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9장

죄와 은혜의 지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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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와 은혜의 지배 제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wyMMYjGOQ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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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오늘 어 죄와 은혜의 집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함께 읽어 가겠습니다. 우리 윤사민 목사님부터 먼저 읽겠습니다. 목소리가음 >> 제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영적인 활기가 쇠퇴하고 무기력한 가운데 정욕에 붙들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령한 경험은 사라지고 육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안에 있다고 해서 신자에게 영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신 신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영적 경험이 있습니다. 1. 영적 은사를 소유하 첫째로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영적인 은사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01:03)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어떠한 영적인 은사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 가운데 있는 신자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판단의 표시로 주신 은사를 거두시는 경우가 있는데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절대적으로 은혜 아래 있는 신자에게만 소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시적인 은사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맺히는 진실한 신앙입니다. 전자는 은사와 후자는 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은혜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이 둘은 모두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01:56)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하여 이중적으로 머리이십니다. 첫째로 신비적인 몸으로서의의 교회의 머리이십니다.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권세와 영향력의 머리로서 신비적인 몸과 연합을 이루는데이는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신비한 몸인 교회를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연합시키심으로써 시킴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나눌 수 없는 한 몸이 됩니다. 둘째로 유기체적 지체로서 통치의 머리이십니다.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유기체적인 몸으로서의 교회와 통치의 머리로서 연합을 이루는데이는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은사들과 영적인 능력들로서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따라 일하게 하십니다.
(02:55) 그러나 한 사람이 이러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은혜 아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은혜 아래 있지도 않고도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성립합니다. 하나는 그러한 영적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성경이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자들의 영적인 능력이나 은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 대한 입증은 예수님께서 거짓 선자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들어 이르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03:57)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 말씀. 두 번째 경우는 가론 유다에게서 입중됩니다. 예수께서 그 12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2 사람의 12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가론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4절. 예수께서는 사도로 삼으신 12제자에게 커다한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실제적인 영적 권세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러한 영적 은사를 받음에 있어서 가론 유다가 죄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04:55)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을 예수님을 배반하고 파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갈 곳으로 가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적인 깨달음이 죄의 지배 아래 >> 말씀 목사님 음속 둘째로 죄의 지배 아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 곧 조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떠한 깨달음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다양하여 그 성격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깊이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깨달음이 아주 현재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05:58)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러한 경험이 곧 죄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하기는 해도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 경우에 잘못된 판단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일시적인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갈등을 경건한 양심을 가진 오해로 갇은 거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은혜가 안에 있는 자신의 죄를 자각한 데서 오는 갈등을 마치 밖으로부터 압박하는 죄가 자신 안에 있는 은혜의 상태에 갈등을 가져온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일시적인 영적 경험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통해 옵니다.
(06:53) 다시 말해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황이 보래도록 계속되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망가져온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하고 간헐적으로 그리고 표피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주는 영향을 과대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깨달음의 경험은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가능합니다. 좀 더 읽을게요. B. 은혜의 지배 아래의 말씀 경험과의 차이점.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은 매우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경험의 지속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렇지만 간헐적인 깨달음과 자각은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능한 경험입니다.
(07:47) 그러나 한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에는 말씀의 경험도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말씀의 경험이 간헐적입니다임. 첫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의 경험은 간헐적입니다. 은혜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내적 깨달음이 일상적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내적인 깨달음이 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을하나님과 공유함에 있어 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는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부분 자기 스스로 추론한 결과이고 설령 성령의 조명으로 인한 깨달음이 있다 해도 그 경험은 매우 간헐적입니다.
(08:45)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도 그것을 통한 내적인 깨달음이 간헐적인 이유는 대부분 죄 아래 굳어진 마음 탓입니다.이 깨달음의 지속성이 없음. 두 번째로 죄의 지배 아래의 내적 깨달음은 내게 지속성이 없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도 말씀의 경험은 있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는 뇌적인 깨달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는 깨달음이 영혼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이는 이는 그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영향력은 증대되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비에 늦음이 주는 영향력은 미약하여 지속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09:35) 조욱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의 경우 그러한 불법한 죄의 강점상 강점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 마음과 영혼의 틀 자체가 죄가 성장하기에는 좋고 은혜가 보존되기에는 나쁜 환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내적인 깨달음은 아침 구름처럼 나타났다가는 쉽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3. 깨달음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어려움. 세 번째로 죄의 지배 아의 내적인 깨달음은 쉽게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신자가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깊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깨달은 발을 쉽게 실천에 옮기게 되고이는 신자에 순종하는 생활을 촉진합니다.
