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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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6:1-13
삼상 16:1-13
오늘은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삼일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옆에 있는 지체와 이렇게 인사할까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여전히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몸 중에 가장 중요한 기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뭐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지요. 심장이 중요하다. 머리가 중요하다. 손이 중요하다 발이 중요하다.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의 삶에 가장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은 무엇보다 눈입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어요.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다.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선 그만큼 이 눈이라는 기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한거죠.
왜 눈이 중요하냐면요, 눈이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많은 정보들이 삶에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 시각 정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통계에 따르면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80% 이상이 시각을 통해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눈을 통해 보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진실이고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거죠.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게 당연한거죠. 어떻게 말만 가지고 믿겠습니까. 내가 봐야 믿지, 내가 그걸 내 눈으로 보아야 믿는거죠. 이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이 눈과 시각이 우리의 삶에 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보고 싶은대로 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본대로 믿는다고 하죠. 내가 보는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고 진짜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아닌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보는대로 믿는게 아니라, 믿는대로 봅니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봅니다. 내가 믿고 싶은대로 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선택적 지각’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 개념은 사람이 똑같은 장소에 있어도, 내가 관심 있는 것만 주로 보인다는거죠. 돈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얼마지만 보이고요,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무슨 옷 입었나 그것만 봅니다. 차에 관심 있는 사람은 지나가는 차만보여요.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는 뭐 애들 용돈도 잘 없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카드 시대가 아니라 현금시대라서요, 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뭔 돈이 있겠어요. 그런데 그 돈가지고 오락실도 가고 싶고, 맛있는것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뭐하고 다녀요? 늘 땅바닥을 쳐다보고 다녔습니다. 어디 떨어진 돈 없나. 그러니깐 돈이 필요하면 뭐만 보고 싶은거에요? 떨어진 돈만 보고 다니는거에요. 유찬이를 차 뒷자리에 다니고 다니면요, 유찬이는 대부분 뭐만 보냐면 자동차만 봅니다. 저기 뭔차가 있다. 산타페가 있다. 버스가 있다. 포크레인이 있다.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보이는거에요.
우리의 시선이라는게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가 진실을 보고 진리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어떤 것을 바라보냐,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영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진짜 영성은 뭐냐면요,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게 영성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과 세상적 편견에 사로 잡힌 시선 말고,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 내고 바라보는 것이 진짜 영성인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계십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의 눈에 들어오십니까? 무엇이 보이십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이 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의 눈길이 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와 오랜만에 수요예배 때 만나게 되었는데요, 지금 오늘 말씀은 어떤 장면이냐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시는 장면입니다. 지난 번에 보았듯요,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졌지만,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실패는 세상적 실패가 아니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실패였습니다. 그는 말씀의 순종이 아니라,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 경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선택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전쟁 가운데 드러났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서는요, 눈 앞에 너무나 많은 군사를 보며 두려움 때문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제사를 드려버렸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요? 하나님께서 진멸하라는 그 명령 앞에, 내가 좋아보이는 것을 남겨두며, 심지어 그것을 제사라는 핑계를 들어가며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종교적인 의식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자기가 진짜 왕이었어요. 사울은 왕이 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왕은 하나님이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세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 대체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사람이라는게 그래요.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면 믿어주는 사람 역시 있었겠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는거에요. 하나님은 사울 왕의 중심을 명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 분 앞에서는 무엇 하나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16장의 말씀을 보면요, 사무엘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15장 34-35절에 보면요, 아말렉과의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 왕을 폐하셨다는 것을 사무엘은 알고 있었죠. 사무엘의 감정이 어떠합니까? 35절에 보면,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16장 1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러세요. 내가 사울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했는데,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러세요.
지금 사무엘의 감정은 어떤 감정입니까? 슬픔의 감정입니다. 이 원어적 의미는 뭐냐면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무엘의 모습이 여러분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버리신 사울 왕을 보며 사무엘은 애곡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가졌던 감정은 어떤 감정이었을까요? 그래도 비록 자신이 원치는 않았지만, 백성들이 그토록 원해서 자신의 손으로 기름 부었던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은 그래도 왕이 세워지고 나서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그와 잘 동역하면 좋겠다. 잘 동역해서 이스라엘이 잘 세워지면 좋겠다라는 비전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대로 잘 안되는 일도 있었죠. 자신을 기다리지 못해 제사를 드려버린다든지, 분명히 다 진멸하라고 말씀을 전했는데도, 자기가 마음대로 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선택을 했다든지,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던 사람인거에요.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소식은 그를 슬프게 했습니다. 애통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에게 사울 왕정은요, 사실 자신의 주 활동 무대인거에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사울 왕정이 하나님 앞에서는 일찍 끝나버린거에요. 사무엘이 가졌던 그 비전, 그 계획, 앞으로의 일들 그것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무너져버리게 된것입니다.
