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2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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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16:1–12 NKRV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1. 본문의 배경: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왔다

먼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 두 집단은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거의 모든 면에서 대립하던 사이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고,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으며, 로마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사두개인은 제사장 귀족 계층으로, 모세오경만을 권위로 인정했고, 부활과 천사를 부정했으며, 로마와 정치적으로 협력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예수님을 시험하러 옵니다. 신학도, 정치도, 세계관도 다른 이 두 집단이 하나로 뭉친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아무리 달라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만은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서로 전혀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 자부심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세속적 이익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지적 교만 때문에. 이유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2.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 무엇이 문제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σημεῖον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을 요구합니다. 왜 하필 하늘로부터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표적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땅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마귀의 힘으로도 가능하지만 하늘에서 오는 표적은 오직 하나님만 보내실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보이든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보이든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 증거를 보여 달라."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요청처럼 보입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요청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마태는 분명히 기록합니다. 본문 1절에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πειράζω, 페이라조) 왔다고. 이 단어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날씨의 비유로 응답하십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내일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 날이 궂겠다 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당시 갈릴리 어부들도 하늘의 색깔만 보고 날씨를 예측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앞의 자연현상은 읽으면서, 지금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일은 읽지 못하느냐.
이것은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해석의 거부입니다. 표적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3.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 결정적 표적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 12:40에서 예수님은 이 표적의 내용을 이미 밝히셨습니다.
Matthew 12:40 NKRV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표적,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화려한 표적은 주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대신 주실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표적입니다.
왜 이것만이 표적일까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해도, 마음이 닫힌 사람은 "우연이다, 자연현상이다, 다른 설명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그것도 미리 예고한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 이후에도 유대 지도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마 28:12-15). 표적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4. 제자들의 오해: "떡을 가져오지 못했구나"

장면이 바뀝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중입니다.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삼가라."
제자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영적 경고를 하시는데, 제자들은 물질적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 떡을 안 가져왔으니까 누룩이 들어간 떡을 사 먹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ὀλιγόπιστοι),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두 가지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던 일,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던 일.
예수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너희 열두 명 먹일 떡이 걱정이냐? 떡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내가 지금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의 작용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생각의 틀 전체를 바꿔 놓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으면서도, 떡 몇 개가 없다는 현실적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눈앞의 부족에 불안해하는 것, 이것이 누룩이 퍼진 상태입니다.

5.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 그 정체는 무엇인가

12절에서 제자들은 마침내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은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διδαχή, 디다케)이라는 것을.
그러면 그 교훈, 그 누룩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면 두 가지가 보입니다.
첫째, 바리새인의 누룩은 "표적을 요구하는 종교성"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16:1의 맥락을 먼저 봐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38에서도 이미 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또다시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구조적인 불신앙의 패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당대 가장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며, 십일조를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까지 드렸습니다(마 23:23). 문제는 이 모든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의로움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체계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과의 연결이 중요합니다. 15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우선시했습니다. 손 씻는 전통, 고르반 서원 등은 원래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대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의 작용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전체를 부풀리고 변질시킵니다.
WBC 주석은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구가 단순한 증거 요청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을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어떤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열린 질문이 아니라 닫힌 심판이었습니다.
이 누룩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퍼지는지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이 기도가 응답되면 믿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세요." 이런 태도는 언뜻 보면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내가 믿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위에 서서 하나님을 평가하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것인데(히 11:1), 바리새인의 누룩은 "먼저 보여주면 믿겠다"는 구조를 만듭니다.
더 위험한 것은, 이 누룩이 퍼지면 감사의 조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으면 감사하고, 나쁘면 원망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이 좋은 분이고,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신앙의 근거가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 신앙이 됩니다.
둘째,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상의 논리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배경을 이해하면 이 누룩의 위험성이 더 분명해집니다. 사두개인들은 주로 제사장 귀족 계층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과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과 타협하며 현실 정치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고,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행 23:8).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두개인들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고,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직접 행동하시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틀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주석은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과 함께 표적을 요구한 것(마 16:1)이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합니다. 평소에 이 두 그룹은 신학적으로 극심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연합한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반대가 신학적 이유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존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공동 방어였음을 보여줍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이 오늘날 퍼지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교회도 결국 조직이니까 경영 원리로 운영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도도 좋지만, 결국 실력이 중요하다." 이런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누룩은 밀가루와 섞이기 때문에 구별이 어렵습니다.
이 누룩의 핵심 위험은, 하나님의 방법을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공을 숫자로 측정하고, 목회를 경영학적 효율로 판단하며, 신앙의 가치를 현실적 유익으로 환산합니다. "이 교회는 성장하니까 잘되는 교회다." "저 사람은 성공했으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판단들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아니라 세상 나라의 원리가 교회의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말씀보다 전략이 앞서고, 기돕보다 분석이 앞서고, 순종보다 계산이 앞선다.
예수님께서 "삼가 주의하라"(프로세케테, προσέχετε)고 말씀하신 것은 이 누룩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퍼진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경건한 외양으로 포장되어 있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합리적 사고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삼가"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번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신앙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6. 제자들의 누룩: 잊어버리는 믿음

그리고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세 번째 누룩을 봅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바리새인처럼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두개인처럼 불신앙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억하지 못하느냐"(οὐ μνημονεύετε)라고 물으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떡을 나눠 주었고, 자기 손으로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사천 명 먹이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떡 몇 개가 없다고 걱정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의 작용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다음 위기 앞에서 잊어버리는 것. 어제의 기적이 오늘의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 것.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불안을 이기지 못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누룩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지는 않습니다. 사두개인처럼 대놓고 부활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은혜를 체험하고도 이번 주에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은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누룩, **"잊어버리는 믿음"**입니다.

적용: 우리 안의 누룩을 점검하라

성도 여러분, 누룩의 특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죽 안에 들어가면 겉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반죽 전체를 변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고 있는 누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번에 이것만 보여주시면 정말 믿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때 보여주셔도 또 다음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조건부 계약입니다. 진짜 믿음은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표적 — 십자가와 부활 — 위에 서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 문제, 재정 문제, 관계 문제 앞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현실이 하나님보다 커져 있다면, 그것이 사두개인의 누룩입니다.
제자들의 누룩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경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셨구나"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어려움 앞에 서면, 그 경험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하고도 떡 걱정을 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은혜를 경험하고도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기억하지 못하느냐?"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고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고가 필요한 이유는, 누룩은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에서는 서서히 변질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기억해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이미 주어진 가장 큰 표적,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는 것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 곧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종적이고 충분한 증거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안에 어떤 누룩이 퍼지고 있는지 조용히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누룩을 걷어내고, 이미 보여주신 은혜의 증거 위에 다시 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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