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가까이하라(동일교회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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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 7-10절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기쁨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이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지금 이야기를 머리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슬라이드)
태초의 에덴동산. 그곳은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아침에는 햇살이 찬란했고, 저녁에는 신선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완벽한 평화가 깨졌습니다.
성경은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나무를 방패 삼아 웅크리고,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들의 눈동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을 겁니다. 이 두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리고, 나무 사이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이라고 생각한 그곳에 숨어 있습니다. 이들은 왜 이러고 있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 죽음의 공포입니다.
(슬라이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야고보가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을 잠깐 보십시오.
(슬라이드)
야고보는 지금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 싸움의 원인이 1절에서 표현한 것처럼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자신의 쾌락과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며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슬라이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라는 명령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를 향한 일반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 마음을 품고, 공동체 안에서 다투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강력한 충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주일마다 교회를 나오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숨은 그 장면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포함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현대인도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아담은 나무 사이에 숨었지만, 오늘날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깊은 숲으로 숨어듭니다.
(슬라이드)
어떤 사람은 게임의 숲으로 숨습니다. 현실의 패배감을 잊기 위해서 가상 세계의 레벨 업에 목숨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숲으로 숨습니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의 삶에 자신을 이입하며,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합니다. 쇼츠는 이렇게 숨어드는 사람에게 최고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넘겨가며 시간을 허비하기에 너무도 완벽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 중독의 숲으로, 어떤 사람은 관계 중독의 숲으로, 어떤 사람은 술과 쾌락의 숲으로 도망칩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이 숨은 것과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들을 실패했고,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어 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 앞에서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보다 나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생각으로 기독교를 오해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종교 서적이 말합니다. “네가 노력해야 해. 네가 수행을 쌓고, 계단을 밟아서 저 높은 하늘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에게 도달해야 해.” 이런 식의 오해는 기독교를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떠나는 위대한 모험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슬라이드)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탐험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추격으로 시작됩니다. 종교는 사람이 신을 향해서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내려오신 겁니다. 이 차이가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슬라이드)
C.S 루이스라는 작가가 쓴 책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C.S 루이스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젊은 시절은 하나님을 가장 강력하게 거부했던 지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슬라이드)
C.S 루이스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그 없는 하나님에게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인생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루이스가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고집 센 지성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하셨고 루이스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루이스를 구석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루이스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잠시라도 일에서 눈을 떼기만 하면, 내가 그토록 만나지 않으려 했던 그분이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시는 것을 느꼈다.”
루이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끝가지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끝까지 추격하셨고, 자신이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자신을 덮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아담이 숨어 있는 그 숲속으로 추격자이신 하나님이 걸어 들어오십니다. 번개를 내리치며, “죄인은 이리 나오라”라고 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는 소리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형사나 재판관의 차가운 호통으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몰라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지 다 아시면서 아담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담의 자리는 아무리 범죄하였더라도, 나무 사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구원도 깨닫지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대하면, 우리가 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더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 오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그러한 종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려오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네 가지 강력한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분명 명령이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추격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슬라이드)
야고보서 4장 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기에 핵심 명령 두 개를 제시합니다. “복종하라”와 “대적하라”. 이 두 명령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하라”라는 단어는 오해를 많이 합니다. 이것은 강요된 굴복이 아닙니다. 원어의 의미는 “자신을 지휘 체계 아래 자발적으로 배치한다”는 뜻입니다. 탁월한 장군의 지휘 아래 기꺼이 들어가는 자발적 행위입니다. 문맥 가운데에서 이 단어는 자신의 욕망과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던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자신을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마귀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뿔 달린 괴물, 꿈에 나타나는 귀신. 아닙니다. 마귀를 그렇게 유치하게 오지 않습니다.
(슬라이드)
야고보서 4장 4절에 충격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간음하는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간음하는 여인들아’라는 말은 성적인 타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비유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랑 되신 하나님을 두고, 우리가 곁눈질하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마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중에 가장 많이,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입니까? 성경입니까? 십자가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손에 들린 작은 화면, 스마트폰입니다.
