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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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9:1-12
제목: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주제: 우리 삶의 어둠은 정죄의 이유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은혜의 기회입니다.
[서론]
우리 주변에 보면 참 안타까운 가정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는데, 그 아들도 똑같이 도박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으로 가정이 깨졌는데, 그 아들도 술만 마시면 괴물로 변합니다.
심지어 이혼이나 불의의 사고마저 대를 이어 반복되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기막힌 사연들을 접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 집안에 흐르는 영적인 저주가 있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수긍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만날 때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아내려 합니다.
그래야만 심리적 안정을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연예인이 비구니가 된 사연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적막한 산에 올라가 홀로 눈물을 쏟아가며 삼천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인생이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결혼한지 4년만에 갑자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IMF로 망한 겁니다.
그런데 그 후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겁니다.
그녀가 찾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게 다 내 업보구나”
내가 지은 죄든, 조상이 지은 죄든, 그 죄의 대가를 지금 내가 받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그 저주의 고리를 끊어보겠다고 머리를 깎고 고행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없는 세상이 고난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인과응보적 세계관”, “운명론적 세계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선도 다르지 않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을 보며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 9:2 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그 당시 대부분들의 사람이 갖고 있던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가난과 질병, 재해 등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수 있을까요?
[본론1]
우리는 인생의 어둠이라 말할수 있는 고난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신앙생활을 소홀히 해서 벌을 받는 것일까?”
“남 모르게 지은 죄 때문인가?”
질문의 끝은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유를 알아야 고통을 견딜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왜”라는 질문은 우리를 과거의 감옥에 가둘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질문은 이 사람이 평생 어떤 시선을 견디며 살아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앞을 못보는 불편함을 넘어, 사회적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낙인 속에서 살았습니다.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장애는 곧 생존의 위협을 의미합니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성전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전 몇 푼을 던지면서도 마음 속으로 정죄합니다.
“저 사람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저 꼴이 되었을까?”
그는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심지어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절망의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차가운 정죄의 시선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태어날때부터 눈이 안 보였는데 어떻게 그게 자신의 죄때문일수 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태아가 모태에서도 죄를 지을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부모가 지은 죄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죄때문이라면 그는 평생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야 하고, 자기 죄때문이라면 평생 자신을 정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쪽의 이유이든 그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길 이웃이 아니라 그저 원인을 분석할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차가운 시선 앞에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떨까요?
요9장 3 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원인을 캐기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가치관의 역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저주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조심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폭력이 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안보이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선이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주신 거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삶의 고난과 비극 조차도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바꾸실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난 그가 어떻게 이런 비극을 겪는지 알 필요가 없다.”
“그가 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하는 것이 내 일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것은 차가운 제 3자의 시선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고통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고난 앞에서 해야할 유일한 일은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2]
우리는 기도할때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합니다.
“주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마치 자판기처럼 뚝딱 뭐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여전히 막막하고, 오히려 더 꼬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병은 금새 낫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는 여전하며, 관계의 실타래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실망합니다.
요9장 6 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원래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씀으로 그를 고치실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고쳐주십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고 그것을 그의 눈에 발라주십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쳐주려면 바로 고쳐주지 더러운 침에다 더러운 진흙을 섞어서 눈에 바르면 기분이 어떨까요?
남들이 보기에도 얼마나 창피한 일일까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침과 진흙을 섞어 바르면 곧바로 눈이 떠지면 좋은데 아닙니다.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형을 보면, 성전 근처에서 실로암 연못까지는 꽤 멉니다.
가파르고 험한 내리막 길을 약 800미터는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30분 이상은 더듬거리며 걸었을 것입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져 크게 다칠수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조롱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실로암에 도착해 물로 눈을 씻어 냅니다.
그 순간 평생 그를 가두었던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바르신 진흙은 창세기에 사람을 빚으신 것처럼 새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편함과 수치를 무릎쓰고 내딛은 발걸음은 창조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 앞에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었을때 일어났습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 찾아온 힘든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일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눈 앞이 어둡고 캄캄해서 스스로를 정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길을 인내하고 견뎌내며 걸어가는 것 자체가 위대한 순종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삶이 불편해져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도 걸어가야 합니다.
실로암까지 가면 주님의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적은 기적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그의 삶을 또다른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본론3]
우리는 전도나 증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혹은 누군가 까다로운 성경질문을 하면 어떡하나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복음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성경을 잘 알아야만 주님의 증인이 될수 있을까요?
요9장 8-9 절입니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하였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치유된 모습을 보며 쉽게 믿지 못합니다.
평생 어둠 속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눈을 뜨고 당당히 서있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기는 커녕 당황하며 의심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변화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 믿기 전의 모습 안에 우리를 가두어 두려 합니다.
제 친구들도 제가 예수님 믿고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강력한 한 마디가 등장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자신이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당당히 고백합니다.
그냥 자신의 과거 모습을 감추고 싶어서 조용히 침묵할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에서 도망쳐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당당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말을 하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수 있을까요?
그가 이제 어둠이 아닌 빛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의 변화가 육체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있던 일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요9장 10-11 절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여기에 어떤 신학적 지식이나 성경지식이 있습니까?
그는 그냥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일을 담담히 전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대로 했더니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나 성경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말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내 어둠을 어떻게 빛으로 채워주셨는지 고백하면 됩니다.
그것이 세상에 보냄받은 자, 증인의 삶입니다.
내가 속한 가정과 일터에서 변화된 내 삶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미스코리아 출신 비구니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닥쳐온 불행의 이유를 자신의 업보에서 찾았습니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고행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과거에 매여 스스를 채찍질하는 또다른 감옥일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도 똑같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정죄하며 영혼의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빛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인과응보와 운명론적 세계에서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고난이 저주의 증거가 아닌 영광의 증거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고난이 기적이 되는 것은 순종의 순간입니다.
그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주님을 전하는 빛의 증인이 될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곳이 우리의 실로암입니다.
그곳에서 빛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함께걷는교회 모든 식구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