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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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7장 죄의 지배의 환경: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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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109페이지 7제 7장 죄의 지배의 환경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이어서 생각해 볼 것은 죄가 신자를 지배하는 환경입니다. 즉 어떠한 환경에서 신자 안에서 죄가 지배력을 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내제하는 은혜도 그리고 죄도 모두 그것이 잘 보존되고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거기에 적합한 환경이 필요합니다. 죄가 지배력을 얻는데 적합한 환경은 신자가 성령의 은혜의 통치를 떠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 안에서 죄가 지배력을 갖기 갖게 되기 전에는 반드시 은혜로부터의 미끄러짐이 있습니다. 신자가 자신 안에서 죄의 강력한 지배력을 느끼게 될 때에는 그 전에 먼저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01:13)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서서히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신자가 성령의 은혜의 통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죄가 지배력을 광화할 수 있도록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그 은혜의 통치 아래 순종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죄가 지배력을 얻기는 커녕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도 매우 불리한 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은혜가 죄를 죽이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지 않은 죄는 자기의 때를 기다리며 우리 안에 엎드려 있습니다. 마치 엎드린 채 사냥감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굶주인 사자와 같이 말입니다.
(02:11) 이처럼 죄는 신자의 내면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얻기 위하여 신자가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기를 고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게 됩니다. 마치 사람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질병과 가깝게 되듯이 말입니다. >> 신자 안의 은혜가 사라짐으로써 죄에 대한 저항력은 현재이 약화되고 악한 욕망에 대한 친화력은 강해지게 됩니다. 더러운 생각은 마음에 쉽게 착상하게 되 착상되어 뿌리를 내리게 되고 뿌리를 내린 생각은 죄를 출산할 수 있는 쉬운 기회를 찾게 됩니다. 이때 영혼의 실증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은혜의 통치례로 다시 돌아오는 일에 태만하게 태만하게 하고 육체의 게으음은이를 위한 마땅한 의무에 대하여 수고하기를 거절하게함으로써 은혜로부터 총체적으로 미끄러지도록
(03:15) 돕습니다. 이렇게 육체의 겨으음과 영혼의 실증이 만나게 되면 신자는 신속히 은혜의 지배로부터 멀어지고 죄가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마음과 영혼 안에 마련하게 되고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와 의싸움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을 쫓아 순종하는 것은 매우 쉬워지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죄와 싸는 것은 매우 힘겹게 됩니다. >> 1. 신자가 은혜의 고할 상태에 있을 때 앞서 살펴보듯이 죄가 신자 안에 들어와 우세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은혜가 쇠퇴하고 나아가 고갈 상태에 있는 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04:09) 그리고 은혜가 지배력을 잃은 것만큼 죄가 지배력을 더욱 확고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은혜의 고갈 상태가 있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신자가 은혜의 구호할 상태에 있을 때에도 은혜의 작용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서 경험되는 은혜의 통치는 은혜의 지배 아래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이것들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통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이지 않음. 첫째로 은혜와 동체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사람이며 실료적으로 사람 그 사람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신겨진 사람입니다.
(05:03) 이제 그 사람은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는 원리적으로 이미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를 율법적으로 다스리지 아니하고 은혜를 통하여 다스립니다. 그가 아무리 절망적인 죄의 지배 아래 있다 할지라도 그의 주신이 생명 새 생명과 은혜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평가하던 사대 교회를 향하여 은혜에 남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영혼이 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간헐적으로 마음에 쏟아부어지는 기도의 경험이 시작인 은혜의 정서를 갖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05:58)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경험한다 해서 그것이 곧 죄의 지배를 벗어나 은혜의 지배로 들어간다는 뜻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집배 아래도 그러한 은혜의 경험을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집배 아래는 이러한 경험이 지속적이지만 죄의 집배 아래는 이러한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간헐적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본 제구의 나를 강점하고 스프는 총칼로이 민족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는 총들고 싸우던 소수 독립투사들이 있듯이 주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는 간헐적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은혜의 경험이 강하게 나타나 죄 아래 자신의 상태를 탄식하며 울부짖게 만들기도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기 구하게 하기도 합니다.
