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10장
죄와 은혜의 지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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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10장_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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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제 10장.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험한 징우들. 우리의 몸에 질병이 있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증세가 우리의 몸에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영혼이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그 징후가 나타납니다. 영적 어두움과 기적인 눈머음 신자로 하여금 징우들을 속히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때로 너무나 명백한 징우가 있는데도 자신의 영혼의 영혼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서는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처럼 죄 제시되는 징우들을 통하여 신자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01:05)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생각할 때 마음에 새겨두야 할 죄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죄의 전 포괄적 영향력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지배는 영혼에 대하여 전 포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 안에 있는 죄의 지배력은 죄의 지배를 받는 영혼의 상태와 동일한 결과를 신자의 인격과 삶 속에 가져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거듭난 본성이나 신자 안에 있는 은혜가 가져다 주는 효과와 동일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신자 인격과 삶에 대한 죄의 영향력도 총체적이며 포괄적이며이고 은혜의 영향력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위한 관건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번성을 소유하는 것과 그 은혜에 의하여 지배받는 상태를 유지하는
(02:08) 것입니다.이는 곧 회심과 그 회심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자가 죄의 집에 아래 있음을 알리는 특히 위험한 징무들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위험한 경우 1. 특정한 죄가 상상력을 지배함. 죄가 특정한 악에 대하여 계속해서 상상력을 지배하고이어서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게 될 때에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뚜렷한 징후입니다. 죄는 제일 먼저 신신자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따라서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사고 기능은 옳고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신자의 사고 기능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들어온 죄는 먼저 상상을 통하여 사고 기능에 간여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전됩니다. A
(03:14) 상상을 통한 죄의 발전 범죄에 대한 상상은 신자가 죄를 짓고 싶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도록 환경에 의하여 제악받을 때 나타납니다. 죄는 즉각적으로 신자의 생각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순전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해 고정되었던 생각을 허탄한 것들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헛된 생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이에 대하여 존 오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생각의 허함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이들의 영혼을 멀어지게 한다. 순전한 대상에 지속적으로 고정되기를 거부한 생각은 죄의 즐거움과 욕망의 이익을 향한 상상력과 또 다른 생각들에 의해 좌우되며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그들은 진정한 만족과 평안함의 복을 위하여 헛된 노력들을 한다. 죄의 즐거움과
(04:19) 유욕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을 포기할 때 죄는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자이며 그 마음은 더러운 정력들로 가득찬 상태가 된다. 인간이 죄지을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도 물리적 환경이 그 욕구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죄지을 욕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비용이 죄의 실행이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는 즐거움보다 많은 것으로 판단될 때에 신자는 그 죄를 실행에 옮기기보다는 범죄의 실행을 상상하게 됩니다.
(05:12) 그리고 거기서 마음에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의 상상은 신자의 마음을 더럽히고 양심의 가책을 가져다주며 영혼에 대한 죄의 지배에 힘을 더하여 줍니다. 상상을 통해 자극되는 정욕이 죄의 지배에 힘을 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크기에 있어서 결코 실제로 죄를 실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응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다음 두 가지 유익 때문에 상상을 통한 범죄를 택합니다. 첫째로 상당력을 통하여 죄를 짓는 것은 물리적인 수행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마음으로 가음하기 위하여 상대가 될 여인을 납치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06:08) 그리고 의견한 성병에 감염될 영도 없습니다. 또한 그 주문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될 위험도 없습니다. 상상을 통한 마음에 간음이 주는 즐거움은 실제로 그 죄를 실행할 때에 즐거움 작지만 그러한 물리적인 희생을 수하기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주께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상령을 통한 범죄는 실제로 죄를 심행하는 것에 비하여 양심의 가척을 겨울 받게 되기 때문이 신자는 마음으로 짓는 죄 역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저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의 죄에 대한 욕구가 보다 친화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의 범죄가 갖춰다 주는 가책을 누리고 상상을 통하여 범죄하게 된다.
(07:02) 그때에 신자는 그러한 범죄가 우리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일뿐 실행에 옮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성의 설득으로 범죄하고자 하는 의지의 힘을 씌어줍니다. 신자가 이처럼 상상을 통하여 자주 범죄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한다면은 그가 죄의 집배 아래 있다는 증후입니다.이 은혜의 집배 아래 생각의 범죄와의 찰적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생각을 통한 범죄가 없니까? 이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은혜의 지배 안에 있는 탁월한 신자에게도 얼마든지 악한 상상이 마음을 스쳐갈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순간적으로 그러한 상상을 붙잡아서 죄의 시행을 꿈꾸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07:59)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일어나는 경향과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A 사고 기능의 지속적으로 간여함. 첫째로 제가 사고 기능에 간여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즉 죄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상상력을 통한 범죄란은 제가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할 결과 주변 아래 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제가 사고 기능에 간여할 때 특정한 죄에 대한 욕망을 욕망이 사고 기능에 반복적으로 여향을 미치게 되게 됨으로써 특정한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강력한 힘을 얻어서 신자로 하여금 쉽게 상상을 통한 범죄에 마음을내어 주 은혜의 집 아래 있는 신자가 방황하는 상상을 통한 범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08:50) 은혜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작이는 신령한들이 간여 아 신령한음 생각들의 간여가 지속적이고 제약된 생각들의 간여는 간헐적이고 안속적입니다. 마음으로 범 범유를 받아들림. 둘째로 마음이 죄의 작용에 반응하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상상을 통하여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마음에 저항이 없거나 매우 약하고 은혜의 집배 아래 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상상을 통한 범죄에 대하여 마음이 친화적으로 민감한데 비하여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저항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신자라고
(09:55) 할지라도 그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시적으로 그의 마음에 붙잡혀서 죄의 즐거움을 상상 속에서 맛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그렇게 스쳐가는 범위가 마음에 착상되기보다는 더 많은 경우에 의지의 저항을 받아 착상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죄가 상상령을 통하여 사고 기능에 간여하는 것이 죄의 지배 아래서처럼 조직적이고 주요하지 않습니다. 죄악된 생각이 사고 기능에 일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가져다 줄 즐거움을 기대하지만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그러한 상상 때문에 잃어버리게 될 은혜를 염두해 줍니다.
(11:02)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생각의 범죄는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의도적이고 계획적입니다. B. 상상의 죄가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악들. 이렇게 죄악된 상상력이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함으로써 구체적인 악을 일으키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만과 유교 그리고 불신앙과 미움입니다. 1. 교만. 첫째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않는 자기 높임입니다. 따라서 사람이이 죄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이 교만의 죄는 영혼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2:05) 하나님께서이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온 세상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왜곡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교만은이 세상에서 더욱 권세를 얻고 더 많이 높아지려는 강력한 열망으로 나타납니다.이는 이는 이사야 14장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에도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높을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이 이 세상 역사에서 대부분의 죄양들이 공통적으로 추진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이었습니다.
(13:06) 그래서 스스로 칭하기를 천자 태양의 아들 현인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인 자신을 종교적으로 신격화하는 일이었 일이었으니이는 홀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도 교만은 죄만은 죄가 상상력을 통하여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대표적인 죄입니다.이 >> 유욕 둘째로 유욕과 더러움입니다. 육체의 욕심과 더러운 정욕의 추구는 죄가 상상력을 통해서 사고 작용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간의 유교과 더러움은 음란함을 통하여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인간이이 죄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고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는
(14:10)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나 인간의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러한 사실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음란함은 세상 사랑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상숭배는 자기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이 모두 그릇된 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인간을 창조의 본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겨우이 음란함은 그것이 영혼에 미치는 심속하고 강력한 불어 어 불결의 영향력 때문에 자주 예수님에 의하여 그 심각성이 경고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서에서도 음심으로 가득찬 눈을 가지고 탐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강력히 탄핵합니다.
(15:04) 모든 유욕 중 가장 강력한 힘으로 인간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신자의 내면을 내면의 세계를 가장 빠르고 쉽게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우리를 얼마나 순식간에 황폐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차던 신자의 마음을 정욕으로 가득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던 육체를 흔느적거리는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모든 끔찍한 상황의 발생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음란한 죄에 대한 상상이 신자의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는 상황이 있고 난 후에 일어납니다. 3. 어, 불신앙. 셋째로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입니다.
(15:58) 이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고자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는 회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어 회의가 믿고자 하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을 가르킨다면 불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곳 악한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사고가 명려하고 행동의 동기가 명징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도 이어질 그 일의 전개 과정과 해결 방법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과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상황이 주는 어 비관보다는 주님의 약속이 주는 낙관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16:51) 그리고 현실의 절망과 소망의 낙관 사이를 믿음과 순종으로 메우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그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고집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악한 강함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마다할 때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앙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져서 남들이 볼 수 있게 되기 전에 반드시 그러한 불신앙의 경향성이 상상을 통해서 그의 모든 사고의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합니다. 그래서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이나 유혹에 대하여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자기의 힘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믿게 됩니다.
