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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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11장_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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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신자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죄와 죄의 세력에 대한 정직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앞의 긴 논의를 통해 신자 안에 죄 죄가 내지한다는 사실과 그 죄가 신자의 불순종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죄의 존재와 강력한 힘은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신자가 복음에 대한 무지 속에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게 될 때 죄의 세력은 더욱 큰 힘을 얻게 됩니다. 더욱이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사는 기쁨 대신 죄의 낙에 기들여지기 시작하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00:55) 그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신자가 죄를 이길 수 없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공급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1. 서론 신자와 죄의 힘 신자가 죄의 강력한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면 그의 실제적인 삶은 외적으로 불신자와 다름없는 부독 부도덕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기간이 오래 지속될수록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증후는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평화의 진전은 없고 경건의 능력은 상실하며 인격은 악해지고 생활은 부도하여 특정한 죄에 빠지거나 유혹에 쉽게 굴복가게 됩니다.
(01:50) 그래서 그의 삶은 불신자보다 더욱 악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신자인 그를 향한 죄의 지배는 예전 불신자이던 시절처럼 절대적이고 완전히 치료적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세 가지 점에서 입증됩니다. A. 죄의 주배력이 절대적이지 않음. 첫째로 죄가 지배하는 힘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에서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은 죄가 그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를 누르고 있는 힘은 매우 강해서 신자는 더 이상 그 죄의 힘에 저항할 수 없을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가 믿음과 복음의 원리에 따라 그 죄에 대항하지 않거나 특한 죄에 탐리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일 뿐입니다.
(02:40) 만약 그가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죄와 싸운다면 얼핏 절대적인 것처럼 보였던 죄의 지배를 힘 있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지가 수십년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같은 정도의 세월의 길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기 위하여 죄를 깨닫고 그와 더불어 싸우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자가 믿음과 복음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는 한 은혜의 회복은 육체의 욕심에 순종함으로 이르게 되는 죄의 지배보다 더 급속하게 이루어집니다. 특히 신자가 지배하는 죄의 힘은 신자가 그 죄의 유혹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한 결코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B.
(03:36) 죄의 시효적인 힘이 가변적임. 둘째로 죄의 시효적인 힘이 가변적입니다. 신자에 대하여 죄의 지배력은 치료적인 힘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죄가이 세상에 있고 신자에 잔존하는 것만으로는 치료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지성적으로만 아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는 신자가 그 능력을 힘입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죄의 집배 아래 있을 때에는 그의 영혼을 공격하는 죄의 힘은 치료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시효적으로 능력 있게 능력 있게 신자 안에서 역사할 때 신자의 영혼에는 어둠이 더하게 되고 마음은 육체의 정력으로 타오르게 되고 육체는 거룩한 의무에 정하게 됩니다.
(04:21) 영혼은 신령한 관점에서 사례를 판단할 수 있는 총명을 잃어버리게 되고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 노릇하려고 하며 삶은 전적으로 자신의 육체의 만족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이처럼 신자가 철저히 죄의 죄에 져서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에는 신자를 공격하는 죄의 시효적인 힘은 견고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가 그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육체의 사악한 욕심을 쫓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회개할 때 죄는 이제껏 발휘했던 시료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05:09) 그리고 이렇게 죄의 실료적인 힘을 약화시키거나 종식시키는 주체는 순종하는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죄의 집배는 영속적일 수 없음. 셋째로 죄의 지배는 영속적일 수 없습니다. 신자가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갈 때에 얼핏 보면 신자의 삶을 지배하는 죄의 지배권은 영갈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의를 보면 스스로 거듭난 신자라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다수일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코 회개하여 은혜의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향한 죄의 지배가 용석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05:58)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불신자에게는 그 지배가 영속적인 것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코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동안 죄의 지배 아래 갇혀 있던 신자라고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면 은혜가 밀려옵니다. 오랫동안 신자를 지배하던 죄의 지배가 성령의 은혜에 의하여 공격당하고 죄는 급속히 지배력을 잃게 됩니다. 오늘날 은혜 안에 살아가는 신자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한 때는 절대적인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한 때는 불순종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형식적인 신자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06:47) 그들 가운데는 구원받았어도 죄의 지배 아래 살았던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통찰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는 결코 영영 영영속적일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신자인 우리에게 주인노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화에 있어서이는 아무리 광조에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를 이길 모든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성하에 있어서 복음은 유일한 온천이고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신자에게 주인 노릇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논중될 수 있습니다.
