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1(오후)

2026 새롭게하는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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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Philippians 2:5–6 NKRV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말씀

서론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대한민국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갈등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일명 ‘택배기사들과 입주민 사이의 갈등 이죠
지상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민 아파트 주민들이, 아이들의 안전과 쾌적한 환경을 지키겠다며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전면 통제해 버린 일입니다.
지하 주차장으로는 높이가 낮아 택배 차가 들어갈 수 없으니, 결국 배달 노동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백 미터 거리를 무거운 수레를 끌고 걸어서 배송을 해야만 했습니다.
갈등이 극에 달해 쓰러지는 노동자들이 속출하고 사회적 비판이 쏟아졌지만, 입주민들의 주장은 단호했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피땀 흘려 산 우리의 사유 재산이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와 우리의 쾌적한 공간을 지키는 것이 왜 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씁쓸한 현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같아요.
나의 쾌적함을 위해 나의 '공간'을 철저히 사수하라고 말입니다.
내 자리를 지키고 나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남의 땀방울이나 눈물쯤은 애써 외면하는 적당한 타협이 지혜로운 처세술로 포장됩니다.
손해 보지 않고 내 공간을 넓혀가는 사람을 세상은 '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절대적인 법칙은 바로 '내 공간의 채움'과 '내 유익을 위한 타협'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깊은 한가운데를 지나는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의 법칙과 정확히 정반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 공간의 울타리를 높이고 꽉 채우라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 울타리를 부수고 철저히 비워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내 편리와 유익을 위해 적당히 눈감고 타협하라 하지만, 십자가는 내 살을 찍어내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단호하게 순종하라'고 명합니다.
나의 쾌적한 공간을 걷어차고 남을 위해 스스로 고통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것.
세상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이 십자가의 역설.
나를 완전히 비워내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이 처절한 길이,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능력이 되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공간의 포기’, 곧 ‘자기 비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어떤 의미 였을까.. 사순절을 지나는 이 기간 곰곰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사들에게는 단순히 골고다 언덕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 그저 2000년전 예수라는 사람이 로마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을 버리다 처형당한 사건인 것 으로 여겨질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 십자가를 믿는 우리들 성도들에게는 십자가는 단순한 사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공간’과 ‘권리’를 철저히 포기하신, 우주적 차원의 위대한 '자기 비움'의 사건이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6절과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기가 막힌 역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Philippians 2:6–7 NKRV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르페(μορφή)’ 즉,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신적 본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말은 온 우주가 그분의 것이며, 온 우주가 영광과 찬양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야 된다는 뜻 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결코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도 자주 그렇잖아요
권력을 쥐면 더 큰 권력을, 재물을 쥐면 더 큰 재물을 가지고 싶고, 가져야만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영광의 보좌, 온 우주의 통치자라는 그 엄청난 자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의 말씀처럼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를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릅니다.
이 비움은 단순히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자격 없는 피조물들을 위해 피조물의 자리로, 자기를 모두 비우시고 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은 이미 세상에 충만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이 거대한 시공간 어쩌면 그 위의 개념을 성삼위 하나님 홀로 누리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자를, 피조물들을 허락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공간을 쪼개어 피조물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교만하여 타락했고, 창조주의 자리를 탐하며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의 기준에서 보면, 인간의 끝은 완전한 파멸과 단절, 영원한 멸망이어야 마땅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마음만 먹으면 이 실패한 세상을 지워버리시고 새롭게 다시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훨씬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 아니겠습니까? 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굳이 배신한 피조물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만드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 한마디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다시 생길 것이고, 광명체가 생기라 하시면 광명체가 생길텐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길을 택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그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 죽음을 향하여, 철저한 파멸을 향하여 스스로 발걸음을 떼셨습니다.
죽으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 오직 악한 피조물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라는 고통과 죽음의 공간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 천성의 자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포기하시고 내려오셔서 이 작고 작은 나를 위해 죄악으로 물든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때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공간’에 집착하는 사회 아닙니까?