(17:46) 일단 신자 안에 이러한 불신앙의 고집스러운 경향성이 깃기 전에 상상 속에서 불신앙적인 생각들이 자주 그의 사고의 전 기능에 관여하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앙의 상상들의 반복은 마음을 굳어지게 하고 정서를 불신앙에 적합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리는 위험한 징후입니다. 그가 부도덕한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 4. 믿음 넷째로 미움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가장 쉽게 생각에 접근하고 사고의 전기에 관여합니다. 이은 음란함과 함께 죄의 본성을 가장 명백하게 어 보여주는 죄로 죄 안에 있는 강기와 맹렬함을 미움처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죄도 흔치 않습니다.
(18:47) 현재 안에는 미움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게 미치는 여향력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주는 영향력을 반대로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사랑의 전 포괄적으로 사랑은 전 포괄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그것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 신자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 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분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기를 사랑하며 그분께 연합된 사람들도 사랑하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도 불쌍히 여깁니다.
(19:47) 심지어 그분이 섭리 가운데 허락해 주신 십자가도 사랑합니다. 미움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신자는 곧 그 사람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것, 그와 관련된 모든 것, 그가 생각하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신 형상 안에 계신 하나님도 미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선하심 의지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미움은 신자의 생각을 지배하고 사고 작용에 광범미하게 다녀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러한 미움이 거기에 배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마음이 그의 정서와 의지를 모두 지배하기 전에 먼저 미움이 실현되는 상황에 대한 상상이 그의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20:40) 그에 반복된 상상은 죄 일뿐 아니라 영혼이 전체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리는 아주 위험한 중후입니다. 예수님께서 미음을 사는 거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이 위험한 징후 2. 특정한 욕망이 정서를 지배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두 번째 징후는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욕망이 신자의 정서를 지배한다는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는 것이나 듣는 것, 경험한 것 혹은 이미 알고 있는 바 등을 통하여 또르는 악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마음을 지키지 않는 결과입니다. 특정한 죄가 신사의 마음에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의지적인 것이 아니지만 죄가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게 되는 것은 신자의 의지적인 선택인
(21:47)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반복적인 상상으로 죄 죄가 사고 기능에 간여하게 하는 것은 상상을 통한 생각의 범죄로 얻게 되는 정서의 즐거움 때문입니다. 그러한 즐거움을 맛보면서 신자의 마음은 죄에 대한 상상이 자신의 사고를 충분히 지배하도록 버려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죄에 대한 상상은 정서를 특정한 죄에 대한 소원들로 가득차게 하고 의지를 굴복시켜서 죄를 산출할 힘을 더하게 됩니다. A 정서가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사는 관건은 지성과 정서에 달려 있습니다. 지성을 통하여 사물을 식별하고 정서를 통하여 그에 대하여 좋고 싫은 감정을 가짐으로써 판단합니다.
(22:46) 그리고 의지는 그것들을 따라갑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물을 분별하는 지식이 정확하고 풍부할 때 좋고 싫음을 느끼는 정서의 기능이 죄의 영향을 적게 받는 올고든 상태일 때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게 됩니다. 은혜의 상태 은혜의 상태에서 정서는 지성에 의하여 잘 통제됩니다. 그러나 죄가 정서를 지배하게 되면 신자는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지도를 받으며 인생을 항해하게 됩니다. 정서가 지성의 지성의 통제를 벗어나고 새 멋대로 작용하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바른 지성을 충분히 소유한 가운데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고 일체의 감각들은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되었습니다.
(23:42)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 추구하게 하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죄에 대한 소원이 정서를 지배하게 되어 죄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비록 신자가 행동으로 마음에 품은 바를 산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죄가 정서의 이처럼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징후가 됩니다. 그가 비록 진실한 신자인 것처럼 살아가도 그의 존재와 삶은 전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있으며 그의 영혼의 상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마음은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굳어져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24:38)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내가 비록 분명하게 죄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혹은 그 혹은 죄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내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필미삼은 인간의 정욕일 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요한복음 14장 21절 말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요한복음 14 장 23절 말씀. 그래서 존 오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신자가 평생에 힘 힘쓸 의무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씀 그리고 삶 전체가 그 유일한 동기가 동기에 의하여 집배받게 지배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삶 곧 착한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도 성경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사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26:18)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받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에는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보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창기와 세류의 사랑을마 마다하지 않고 받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죄인이었지 죄와 주님을 동시에 사랑한 사람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죄를 사랑하던 죄인들 죄인들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 이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을 사랑하던 죄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 놀라운지요. 자신의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몸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7:14) 그 사랑과 은혜의 감 감하로 이전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자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죄를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무 희망 없는 죄인들이었던 우리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고 각각의 실천들은 그 사랑하는 바의 시련에 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혹시 실천하는 어떤 행동이 그러한 방향에 계하지 않는 것이라면 의무감으로 행하게 되거나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신자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자 할 때에 가장 강력하게 공략하는 부분이 바로 정서입니다.
(28:07) 거듭남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심으신 새 생명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경향 속으로 나타납니다. 죄가 신자의 정서를 지배하게 되면 신자는 자기 안에 주신 이러한 주도적인 경향성에 반하여 죄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따라 범죄를 실행하고자 하면 중생을 통하여 주어진 생명의 성령의 법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정지됩니다. 다시 말해 죄가 신자의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정서 기능이 죄에 대한 소원으로 가득차게 될 때 그렇게 불순적으로 악한 상상을 선택한 신자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 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9:07)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이전처럼 죄가 신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죄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리는 의심할 수 없는 징후입니다.이 이 죄에 강력하게 이끌릴 때의 처방 신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항상 동일하지 않듯이 죄의 역사 또한 동일하지 않습니다. 죄가 신자 안에서 특별히 역사하고 강력한 힘으로 그를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신자의 내면의 세계가 죄에 대한 정 저항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죄는 시료적인 힘을 가진 법이 되어 무서운 기세로 신자를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29:58) 물론 죄의 역사는 정서만을 공략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착상되고 발전하며 산출되는 단계마다 인간의 생각과 정서 의지는 서로서로 상호작용하며의 역사를 돕습니다. 그러나 각 단계마다 주도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죄가 신자의 마음에 착상될 때에는 의지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생각이 정서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가 아 그 죄가 내면 속에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정서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의지가 생각에 도움을 받습니다. 최종적으로 죄가 산출할 때에는 어 의지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며 정서가 생각을 설득하여 의지를 강요합니다. 그리고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어 죄의 역사하는 힘을 이룹니다.
(30:56) 이때 죄의 역사하는 힘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고 자신 안에는 실제로 죄를 대적하고 이길 수 있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죄가 자신을 강력하게 끌고 가려고 할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깨달음. 실제로 성령의 조명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질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죄를 죽이는 불불변의 방편입니다. 따라서 죄가 상륙하게 역사하여 자신을 그 아래로 끌고 가려 하는 힘을 느낄 때 신자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31:52) 그래 영혼의 상태와 그에 대한 처방을 알게 하는 복음의 진리들을 정확히 깨닫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러한 진리들을 사용하셔서 친자 안에 융하는 죄의 세력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용하시는 아 사용하셔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의지하는 것은 신자가 죄의 집배 아래 들어가지 않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조명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복음의 비밀을 아는 것이는 누구도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총계도 좋은 오해는 충고합니다.
(32:39) 신자가 죄의 강력한 세력을 느끼고 그것이 자신을 끌어가려고 할 끌려 끌어가려고함을 알 때 인간의 영혼과 죄의 본질과 작용 그것과 싸우는 복음의 비밀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영적인 의사를 찾아서 도움을 구하라고 말입니다.이 이 죄의 세력의 약화를 위하여 기도와 둘째로 자기 안에 죄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반응은 사주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의 집배 아래 있을 때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이미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설령 기도할 때 그러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약화되고 다시 은혜가 우세한 지배력을 얻게 되지 않으면 그런 확신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33:40)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지배적인 세력이 약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또다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의 경험과 범죄의 재발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 느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경험하는 사제의 확신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경험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주심과 그것을 믿는 마음 안에서 용서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영혼의 상태는 내버려든 죄,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사제의 확신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된 거라 고통받는 양심의 가책을 보면하고자 하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4:27) 오히려 하나님께선 이러한 상황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개별적인 죄에 대한 사제의 확실을 유보하심으로써 그러한 개별적인 죄에 빠지게 될 빠지게 된 보다 근본적인 영혼의 상태 곧 죄의 집배 안에 있는 영혼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붙일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제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을 회복하게 될 때에 찾아오는 영적인 확신입니다. 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구속의 효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것이 것 것이므로 신자로 하여금 어떤 개별적인 죄의 용서를 구게 하는 근본적인 동계는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하나님과의 소원함 곧 거래감과 날서음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35:22) 그러나 거듭난 신자에게 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근본은 순간적인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기보다는 성화의 결과로서 경험됩니다. 죄를 버리고 순종하던 삶에서 돌이켜 죄의 지배에서 은혜의 지배로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거리감은 친밀함으로 낯설음을 낯설은 사랑 낯설은 사랑스러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되면 그가 사제를 구하면 구하며 탄 하던 고통은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이렇게 다루시는 것은 주의 청소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지금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사조의 은혜를 구하는 고통스러운 죄 역시 죄의 주변을 받는 보다 뿌리가 되는 영적인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의 근을 다루음으로써 신자를 번질적으로 세신시키고 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36:20) 따라서 이런 상황을 상황에 있을 때 신자는 안거할 수 없을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이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은혜의 수단에 부지런히 참여함. 셋째로 은혜의 수단에 부지런히 참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악에 대항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도록 지정된 수단에 부지런히 참여 해야 합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어 정서가 죄에 장악되면 그는 스스로 악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일에 있어서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이때 육체의 게음과 영혼의 실증은 신자가 이렇게 물러가는 일에 도움을 줍니다.