(07:36) 첫째로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복음이 죄와 싸울 동기와 경려를 주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는 첫째 논증 곧 죄가 신자인 우리에게 주인 노릇 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루고자 합니다.이 이 은혜와 율법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근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법이란 율법을 가리킵니다.에 율법은 무엇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무엇이며 그 율법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왜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정리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08:36) 그래서 율법은 신자인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고 복음을 대적하는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비롯해서 죄를 이기고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말함에 있었뿐 아니라 창조와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종말의 심판 전 과정을 해석함에 있어서 율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마치 하늘에 빛나는 별이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찬란히 반짝일 것처럼 복음도 율법을 배경으로 그 참된 의미를 영롱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율법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만큼 복음이 복된 소식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09:26) 그러면 율법은 무엇일까요? 율법은 아 성경은 율법을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과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우리가 피해 의식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율법은 좁은 의미의 율법 중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세하게 살펴보면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넓은 의미의 율법. 율법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 그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흠없이 계시해 주신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코 부정적인 의미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시편는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합니다.
(10:20)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죄하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편 2절. 시인이 즐겨 묵상하며 영혼의 유익을 얻은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보여주는 모든 계시의 총체였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깨닫게 된 모든 하나님의 계시 전부였습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목상하며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하여 죽은 자와 같았던 자신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율법도 넓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편 19편 7절 율법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1:23) 지혜인은 율법을 통하여 정죄받고 송사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방해받는 내신 어 침체된 영혼의 회복을 경험하고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지하던 상태에서 분별력이 있는 상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시인의 영혼에서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어두움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에 기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편 18절.이 이 또한 신약이 부정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율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영혼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12:18) 이 좁은 의미의 율법.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보다 많은 경우에 율법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의 율법을 가르킵니다. 율법이라는 말이 좁은 의미로 사용되면 그것은 구약에서 완전한 복정을 위해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규칙을 뜻합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율법은 항상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강제 조항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고 말할 때 그 율법은 바로 좁은 의미의 율법을 뜻합니다. 그분이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셨다가 진술할 때도 죄인들이 정죄를 받는 기준으로서 거론되는 율법을 말할 때도 모두이 좁은 의미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13:08) 이러한 의미에서의 율법은 다시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에덴에서 주어진 율법이고 사는 하나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입니다. A 에덴에서 주어진 율법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인류의 첫조상인 아담에게 주어진 율법입니다. 아담은이 율법을 받을 때 개인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받은 것입니다. 자신과 아내인 하와 그 후손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대표자로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이 율법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함께 언약의 당사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에 있어서 함께 당사자가 되는 언약적인 연대는 이미 구약 성경에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14:02) 여호와께서 이왕에 너에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너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너의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내가이 언약과이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신명기 29장 13절에서 15절 말씀 에덴 동산의 율법은 흔히 종교 명령으로 불리는 지시적 성격을 가진 언약 안에 있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신 율법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14:52)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창세기 2장 17절 말씀. 이것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에 대하여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설명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요구되는 것은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사의 강제 조항과 함께 주어진 율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선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이 이 명령은 너무나 명쾌하고 간단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교전과 반역이며 그 결과로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순종하여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15:39) 아담은이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아담은이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그들의 전적인 의무가 무엇인지를 계시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전과 거기서 비롯되는 절대 순종의 자세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통하여 창조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뇨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시키심으로 그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 세계를 사스렸습니다.
(16:30)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 모두를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적어도 타락하기 전까지 아담과 하은 하나님의 온전한 대리자였습니다. 모든 피조물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그분의 대리자인 인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다스림에 복종하였습니다. 아, 제가 들어오기 전 인간의 지위하신 분은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그는 창조 세계를 돌보도록 부름받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하시고 그는 하나님처럼 온 세상을 다스리고 모든 피존물은 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처럼 세상을 관리하고 사스였습니다.
(17:16)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눈에 잘 뛰는 나무 한구루 앞에만 서면 언제나 그 실과를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율법이 생각났고이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고 자신은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창조된 한 피조물의 불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주어진 율법은 아담에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전과 순종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그 율법이 요구하는 바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의로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18:07) 그리고 아담이 그렇게 의로운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아담을 통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눈에 보이는 선악과의 깃들린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기를 금하신 선악가가 인간을 넘어뜨리는 역할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훌륭한 표지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선악가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에덴 동산에서의 율법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하는 힘만 있었을뿐 죄를 막거나 축출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었습니다.