(슬라이드)
오장육부가 무엇을 부르는 말이죠? 오장은 “간장, 심장, 비장, 폐, 신장”이고, 육부는 “담, 위, 대장, 소장, 방광, 삼초”를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육장육부 또는 오장칠부라고 해서, 스마트폰이 우리의 또다른 장기라고 부릅니다.
잠들기 직전, 캄캄한 방에서 여러분의 얼굴을 비추는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불빛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타인의 화려한 삶, 끊임없이 재생되는 자극적은 쇼츠, 나보다 잘난 사람들의 자랑.....우리는 그 속에서 도파민이라는 쾌락 호르몬을 얻습니다.
(슬라이드)
이런 상태를 뇌과학자들이 ‘팝콘 브레인’이라고 부릅니다.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즉각적인 자극에는 반응하지만, 깊은 사고나 느린 자극에는 반응하지 못하는 뇌가 되는 겁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중독이 뇌의 전두엽을 마비시킨다는 것입니다. 전두엽은 이성적 판단과 공감 그리고 영적인 감성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
이렇게 도파민에 빠진 상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루하다고 느낍니다. 1시간 설교가 1년처럼 느껴집니다. 자극적인 것에만 빠르게 반응을 하다보니, 깊은 의미와 사색을 하는 것이 힘든 겁니다. 이런 상태는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것입니다.
(슬라이드)
그렇다면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문맥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지금 내 눈과 뇌를 장악하고 있는 가짜를 치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서 사람들이 정욕으로 다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교인들도 자신들의 정욕으로 눈과 뇌가 장악당한 상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눈과 뇌를 장악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마귀의 공격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금욕이나 절제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을 치워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빈 공간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즉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 겁니다.
(슬라이드)
시편 34편 8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성경의 가르침은 도파민이 주는 싼 기쁨이 아니라, 말씀이 주는 깊은 기쁨을 맛보라고 가르쳐줍니다. 여러분이 할 것은 단순한 금욕이 아닙니다. 더 맛있는 것, 더 영광스러운 것을 보기 위한 미식가가 되라는 겁니다.
야고보가 “하나님께 복종하라”라고 했을 때, 이것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이성과 영적인 감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짓는 죄는 이 전두엽을 마비시키고, 즉각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파충류의 뇌로 우리를 퇴보시킵니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이 퇴보를 역전시키는 겁니다. 말씀 앞에 앉아서 느린 리듬으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은 여러 모양이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 앉는 겁니다. 그것이 마귀를 도망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8절의 앞부분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여기에서 “가까이하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다가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배적 접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길을 통해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슬라이드)
“지복직관”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복” 더 없는 행복. “직관” 바르게 본다. 즉, 바르게 봄으로써 누리는 최고의 행복을 말합니다.
(슬라이드)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사람이 창조된 최종 목적이 무엇이냐고 할 때,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슬라이드)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금식한 후에 하나님께 구한 소원은 출애굽기 33장 18절의 기록처럼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였습니다. 다윗이 평생 소원했던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27편 4절에 고백해놨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슬라이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로 이 보는 것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봐야 할 우리의 눈을 스마트폰에 고정시킵니다. 우리는 외로워서 스마트폰을 켭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서입니다.
스마트폰과 함께라면 우리는 잠시 외로움을 잊고 즐거움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여러분의 곁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얼굴과 여러분의 얼굴을 맞대고 시간을 보내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마트폰은 보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느리지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즉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접속을 끊고, 5G나 와이파이에 접속하려고 합니다.
(슬라이드)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맹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성어입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더니 곡소리를 흉내내고, 시장으로 이사했더니 흥정하는 것을 흉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학교근처로 이사했더니 공부에 전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허무한 것을 보면, 여러분의 영혼은 허무해집니다. 음란한 것을 보면 더러워집니다. 비교 의식을 자극하는 영상을 보면 비참해집니다.