(10:24) 은혜의 지배 아래 악한 고집이 꺾히고 하나님의 은혜에 길들어진 심령의 경우 작은 뇌적인 깨달음도 영혼 전체에 거룩한 영향을 미치는 작용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죄에 익숙해진 삶의 습관이나 뜻적인 경향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때에 그렇게 할 힘이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결심을 하고 뚜렷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아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저항을 자신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3.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하 셋째로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신앙적인 의무를 행하는 중에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1:26)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해서 일시의 모든 신앙적인 의무를 줘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은혜나 의무감 익숙해진 습관 혹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감당해야 할 불편함 때문에 일상적으로 신앙적인 의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일시적으로 어떠한 정서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조국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거나 무능함을 자각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적극적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들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낙관을 갖게 되거나 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될 때에 신자는 자신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금방 새처럼 나아서 죄의 지배를 벗어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12:27)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도 그러한 그런 일시적인 경험은 얼마든지 할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는 절대적인 지배가 아니라 상대적인 지배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는 이러한 경험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령한 성질의 거칠 수도 있고 그러한 역사와는 상관없는 정서의 변덕스러운 작용이 가져다 준 자의적인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경험의 항복판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자가 신한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경우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3:16) 따라서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는 자기 암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비록 신자의 죄가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 일시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 안에는 이미 성령의 지속적이고 생명령이 있는 역사를 가로막는 죄가 우세한 힘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은혜로운 정서의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참여와 순종하는 믿음의 행사 없이는 결코 지속적으로 생명력 있게 타오르지 못합니다. 마치 비 오는 날 장작불을 피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종교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경험하는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에는 늘 어떤 내적 깨달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이는 대게 그의 영혼을 죄의 지배 상태에서
(14:22) 벗어나게 하기에 충분히 역사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아주 돌이켜 순종하는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의 생각과 정소와 마음에 대한 죄의 지배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경험하는 내적인 깨달음이 지석적으로 생각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서적인 경험도 지속력을 가지지 못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나 개인적인 추문 등을 두려워하며 의지도 열매도 없는 결단을 반복하지만 이것은 아침 구름과 같고 마치 넘치는 죄악의 강물을 모래로을 쌓아서 막는 것과 과 유사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이러한 간헐적인 내적 깨달을뿐 내적 깨달음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진실한 참여와 개별적인 죄로부터의 단호한 돌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15:27) 지속적 실천이 꼭 불려한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4.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함. 넷째로 죄의 지배 아래도 신자는 도덕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작과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도덕적인 삶도 어 약화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 원칙은 신자가 연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만큼 정확히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연합으로부터도 멀어지지만 그렇게 멀어지는 것만큼 도덕적인 삶의 실천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도덕적인 삶의 뿌리가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6:24) 따라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서도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거나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도 진정으로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면의 도덕적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덕적 열매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도덕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도덕적인 삶은 거룩한 삶의 결과이여야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17:07)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전 세계의 모든 인류에 대하여 유익을 끼치도록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참된 도덕의 본질이 될 수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도덕적 피조물 자신의 유익을 겨냥한 도덕은 결코 참된 도덕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떤 도덕적인 지성이 창조된 존재에게 유익을 끼치는 참된 도덕을 시행하는 한 그것은 주로 피조물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데 피조물의 유익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해 알거나 보는 것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하나님을 담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18:00)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와 실천이 모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기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지배 아래도 이러한 도덕적 의무를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자원이 결코 하늘 자원이 아니라는 어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만 모여 사는 세상에게도 기본적인 질서와 도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번성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전부터 방탕하게 살지 않았고 도덕적인 생활이 몸에 배인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더울 고통을 느끼면서도 도덕적인 의무를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18:47) 물론 그렇게 됨으로써 죄의 지배 아래도 자기 의를 쌓아갈 위험 역시 높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범죄에 대해 단편적으로 참회함. 다섯째로 죄의 지배 아래에서도 진실한 참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죄에 대한 자각이 둔해지고 양심의 그름 또한 은혜 아래 있을 때처럼 바람직하게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절대로 참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 점에서 진실한 참여가 되기에 어려운 한계들을 갔습니다. A 죄의 지배 아래에서의 참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경험이 지속적이지 않지만 죄가 지배하는 굳은 마음도 절대적인 굳어짐이 아닙니다.