15장 35절에 보면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했다. 약간 이 두모습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16장 1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그러세요. 아니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했는데,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이새의 집으로 가라, 거기서 내가 내 왕을 세우겠다. 그러니깐 사무엘 선지자가 그래요. 2절에 보면, 내가 어찌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사울 왕이 알게 되면 나를 죽일겁니다.
여러분 선지자가 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못하겠다는거에요. 그러니깐 사무엘의 이런 감정 상태와 그의 모습을 보면요, 그가 사울 왕을 향한 그 슬픔이 단순히 그 사람을 향한 안타까움을 넘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자신 역시 인정하기가 어렵고, 받아들이기가 힘든 상황임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 선지자는요 다윗에게 기름 부음을 부은 후 그의 활동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역하고 활동하던 주 무대는 사울 왕정 시대이고요, 다윗의 때는 절대로 아닌거에요.
여러분 이 사무엘의 깊은 슬픔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실패한 과거, 사울과 함께 꿈꾸었던 나의 비전이 무너진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손으로 기름 부었고, 내가 공들여 세웠고, 내가 은퇴할 때까지 함께 가리라 믿었던 그 계획이 산산조각 난 것 입니다. 사무엘의 슬픔은 어쩌면 “하나님 제 인생의 계획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는 원망 섞인 탄식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무너져버린 과거의 무대가 아니라, 이미 다른 곳에 새 무대로 준비하시고 세우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비록 사무엘이 주인공은 아닐지는 몰라도,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세워지게 될 것이에요. 사무엘은 사울이라는 과거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진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을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래요. 우리는 내가 세운 비전, 내가 세운 계획, 내가 생각하는 미래, 내가 거기에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게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너져 내려버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까지 의심합니다. 하나님 나 버리신겁니까? 나는요? 그리고 사무엘처럼 슬퍼합니다. 애곡합니다. 여러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라는 그 사실 때문에 주저 앉아 있지 마십시오. 나의 활동 무대가 끝났다고 해서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전이라는 것은요, 나의 비전이 아니에요. 나의 비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는게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이 좋은 왕이에요? 아니면 다윗 왕이 좋은 왕이에요? 이스라엘 전체에서 보면 다윗 왕처럼 훌륭한 왕, 백성들을 위한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늘 우리는 내 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공일 때, 내 비전, 내 생각, 내 계획, 내 커리어, 그게 무너지면 슬퍼지고요, 그게 바뀌어버리면 하나님까지 원망해버려요. 그런데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있는 사람이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이 내 계획보다 백배 천배 낫다고 인정하는게 진짜 믿음에요. 여러분 우리의 계획보다 크신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더 선하심을 고백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살펴볼 부분은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왕을 세우기 위하여 이새의 집으로 향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그랬잖아요. 제가 왕 세우러 가면 분명히 사울 왕이 절 죽일겁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그래요. 그냥 제사하러 왔다고 해라.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합니다. 이제 사무엘은 그 집 안에 왕으로 기름 부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몇번째 아들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그때 이새의 장남이었던 엘리압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이 요동쳐요, 6절을 보세요.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여러분 과연 사무엘이 엘리압의 무엇을 보고 딱 이 사람이다 이랬을까요? 그 다음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러세요.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이 말은 사무엘이 뭘 봤다는거에요?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고 저 사람이 딱 왕이구나 이랬다는거에요.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울의 실패를 보며 그토록 슬퍼했으면서 정작 새로운 왕을 찾을 때 역시 뭘 보고 있어요? 사울과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게 참 이렇습니다. 과거에 그것 때문에 실패했으면서도, 또 여전히 그걸 붙들고 있는거에요. 어떨 때는 그 외모와 용모, 조건을 보는 세상을 원망하면서도 그런 사람을 탓하면서도, 또 다시 그것을 따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무엘의 생각을요 시선을요 단칼에 거절하십니다. 우리 본문 7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무엇을 보신대요? 중심을 보신다 말씀하세요. 하나님이 엘리압에게 그래요.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엘리압이 뭐 잘못해서 버렸다라는게 아니라, 그가 가진 조건, 이런 용모와 키를 보는 사무엘의 시선, 하나님은 사울 왕과 같은 시선을 거절하신다는거죠. 하나님은 더 이상 외모로 열방의 왕들처럼 풍채로 통치하는 왕을 원치 않으셨다는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라는 것은요,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의지, 인격, 태도,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세상과 사람은요 늘 겉포장지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요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보신다는거에요.
