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01 청년교회

청년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7 views
Notes
Transcript
Matthew 19:1–12 NKRV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시험하여'라는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하여' 질문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결혼과 이혼에 대한 질문이 예수님에게 '시험'이 되었을까요? 단순한 신학 토론 정도 아니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편 유대 지경으로 이동하십니다. 이곳은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영역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형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적인 결혼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불법적인 결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고, 세례 요한은 그 비판 때문에 목이 베여 순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헤롯의 영토에서, 예수님에게 이혼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혼을 반대한다고 말씀하시면, 헤롯의 이혼과 재혼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셈이 되고, 세례 요한처럼 정치적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혼을 허용한다고 말씀하시면, 모세의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보여 종교적 권위가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혼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있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신명기 24장의 '수치되는 일'을 간음과 같은 심각한 도덕적 문제로 제한하여 해석했고, 힐렐 학파는 이를 매우 넓게 해석하여 아내가 음식을 태우거나,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이유로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속 '어떤 이유가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논쟁을 반영한 것입니다. 어느 편을 들든 다른 한쪽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함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함정에 빠지시지 않습니다. 어느 학파의 편에 서시지도, 정치적 발언을 하시지도 않습니다. 대신 질문 자체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십니다. '이혼이 허용되느냐?'라는 질문에 '결혼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냐?'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창세기,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찾으십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통해 세 가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설계하신 관계의 원래 목적은 무엇인가. 둘째, 모세의 이혼 허용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이 말씀이 결혼을 넘어 우리의 모든 관계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설계하신 관계 —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창세기로 돌아가십니다. 4절과 5절에서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이혼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해 '이혼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로 답하신 것이 아니라, '결혼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의 전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언제 관계를 끊을 수 있느냐?'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관계가 왜 시작되었느냐?'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한 몸'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바사르 에하드'인데,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을 넘어서 존재 전체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이 각각 독립된 존재로 살다가 만나서, 서로의 삶을 내어주고, 하나의 새로운 단위를 이루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주석은 이 표현이 단순한 성적 결합이 아니라 '전인격적 결합, 삶 전체의 나눔'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 예수님은 결정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헬라어 '쉬네쥬겐'은 '멍에를 함께 메다'라는 뜻입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 두 마리의 소가 하나의 멍에 아래 함께 밭을 가는 것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두 소가 같은 방향으로, 같은 무게를 지며, 함께 일하는 것처럼, 관계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 아래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관계의 원래 설계입니다. 관계는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아래, 두 사람이 서로를 섬기며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겠습니다. 지금 청년들 사이에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비혼'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워졌고, 결혼을 '선택사항'으로 여기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경제적 부담도 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관계에 대한 피로감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 '관계 때문에 내 삶이 힘들어지면 어떡하지?'라는 마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혼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고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는 삶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택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맺는 관계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입니다.
오늘날 많은 연애와 결혼 문화의 중심에는 '나의 만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이 관계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가 관계의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관계의 출발점이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라고 말합니다. 내가 만족하기 위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 관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이 따라옵니다.
결혼을 준비하든, 아직 만남이 없든, 혹은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관계가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있는가? 내 삶의 관계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관계관의 출발점입니다.

2. 모세의 이혼 허용 — 그 참된 의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반박합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명기 24장 1절을 근거로,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명확합니다. 8절입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명령'이라는 바리새인들의 표현을 '허락'으로 바로잡으십니다. 모세는 이혼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허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고대 근동의 여성의 지위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내보낼 수 있었고, 내보내진 여성은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단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런 증빙 서류도 없이 집에서 쫓겨난 여성은 재혼도 할 수 없었고, 친정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으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여자'라는 낙인 속에서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모세의 이혼 증서 규정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명기 24장의 이혼 증서는 이혼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혼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실 속에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장치였습니다. 이혼 증서가 있으면 그 여성은 법적으로 '자유인'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고, 재혼이 가능했으며,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WBC 주석은 이 규정이 '이혼의 정당화가 아니라 이혼으로 인한 피해의 제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석합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병원에 응급실이 있다고 해서, 병원이 사고를 장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응급실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이혼 증서 규정은 이혼을 권장한 것이 아니라, 이혼이라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이 담긴 조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원래 설계에는 이혼이 없었습니다. 관계가 깨지고, 언약이 파기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관계가 깨지는 현실이 존재하고, 하나님은 그 깨어진 현실 속에서도 약한 자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은 관계의 실패를 심판의 기회로 삼지 않으시고, 회복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관계가 깨어진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자리에서도 일하시는 분이시고, 상처받은 사람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3. 결혼을 넘어서 — 그리스도인의 관계의 목적

그런데 오늘 본문을 결혼과 이혼에 대한 말씀으로만 읽으면, 이 말씀의 절반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을 넓게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해서,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것, 넘어지게 하지 않는 것,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아가는 것, 형제가 죄를 범하면 권면하는 것,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19장에서 결혼과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배치가 아닙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이 흐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8장의 공동체 관계 교훈과 19장의 결혼 교훈은 하나의 큰 주제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는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다.
우리가 맺는 관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 외로움을 달래는 것입니까? 내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까? 내 유익을 얻는 것입니까? 물론 관계 안에서 위로도 받고, 기쁨도 얻고, 도움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관계의 '목적'은 내 만족이 아닙니다.
6절의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은 결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고, 동료를 주셨고, 이웃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관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관계는 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섬김을 배우고, 사랑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관계가 언제나 편하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 공동체 안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관계에서 쉽게 도망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관계를 참고 버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깨어진 현실 속에서도 약한 자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관계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관계를 쉽게 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관계의 목적이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4. 어려운 관계 속에서 — 거리와 긍휼 사이

그렇다면 실제로 나에게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 권면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18장 15절에서 17절까지,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단계적인 권면의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증인과 함께 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표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을 많은 사람이 '관계를 끊으라',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제로 이방인과 세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방인의 믿음에 감탄하셨고, 이방인의 딸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고,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먹는다 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는 것은 '포기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의미였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는 함께 나아갈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거리를 두되, 영적으로는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나를 반복적으로 해치는 사람,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경계는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과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은 다릅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미움이 아니라 긍휼함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더 이상 내 알 바가 아니야'가 아니라,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구나'라는 시선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 사람이 돌아올 때,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반복적으로 죽이려 했습니다. 창을 던졌고, 군대를 보냈고, 직접 쫓아왔습니다. 다윗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리적으로 사울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순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놀라운 것은, 도망가면서도 사울을 향한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오히려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손을 대어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니라."
다윗은 사울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졌지만,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보는 시선을 잃지 않았습니다. 미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원수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애가를 지어 사울을 애도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어려운 관계 속에서의 태도입니다. 거리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선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미워함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긍휼함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나를 반복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을 긍휼함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필요하고, 말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본래의 자리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설계하신 '본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아래 하나 되어, 서로를 섬기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우정에, 공동체에, 모든 관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질 때, 관계가 깨어집니다. 내가 중심이 될 때, 내 유익이 기준이 될 때, 관계는 도구가 되고, 상대방은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나에게 더 이상 유익하지 않으면, 쉽게 끊어버립니다. 모세 시대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의 마음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관계의 중심에 나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긍휼한 시선으로 기다리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가능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연인이 있을 수도 있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만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가족 중에 관계가 힘든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관계는 여러분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관계가 깨어진 자리에서도 일하시고, 상처받은 자를 돌보시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관계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관계를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우리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이 중심이 되게 하시고, 내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긍휼함을 주시고, 건강한 경계 안에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관계의 기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