유튜브나 틱톡의 짧은 영상이나 게임의 화려한 영상 효과를 보는 것은 뇌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짧고 강렬한 자극에만 익숙해지게 되고, 이런 일이 지속되면 책 한 장을 제대로 못보고 짧게는 1분, 길어야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화려한 소비와 재력을 매일 보면, 개인의 행복 기준을 소유로 옮기게 됩니다. 이런 것에 길들여지면, 사람을 통장 잔고나 명품과 같이 가치로 평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품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나 검사 또는 판사나 변호사와 같은 직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명예와 돈 그리고 권력이 최고라고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다보니 우리에게 보여지는 세상은 우리를 그런 수준의 낮은 인생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지복직관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앞으로의 삶에서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봤다고 하거나, 환상으로 하나님을 보았거나, 천국에 다녀와서 하나님을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일단 멀리하십시오.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우리 앞에 지금 나타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인인 우리를 용납하지 않아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겁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슬라이드)
이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출애굽기 33장 20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직접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볼 수도 없는 것을 보라고 했으니 제 설교는 여러분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헛소리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이 되어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셔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슬라이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싶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40일 금식 기도를 하거나, 다니엘 특별 새벽 기도를 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서 대단한 신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는 여러분의 손에 몸의 일부처럼 붙어 있는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 말씀 속에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이 우리가 힘써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먼저 가까이 오신다는 약속이 선행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장 3절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갈테니 우리를 받아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는 행위보다,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시니 그분에게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표현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서 “거하시매”로 번역된 단어는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하신 행위가 죄인들 가운데 텐트를 치고 내려오신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거룩한 산으로 기어 올라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곁에 텐트를 치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텐트 문을 하나님 쪽으로 여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가까이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슬라이드)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애통하며 울라.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조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장이 성소에 하나님을 섬기러 들어갈 때 해야 했던 정결 예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먼저 “손을 깨끗이 하라”는 것은 우리의 외적 행위와 관련됩니다. 손으로 하는 일들은 눈이 보이는 행동들, 남들이 알 수 있는 죄들을 의미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것, 거짓을 말하는 것, 관계에서 정직하지 못한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것은 우리의 내적 동기를 의미합니다. 행동은 거룩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탐욕, 질투, 교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둘을 모두 다루셨습니다. 살인하지 않아도 마음에 미움을 품으면 살인죄입니다. 간음하지 않아도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손만 씻어서는 부족합니다. 마음까지 씻겨야 합니다.
8절에서 야고보는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라고 특별히 집어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두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두 개의 영혼”을 의미합니다. 즉, 영혼이 반으로 나눠져서 하나는 하나님께 향하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향하는 겁니다.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걸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은 목적이 상실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수단 정도로만 취급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십시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에 나오는가? 아니면 취업, 결혼, 성공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두 마음은 사실상 나 자신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에 가장 큰 방해물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나르시시즘” 즉, 자아도취와도 연결됩니다.
예전에 목사님들과 여수 펜션에서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야외 수영장이 있는 곳이었는데, 2월 말쯤이었으니 지금과 비슷한 때였습니다. 야외 수영장에서 목사님들이 수영을 하고, 저는 밖에 앉아서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약 2시간 정도를 놀았는데, 그곳에 있던 여대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2시간을 계속 사진만 찍고 있었습니다. 해가 넘어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풀장과 바다와 노을의 삼박자를 갖춘 사진을 2시간 동안 내내 찍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 지금 우리 시대를 확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슬라이드-3장)
“나 예쁘지? 나 잘났지? 나 좀 봐줘”라고 외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왕의 자리에 나를 앉혀놓는 겁니다.
나만 바라보는 삶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감옥입니다. 내 감정의 기복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불안한 삶입니다.
(슬라이드)
두 마음의 또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신앙을 계산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에서 지적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기도가 이런 겁니다.
성경에는 매우 계산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유다는 화를 냈습니다.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유다의 말이 틀렸습니까? 합리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가 아닌,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본래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효율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할 때, 우리는 언제나 유다처럼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있는 것이 나에게 이득일까?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면 나를 취업시켜주시거나 성공시켜주실까?
이것이 두 마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겁니다.
(슬라이드)
그래서 이런 상태에 대한 처방을 야고보는 9절의 말씀처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고 내립니다. 갑자기 왜 울라고 할까요? 이것은 당시 문화의 기쁨을 뒤집어 애통과 근심으로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야고보서를 받아 보는 성도들은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웃고, 즐기고, 잔치하고 있었던 겁니다.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 그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슬라이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 자신의 영적 가난함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통을 통해 위로가 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실 때,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그 피 흘리시는 예수님 앞에서 쩨쩨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할 이유를 찾은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가 터져 나올 때, 여러분의 손에 들린 계산기가 박살 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10절의 마지막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는 강력한 약속도 함께 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절부터 시작된 명령의 흐름을 이 한 문장에 압축이 됩니다.