(37:13) 이렇게 되면 신자는 신앙에 대하여 아주 냉담해지거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은 채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 즉 예외에와 성찬에 참여하거나 참석하거나 기도나 성경 공부 혹은 신자의 교재에 참여하는 것 등을 통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영혼은 실증을 느끼게 되고 육체는 그러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을 게리하게 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이러한 시도가 효과 없다는 패배감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38:07) 그러나 실상은 은혜의 수단들이 무효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랑 안에 있는 죄의 우세함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은혜의 수단들을 통하여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새롭게 회복시키시고 죄의 세력을 꺾으셔서 은혜의 통차례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은혜의 수단들의 마음을 기울이며 부지런히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 수단들을 통하여 죄의 세력을 약화시키시고 다시 은혜를 주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3. 위험한 진고 3.
(39:01) 파악된 죄를 버리지 못함. 셋째로 이미 파악된 죄인데도 그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하고 있는 일이 죄인지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집배 아래 있는 신자라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집배 아래에 있는 신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행했던 어떤 행위가 죄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에는 쉽게 그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죄를 죄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그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9:47) 신자의 마음 안에 성께서 마음으로 빛을 비춰주시면 어느 한순간에 죄를 자각하게 됩니다.이는 이는 마치 햇빛이 잘 들어오는 방에서 먼지가 잘 보이고 피부에 여러 가지 변균들이 기어다니는 것을 현미경으로 잘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빛에 의하여 죄가 죄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친화성이 은혜에 대한 갈망보다 크면 신자는 그 죄를 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큰 죄는 아닐 거야.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하고 있잖아. 다른 것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지금 당장이 죄를 버리려면 고통이 따르겠지. 시간이 흐리면서 천천히 힘들지 않게이 죄를 버리게 되는 날이 올 거야.
(40:34) 지금 죄가 파악되었다고 해서 당장 버리지는 않아도 될 거야.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간교한 생각 때문에 신자는 죄를 버리지 못하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이 그것은 이미 신자의 생각 속에서 죄의 속임이 총체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를 확신하더라도 자만심이나 죄로 말미암는 기쁨 때문에 그 죄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총체적인 죄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고 단지 한두 가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죄에 대해서만 저항하는 것이 죄를 죽이지 못하는 것도 바로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이크 자 위험한 중차 마음의 극한 거지로
(42:19)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길 수 없는 마음의 그거짐입니다. 입니다. 신자가 죄의 주변을 받은 받는 영적인 상태는 그의 마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영혼에 내지하지만 그 작용은 영혼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기능의 영향을 미치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죄인은 신자의 전격과 삶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신자의 마음에 이루어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한 거짐이 신자의 마음은 죄의 주배를 받는 영혼의과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으로 나타나는 일에 있어서 사령부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굳어짐은 절대적인 굳어짐 곧 통체적인 굳어짐과 상대적인 굳어짐 곧 구분적인 굳어짐으로 나닙니다.
(43:11) 이 총체적 굳어짐 신자의 마음의 굳어짐에 있어서 총체적 굳어짐은 절제적인 굳어짐으로써 자연적인 굳어짐과 심판적인 굳어짐으로 아닌 이것을 좀 더 상세히 설명 상세히 설명하면 된 거 같습니다. 첫째로 자연적인 거짐은 불신자의 마음입니다.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마음이 굳어 있는 것입니다. 심판적인 굳어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더 길 수 없도록 부어지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출기 9장 12절에서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을 강팍되게 하셨다고 할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팍하심을 막으시던 은혜의 방패를 거두시고 굳어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이러한 심판적인 부어짐 역시 제적인이는 신자에게도 일어날 주신 자에게도 일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44:13) 이 부분적 굳어짐 신자들에게도 굳어진 마음이 남아 있는데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러한 마음의 굳어짐은 변화될 수 없는 절대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 굳어짐 혹은 부분적인 굳어짐이라고 부릅니다. 불신자의 마음에 부분적인 굳어짐은 부드러움이 거의 없어져 불신자와 방불하게 된 신자로부터 굳어짐이 거의 없이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그 마음은 현작에 굳어집니다. 은혜의 집배 아래 있을 때에는 그 마음이 부드러워서 하나님의 생각과 정서 그리고 의지에 쉽게 영향을 받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그와 반대입니다.
(45:09) 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불순종하는 삶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순종하는 삶이 보편적인 이유로 바로이 때문입니다. 마음의 굳어짐에 오인 신자는 영혼의 중생을 통하여 본성이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처음 회심에서 그 마음이 깨뜨려지고 부드러움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부드러워진 신자의 마음이 왜 다시 굳어지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근본적인 원인과 실제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거듭난 신자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과 또한 의뢰 아래 살지 않는 상태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범죄하는 것과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46:02) 근본적인 원인 첫째로 타고난 부패성 때문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없는 구원입니다. 그는 중생을 통하여 본생이 본성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마음에 심겨진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영혼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신자 안에는 여전히 죄가 전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타원한 부패성이 신자로 하여금 마음이 굳어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중생을 통하여 죄의 절대적인 지배가 무너진 신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죄의 부패성이 잔존합니다.
(46:47) 그래서 그것을 은혜로서 적절하게 죽이지 않하면 수많은 악한 생각들이 마음을 더럽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신자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볼처럼 굳어지게 만듭니다.이 이 굳은 마음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굳은 혹은 강팍한을 신약 히라버 성경에서는 스클레로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이는 습기를 빼앗기고 마치 부어같이 말라서 딱딱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은혜 아래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자 안에 타고난 부패성이 잔존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한다면 마음이 굳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는 주된 수단은 두 가지입니다.
(47:37)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회심의 은혜는 보존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중생과 함께 지니게 된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 같은 부드러운 마음도 유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의 굳어짐은 그가 은혜의 지배 아래 살지 아니한 결과이기도 하고 또한 반대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에서도 비인하지만 제적인 원인에 더욱 많이 영향을 받으나적인 원인으로서 신자가 범죄하기 때문에 또한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 째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범죄는 마음을 신속히 이어지게 하고 작은 범죄는 서서히 이어지게 하고
(48:41) 살인 가음 두곡질 같은 명백기 양심을 거스리는 죄로부터 시작해서 원망과 미움과 그리고 몸에 맨 베어름과 영적인 평안되어 신자의 마음에 굳어지게 하는 요인이 이것이 큰 작은 범죄은 신자의 마음을 부어지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안에 있을 때에 범죄은 신자의 마음을 더욱 급격하게 굳어지게 만들 수 있고 반복해서 경고가 주어진 죄에 대하여 범죄하였을 때에도 다른 경우보다도 더 신속하고 강력하게 어질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마음의 굳어짐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마음을 잡히지 못하기 때문이 신자가 실제적인 범죄에 빠지기 전에 먼저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일이 있습니다.
(49:36) 경건한 신앙의 사람들이 마음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과 바로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해나 신자 역시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지 않으며 생각과 마음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죄는 몸으로 짓는 죄보다 마음을 더 마음을 덜 굳어지게 하고 천천히 굳어지게 하지만 반복적인 반복적으로 짓는 마음의 죄는 필현조로 그 사람 안에 잔존하고 있는 은혜를 호사시키고 마음이 탁했도록 만듭니다. 되고 그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함로 마음은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내 결정적인 도움이 마음의 굳어짐과 함께 신자의 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50:37) 이 굳어진 마음의 증거든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증후가 나타나듯이 신자의 마음이 어 신자이 인식할 수 있는 자각 증상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이러한 자극 증상을 인정하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회복이 월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죄의 지배 아래에 있어도 지혜로운 신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지적된 자신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자각 증상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이 부어진 증거는 다과 같습니다. 예. 말씀을 통하여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향을 받으려는 마음의 준비가 없습니다.
(51:36) 신자의 마음이 죄의 지배 아래 굳어진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향을 받으려는 마음에 기꺼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이 깨어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며 예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힘을 공급받으려 기꺼운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집 아래 있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에 목마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어찌하든지 정직하고 권의 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을 피하게 되고 진지하게 성경 진리를 참고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52:25) 이 모든 굳어진 마음에이 모두 굳어진 마음의 증거입니다. B.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둘째로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에 그 마음은 굳어진 마음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하여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감을 느끼는 느끼지 않는 마음은 죄의 지배 아래에서 굳어진 마음의 증거입니다. 은혜의 주배 아래 있어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신자의 양심은 죄에 대하여 저항적으로 예민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행하고 있거나 행하려는 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고 이에 따르는 책임감도 뚜렷합니다.