(06:53)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있다 해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그의 영혼 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진실한 자기 인식과 참매의 경험을 통하여 죄의 지배력과 싸울 계기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험으로 그치고 구체적으로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분한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 그러한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이 곧 은혜의 상태로 들어간 증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B. 지적인 혼란의 경험. 둘째로 지적인 혼란을 경험은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간헐적인 경험으로 인하여 종종 죄의 지배 안에 있는 신자들이 지적인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07:52)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혼란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오해. 첫째로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주의 집에 주의 집에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수시로 율법에 의해 송사당하고 정죄받을 때 신자는 자신을 쏟아 자신을 쏟아부어 깊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기도해도 응답의 확신이나 하늘의 은혜로 가득차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지켜진 것은 차가운 거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기도의 문이 다시 열리고 마음으로부터 물어나오는 기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08:53) 그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라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있어도 죄는 여전히 그의 영혼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시적인 기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정력과 거기 거기에 강하게 저항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쉽게 굴복하는 죄의 경향성은 잠시 추할뿐 악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간헐적인 은혜의 순간이 사라지면 예정과 같은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죄의 집배 아래 있지만 하나님께서 떼도록 그를 불쌍히 여기서 회복으로 나아가도록 기적인 은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09:42)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안을 갈망하여 죄와 구체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기회가 됩니다. 예. >> 2.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오해.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속단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또 다른 고통은 죄의식입니다. 특히 양심에 거스르는 범죄가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 경우에는 오직 그 개별적인 죄가 자신이 지금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이는 이는 그 범죄가 양심이 송사하고 정죄하는 뚜렷한 표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되기까지 이바지한 죄의 영향력은 총체적인 것이지 한두 가지의 실행죄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43) 물론 그러한 개별적인 죄가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제 뚜렷한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데는 바세바와의 간음 사건이 계기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그가 죄의 집배 아래로 들어가게 된 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죄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도가 되지 않고 은혜의 응답이 없는 것이 모두 자신의 그 계기적인 실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때에 순간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기도의 교통이나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증거라고 믿게 합니다.
(11:31) >>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이는 죄책보다 죄의 현재적인 힘이 문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시급한 것은 걱정한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죄의 힘의 약화입니다. 개별적인 죄에 대한 용서의 경험이 신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죄의 기대 안에서 하는 일이 없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사제의 경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우세한 죄의 지배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한 어느 대별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확신한다 하더라도 강력한 죄의 지배력 때문에 또다시 쉽게 범죄하고 낙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27)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적절한 은혜의 원리를 따라 죄 죽임을 실천함으로서 죄가 지배력을 잃게 되면 사제의 확신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죄 죽임의 실천을 통하여 죄가 지배력을 이루면서 은혜의 지배는 우세해지고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교통의 경험은 강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도의 응답을 잘못 적용함. 셋째로 기도 응답의 확신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또 하나의 고통은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소원과 함께 역사하는 죄의 유혹하는 능력이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때 신자는 죄와 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게 됩니다. 사도
(13:34)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 탄식하게 됩니다. 오라 나는 곤구한 사람이로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 말씀.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에서 많이 갈등하지만 한편으로 정욕의 욕구를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울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신자는 기도 응답이라는 방법으로 죄에게 지배를 받는 상황을 뒤집어 보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은혜를 주셔서 열렬한 기도가 가능하게 되면 이것이 곧 자신을 죄의 집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 아래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기에 인색치 않으신 분입니다.
(14:36) 그리고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에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응답의 확신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고통스러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도 응답의 확신 때문에 구체적으로 제 죽임의 실천을 위해 힘쓰기보다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가 죄의 집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런 식의 한 순간의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이 >> 은혜의 죄 한 보좌를 다툼 신자에게는 은혜와 죄가 공존합니다. 가장 나쁜 신자 안에 은혜가 있고 안에도 은혜가 있고 가장 좋은 신자 안에도 죄가 존재합니다.
(15:39) 그리고 죄의 은혜는 모두 우세 지배 되고자 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은혜가 사라지지 않고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도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의미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영혼의 상태는 오직 은혜의 지배 혹은 죄의 지배뿐인가? 혹시 아직 어느 쪽의 지배도 받지 있지 않거나 양쪽 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자의 상태는 오직 둘 중에 하나입니다. 비록 신자 안에 은혜와 죄가 공존하지만 양쪽 중 어느 쪽도 지배권을 확보하지 않는 미정의 상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죄가 공전한 신자의 마음의 보좌는 오직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16:31) 주님께서 그 보좌에 계시든지 자기 욕망이 그 보좌로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결론을 십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시며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절만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은 극기 소소이고 대사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재물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7:23) 그러나 두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만 불명 둘 중에 하나만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배타적인 사랑이 아니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 사랑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신자의 마음에도 은혜 죄 아래 배타적인 두 가지가 어느 쪽도 지배적이지 않는 상태에서 공존한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 안에 은혜와 죄가 공존하지만 통치와 노릇을 하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보좌는 오직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국가를 전보하고 반란 일으킨 반란군의 수계가 합법적인 정부의 어 대통령이 한 나라의 영토 안에 있을 수는 있어도 아 하나밖에 없는 대통령 직무시를 함께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18:18) 신자는 죄의 집 아래 있을 수도 있고 죄의 은혜의 집배 아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어느 한쪽이 우산 지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은 빼앗긴 지배력을 다시 찾고자 공격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또한 적은 이미 찾은 지배력을 다시 잃지 않으려고 사수하며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은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누리는 은혜의 정도가 다르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죄의 지배하는 정도가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죄와 은혜의 집배에 있어서 중간은 없습니다. 이미 놓인 놓여 있는 죄의 집배 혹은 은혜의 지배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말해 줄 뿐입니다.
