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버지의 때를 따르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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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치와 아버지를 주목하는 삶
세상의 가치와 아버지를 주목하는 삶
요한복음 7장 1–13절
핵심 본문: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6)
본문 배경과 문맥
요한복음 1장에서 7장까지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핫이슈입니다.
오늘 12절과 같이 좋은 사람이다, 아니다 나쁜 사람이다. 메시야다, 아니다 거짓선지자다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성경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갈 때,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수근 수근 도마위에 오를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쁜데, 나만 슬픈것 같을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 예수님 처럼,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때를 주목하고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 부터 미움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기를 포기해야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를때 미움과 상처는 우리의 훈장입니다.
서론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 능력이 있으면 보여줘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인정받는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늦는다 — 이런 말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똑같은 압박을 받으십니다. 형제들에게서, 합리적인 말로, 선한 의도로 찾아오는 압박입니다. 또한 죽음의 압박도 받으셨습니다.
그 압박을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는 보게 됩니다.
1부: (1–8절) 세상이 압박할 때 예수님의 반응이라고 한다면,
2부: (9–13절), 하나님의 응답의 때의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본 론
1부: 세상이 압박할 때 예수님의 반응 (1–8절) ,
본론 1 — 예수님은 늘 살해 위협속에서 사역하셨습니다.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1)
본문 해설
'그 후에'라는 말은 6장의 거절과 배신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해의 위협 아래 계십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으로(5:18, 7:25, 8:40, 10:31),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죽음의 압박 속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지도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입니다. 예수님이 거기 머무신 것은 고향히 편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6절에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반드시 돌아가셔야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살해의 위협속에서도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서 기다리셨다고 기록 되어있진는 않지만, 예수님의 습관에 따라 날마다 새벽과 철야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만을 순종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은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늘 행해졌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때를 따라 순종하는 것은 때로는 세상의 논리로 볼 때 비합리적이고, 심지어 위험해 보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가족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전도하고, 양육할때, 가성비 떨어지고, 밑빠진독에 물붓기, 때로는 손해와 위협에 노출되는 상황에 놓일수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살해 위협을 받으셨듯이, 우리 또한 늘 사탄의 유혹과 살해 위협속에서, 순종과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속에서 습관적인 기도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본론 2 — 가장 합리적인 말이 불신일 수 있습니다. (2–5절)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2-5)
해설
사탄은 광명한 천사입니다. 늘 좋은 것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씽, 인터넷 거래 사기, 세상에서 전세사기 좋은 것을 싸게 주겠다. 좋은것을 주겠다. 힘안들이고, 쉽게 얻게 해주겠다. 너 잘되게 해주겠다.
예수님은 늘 살해위협 아래에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형제들은 예수님을 나타내라고 조언합니다. 3절 많은 제자들이 볼수 있도록, 갈리리를 떠나 유대로 가라고 조언합니다. 유명해지면, 더 사역을 잘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자신을 증명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죽을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하루 전에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려고 나갔을때,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실때 그때에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희생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유명해져서, 그 사람때문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은밀히 사람들을 살리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유명해지는것과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2절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3대 절기중 가장 큰 기쁨의 절기입니다.
초막절(草幕節, Feast of boths) 은 유대교의 3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 하나로서, 유대력 7월(디스리 월, 태양력 9–10월) 15일부터 1주간 지킨 절기입니다.
*초막절: 풀을 사용하여 장막을 지었다고해서 초막절이라고 불렀고,
장막을 만들어서 지킨다고해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
또 초막절은 시기상 수확한 소산물들을 곳간에 저장한 뒤에 지켜졌기 때문에 ‘수장절’(收藏節)로도 불렸습니다.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 다 같은 절기를 의미합니다.
기간에는 매일 특별한 세 개의 의식이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① 매일 아침에는 하나님께 물을 헌납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특히 절기 첫날 아침에는 나팔 소리와 함께 제사장 무리가 실로암 못에 가서 성대한 의식 속에 일주일 동안 사용할 물을 길었다. 그 동안 순례자들은 할렐 찬송을 불렀고, 제사장 행렬이 물을 길어와 제단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순례자들은 손에 종려나무나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후 제사장은 제단에서 두 개의 은 그릇에 물과 포도주를 담아 하나님께 바쳤다.
② 초막절에 행한 또 하나의 성대한 의식은 밤에 이루어졌다. 제사장은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4개의 큰 촛불에 불을 밝혔고 참석자들은 이 불빛 아래서 춤을 추었다. 이때 레위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를 불렀다.