이새에게는 아들이 참 많았습니다.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한 명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깐 사무엘이 당황하는거에요. 그래서 이새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의 아들이 다 여기 있는거 맞습니까?” 그러니깐 이새가 그러는거에요. 11절에 보면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킵니다” 이렇게 대답해요. 이 표현이 참 그래요. 이새가 막내라고 표현하는 이단어가 카탄이라는 단어인데요. 이 말은 나이가 작고 어리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작은 자, 보잘 것 없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버지 이새가 자신의 아들이었던 다윗을 이 소중한 제사의 자리에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집안의 중요한 일에서 늘 제외되던 존재였고, 들판에서 양이나 돌보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목한 자는, 이 다윗이었다는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시선에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우리는 뭘 생각해요. 사람들의 시선, 세상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가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맞아요 그걸 맞추고 그 시선에 따라 살면 세상적으로는 성공은 할지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너 참 대단하다 인정해줄지는 몰라요. 그러나 그게 꼭 하나님 앞에 성공한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과 세상 앞에, 하나님 앞에 다 성공할 수 있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세상의 니즈, 세상의 요구, 사람들의 요구와 시선 그거에 따라 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시선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가 대다수 입니다.
여러분 다윗 보세요. 그는 정말로 본문의 이 순간 안에서도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뭐에요? 거들떠도 안보는, 집안에서도 인정 못받는, 그저 막내, 양이나 지키는 애, 철부지였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요. 너 그렇게 살면 안되, 더 갖추어야 되, 더 나은 스펙,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외모,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환경 그게 필요해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시선은요? 과연 그것일까요?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요. 이 다윗 처럼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지언정, 하나님께 주목 받는 인생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을지언정, 하나님께 인정 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배운 것 없어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많아도 괜찮습니다. 가진 거 없어도 괜찮습니다. 스펙 없어도 괜찮아요. 하나님은 그런 걸로 우리 인생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조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매일 내가 하나님 시선 앞에, 신실히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나의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자가 다윗 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우리의 용모를 보고 키를 볼지언정,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만 있어서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무엘도 용모와 키를 봤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아요 용모와 키가 보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 되는 마음이 뭐에요? 이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세상을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대할 때에도요, 저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가? 저 사람은 얼마나 가졌고 얼마나 배웠는가, 이런 기준만 가지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한 영혼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화려하고 앞장서는 사람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빚도 없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헌신하는 성도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찾아내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겉모습을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귀히 여길 때, 우리 공동체가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 이 이새의 집에서 기름 부음을 받아 다음 왕이 될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다윗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 13절 말씀 함께 같이 읽어볼까요. 사무엘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이 다음 왕으로 기름붓는 의식을 행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요.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지만요, 당장 왕위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이때 청소년의 시기쯤으로 보는데요, 15살이라고 치자면요, 다윗은 헤브론에 30살에 왕이 되고요,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에는 37세입니다. 그러니깐 지금 기름부음 받았다고 왕이된거 아닙니다. 최소 15년의 시간 뒤에 왕이 됩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았지만 여전히 목동이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 집안의 막내입니다. 양을 쳐야 했고 일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달라진 것 하나는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신약시대로 넘어가면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상징하는 그림이 되어집니다. 즉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요, 우리에게 완벽한 환경을 요구치 않으십니다. 다윗처럼 부족한 환경,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것은요, 나의 나약한 환경이나 내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여전히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이후로, 골리앗 앞에 서게 됩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하는 고난의 시절을 살아갑니다. 그가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 앞에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은 한주의 삶에서도, 늘 나의 형편, 나의 능력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나와 늘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인도 멘트]
[기도 인도 멘트]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시는지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시편 139편의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우리는 자꾸만 겉모습을 치장하고 세상의 시선에 나를 맞추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세 가지 기도 제목으로 함께 마음을 모으겠습니다.
✅ 첫 번째 기도: 하나님의 시선에 우리를 맞추게 하소서 (말씀 통합)먼저 오늘 주신 1, 2, 3대지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로 통합해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보다 크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하소서. 세상의 화려한 용모와 스펙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나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하소서. 나의 나약한 환경과 형편을 탓하며 주저앉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나를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서는 삶이 되게 하소서. 👉 “주님, 나의 좁은 시선을 교정하여 주시옵소서. 내 비전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내 외모보다 내 중심을, 내 환경보다 성령의 능력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이 시간, 말씀의 결단을 담아 주여 한 번 외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두 번째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 (단기선교와 새 학기)두 번째로 우리 광혜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베트남 단기선교를 준비하는 모든 대원을 위해 기도합시다. 현지의 영혼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시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가득하게 하소서. 또한, 다가오는 새 학기를 맞이하는 자녀들과 교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의 성적과 평가라는 시선에 아이들이 위축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달란트와 중심을 발견하는 복된 학기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우리 교회가 서로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이제 우리 교회 사역과 자녀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세 번째 기도: 개인의 기도 (훈련의 시간을 이기는 믿음)마지막으로, 각자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뒤에도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 20년의 세월을 견뎌냈던 다윗을 기억합니다. 지금 내가 지나는 이 막막한 광야와 훈련의 시간이 나를 왕의 그릇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세상의 그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이 되게 하소서. 👉 “주님, 나의 들판에서, 나의 광야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연단의 시간을 성령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소서!”오늘 밤 주님께 꼭 응답받아야 할 각자의 간절한 제목을 놓고 마지막으로 힘있게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