누구나 가지기를 열망하는 최고의 재산 목록 1호, 뭡니까?
언제나 땅이고 집입니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세상의 진리 처럼 통용되겠습니까?
그 공간이 진짜 누구의 것인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헛소리 입니다. 악한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나의 공간’을 찾고 넓히려고 합니다.
내가 누울 곳, 내가 인정받는 자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구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때로는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 짓밟기까지 합니다.
내 자존심의 공간, 내 물질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진짜 우리의 자리 입니까?
세상의 모든 공간 아니 조금이라도 더 공간을 가지겠다고 아둥 바둥 하는 것이 진짜 우리의 자리 이냐고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주의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공간을 아니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모든 공간의 특권을 포기하고 가장 냄새나고 비천한 말구유로, 그리고 끝내는 예루살렘 성문 밖 저주받은 십자가의 형틀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내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거할 곳을 마련해 주시려고, 자신의 모든 공간을 비워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부름 받았습니까? 청지기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것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세상에서 나의 것을 찾으십니까? 왜 세상에서 나의 공간을 찾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십자가의 은혜 앞에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끝까지 쥐고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러분만의 '공간'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나를 위해 하늘 보좌마저 비우셨는데, 나는 여전히 내 체면, 내 고집이라는 좁디좁은 공간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내 공간을 넓히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은 나의 권리와 공간을 비워내는 '케노시스'의 길입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선택하시고 자신의 공간을 포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압도적인 사랑 앞에,
오늘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과 공간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내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지 2: 예수님의 십자가는 말씀 성취를 향한 '타협 없는 순종(단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지나며 기억해야하는 것 그 두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말씀 성취를 향한 ‘타협 없는 순종’, 곧 끔찍한 ‘단절’을 감수한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앞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간과 권리를 포기하신 '자기 비움(케노시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움의 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8 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Philippians 2:8 NKRV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 하셨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복종입니까?
예수님의 복종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위한 복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피 값으로 사신 그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이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모든 순종의 끝이 파멸이면 여러분 아멘 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 극단적으로 가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게 나의 지옥행이 결정 된다면 여러분 아멘으로 받으 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겠죠! 온 마음과 온 영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완전한 파멸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그 무거운 말씀이 성취되는 그 현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육체적 고통 만을 내포한 사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영원 전부터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던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
그 단절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 입니다.
예수님은 그 끔찍한 단절과 파멸이 기다리는 십자가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길이라면 타협 없이 순종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말씀을 떠올릅니다.
Mark 9:43–47 NKRV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없음)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애써 외면하거나 가벼운 비유로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듣기 거북하죠.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아내라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왜 이토록 극단적이고 무서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두 손과 두 발을 멀쩡히 가지고 사는 그 끝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인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삶의 썩어가는 부분을 도려내는 피 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자가를 위로의 상징, 나를 천국에 보내주는 편리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려고는 합니다.
그러나 진짜 십자가의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협 없는 순종의 표적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과 발을 찍어버리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본인의 양손과 양발을 십자가의 굵은 쇠못에 내어주셨슴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도려내기 위해, 창조주이신 그분이 친히 자신의 온몸을 찢으시고 성부 하나님과 단절되는 그 무서운 심판의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공간을 포기하신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찍어내고 도려내어 죽음의 공간에 던지신 그 십자가의 순종이 있었기에,
오늘 두 손과 두 발이 다 범죄로 얼룩진 우리가 꺼지지 않는 불을 피하여 영생의 소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면서도,
정작 내 손에 쥔 작은 이익 하나, 내 발이 향하는 은밀한 쾌락 하나, 내 눈이 즐기는 죄의 습관 하나를 찍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두 손과 두 발을 다 움켜쥔 채로 십자가의 은혜만 누리려 합니다.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
내 손과 발을 찍어내는 듯한 아픔과 손해가 따르더라도 오늘 당장 단호하게 도려내야 할 타협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끊어내야 할 죄악된 관계, 포기해야 할 부정한 이익, 내려놓아야 할 거짓된 자아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는 사형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마저 감수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듯이,
우리 역시 나의 유익을 구하는 죄악과 단호히 단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최우선이 되는 타협 없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안의 죄악을 도려내는 이 아픈 순종이, 결국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짜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이 비이성적인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성을 향해 걷는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우리는 내 안의 죄악을 도려내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철저한 단절과 순종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범죄하는 손과 발을 찍어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과연 내가 저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무섭고도 처절한 순종의 길걸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동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에서 나오는게 아니에요
우리의 공포로 여기 까지 오지 않았잖아요.