③ 이른 새벽 해가 뜨는 시간에는 제사장들이 성전 동문으로 가서 태양을 등지고 서쪽의 성전을 바라보며 “우리 조상은 동쪽을 보며 태양을 숭배했지만(겔 8:16) 우리는 성전을 바라보며 주를 경배하나이다.”라고 장엄하게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아침, 밤, 새벽에 이루어진 세 가지 성대한 의식은 1주일 동안 매일 행해졌고, 8일째는 대 성회를 가졌다. 이때도 역시 할렐이 불렀습니다.
가장 큰 잔치입니다. 이에 3,4절 예수님의 형제들의 조언인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 는 것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말입니다. 세상 어디서나 통하는 상식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보여주어야 인정받는다, 지금이 기회다, 갈릴리 변방에 있지 말고 중심에서 자신을 드러내라 — 이것이 형제들의 논리였습니다.
도시로 가라! 세련되게 해야한다!
그런데 요한은 이 말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절). 완벽하게 합리적인 이 말이 '불신'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제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광대하신 주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늘 실수 할수 있습니다.
5절에 형제들이 믿지 않았다는것은 요한 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저주의 나무에 달려 대속 사역하는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해야 할 인물로 보았습니다.
세상은 규모의 경제입니다. 많이 몰려야 힘이 있습니다. 대짜를 좋아합니다. 대기업. 대형교회, 대형마트, 대형집회 등…
군중의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확장하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메시아관을 예수님께 투영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선한 압박이 '가까운 사람'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입니다. 함께 자란 사람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험한 압박은 대부분 이런 형태로 옵니다 — 합리적이고, 선의에서 나오고, 가까운 사람에게서 옵니다.
본론 3 — 세상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릅니다. (6–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위를 악하다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요 7:6-8)
본문 해설: '때'의 대비
예수님을 많은 사람에게 증명하라는 형제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두 가지 '때' 로 대답하십니다. 세상의 때와 하나님의 때입니다 . 그리스어 원문에서 '너희 때'는 καιρός(카이로스)인데, 이는 단순한 시간적 순간이 아니라 '적절한 기회, 결정적 순간'을 의미합니다. 형제들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은 5절의 해설과 같이, 믿지 않는 세상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진 세상은 자신의 일정대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뜻과 타이밍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늘 준비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는 다릅니다. 아버지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일관되게 '아버지께서 보내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출생도, 공식적인 사역의 시작도, 기적을 베푸시는 타이밍도, 십자가 죽음,, 부활도,승천도, 재림도 — 모두 아버지의 때 안에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면 나타내주세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라고 하나님을 재촉할 때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선한 의도와 옳은 논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7절에 예수님은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논리, 인간 중심, 성공 중심에 맞추면 세상이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7절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위를 악하다 증언함이라.'
형제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같은 언어, 같은 논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닮은 것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동조하면 미움당하지 않습니다. 다 예할때, 아니오 할때 미움 당합니다. 다 아니오 할때, 예하면 미움 받습니다.
세상은 다 옳다 옳다 할때, 예수님은 세상의 행위를 '악하다'고 증언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 자기 과시, 권력, 인정 욕구 — 에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분을 미워했습니다.
세상이 왜 악합니까?
요한복음에서 "세상"(κόσμος)은 창조된 물질 우주가 아니라, /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긍휼, 공의와 정의를 거부하고 사탄 아래 있는 타락한 인류 체계를 의미합니다.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80억 인구로 뺵뺵한 곳이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본 "세상의 악" ,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악 왕국” 입니다.
세상은 죄의 노예 상태입니다. 요 3:19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실이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느니라."
- 세상의 "일들"(ἔργα, 행위)은 하나님 뜻 거스르는 모든 것: 위선, 탐욕, 불의, 교만, 육체 욕망 등입니다.
- 예: 바리새인들의 외식(요 5:44), 먹고사는 문제 해결자로, 세상 임금 삼으려는 군중의 이기적 추종(요 6:26), 지도자들의 살인 음모(요 7:1).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을 폭로·판별·정죄하십니다(ἐλέγχω = 드러내어 죄를 깨닫게 함).
예수님이 아무리 악함을 포할 때 세상은,
세상은 자신의 악을 자기 합리화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세상이 자신을 정죄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좋은 일들"조차 악하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 자선·금식은 "사람 보이려"(마 6:1–18), 율법 준수는 "자기 의"(롬 10:3).
사람의 인정과 자기 만족, 자기 의를 쌓는 선행 조차 악하다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중에 한 사람은, 자기의를 “빛나는 악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예수님을 "미혹자"(요 7:12), "악령 들림"(요 7:20)으로 몰아갑니다.
