의 빛 아래에서 자신을 보십시오.
이미 16–17절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니 질문하십시오.
“내 마음에서 하나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과도하게 붙든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것 없이는 못 산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묶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을 다시 중심에 모십시오.
피조물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십시오.
✨ 결론
✨ 결론
로마서 1장은 말합니다.
진노는 지금 현실입니다.
인간은 알면서 외면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그 결과 인간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때
우상은 무너집니다.
질서는 회복됩니다.
관계가 회복됩니다.
마음이 회복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