(53:18) 그리고 이러한 양심의 기능은 범죄의 무모함을 억지하는 역할을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합니다. 죄의지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서 자기 깨어짐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아파하지 않음. 뜻때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른 사람의 악행과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음이 굳어진 증거입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어서 마음이 부드러울 때는 자신만 거룩한 삶을 살아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같은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한 기대는 온 세상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는 갈망의 발로입니다.
(54:14)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려드렸다는 소문을들을 때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시편 119편 136절에서 시인이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내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고백한 것도 이러한 경험의 반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생 동안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이 세상의 죄악을 인하여 고통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반영된 기도입니다.
(55:00)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사무치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던 사람들이이 세상을 인하여 마이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시기에 흔겼고 먹고 마시던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때로는 지체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반감을 가집니다.
(55:47) 그들은 자신들과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때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이 모두 죄의 지배 아래 굳어진 마음의 증거입니다.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함 넷째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이나 아픔을 인식하는 마음의 신령한 지각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가 은혜의 지배 아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수시로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좋아하심과 싫어하심을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가 성령의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굳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인지하는 감각이 현저히 사라집니다. 자신의 상태나 마음의 생각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 등에 대하여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56:46)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이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하고 쉽게 범죄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 여기까지 오늘 읽겠습니다. >> 네. 다섯 번째 위험한 징후. 제죽임을 위한 방편들을 소홀리함. 다섯째로 제 죽임을 위한 방편을 소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사신 안에 내죄하는 죄를 죽이며 은혜 아래 살게 하는 수단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위험한 지무입니다. 신자가 거룩한 삶을 위하여 죄를 죽이는 비결은 크게네 가지로
(57:51) 집약됩니다. 첫째는 자기 부인의 실천이고 둘째는 십자가를 질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며 셋째는 내세를 묵상하는 것이며 넷째는 기도를 시천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죄 죽임의 방편들이 활발하게 활용되어내는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리는데 기회하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이러한 죄 죽임을 위한 방편들을 소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신자는 자신 안에 내제하고 있는 죄를 죽이지 않고는 그 지배를 벗어나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죄는 무엇을 통해 죽 죽을까요? 신자가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경건해지려고 예를 쓸지라도 사실 자신의 행실을 가지고는 내제하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58:53) 죄를 죽이는 주체는 오직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뿐입니다. 따라서 내지않은 죄를 죽이시는 성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죄를 죽이시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의지를 거스르거나 우리의 순종 없이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의 순종 앞에서 우리의 순종 안에서 우리의 순종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렇게 신자의 죄를 죽이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성령께서 죄를 죽이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진술은 곧 성령께서 신자가 말씀을 깨닫는 것을 사용하셔서 죄를 죽이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말씀을 깨닫는 일 없이는 결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59:51)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죄 죽임을 위한 당을 소리하는 대표적인 경우 내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기 부인이 없음. 첫 번째로 자기 부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평화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사단이나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지한 바와 같이 신자의 가장 큰 대적은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옛차 곧 죄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옛사람의 번성입니다. 우리 안에 남은 옛차 육체의 번성은 우리를 부패한 욕망을 따라 살게 하고 중생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하신 번성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거스르게 합니다.
(1:00:44) 성화의 과정은 바로 이러한 옛사람의 본성은 점점 죽고 새 사람의 본성이 점점 살아나는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였을 때 말한 그 내가 바로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옛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지고 나를 것이니라라고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은 죄를 죽이는 중요한 수단인데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때에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은혜의 소원이 옛자하의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죄의 소원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01:40)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이처럼 죄 죽임을 위한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죄임을 위한 신자의 자기 부인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은 자기 안에 내제하는 경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성의 출론을 절대시하는 경향과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부패한 육체의 욕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 이성으로부터의 자기 부인. 첫째로 이성으로부터의 자기 부인입니다. 지성은 사물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며 이성은 이렇게 얻어진 지식들을 통해 사물관에 있는 원리를 추론하는 능력입니다.
(1:02:37)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고기한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입니다. 인간은이이 이성에이 인간은이 이성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은 상당 부분 원래 기능을 잃어버렸지만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닙니다. 특히 중생한 인간의 이성은 신앙의 조명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사실과 원리를 보다 잘 추론하게 하고 그래서 피조 세계에 깃들린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 구원 다음으로 값진 것은 지성 혹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3:30)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패함이 남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것에 그것의 출론을 절대적으로 신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제쳐두고 신뢰할만큼 완전하지도 않은 이성을 온전히 추종하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신자의 특징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그들 안에 있는 우세한 죄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성의 판단과 추론을 더욱 따르게 합니다. 따라서 참참된 심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부패한 이상의 출론을 부인하고 그 판단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자신의 소욕을 거절해야 합니다.
(1:04:17) 이성의 출론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에는 언제나 자기 이성을 이성의 출론을 꺾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사세가고 행동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신자는 방종한 이성의 항로를 차단하고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으로부터의 자기 부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 부인보다는 자기 성취가 자랑거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 가치는 신자가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 형상은 완전히 거룩한 형상이며 타락하기 전 아담 안에 있던 형상입니다. 또 우리를 거기로 회복시키려는 형상입니다.
(1:05:16) 그러나 신자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는 그 길을 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 2. 부패한 욕망의 제가를 물림. 둘째로 부패한 욕망의 제가를 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골로서 3장 5절. 여기서 땅에 있는 지체란 부패한 욕망을 따라 살려는 육체의 정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후에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렇던 생각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1:06:02)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일서 1장 8절. 아무리 거듭난 신자 심자가 되었어도 그속에 죄된 욕망과 번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죄가 원리적으로는 지배력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죄이 없는 삶 가운데 성령의 은혜의 지배력이 약화될 때에 그 죄의 세력은 실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정욕은 바로 이렇게 죄의 법이 힘을 얻는데 사용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마치 성령의 은혜의 불이 진리를 아는 지식을 연료로 하여 더욱 맹렬이 타오르듯이 죄의 불길은 정욕에 굴복하는 실행를 통하여 더욱 치열하게 타오르도록 힘을 얻습니다.
(1:06:54) 따라서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육로부터 비롯되는 악한 욕망에 굴복하게 되면 결코 죄를 죽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 안에 남은 성의 은혜는 점점 고갈되고 보다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끝없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적과 같은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실 수 없을 것입니다. 욕망은 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더욱더 죄의 노예로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죄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만큼 하나님의 자녀의 번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악한 욕망에 복종하였던 처음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1:07:47)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는 욕망의 종이 되자 그토록 행복해하던 아름다운 지위를 버렸고 하나님의 명령도 무시해버렸고 그것을 어긴 자에게 예고된 무서운 진노의 심판도 비웃고 범죄하였습니다. 악한 욕망이 그들 마음의 보좌를 지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죄를 죽이는 삶은 이처럼 부패한 옛사람의 번성에서 울어나오는 욕망을 부인하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기 부인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자신의 부패한 욕망에 대하여 수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부패한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부 어 부인을 어 말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측면입니다.
(1:08:40)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참된 죄 죽임에이를 수 없습니다.이 이 자기 부인의 적극적인 측면,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이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나 활동에 대한 부인이라면 적극적인 측면은 자기 안에 있는 은혜의 통치를 삶으로 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사랑을 비운 결과로서의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헌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이웃을 사랑함. 첫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을 비움으로써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체에는 반 실천에는 반드시 자기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뒷릅니다.
(1:09:32) 이거 이것은 자기 이것은 이웃 사랑이 부당한 자기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인간에게 있어 자기 사랑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본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신자는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사랑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참여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한 참여에도 불구하고 신자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은 결코 완전 완전히 죽지 않습니다.
(1:10:23) 그리고 그것은 신자 안에 잔존한 죄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부당한 자기 사랑은 타락한 인간을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창조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아니하려는 완고함은 대게 그릇된 자기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됩니다. 왜냐면 궁극적으로 인간이 따르는 모든 가치 질서는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바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사랑에 빠진 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외관상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11:15) 예수님께서 자기의 아비나 아비와 어미를 사랑하는 자가 자신에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런 사랑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이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면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자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자기 사랑의 연장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와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장 5장 6 46절 말씀.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은 이처럼 자기 희생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 자기 사랑을 비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1:12:03)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통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것은 곧 자기 부인에 속합니다. 왜냐면 자기를 사랑하려는 이기적인 경향성을 끊임없이 거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자기 사랑을 비우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희생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죄의 지배는 곧 빛나간 자기 사랑의 지배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함 둘째로 이러한 이웃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이제 독자 여러분에게는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이웃은 그렇게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1:12:49) 우리 주위에는 정말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많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이웃도 많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기 사랑을 비우고 사랑하여야 하는 이웃은 그런 훌륭한 이웃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악한 죄인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사랑을 비우고 사랑하도록 요구하시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의 삶과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 이웃들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의 가치나 사회적인 유용성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두신 하나님의 상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 안에 자신의 상을 두셨습니다.