(19:05) 이처럼 좁은 의미의 율법 안에는 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힘은 있었으나 그것과 싸워 이기게 하는 어떠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처음의 율법보다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물론이 율법은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이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제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게 하셔서 그들을 직접 통치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머물면서 과거에 불경건한 습속을 털어버리는 시간들을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전에 주어진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세히 규정된 율법을 받습니다.
(19:57) 특히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시민법과 제사 규례를 가진 의식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주어진 그 율법 속에는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약의 백성들을 복주시기도 하고 벌하시기도 하는데 그 기준으로서 율법이 제시된 것입니다.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그들을 따라 애굽을 탈출한 이방의 족속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적인 이스라엘과 신앙 고백을 통해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온 다른 무리들을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0:47) 그것은 언약관계에서 안에서 살기 위한 의무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율법, 고시민법과 의식법 안에는 죄를 파괴하는 하나님의 은혜나 죄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직이 좁은 의미의 율법만 주시고 넓은 의미의 율법을 통하여 은혜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스라엘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 백성들과 같아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백성들에게 넓은 의미의 율법과 약속들을 통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혜를 주시고이 은혜로서 세상의 죄악된 환경 속에서 언약 관계를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21:40) 더욱이 이스라엘 공동체로 하여금 어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계약 공동체로서의 어 언약적인 연대와 영적인 결속을 강화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내산에서 주어진 좁은 의미의 율법 안에는 죄를 파멸시키는 은혜의 힘이나 죄에 대항하게 하는 능력이나 동기 격려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죄에 대해 대항하고 싸워 이기게 하는 능력도 없는 율법을 주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지내산에서 주어진 좁은 의미의 율법에는 에덴동산의 율법에는 없었던 새로운 목적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을 지키기에 무능함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22:35) 율법의 빛이 비치면 스스로 죄인지 모르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유익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단지 죄를 느끼게 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고 책망하여 정죄할 뿐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도록 지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혜의 역사가 없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쉽게 벗어납니다.
(23:24) 그래서 어느 순간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 죄의 결과에 비참함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범죄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설령 율법을 통하여 죄에 대한 두려운 심판에 눈투고 그래서 어떤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욕구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억눌리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깨달은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이 범죄가 가져다 줄 즐거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범죄의 실행을 유보하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이 죽거나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24:11) 율법은 인간의 내면에 그러한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복음을 통한 성의 은혜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는 복음적인 거룩에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경로는 오히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스스로 율법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 밖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소망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은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죄를 용서받고 불결한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올 수 있는 한시적인 교재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5:06) 그것이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운 제도가 율법 안에서 함께 계시되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없을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안에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의 죄가 한시적으로 남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지정된 장소 곧성막이나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재물이 될 짐승을 가지고 갑니다. 거기 가서 제사장 앞에서 믿음으로 기도할 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짐승에게 증가되게 하시고 그 짐승이 그의 죄값을 대신받아 피흘려 죽음으로써 그는 잠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됩니다.
(26:04) 이것은 물리적인 이치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로로서 그분을 믿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미리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사들을 때 자기를 대신하여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짐승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와는 실제적으로 상관이 없는 재물을 비참하게 죽이면서까지 죄인인 자신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입니다.
(26:51) 연기가 올라가고 죽임당하는 짐승의 피가 튀며 죄인들의 끼는 울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제사는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용서와 화해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어긴 죄인들도 제사라는 은총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교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민법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제사를 위한 의식법 역시 그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율법의 효용이 추가되었으니 그것은 이러한 행위의 율법들을 통해서 죄를 책망하고 확신시키고 자신의 힘으로는 모든 행위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함으로써 보다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곧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바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27:51) 그 율법의 한계 죄인들이 제사의 은총을 통하여 잠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죄를 이길 궁극적인 힘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 안에는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 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결국 다시 죄를 짓게 되고 또 다시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결통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제사와 같은 임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편을 통해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는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으로 이어졌습니다.