(슬라이드)
야고보서가 하나님께 복종하라거나 낮추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비굴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초대입니다. 여러분이 왕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내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내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
낮추는 것은 굴욕이 아닙니다. 낮춤은 자아도취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의 품에 안기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삽니다. 내가 작아져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커집니다.
야고보는 단순히 낮추라고 명령하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리라”
(슬라이드)
이러한 패턴은 7절부터 반복되던 겁니다. 복종하면 마귀가 피합니다.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가까이하십니다. 낮추면 하나님이 높으십니다. 이것은 복음의 논리입니다.
사람의 논리는 올라가면 높아지고, 낮추면 패배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반대입니다. 낮아지는 자가 높아집니다. 낮춤의 완벽한 모형은 예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8-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낮아지셨고, 하나님이 높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의 공식입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길은 결국 파멸로 끝납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4장 10절의 약속입니다.
(슬라이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방식은 효율적이었을까요? 전능하신 창조주가 먼지 같은 죄인을 구하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린다면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구원의 방식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나의 더러운 죄를 예수님이 짊어지고,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움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생명을 맞바꾸는 교환이 일어납니다.
쓰레기를 가져가고 보석을 내어주는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최악의 적자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미련하다고 말하거나 실패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낭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생명까지도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마땅합니다.
(슬라이드)
요한복음 13장 1절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여러분을 구원하고, 천국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가장 미련하고 멍청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자기 사랑을 보여주는 최고의 방식을 보여준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빼앗는 스마트폰을 멀리하십시오. 세상의 것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리고 말씀으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두 마음을 버리고 자아의 거울을 깨고, 계산기를 던져버리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을 낮추며 하나님을 바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겁니다.
(슬라이드)
19세기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유명한 성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충격적인 디테일이 숨겨져 있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 바깥쪽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문고리는 오직 안쪽에만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끈질기게 우리를 추격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저 높은 보좌에서 이 낮은 땅으로, 에덴의 숲을 지나, 역사의 골짜기를 지나, 십자가 언덕을 넘어서 이곳까지 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문을 부수고 강제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문밖에 서서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두드리십니다.
(슬라이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아가서 5장 2절 말씀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아가서의 말씀은 신부의 방을 두드리는 신랑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새로운 관계로 나가기 위한 장면이 아니라, 이미 깊은 관계가 새롭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계시록 문맥에서도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토해내고 싶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실망하셨고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자에게 책망과 가르침을 준다고 하시면서 여전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더욱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셔서 문을 두드리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두드리고 계시니 여러분이 안쪽에서 굳게 잠가두었던 마음의 문을 풀고 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혹시 “저는 문을 열고 싶은데 힘이 없습니다. 문이 너무 오래되어서 죄의 녹이 가득해서 꼼짝도 안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사실 안쪽에서 열 수 있는 문이 맞는데,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이 문을 열 수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의 의지도 약합니다.
(슬라이드)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약속하셨던 겁니다.
에스겔 36장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길 원하신다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기도의 손을 올리십시오. 성령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죄로 인해서 녹슬어버린 여러분의 마음의 문에 기름을 부어 주시고, 굳은 마음을 녹여 주시고, 내 안에서 문을 열수 있는 힘을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지쳐있는 분은 주님이 위로하실 겁니다. 의심이 가득한 분은 주님이 확신을 주실 겁니다. 죄책감에 숨고 싶은 분은 주님이 보혈로 씻어주실 겁니다.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 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 시간에 성경을 펼치십시오. 그리고 어떤 자세든 좋으니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구하십시오.
(슬라이드)
혹시 여러분 중에도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이 싫으신 분이 계십니까?
이런 생각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추적해서 오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담을 동산 나무 사이에서 찾으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저와 같은 미련한 설교자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으시는 방법이고,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으시는 방식입니다. 때로 고난과 아픔을 주신다면 그것도 역시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괴롭게 하거나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 이상 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