(1:13:34)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안에 넣어 주신 것이며이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주신 그분 자신의 성품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과 교통하고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으며 인간으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웃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이 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상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1:14:25) 그렇게 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동일한 근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삶 가운데 짓는 죄악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상은 소중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있는 그 상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형상을 품은 모든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있을 때 신자는 이웃이 아무리 커다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이웃의 죄를 향한 미움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15:13) 어떻게 하든지 그에게 진리를 가르쳐서 참된 길을 알려주고 진실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자신처럼 그가 창조의 목적에 부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한 신자들의 이웃 사랑을 곧 그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나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만큼만 사람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참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이런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1:16:10) 그러므로 우리는이 사랑을 펼쳐서 세상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들을 참되신 창조주께 돌이킬 수 있도록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기 부인이 없는 삶에 비참함.이 진리를 대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이 있습니까?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신자들의 특징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자기 부인의 고통보다는 자기 부인을 통하여 죄를 죽이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을 누리는 기쁨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통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깨어짐이 많다는 사실은 그들이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얼마나 자기 사랑을 비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17:05) 신자의 경건한 자기 깨어짐은 자기 부인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자기 부인의 실천이 없거나 매우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의 부인은 곧 죄를 죽이는 것이며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훨씬 더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을 악한 생각임에도 부주의한 나태함으로 그런 생각들이 마음에 신기도록 방치하거나 적극적으로 죄의 유혹을 따름으로써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비참함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통제를 벗어난 이성의 출론을 부인하지 않으므로 자기의 뜻대로 살고 욕망의 종노릇하며 하나님과 그 형상을 가진 이웃을 위하여 사는 대신 더러운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1:18:04)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죄를 죽이는 실천이 없으므로 구속의 목적의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현저히 더럽니다. 아, 이렇게 살아가는 무죄한 신자들이 우리 주에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있는 종의 있는 죄의 능력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냉담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스도의 그 고귀한 구원을 그렇게 멸시하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 창조의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살도록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자유를 주시고 독생자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는데 어떻게 그 큰 구원을 등안히 여기고 다시 죄를 택하며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모두 함께이 복음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1:19:09) 사랑하며 온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우리의 정성을 드리며 살 수 있다는 얼마나 좋을까요? 십자가를지지 않음. 둘째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 특징은 십자가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십자가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고생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하게 된 신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서 경험하신 죽음과 부활과 유사한 모형들을 경험함으로써이 땅에서 자신들을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리에 복종합니다.
(1:19:58)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거룩하게 성숙시키기 위하여 작정하시고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환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지지 않는 것은 죄 죽임을 위한 가장 좋은 은혜 수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 없는 삶이 계속되는 것은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절대적 십자가와 상대적 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의 신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대신 질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는 권난을 구여받지도 않은 예수님께 고유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을 말씀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0:4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치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여기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치고 따르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신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표현하신 그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자가에는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와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는 신자 자신의 죄와 허물과는 관계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을 가리킵니다.
(1:21:37) 둘째로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는 그 이외의 상황에서 당하는 고난을 가리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하여 심리 속에서 당하게 된 시련과 환난이 여기에 속합니다.이 이 신자의 십자가 성안을 위해 사용되는 환난과 고통들 신자의 성화와 관련하여 말할 때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거룩하게 성숙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환난이나 고통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통하여 도래하게 된 부패한 본성이나 이해 이에서 초래된 고통스러운 상황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당해야 당해야 하는 환난이나 고통을 가르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1:22:35)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허물과는 상관없이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당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섭리 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당합니다.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성화를 통해 신자인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가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인가?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인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죄를 죽이고 성화되는 효과를 얻는 것은 십자가의 종류보다도 십자가를 대하는 믿음의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비록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오히려 원망과 불평을 일삼고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죽이고 성화되기는 커녕 죄로 인하여 마음이 굳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1:23:37) 그러나 비록 자기의 죄를 인하여 당하게 된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 죄를 진실로 회개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인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안에 뇌지하는 죄를 죽여 성화되어 가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일의 증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던 순결한 삶을 버리고 한 순간의 정욕으로 인하여 가과 살인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진실로 참여하였으나 그의 범죄한 결과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후일 그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여 울며 황급히 도망가야 했던 고난은 어떤 의미에서도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였습니다.
(1:24:29)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고난을 자신의 십자가로 여기고 믿음으로 인내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하여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다시 빚어가셨고 그는 하나님 앞에 더욱 순결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의 도래를 보여주는 계시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십자가로 받아들여서 은혜의 수단으로 적용하는 삶이 거의 없습니다. 신자의 인내 믿음으로 감당할 때 성화가 촉진된 신자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죄를 죽이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에서 비롯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이는 우리의 부패한 옛자아의 본성은 자기를 깨뜨리는 고통을 잘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25:31) 우리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쉽게 변화되지 않으려 하는 완고함이 너무나 강하게 깃뜨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지시하는 말씀과 자신의 이익이 충돌할 때 말씀을 덮고 자기의 의지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어진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생활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 할지라도 믿음의 인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왜곡해서라도 도피처를 찾거나 현실을 핑계삼아 명백한 진리를 외면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믿음으로 십자가를지고 살아가는 인내함이 없습니다. 신자를 생활시키기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는 잠시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1:26:24) 오래도록 짊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참고 싶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한 인내가 아니며 인내가 필요 없는 고통은 십자가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짐을 통한 성화의 작용이라는 것 자체가 주사를 맡듯이 고난을 주입시켜 충결하게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짐을 통하여 죄를 죽이고 성화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본성적인 변화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4.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함. 성령의 위로로 성전적인 효과를 가져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지고 당하는 고통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계됩니다.
(1:27:24)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인내 가운데 감당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연합을 경험 경험합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고 힘겨워도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비밀을 배우고 하나님의 유로를 경험합니다. 이것을 다소 어려운 표현을 비어 표현하자면 십자가 짐을 통한 성례 전적인 효과라고 합니다. 즉 신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분의 권난을 알게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으심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세례 성찬과 같은 성례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28:24) 신자가 받는 세례는 그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에 참여하는 참여함을 형성화한 것이며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된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교통하게 될 때에 바로 거기서 부활도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현세에서 성화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통을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의 삶 속에 실제되고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부활도 신자의 현세적인 삶 속에서 실제 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거기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배웁니다.
(1:29:14) 그러나 십자가를지지 않으려다가 당하는 권한에는 이러한 성의 전적인 연합과 위로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당한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진다는 것은 신자 자신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고난 자체는 사람을 거룩하고 성화되고 성소하게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안에는 고난을 그렇게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가져다 주시는 효과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십자가를지고 인내할 때에 성령께서는 그 순종을 사용하여 신자의 죄를 죽이십니다.
(1:30:05)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신자는 고통스러운 인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권한에 자신을 투용함으로써 그분과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짐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연합의 경험에 한복판에는 그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있습니다.이는 이는 십자가를 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과정 자체가 죄를 죽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30:57) 고린도서 4장 10절 말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으나이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를 통하여 창조의 목적으로 완벽에 가깝도록 돌아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경험이 없습니다. 내새를 묵상치 않은 셋째로 내새에 대한 묵상이라는 죄임을 위한 은혜 방편을 소홀리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위로의 경험이 일상적이지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목상이 없거나 현실피적인 동기에서 비롯됩니다.
(1:31:48) 그러나 내새에 대한 목상은 죄를 죽이는 가장 훌륭한 방편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이 세상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대한 묵상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이 세상에 대한 부당한 사랑을 죽게 하고 천상의 소망을 불붙칩니다. 신자가 내새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현세의 비참함에 눈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부분의 욕망이 땅의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망은 세상에서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죄만은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먹고 마시고 미래를 준비합니다.
(1:32:38) 오늘 준비하고 내일 내년 후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을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신뢰자의 삶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경건한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붕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시편 17편 14절. 신자가 이렇게 현세에 만족하면 땅의 것을 멸시할 수 없고 하나님께 배음망덕한 삶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이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비참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데 현세에서는 어떠한 신자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1:33:35)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인 적대감인데 어 그것을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께 배음망덕한 삶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과 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가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맛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주시는 축복과 상급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1:34:32)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에게이 세상을 더욱 사랑하라고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더욱 큰 하늘의 복한 축복의 원래 시여자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누리게 될 신령한 복을 미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축복들은 미래에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더 큰 축복의 맛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이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이 땅에서의 축복이 전부인 줄 알고 받은 바 축복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더 사랑하며 산다면이 얼마나 슬프고 무지한 일입니까?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1:35:24) 그들은 네를 묵상함으로써 자신 안의 죄를 죽이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신자가 내세를 묵상하며 살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 중 하나는 죽음을 겁내지 않고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에 쉽게지는 이유 중 하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자기에게 종노릇하게 합니다. 모든 소망을 오직 현세에게 현세에만 두며 살아가는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열렬히 사모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지 않는 신자가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당장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면 어떻게 하렵니까? 아무 두려움 없이 가슴 벅찬 소망과 기쁨의 감격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선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바 떠나서 그리스도 함께
(1:36:30)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소망 가운데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간 신자의 일생은 얼마나 부끄러운 부끄러운 일생일까요? 죄의 지배 아래서 자기만을 위해 먹고 마시고 누릴뿐 제 죽임도 없고 자기 부인도 없이 내세를 묵상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게 세상만을 사랑하며 십자가를 버리고 타령병처럼 살았던 신자들에게 죽음이란 그를 잡으러 온 헌병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안에 불결과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뇌면의 죄와 싸우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들 끊임없이 내세를 묵상하며 현세 아픔을 이기며 충성스럽게 살아간 사람들은 얼마나 큰
(1:37:35) 기쁨으로 그날을 맞이할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이고 그들의 두 눈에서 흐른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넘치는 위로와 영광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채우를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육 위험한 중후 6육 기본적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는 여섯 번째로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죽이기 가장 훌륭한 방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이러한 은혜로운 방편을 부지런히 열렬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이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다루고자 합니다.