(19:55) 따라서 언제든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시면 그들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가련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에서의 참회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후회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뿌리를 인식하는 데서 오는 참매가 아니라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후회나 고통으로 인한 뉘침인 경우가 많습니다.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참여이기 때문에 진정한 총체적인 참여의 결과인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20:47) 비 이러한 참여의 한계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십자가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실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신자의 진실한 회개는 죄로부터 구출받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 있는 총체적인 죄의 뿌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참된 회개가 아닌 자기의 범죄 행위에 대한 단편적인 회개는 그를 죄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지 벗어나게 하지 못하고 더더욱 그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에서 경험하는 참여의 경험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1. 동기가 이기적인 먼저 참회의 동기가 이기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21:41) 즉 회개의 동기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명예를 드리고 그 사랑을 배반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경험하는 자신의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영혼에게는 반드시 죄의 결과인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자각한 신자는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혼란 가운데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대해 자유롭고 인격적인 인정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는 고통의 석박으로부터 비롯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 죄의 결과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먼부림일 뿐입니다.
(22:29) 그러므로 거기에는 진실한 자기 깨어짐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도 자기 의에 관해서도 결코 깨어지지 않은 채 고통스러운 후회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고 복음과 믿음의 원리를 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후회에도 불구하고 죄는 죽지 않습니다. 때로는이 과정에서 울부짖음과 눈물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벗어나지 못합니다. 회개하는 동안에는 자기의 의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그는 울부짖고 눈물 흘릴뿐 깨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종류의 회개로 죄의 지배 아래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회개의 경험이 그가 하나님의 의뢰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3:23) 2번 읽어 주십시오.이 >> 지속적이지 않음. 다음으로 참여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지적받을 때 그 영향이 비교적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을 때일수록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정한 죄에 대하여 지하게 지적하시고 고치게 하시는 한구적인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 아래 때로는 참회가 외적으로 볼 때에 격렬하지 않다 할지라도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는 대체로 그것이 비록 강렬해 보여도 그 경험은 단 단 속적 아 단속적입니다. 특히 습관적인 죄에 빠졌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24:21) 고통스러운 회개의 눈물이 마르고 나면 다시 악한 정욕이 고개를 들고 죄 아래로 사로잡아갑니다. 이때 신자는 얼마 전에 있었던 자신의 회개의 경험이 진심으로부터 우어난 것인지에 대해 혼란을 느낍니다. 또한 이때 이러한 영혼의 상태에 대한 명백한 복음 교리적인 이해가 없고 은혜를 구하는 열심이 없으면 잠시 고민하다가 영혼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음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간헐적인 참여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 영혼의 변화가 없음. 마지막으로 마음에 깨어짐을 통한 영혼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참매의 효능은 그 경근해 보이는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내적 변화에 있습니다.
(25:13) 진정한 참여는 신자의 내면에 커다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것의 반복은 내적 성향과 경향성을 바꾸어습니다. 진정한 참회는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마음의 틀을 새롭게 세우고 영혼의 질서를 회복시킵니다. 그러나이 모든 일은 신자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변화는 반드시 마음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경험하는 간헐적 참여는 마음의 깨어짐을 충분히 동반하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참여 안에 많은 울부짖음과 눈물이 있어도 그것이 죄를 향한 사랑에 대한 깨어짐이 아니면 결코 영혼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마음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26:13) 헛때의 결단함. 여섯째로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도 죄에 대항하고자 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죄가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목적으로 얼마나 멀어지게 하는지를 아는 데서 비롯된 것이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거듭된 자신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주도적인 성품을 곧 거룩하게 살려는 내적 생명의 경 경 경 경 경향성을 거스리며 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정욕을 만족시킴으로써 경험하는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그 결과로 경험하는 고통은 지속적입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에 죄악의 즐거움이 끝나면 더 큰 고통을 느낍니다.
(27:08)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 중에는 종종 극단적인 쾌락에 자신을 던져 침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쾌락에 대한 탐력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병적인 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질병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정상적인 치료 방식을 택하지 아니하고 신통을 목적으로 아편을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을 입기 위해 택한 죄는 더욱 깊은 고통의 심년으로 신자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시인처럼 부르짖게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고하는 소리의 길을 기울이소서. 시편 130편 1절, 2절 말씀. 이러한 혼란과 고통 때문에 죄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들도 죄에 대항하려는 결심과 결단을 합니다.
(28:10) 범죄로 말미암는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죄에 한거하려고 자주 결단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죄의 대항하려는 결심이나 결단만을 가지고는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죄의 특성상 신자는 얼마든지 그렇게 죄를 대항하고자 결심하고 결단할 수 있지만 죄의 지배 아래는 그러한 행동들이 바람직한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그러한 약속과 결단은 마치 호세아 선지자의가 저의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리석은 시도는 곧 실패하고 맙니다.