8절에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는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해설: '올라가지 않겠다'의 의미 (8절)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 이 말씀은 10절에서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것과 모순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절하신 것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메시아임을 세상 앞에 증명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을 거절한 것을 말합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 일정 안에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주장할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자신의 계획 안에 하나님을 투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나의 삶이 세상과 전혀 마찰 없이 흘러간다면, 혹시 내가 세상과 같은 논리와 가치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여쭈어봐야합니다..
본론 4 — 기다림은 포기가 아니라, 순종의 다른면입니다. (9–10절)
9절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항상 움직여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멈추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일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에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10절 이제부터 하나님의 응답의 때의 예수님의 반응 입니다. (9–13절),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요 7:10)
본문 해설: 역설적 순종
그러나 아버지의 때가 되었을 때 — 은밀히, 조용히, 자기 과시 없이 — 예수님은 즉각 움직이셨습니다.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라는 움직이셨습니다 . 형제들이 원한 것은 공개적 나타남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목적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4절을 보면 '명절의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올라가셨습니다. 목적도, 방식도, 때도 — 모두 아버지 중심이었습니다.
적용: 우리도 우리가 행한 선행, 교회와 가족을 위한 수고, 수련회, 교회 사역, 청소, 설거지 등,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싶은 욕망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은밀히 보심을 신뢰하고, 칭찬하실것을 믿고, 드러내려는 유혹과 나만 한다고 하는 분노를 이기기 원합니다.
본론 5 — 두려움이 침묵시킬 때, 예수님은 움직이셨습니다. (11–13절)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내 놓고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 7:11-13)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 죽이려는 사람들 입니다. 유대 지도자들(11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수색입니다. 1절의 '죽이려 함'이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둘째, 12절에 헷갈리는 사람들입니다. 무리 안에는 의견이 갈립니다. '좋은 사람이다' vs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중립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게 만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모두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감치 포기해야합니다.
주님도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시원하게 선포하고 가겠습니다. 나는 미움 받게 되어있다! 옆 사람을 보면서 당신은 미움 받을 운명입니다. ~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요 16:33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환난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환난을 이기게 하실것입니다.
환난만 당하면 너무 슬프니! 우리 안에 주님이 환난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죽이려 하는 자들이나, 헷갈려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내 놓고 말하는 자가 없더라.' 알고 있지만 침묵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죽이려 함'으로 시작된 단락이13절에서 '두려워 침묵함'으로 마무리됩니다. 수미쌍관 구조입니다.
지도자들의 적대가 무리의 침묵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진리에 대한 공개적 반응을 막습니다.
우리는 순종할때 잃을 것을 생각합니다. 이번 순종으로 나는 뭘 잃게 되지? 또한 오늘날 차별금지법, 종교단체해산법, 만삭낙태 허용법 등이 계속 시도되고 있습니다.
한번 법제화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반대 할 때 벌금과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해야합니다.
법제화 되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 보다, 반대 투표하고, 반대 운동하면서 미움을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적대와 침묵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지도자들의 수색도, 무리의 두려움도, 예수님의 움직임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오직 아버지의 때만이 그분을 움직였습니다.
적용
우리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형제들처럼 세상의 논리로 살거나, 무리처럼 두려움으로 침묵하는 지는 않습니까? 이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때를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움직이도록 생명을 내어드리는사람입니다.
결 론
형제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세상의 논리로 재촉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무리는 알면서도 두려움으로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압박의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를 보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때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합리적이고, 선의에서 나오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이유처럼 들립니다. 그 목소리들이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소리들이 하나님으로 부터인지, 세상으로 부터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기도 제목을 들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응답이 없고, 순종했는데 상황이 바뀌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다리셨습니다. 죽음의 위협 아래서, 형제들의 재촉 속에서, 무리의 침묵 가운데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때가 되었을 때 — 은밀히,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 움직이셨습니다.
주변의 재촉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세상의 두려움에 침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를 주목하고,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그 때가 왔을 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안에서 용기와 힘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만 기뻐하시는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 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렵습니다. 조급합니다
사람들의 미움이 두렵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함이두렵습니다.
손해와 육체의 고통이 두렵습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기시고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안에 사십니다. 주여! 미움 받을용기를, 기다리는 인내를, 주님을 기쁘시게하는 순종할 힘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 보다 사람의 인정을 더 주목하여 선택했던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과 나의 때를 주장했던 것을 자백합시다.
-평생 살해 위협속에 오직 아버지와 아버지의 때를 위해 사셨던 예수님과 같이, 우리 안에도 미움 받을 용기와 죽음을 극복할 힘을 주옵소서.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성의 삶을 살게하옵소서.
청년 2부 : 주일성수, 마음이 아픈 지체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