(1:38:30) 먼저 제 죽임에서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의 중요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이어서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의 중요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제 죽임에 있어서 기도의 지속적 실천에 중이었어. 첫째로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이의 지속적인 실천이요 실천이 요구됩니다. 기도가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임으로써 그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평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기도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이러한 성화의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의 요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39:17) 전자는 성화에 있어서 신자 안에 있는 죄의 끈질김을 말해 주는 것이고 후자는 죄가 자리잡고 자리잡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해 줍니다. 영적일 영적 어둠과 능력을 공급받은 성화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은 단지 기도에 대한 응답말을 염두해두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은 기도가 실천될 때에 이것이 가지는 영적인 효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도를 실천하는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힘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여 마음을 조명하시며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1:40:08) 이때 신기도의 실천은 곧 그 죄와 맛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인 이해가 증진다 해도 이에 대하여 실제적인 기도의 실천이 없다면 결코 죄를 죽이지 못합니다. 가 말씀을 통하여 죄를 지적받아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고백하고 자기를 심판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서 죄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경험이 죄에 미칠 수 있는 경영 영향은 영향은 겨우 죄를 일시적으로 움추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죄 죽음의 주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자 순종하는 신자의 믿음을 통하여 말씀을 가지고이 일을 하십니다.
(1:40:56)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은 바로이 일을 위하여 신자가 믿음으로 마음을 마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런데이 기도가 신자 안에 내제하는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실천이 지속적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끔 드린 기도는 그 실천이 비록 마음으로부터 우울어나고 또 열렬하다 할지라도 죄 죽임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방편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성령의 역사는 신자가 진지하고 부지런히 기도의 실천에 참여함을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박식하고 경건한 청교도 존 오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죄의 죽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명령인 것은 이러한 기도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죄를 대항할 수 있는 영적인 도움과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1:41:49) 우리는 죄책에 대해 용서받도록 열렬히 기도하기보다는 죄의 세력이 꺾이도록 절대적으로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자가 태하는 사람은 결코 전자의 연일 수 없다.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압력과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지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압력과 고통은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단지 죄에 대해 용서받는 것은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 안에는 죽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적인 안식은 없다. 이것이 기도의 사역이다. 즉 죄 죽임과 성화의 은혜를 구하고 얻어서 죄의 세력이 계멸되고 죄의 힘이 근절되고 죄의 뿌리가 마르고 죄의 생명이 파괴되고 그래서 옛 사람이 총체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 기도의 사역이다.
(1:42:45) 예. 그런데 문제는 실제에 있어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면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이 매우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열심히 기도생활에 힘쓰지 않는 것은 단지 그의 육적인 게으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기도에 힘쓰지 않는 것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는 기도하고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거들감을 경험하고 죄가 자기 안에서 이미 쉽게 이길 수 없는 세력으로 자라 있다는 것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1:43:32) 그러나 죄가 이렇게 신자 안에서 우세하게 된 상황에서 용서의 확신이 주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관심은 용서의 선언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가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회개와 함께 죄의 번성함으로 망가진 마음의을 고치고 무너진 영혼과 내면의 질서를 은혜로 다시 세우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에 적합하도록 죄의 지배 있던 신자를 총체적으로 최신시키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영혼의 최신 안에서 그는 보다 발전된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해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단순히 용서를 선한 것 이상에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1:44:26) 이러한 이치는 신자의 영혼이 경험하는 진정한 안식은 용서의 선언보다는 죄의 죽임을 통하여 획득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실제적인 기도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경건의 욕구는 물론 기도가 필요할 때 즉시 기도를 실천할 수 있는 순발력도 함께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상태에서도 간절한 기도가 간헐적으로 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양심의 강한 가책이나 고통이 엄습할 때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에도 이따금씩 기도가 되게 하시는 것은 신자를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1:45:18) 죄가 우세하여진 상황에서도 신자로 하여금 낭망치 않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죄 죽임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시려는 은혜입니다. 지배 아래 있을 때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런 기회들을 무지 때문에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혹은 영적인 일에 대한 헌신을 강해하는 죄의 힘 때문에 지속적으로 기도를 실천하는 전환점으로 활용하지 못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의 실천의 경험은 그것이 비록 강렬할지라도 죄에지고 있는 어 영적인 상황을 일시 개선하지는 못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회개하는 죄는 그렇게 한두 번의 기도의 실천으로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6:13) 죄 죽임에 있어서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이 때문입니다.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 성실함으로 꾸준히 실천에 지속적으로 힘쓸 일 없이는 결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이 마음의 거룩한 틀을 유지함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을 얻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성화 이치를 깊이 살펴보면 기도의 실천 속에는 우리의 영혼과 몸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람직한 자세로 기도의 의무에 힘쓰는 것은 죄가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틀에 영혼을 보존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1:47:19) 기도를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는 것입니다. 칼빈은 자신의 기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진지하고도 열렬한 소원으로 우리의 마음이 항상 불타오르게 해준다. 또한 어떤 상황에 찾아오든지 하나님을 자신의 영혼의 거룩한 덫으로 여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습관을 갖게 해준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욕망이나 바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또한 우리의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는 방법을 배우고 그렇게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놓는 법을 배우게 해준다.
(1:48:20)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도하신 바는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와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의전과 순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성화를 위한 효능 있는 방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실천이 지속적이 지속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무너진 마음의 틀을 다시 세우시고 영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를 죽여서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은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1:49:17)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자일수록 많은 기도의 짐을지고 살게 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한 번의 열렬한 기도를 하게 하시는게 아니라 수많은 날 동안 그 기도를 가시도친 십자가처럼 아프게 짊어지고 기도하게 하신 후에야 응답을 주시고 응답이 끝나면 또 다른 기도 제목을 주셔서 가슴이 저리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은 죄를 죽이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신자는 거룩해지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아 예 예
(1:50:22) 아 B 죄 죽임에 있어서 마음으로부터의 기도의 중요성로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이 신자 안에 내지않는 죄를 죽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해야 합니다. 1.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진실하기도는 반드시 마음의 적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죄가 영혼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은혜로운 틀을 형성하십니다. 또한 동일한 작용으로서 이미 무세하게 된 죄의 세력들을 파괴하십니다.이 일은 성령께서 홀로하지 아니하시고 마음을 바쳐 기도하는 신자에 순종하는 믿음의 실천을 통하여 행하십니다.
(1:51:14) 기도가 제 죽임을 위한 효용을 가지고 있다.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자의 마음으로부터 오르나는 것이 한다는 사실 조에 또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현실적으로 저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는 마음깊은 곳에서 기도가 쏟아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음의 틀과 영혼의 상태가 기도하는 영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게끔 변해입니다. 지배하는 동안에서 서희 그런가 일어난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기도를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가 은혜의 집배 아래에 있을 때입니다. 신재가 은혜의 집배 아래 있을 때에는 마음에 있는 기도가 마치 원촌을 천공 천공할 때 그 물이 하늘 높이 솟구쳐 품어지는 것과 같이 쏟아집니다.
(1:52:05) 그래서 열렬한 기도가 되고 긴 시간을 기도에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 기도가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의 집에 아래 있을 때에는 마치물을 파고파 하고자 아무리 길게 두리박을 내려도 그물에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 대신 바닥에 붙이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기도를 길 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 있는 신자들의 기도는 되게 마음에 쏟아짐 없이 주원 보안하는 힘겨운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신자가 어떠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지간에 마음에 울어나오는 기도는이 기도는 울어나오는 기도 이후에는 죄를 줄이는 효능을 다해할 수 없습니다. 예. 다음 읽어 주십시오.
(1:52:59)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의 기도 생활은 내게 마음의 속으로 나오는 진실한 기도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기도를 통하여 죄임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길어 올려올리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마음 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 진실한 기도만이 무너진 은혜의 흐트를 마음에 다시 형성합니다. 그리고 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그 지배력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반드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해지려고 있으는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를 올리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의무적으로 행하는 간헐적인 기도는 영혼의 어떠한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1:53:46) 못하지만 마음은 곳에서 우어나오는 기도의 실체는 전 영혼에 거룩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의 경험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까지는 내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내 안에 오셔서 자신이 하고 싶으신 기도를 나를 통하여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이 모든 특별한 기도의 경험은 항상 마음으로부터 오어나오는 기도의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신자가 형식적으로 의무감에 얽매어서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는 그런 강한 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가 그렇게 마음으로 오어나오는 기도를 실천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죄를 죽이는 효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54:35) 더욱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마음에서 오나오는 기도를 실천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특별히 형식적인 기도가 일상하는 것을 깊이 뉘우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기를 힘써야 할 것임합니다. 처음에는 그 실천이 힘겹지만 그러 실천만이 내 영혼과 마음의 성태를 열렬하고 마음을 드리는 기도에 맞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거의 없는 바 우물에 두래박을 던져 싹 물을 뒤로 올리는 것처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보다 깊고 열렬한 기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새벽 기도에 성실하게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매우 심각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55:29) 그들이 드리는 기도의 실천이 지속적이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죄에지고 있는 상태를 바꿔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한 교회의 신자들이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면하지 못한다면 마귀는 온 교회당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신자들로 가득친다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죄 아래 있는 신자의 기도의 의무적인 실천은 대부분 마음으로부터 오어나오는 기도의 실천이 아닙니다.이 이 죄에대 죄에 대한 영혼의 직접적인 투제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기도만이 죄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만이 제 죽임의 효능을 발휘하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은혜로 쇠신시킬 수 있습니다.