(29:01) 영혼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음, 익숙한 죄에 대한 사랑과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죄의 산출을 억제할 수 없게 되고 솟아는 내면의 죄의 욕구는 점점 겉세어져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결심을 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신 앞에서 솟아나는 죄의 샘물을 막지 아니하고 넘치지 못하도록 재방만을 싼 것과 같습니다. 신자 내면에서 솟아나는 죄의 근원을 공격하고 그것을 마르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수한 결신과 결단으로 쌓아올린 재방은 쉽게 무너지고 내면의 죄의 강물은 행동과 삶으로 넘쳐나게 넘쳐날 것입니다. 신자가 죄의 집 아래 있을 때 이러한 약속과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적인 원리를 따라서 죄의 근원을 공격함으로써 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천의 과정을
(30:05) 통하여 죄의 집에 척합하도록 망가진 영혼과 마음의 틀이 총체적으로 회복되고 영혼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 은혜의 지배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도 스스로 경건한 신자라고 오해할 수 있게 하는 외적인 표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외적인 표지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다면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0:59)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 앞에 음연이 존재하며 우세한 지혜력을 행사하는 죄를 쫓 찾아내는 일이나 죄 죽임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거짓된 평안을 구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죄의 지배 아래 가두 가두시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 지식의 빛과 은혜의 능력 아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복음 진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참여하고 거룩한 생활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빛 가운데서 그분과 교재하며 살도록 한 눈에 보는 장 죄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영네 제가 읽겠습니다.
(32:00) 목사님 잠깐만 주십시오.
아멘.
한눈에 보는 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I. 영적 은사를 소유함.
-성령께서는 은사들과 영적인 능력들로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따라 일하게 하심.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함.
-성경은 영적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경우와 은혜 아래 있지 않은 자들의 영적인 능력과 은사에 대해 말함.
II. 내적인 깨달음이 있음.
A. 죄의 지배 아래의 말씀 경험
B. 은혜의 지배 아래의 말씀 경험과의 차이점.
1. 말씀의 경험이 간헐적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도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있으나 간헐적임.
-내적인 깨달음이 간헐적인 이유는 죄 아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임.
2. 깨달음의 지속성이 없음.
-내적인 깨달음이 영혼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함.
-죄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비해 내적인 깨달음이 주는 영향력은 미약하여 지속성이 없기 때문임.
-영혼의 틀이 죄가 성장하기에 좋고 은혜가 보존되기에 나쁜 환경이 되어버려서 내적 깨달음이 와도 쉽게 사라짐
3. 깨달음이 실천적으로 이어지기 어려움.
-은혜 아래 있을 때는 내적인 깨달음이 깊을뿐만 아니라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생활을 촉진함.
-죄의 지배 아래는 익숙해진 삶의 습관이나 내적인 경향성 때문에 깨달음을 실천할 힘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됨.
III.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함.
-죄의 지배 아래도 신앙의 의무를 행한 중에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음.
-모든 신령한 경험의 한복판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함.
-그리스도를 위해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는 자기 암시적인 현상일 뿐임
IV.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함.
-모든 도덕적인 삶의 뿌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에 죄의 지배 아래도 도덕적 의무를 행할 수 있음.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의무를 실천하게 하는 자원은 하늘 자원이 아님
V. 범죄에 대해 단편적으로 참회함
A. 죄의 지배 아래의 참회
-죄의 지배 아래의 참회는 개별적인 범죄에 대한 후회나 고통으로 인한 뉘우침인 경우가 많음
-따라서 총체적인 참회의 결과인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가 많음.
B. 이러한 참회의 한계들
1. 동기가 이기적임
-회개의 동기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명예를 드리고 그 사랑을 배반했다는 자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통임
-단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속에는 진실한 깨어짐이 없음
2. 지속적이지 않음
-외적으로 볼 때 참회가 강렬해 보여도 그 경험이 단속적임.
-고통스러운 회개의 눈물이 마르고 나면 다시 악한 정욕이 고개를 들고 죄 아래로 사로잡아감
3.영혼의 변화가 없음
-많은 눈물을 흘려도 죄를 향한 사랑에 대한 깨어짐이 없으면 영혼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음.
VI. 죄를 짓지 않겠다고 헛대히 결단함
-범죄로 인한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에 대항하고자 결단하기도 함.
-그들의 약속과 결단은 매우 연약하여 바람직한 열매를 맺지 못함
스터디
제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1.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관련하여 은혜와 은사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십시오.(146-147)
2.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영적인 은사를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7)
3. 말씀에 대한 경험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48-149)
4.은혜의 지배 아래서와 죄의 지배 아래서의 말씀의 경험은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149-151)
5.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쁨을 경험하는 등의 정서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153)
6. 죄의 지배 아래서도 도덕적인 의무를 행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도덕적인 의무를 행하는 것이 거룩한 삶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154)
7.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경험하는 참회가 갖는 한계는 무엇입니까?(157- 158)
8.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죄에 대항하고자 결심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한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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