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진리를 분별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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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된 진리를 분별하는 법
본문: 요7:14-24
[서론]
빌게이츠가 대학생들에게 항상 추천하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사실충실성)’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오해하며 살고 있는지 폭로합니다.
이 책에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 저소득 국가에 사는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30프로 혹은 70프로 이상이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실제 정답은 9프로에 불과합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질문의 정답률입니다.
평균 겨우 10퍼센트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침팬지에게 무작위로 번호를 찍게 해도 33퍼센트는 나오는데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편견’과 ‘선입견’ 때문입니다.
이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게 만드는 10가지 본능을 지적합니다.
그중 하나가 ‘일반화 본능’입니다.
“저 사람은 저런 배경을 가졌으니 이럴거야”
“저 지역 출신은 원래 그래”라는 식의 고정관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편견이 단순히 세상을 오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진리’ 앞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신앙, 내가 배운 관습과 전통, 혹은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라는 ‘편견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찾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의학박사인 티머시 제닝스는 자신의 책,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변하고 삶이 변한다.”
무슨 의미일까요?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내 편견과 선입견이 만들어낸 우상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경우 우리의 신앙은 오히려 우리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깊이 자리잡은 신앙적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진짜 진리를 만나는 비결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1]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성경을 더 많이 배우면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데 있어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14-15절입니다.
명절이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에 참여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그 곳에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에 매우 놀랍니다.
그냥 감탄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무식한 예수란 작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거야?”
이런 뉘앙스입니다.
예수님이 촌구석 나사렛 출신에다가 정식 랍비 교육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는 진리가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문과 비아냥거림에 응답하십니다.
16-1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이 말씀은 그들 마음의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경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예수님을 따르기 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기득권과 자기 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진리인 말씀을 머리로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알면 행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행할 의지가 있어야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진리는 자신의 속살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과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진리는 모습을 감춥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진리는 자기 뜻대로 행하는데 있어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진리를 자기 뜻대로 왜곡하여 해석해 버립니다.
진리는 단지 자신을 받드는 시중노릇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을 따르려는 의지가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길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욕심,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 왜 순종의 의지가 잘 생기지 않을까요?
18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만,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순종할 의지가 없습니다.
단지 내 생각, 내 지식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진리조차도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해 버립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하던 기복주의 신앙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다릅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내 삶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 지식은 나를 변화시키는 진리가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는 또다른 장애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쌓아온 ‘전통과 형식’이라는 틀입니다.
[본론2]
신앙생활을 하며 전통과 형식을 만드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의 자연스러운 현상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경험한 전통과 형식이 마치 진리라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피아노 위치 하나 옮기는데도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피아노가 익숙한 자리에 있어야만 신앙이 유지된다고 믿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하나도 이렇게 옮기기 어려운데 하물며 신앙은 어떨까요?
형식이 본질을 앞서기 시작하면,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한국교회에도 이른바 ‘좋은 신앙인’의 5대 기준이 있었습니다.
첫째, 새벽예배
둘째, 술과 담배 금지
셋째, 주일성수
넷째, 십일조
다섯째, 봉사
물론 귀한 덕목들이지만,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만 잘 지키면 내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쉽게 정죄한다는 점입니다.
19절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율법을 613가지나 디테일하게 만들어서 지키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을 단 한사람도 지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정말 큰 충격적인 말씀일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 자체를 지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과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끔찍하게 여기지만 오히려 속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지킬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또한 예로 드신것이 안식일입니다.
앞서 5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는 금지된 일입니다.
21-2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는데, 너희는 모두 놀라고 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법을 주었다.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이 때문에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준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몸 전체를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분개하느냐?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그들은 모세의 율법도 아닌 조상들이 지켰던 할례를 목숨처럼 지킵니다.
안식일인데도 몸에 상처를 내는 할례는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38년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자 그대로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긍휼과 사랑’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24절입니다.
“겉모양으로 심판하지 말고, 공정한 심판을 내려라.”
율법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배우고 경험한 신앙의 기준이 성경의 기준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내가 배우고 경험한 신앙 전통과 관습이 성경의 기준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종교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문자 그대로를 순종해야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약의 율법들을 다 순종할수 있겠습니까?
굽이 갈라진 동물은 먹어서는 안되고, 피가 섞인 선지국이나 순대도 먹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토요일이 안식일이기에 예배도 토요일에 드러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의 핵심은 ‘사랑’과 ‘생명’입니다.
그것을 벗어난 성경 해석은 남을 죽이는 것이 될수 있습니다.
신앙을 빙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혐오가 복음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한스 로슬링은 그의 책에서 우리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침팬지보다 세상을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고 꼬집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앞에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싫어하는 잘못된 고집 때문입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전통이라는 안경이 그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년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내 안의 편견이 있을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깨어있지 못하면 우리 역시 신앙의 본질을 놓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수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한 말씀이라도 순종할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진짜 진리는 순종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식과 전통이 오히려 신앙의 장애물이 될 위험성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모든 말씀의 본질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너무 좋아합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 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는 팩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진리가 중요합니다.
그 진리의 핵심이 사람이고 사랑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주 누군가를 판단하고 싶을때 잠시 멈추고 내 편견의 안경을 닦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함께걷는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