(1:56:33) 신자가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반복해서 길어 올리고 그 기도가 열렬하고 간절해지기 시작할 때 거기서 다음 세 가지 놀라운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첫째로 신자의 마음이 죄를 죄를 죄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그가 마음으로 사랑하던 죄는 그의 마음과 하나된 주관화된 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를 반복하며 그 기도가 열렬해지게 되면 그의 마음과 죄 사이에 분리가 분리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껏 자기와 하나되었던 죄를 객관적인 죄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사랑하던 죄를 자신의 영혼의 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1:57:33) 또한 그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둘째로 영원히 객관화 객관화된 죄와 실제적으로 맞어 싸우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는데 지속 지적으로는 죄를 죄로서 정확하게 정확히 인식하게 되고 정서적으로는 그것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며 의지적으로는 그것을 죽이기를 힘쓰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역사하였던 지성과 정서와 의지의 활동이 정반대로 작용하면서 죄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기도가 진실하고 열렬할 수 열렬할수록 새와 맛부터 싸우는 방식이 더 맹렬해집니다. 셋째로 이렇게 될 때에 성령께서는 비로소 죄를 죽이기 시작하시며 그토록 끈질기던 죄는 죽기 시작합니다.
(1:58:39)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실천의 반복을 통하는 통 통하여 죄는 급속히 신자 안에서 세력 기반을 잃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파괴시킬 수 없을 것 같았던 죄의 세력들이 교멸되는 것을 경험하고 죄의 우세한 힘이 파괴되는 것만큼 다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진 역사. 이처럼 신자 안에 내지않는 죄는 지속적이며 마음으로부터 오나오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실제적인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어떻게 해야든지 신자가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1:59:39) 총교도 좋인이 지적한 것과 같이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입니다. 신자 안에 내지않은 죄가 모든 기도의 실천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마치 모든 기도의 실천이 죄를 죽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기도가 자신과 직접 앞부터 싸우고 싸우 싸우려고 하지 않는 한 그 실천을 방해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죄는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있을 때에만 강력하게 한거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항상 죄의 공 기도를 향한 죄의 공격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기도하되 마음으로부터 울어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도록 공격하는 것입니다.
(2:00:31) 죄가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를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신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무의 식정을 느끼게함으로써 성취합니다. 그리고 죄가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육체의 게으음과 손잡 손잡음으로서 성취합니다. 영혼의 실증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의무에 대하여 느끼는 영혼의 권태감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영혼이 그런 권태감에 빠지게 되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기도를 실천하는 일이 매우 힘들게 느껴지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기도하고자 하는 갈망이 어느 정도 있다 할지라도 육체가 개운을 빠져 있으면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2:01:16) 그러면 신자 안에 있는 죄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기도를 죽이는 걸까요? 신자 안에 내제하는 죄가 기도를 죽이는 과정은 크게네 단계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심적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들 제 1단계 기도에 준비되지 못함 첫 번째 단계는 죄가 신자로 하여금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을 때에 가장 뚜렷한 영적인 특징 중 하나는 언제든지 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와 은혜를 잘 인식할 수 있도록 정돈되어 있으며 영혼의 상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에 답하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2:02:14) 따라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제하는 죄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기도 실천의 순발력이 천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비록 두렷하고 커다한 범죄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죄 죽임을 실천하는 일에 게으르고 마음의 정욕에 순종하여 죄가 세력을 얻기 시작하면 신자는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민첩하게 기도에 몰입할 수 없게 됩니다. 내제하는 죄의 활동으로 인하여 마음이 영적인 순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신자가 기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는 것은 평소에 그의 마음과 온 영혼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3:03) 마음으로부터 어 울어나오는 열렬한 기도를 일상적으로 하려면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고정된 가운데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영혼이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의 온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기를 힘며 거룩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고 기도를 능가하는 삶도 없습니다. 신자 안에 있는 어 은혜가 약화되고 죄가 활동을 시작하면 신자는 이러한 순발력을 급속히 성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영혼은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에 실증을 느끼게 되고 여기에 육체의 게으음까지 가세하게 되면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 되어도 어 더욱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2:03:56) 처음에는 기도하기 싫어서 기도하지 않는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할 수 없어서 기도하지 않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이 이 제2단계 기도의 실천을 꺼려함. 두 번째 단계는 신자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꺼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안에서 뇌제하는 죄가 우세한 힘을 얻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가 신자 안에 있는 기도하고자 하는 영적인 욕구에 죄의 욕구가 죄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 상태라면 신자가 스스로 기도하기를 꺼려하는 두 번째 단계는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죄에 의하여 엎눌려진 상태입니다. 신자의 영혼 안에서 죄가 이미 우세한 힘을 획득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2:04:57)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마음과 영혼의 성향이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적합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는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간직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령한 욕구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또 더 많이 사랑받고자 하는 실제적인 연합의 요구입니다. 이때 영혼은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마음은 그것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고 육체는 그러한 욕 욕구를 수정들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 안에서 활동하던 죄가 힘을 얻게 되면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체 사이에 존재하던 기도의 실천을 위한 일치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2:05:48) 영혼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마음은 기도와 같은 신령한 일에 매달리기에는 착합하지 않는 틀로 변하고 육체는 신령한 의무를 수종들기보다는 육적인 욕구에 굴복하기에 적합하게 됩니다. 결국 신자는 기도하기를 꺼려하게 됩니다. 이때 신자가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기도에 대한 의무감이고 또 하나는 기도 실천의 습관입니다. 신자가 비록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기도에 대하여 강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면 영혼은 기도하기를 꺼려도 기도하고자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히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진지함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습관이 몸에 베어 있으면 영혼히 기도하기를 꺼린다고 해서 기도의 실천을 당장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2:06:54) 병건에 있어서 의무감과 습관은 영혼의 영혼의 은혜와 열렬함을 보존하는 단단한 껍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자 안에 뇌제하는 죄가 힘을 얻어 신자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꺼려하게 만들 때 이러한 의무감과 습관만으로는 그러한 영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형식의 껍질을 활용함으로써 무너져 가는 기도의 세계를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데 의가 있는 것입니다. 제 3. 제 3단계 기도의 능력을 상실함. 세 번째 단계는 기도의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지하는 죄에 있어서 기도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천적과 같습니다. 기도의 은혜와 죄의 번성 사이에는 어떠한 화해와 일치도 없습니다.
(2:07:56) 오직 치연한 적대감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맹렬한 적대감 속에서 기도의 은혜와 죄의 본성은 우리의 마음을 서로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렬한 싸움은 궁극적으로 우리 영혼 안에 각각 우세한 힘을 얻어져 합니다. 신자가 기도를 꺼리게 만든 죄의 역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신자 안에 있는 은혜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기도의 능력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세한 힘을 얻 얻은 죄가 신자의 영원한 안에 있는 기도할 수 있는 잠재적인 영적인 힘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죽이는 것의 역사가 이렇게 발전한 가운데서도 신자는 여전히 기도를 실천할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2:08:49) 그가이 단계까지 오게 되면 그는 다른 때 없이 기도하고 있지만 이미 교회의 능력을 상실한 채 기도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겉으로는 변함 없이 기도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의 기도의 세계는 죄의한 공격으로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고 죄와 직접부터 싸우는 영적인 경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이 이 단계에서는 축적으로 기도를 시켜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 속에서 우세한 힘을 얻게 된 주의 세력을 통제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를 실천할 때 성령께서 자신과 함께하며 역사하고 계시는 다른 경험들이 말라버린 가운데 증언부원하게 됩니다.