(19:09) 3. 은혜의 통치 어 은혜의 현재 한대적 통치를 관망하라 그러면 은혜의 지배 안에 있는 신자들이 죄의 지배를 떨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기 힘써야 합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상태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영원히 경고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 아래 있는 성경의 인물들이 그 복된 상태에서 미끄러져 죄에 빠졌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받은 은혜는 이전에 필요한 은혜이고 지금은 오늘 오늘 하늘을 열고 부어 주시는 거룩한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은 오늘 우리 안에 역사하는 은혜의 현재적인 지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19:58) 우리가 하늘적으로 맛보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죄의 지배력을 벗어나 거룩한 은혜의 지배 아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은혜의 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더 깊고 열렬한 영적 상황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내 마음을 지키며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 지정하신 은혜의 수단의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영혼의 실증과 제직기를 털어내야 합니다. 마음을 쏟아는 기도 속에서 마음의 은혜의 태를 경고의 하고 여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46) 나아가서 이미 자기 안에 존재하는 죄에 대하여 복음의 원리를 따라 죄의 죽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이 모든 일에 있어서 현대적인 은혜를 갈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은 분조하는 삶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처럼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받은 바 이것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진자가 제 가운데 떠밀려 빠져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21:31) 그가 거룩한 섬을 살기 위하여 분투하고 죄를 죽이지 아니하면 결국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그를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스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신자가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니다. 날마다 진 진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하여 애쓰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참된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부패하게 된 신자들은 얼마든지 만납니다. 그들의 심이 거짓이기 때문이기 그들의 심이 거짓이기 때문이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 살기 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에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을지라도 현재적으로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성령과 그 통치를 떠남으로써 제가 지배하기 위한 환경 속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2:35) 그러므로 죄를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편은 은혜의 현재적인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 아멘.
한눈에 보는 7장, 죄의 지배의 환경: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
I. 신자가 은혜의 고갈 상태에 있을 때
A. 은혜의 통치가 지속적이지 않음.
-죄 아래에 있어도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마음이 쏟아지는 기도, 은혜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음.
-은혜의 지배 아래는 이러한 경험이 지속적이지만 죄의 지배 아래서는 간헐적이며 일시적임.
-간헐적이며 일시적인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이 곧 은혜의 상태로 들어간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
B. 지적인 혼란을 경험함.
1.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오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다 어느 순간 기도의 문이 잠시 열릴 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라고 속단함.
-그런 경험이 있어도 여전히 정욕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임.
-이런 사람들이 경험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회복으로 나아가도록 주신 기회임.
2.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오해
-죄 의식으로 괴로워하던 신자는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러다 순간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기도의 교통이나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이 하나님의 용서의 증거라고 생각함.
-그러면 그는 의대적인 힘에려 자유를 누리지 못함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시급한 것은 특정한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죄의 힘의 약화임
3. 기도의 응답을 잘못 적용함
-신자의 마음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죄 유혹하는 능력은 그를 놓아주지 않음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에서 갈등하며 실제로 싸울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함
-어느 순간 열렬한 기도가 가능하게 되면 자신을 죄의 집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함
-구체적으로 죄죽임의 실천을 위해 힘쓰기보다 막연한 기대감 속에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희망을 가진 신자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순간의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음.
II. 은혜와 죄 : 한 보좌를 다툼
-신자 안에는 은혜와 죄가 공존하지만 항상 둘 중 하나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음
-신자의 마음의 보좌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임
-한쪽은 빼앗긴 지배력을 다시 찾고자 공격하고, 또 한쪽은 이미 찾은 지배력을 다시 잃지 않으려고 싸우는 중임
III. 은혜의 현재적 성취를 갈망하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기를 힘써야 함.
-누리고 있는 은혜 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더 깊고 열렬한 영적 상황을 추구해야 함.
스터디
제7장
죄의 지배의 환경: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으로써
1. 죄가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얻기에 적합한 환경은 무엇입니까?(109-110)
2. 신자 안에 은혜가 사라짐으로써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질 때,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은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110)
3.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은헤의 경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111-112)
4.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신자가 간혈적인 은헤의 경험 아래서 오해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113-114)
5. 죄의식 아래서 괴로워하는 신자가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 아래서 오해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신자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115)
6. 한 번의 기도 응답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16-117)
7.죄와 은혜 중 최종적으로 지배력을 갖는 것은 하나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이 죄의 지배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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