이 길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이곳에서 마주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향해 부어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사랑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들 이런 질문을 주고받곤 합니다.
"천국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 앞에 서면 누구나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맞는가?'를 깊이 성찰하게 되죠.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복된 백성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힘과 내 의지로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로 인해 감히 쳐다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었던 하나님 나라 천국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과 십자가의 구원하심을 통해서 이제는 당당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자원을 누리며 살아가는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천국 갈 확신'이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님을 기억 또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누리는 이 구원의 감격 뒤에,
나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
영광스러운 자신의 공간을 포기한 자기 비움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뭐 이런 신이 다 있단 말입니까?
신은 절대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자입니다.
만약 피조물이 배신하고 타락했다면, 그래서 이토록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이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고 새로운 인류를 다시 만드시는 편이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긍휼 때문에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타락하고 악한 피조물인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라는 지시로 친히 고통당하시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나를 위해 모든 이성과 계산을 뛰어넘는 이 바보 같은 사랑, 비이성적인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
이것 말고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이 엄청난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이 변화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진짜로 경험한 천국 백성은 더 이상 이 땅에서 '나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내가 영원히 거할 찬란한 공간이 이미 예수님의 피 값으로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때 이웃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사랑하사 자리를 내어주시고 고통받으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나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그들을 돌보며 자리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랑에 빚진 자 된 우리는 이제 내 유익을 구하는 죄악된 손과 발을 찍어내는 순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자에게,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하늘 보좌마저 버리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서,
내가 버리지 못할 아집이 어디 있으며 끊어내지 못할 죄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억지로 지는 짐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된 우리가 주님을 향해 올려드리는 가장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자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를 향한 이 위대한 십자가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겨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창조주의 그 비이성적인 사랑을 정말로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게 하기 위해 내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 가족을 위해, 내 직장 동료를 위해, 우리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내가 비워내야 할 나의 '공간''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십자가의 철저한 단절과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천국 갈 확신을 선물해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기꺼이 좁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맺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공간을 비워낸 '위대한 포기'이자, 하나님과의 처절한 단절마저 감수한 '타협 없는 순종'이었습니다.
창조주의 그 비이성적이고 압도적인 사랑 덕분에, 죽어 마땅한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세상에서 나의 공간을 움켜쥐려는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내 안의 죄악을 단호히 도려내는 참된 순종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나를 철저히 비워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우는 거룩한 천국 시민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살리시려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비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고통과 단절을 감수하신 그 압도적인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회개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그 모든 공간을 포기하셨건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나의 공간을 넓히고 나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만 누리려 할 뿐, 내 삶의 썩어가는 죄악들을 도려내는 일에는 두려워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이 십자가의 은혜 앞에 우리의 삶을 결단합니다.
나를 천국 백성 삼으시려고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으신 그 비이성적인 사랑을 기억하며, 이제는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범죄하는 손과 발을 찍어내는 듯한 아픔이 따르더라도, 내 안의 죄악을 단호히 끊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타협 없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영광스러운 천국 시민권을 가슴에 품고, 이제는 나를 비워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주님의 뜻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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