(2:09:41)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기도가 힘들어지고 기도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이행하 있어서 예전보다 더욱 힘이 드는 것이 느껴지게 됩니다. 마음을 바쳐서 기도하는 일이 매우 힘들게 되고 할 강고할 제목은 있어도 머릿속에 있는 내용이 기도의 내용이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간절함에 불타게 하는 작용을 멈추게 됩니다. 때 신자는 기도 시간을 마음으로 쏟는 기도 대신 머릿속을 오가는 공상이나 졸음으로 허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있으나 실제로 기도의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 4. 제 4단계 기도의 의무를 무시함.네 네 번째 단계는 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2:10:29) 기도를 죽이는 죄의 그 전진적인 역사는 신자 안에 있는 기도의 능력을 파괴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는 신자로 하여금 다시 기도의 능력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이미 죄에지고 있는 신자의 지성을 설득하여 기도의 현혹을 얕잡아 보게 하고 그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만듭니다.이 이 단계에서는 어 신자는 영적인 세신의 작용 없이 계속하던 의무적인 기도의 실천마저리게 됩니다. 죄가 신자의 영혼 안에서 기도의 능력이라는 알맹이를 편질시키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보호하던 껍질까지 완전히 부서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의무를 어 무시하라. 무시라고 할 때에 어 그것은 결코 예배 중에 있는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식사 기도의 습관을 버린다거나 신앙적인 모임에서 부과되는 기도 같은 것을 거절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11:31)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진적인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기도의 의무를 무시한다는 것은 죄를 죽이고 영적인 은혜를 강화하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의 의무에 대한 무시를 두고 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의무조차도 버리게 되면 그것은 곧 전투에서 적군에게 항복하였을뿐 아니라 무기까지 완전히 빼앗힌 상황입니다. 이제 그는 자기 안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힘을 얻은 죄의 지배력에 한거할 수단을 빼앗긴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개인적인 기도 실천의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데 성공한 죄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신자로 하여금 기도의 의무를 경멸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역사하기도 합니다.
(2:12:20) 죄가 거기까지 성공을 거두면 신자는 단지 기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의무 자체를 경멸함으로서 자신을 비 영적인 틀에 가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영적인 갈급함이나 열매없이 살아가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 만족하도록 길들려지게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거기로 걸어들어간 결과입니다. 영적인 어둠과 지적인 눈 속에서 죄임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온 결과입니다. 은혜 언약은 신자가이 세상에서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의 공급을 무제한으로 약속하고 있지만 신자의 의지를 초월해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증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2:13:17) 신자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성화를 위한 역사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이러한 신령한 능력의 공급을 통하여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얻어 보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허는 일에 하수인처럼 살아가는 그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그는 일생 동안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린 채 요동치는 물결과 같이 정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2:14:17)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을 일평생 두려워하며 그 위에 떨고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죄가 던져주는 육체의 쾌락을 위로로 삼으며 어둠 속에서 아끼는 자 없이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 스스로 영혼의에 여러분의 영혼의 상처를 정직히 판단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은혜의 집배 아래 있습니까? 혹은 죄의 집배 아래 있습니까?
아멘.
한 눈에 보는 10장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
I. 위험한 징후 1: 특정한 죄가 상상력을 지배하여 사고 기능에 간여함.
A 상상을 통한 죄의 발전
1. 상상을 통한 범죄를 택하는 이유.
-상상력을 통하여 죄를 짓는 것은 물리적인 희생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임
-상상력을 통한 범죄는 실제로 죄를 실행하는 것에 비하여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 되기 때문임
2.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의 생각의 범죄와의 차이점
a. 사고 기능에 대한 간여가 지속적임
b. 마음으로 범의를 받아들임
B. 상상의 죄가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악들
1. 교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 높임으로 신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
2. 육욕: 음란함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나며 음란함은 신자의 내면 세계를 가장 빠르고 쉽게 더럽힘
3. 불신앙: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악한 고집이며 불신앙의 상상들이 반복되면 마음이 굳어지고 정서가 불신앙에 맞게 변함
4. 미움: 미움은 신자의 생각을 지배하고 사고 작용에 광범위하게 간여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미움이 배도록 만듦.
II. 위험한 증후2: 특정한 욕망이 정서를 지배함.
A 정서가 죄의 지배를 갖는 상황.
-죄가 정서를 지배하게 되면 지성의 통제를 벗어나 느끼는 대로 인생을 항해해 감.
-마음에 품은 죄가 산출되지 않았어도 죄에 대한 소원이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면 죄의 지배 안에 있는 것임.
B. 죄에 강력하게 이끌릴 때의 처방
1.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깨달음
2. 죄의 세력의 약화를 위해 기도함
3. 은혜의 수단에 부지런히 참여함.
III. 위험한 증후 3: 파악된 죄인인데도 사랑을 버리지 못함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자기 행위가 죄 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쉽게 버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죄를 죄로 파악했음에도 그것을 사랑하기에 버리지 못함
-그에게는 죄에 대한 친화성이 은혜에 대한 갈망보다 크기 때문임
-죄를 확신하더라도 자만심이나 죄로 말미암은 기쁨 때문에 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죄의 집에 아래 있음을 입증함.
IV. 위험한 징후 4: 마음이 심각하게 굳어짐.
A 총체적인 굳어짐
-자연적인 굳어짐: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 있는 상태.
-심판적인 굳어짐: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기에 그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내버려 두시는 것.
B 부분적인 굳어짐.
1.마음의 굳어짐의 원인
a. 굳어짐의 원인: 타고난 부패성 때문에 은혜 안에 살지 않기 때문임.
b. 실제적인 원인: 범죄하기 때문이며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임.
2.굳어진 마음의 증거들.
a 말씀을 통하여 영향을 받으려 하지 않음.
b 죄책의 인식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음
c 다른 사람의 죄를 아파하지 않음
d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함
V. 위험한 중후 5: 죄 죽임을 위한 방편들을 소홀히 함.
A 자기 부인이 없음.
1.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
a 이성으로부터의 자기 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려는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부인하고 그 판단을 따라 살려 하는 소욕을 거절해야 함.
b 부패한 욕망에 재갈을 물림: 부패한 옛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욕망을 부인하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아야 함.
2. 자기 부인의 적극적인 측면
a 이웃을 사랑함: 자기 사랑을 비움으로써 가능함
b 하나님께 헌신함: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공유함
3.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의 비참함
B 십자가를 지지 않음
1.절대적인 십자가와 상대적 십자가
2.신자의 십자가 성화를 위해 사용되는 환난과 고통들
3.신자의 인내: 믿음으로 감당할 때 성화가 촉진됨
4.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 성령의 위로로 성제적 효과를 가져옴
C.내세를 묵상하지 않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묵상이 없거나 있어도 현실도피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
-내세를 묵상하지 않는 것은 현세의 비참에 눈뜨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는 대부분의 욕망이 땅의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임.
-이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소망 가운데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없음.
VI. 위험한 징후 6: 특히,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음.
A 죄 죽임에 있어서 기도의 지속적 실천에 중요성
1. 지속적인 기도로 영적 도움과 능력을 공급받음.
2.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으로 마음에 거룩한 틀을 유지함.
B. 죄 죽임에 있어서 마음으로부터 기도의 중요성.
1.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기도가 죄 죽음의 효능을 가지려면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함.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은 마음의 틀과 영혼의 상태가 영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쏟아지지 않음
2. 죄에 대한 영혼의 직접적인 투쟁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길어올리면, 첫째로 신자의 마음이 죄를 죄로 인식함
-둘째로 영혼이 객관화된 죄와 실제적으로 맞붙어 싸우기 시작함.
-셋째로 이렇게 될 때 성령께서는 비로소 죄를 죽이기 시작함.
C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진적인 역사
1. 제1단계: 즉각적으로 기도하도록 준비되지 못함.
2. 제 2단계: 기도하기를 꺼려함.
3. 제 3단계: 기도의 능력을 상실함.
4. 제 4단계: 기도의 의무를 무시함.
스터디
제10장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
첫번째공부
1. 상상을 통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70-171)
2.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생각을 통해 범죄하는 것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상상을 통해 죄를 짓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171-172)
3. 죄악된 상상력이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관여함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대표적인 악은 무엇입니까? 각각의 주요내용과 특징을 말해 보십시오.(173-177)
4. 죄가 신자의 정서를 지배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180-181)
5.죄가 신자를 강력하게 끌고 가려고 할 때, 신자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각각의 주요 내용과 특징을 말해 보십시오.(182-186)
6. 말씀의 빛으로 죄를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악된 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86-187)
7.부분적인 굳어짐이란 무엇이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189- 191)
8. 부분적인 굳어짐의 실제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191-193)
9.마음이 굳어진 증거는 무엇입니까? 각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느낀 점을 나누어 보십시오.(194-196)
두번째공부
10. 죄 죽임을 위한 방편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신자가 자신의 행실로는 죄를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97-198)
11.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은 무엇입니까? 각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십시오.(200-204)
12. 자기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것이 자기 부인에 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6-207)
13.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이웃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보시는 이유는무엇 입니까? 인간들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십시오.(208)
14.신자의 성화와 관련하여 말할 때,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211)
15. 성화를 위해 주어지는 십자가를 질 때, 반드시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13)
16. 믿음으로 인내 가운데 십자가를 질 때, 성례전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는것의 의미는무엇입니까?(213-314 )
17.내세에 대한 묵상이 주는 효과는 무엇이며, 신자가 내세를 묵상하지 않는 이유는무엇입니까?(215-216)
세번째 공부
18.죄 죽임에 있어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19)
19.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다릅니까?(221)
20. 아무리 기도가 열렬하다 할지라도 간헐적인 기도로는 죄를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22)
21.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223)
22 신자가 마음으로부터 반복해서 기도를 길어올릴 때 일어나는 세 가지 작용은 무엇입니까?(226-227)
23.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진적인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자신의 기도 생활은 어떠한지 돌아보십시오.(229-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