(28:4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 오시기 전 사람들은이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했었던 사람들은 그 율법의 향계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키어하시는지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다 준행하기에는 무능하였고 또 율 그 율법이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지도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통하여 잠시 죄를 용서받는 평안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고자 충실하였던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 통해서 정죄를 받았고 율법의 도움으로도 자신의 힘으로도 죄를 이기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29:29)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속죄의 은총과 죄를 이길 힘을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는 신앙을 갖게 된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율법을 몽학 선생으로 비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 어린 학동과 같던 구약 시절에 몽학 선생인 율법이 그 손을 이끌고 그 손을 이끌고 데리고 간 곳의 마지막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자신의 죄와 그 죄의 비참한 결과를 깨닫게함으로써 영원한 속죄의 중무자이시고 죄를 이길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인간을 다스리시는 두 방식 율법과 은혜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30:34) 그렇다면 이제이 율법을 하나님께서이 세상의 인간들을 다스리시는 방법과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다시 그분께로 돌아갑니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장 36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이 온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통치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다스림을 위해서는 반드시 법이 필요한데 불신자는 율법으로 통치하시고 신자는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31:23) 1. 불신자 율법으로 다스리심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다스리시든지 은혜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둘 중 하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으며 둘 중 아무것에게도 속하지 않거나 둘 다에 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을 법 아래 혹은 율법의 아래에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제시된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다시 이미 율법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닙니다.
(32:13) 그래서 이미 율법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으로 다스리시고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 즉 구약 시대 이방인들과 오늘날 불신 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 놓으신 율법인 양심으로 다스리십니다.이 양심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 속에 새겨진 본성적인 율법입니다. 이것의 존재는 다양한 문화들 속에 공존하는 도둑의 일치로 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동서양 모두에서 형벌받을 무서운 죄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역시 문화권에 상관없이 요구됩니다. 도덕적인 부분들에 있어서도 그는 아프리카 토인, 에스키모할 것 없이 사소한 차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놀라운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33:01) 이것은 서로 다른 문명권이 서로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이는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 속에 양심이라는 본성적 율법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왔으나 하나님께서 >> 그들에게 주신 어 이러한 양심의 법으로 말미암아 일반 은총에 차원에서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해 가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됩니다. 윤리학에서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보는 것도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이 세상에 있는 도덕적인 질서, 사회적인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한 율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33:54) 이 이 본성적인 율법은 죄를 발견하게 하고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을뿐 그 죄를 끊거나 이기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단지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 이 신자 은혜로 다스리심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율법으로 다 다스리신다면 거듭난 신자는 무엇으로 다스리실까요? 본문은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장 14절 말씀. 여기서 법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제하고 죄를 확신케 하는 율법을 가르킵니다.
(34:47) 그리고 여기서 너희는 거듭난 신자들을 가르킵니다.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면 분명히 제가 그들에게 주인 노릇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 율법은 그들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보여주고 죄를 확식게 함으로 억압 가운데 있게 할뿐 죄를 이길 어떤 힘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율법의 통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그들에 대하여 주인노릇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 둘 곧 율법과 은혜 중 하나 아래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인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방식으로서의 은혜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35:40) 즉 본문 구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내가 너희를 주관 못하리니 왜냐하면 너희가 율법의 다스림에 율법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의 통찰에 있음이라.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렇게 차별대워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는 율법의 통치를 받아 죄의 다스림 아래 있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은혜로 다스려서 다스리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율법 안에서 그렇게 고통받다가 정죄받고 결국은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하시고 신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아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36:35) 이 차별의 경계 선상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율 율법의 정죄를 대신 받으신 속죄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신자가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신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 사람입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37: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지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안에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용서해 주실뿐 아니라 우리 안에 본성을 허무시고 새로운 본성을 심으신 것입니다. 심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새 사람이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를 공급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남은 죄들을 이기게 하십니다. 예전에는 율법 아래 죄의 법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제는 은혜 은혜가 법이 되어서 우리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38:15) 아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숙명처럼 여기며 살던 지배를 종식시키고 하늘의 능력을 힘입어 살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누리는이 축복을 앞서 수많은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워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 무거운 짐을지고 아무 소망도 없이 고통 가운데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 죄를 통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사단의 세력을 십자가로 못 박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39:06) 골레새서 2장 14절에서 15절 말씀. 이제 우리 안의 죄는 예전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거듭나의 거듭나기 전의 죄가 이라크가 망하기 전의 사단 후세이라면 거듭난 후의 죄는 나라가 망하고 벙커에 은신하던 때의 사단 후세인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나라에서 모든 합법적이고 치료적인 권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어서 여기 저기서 준동하고 열합군과 시민들의 안전을 유협하였던 것처럼 지금도 신자인 우리 안에 죄는 역사합니다. 죄의 생명에 올리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창자가 터져 나오고 피흘리며 쓰러져 죽기 직전의 맹수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를 향한 죄의 계획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02)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새 언약은 이러한 죄에 대한 승리를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거듭났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어도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그렇게 범 빈번히 신자들에게 분토하는 삶을 추구하지 촉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성화의 삶을 위한 어떠한 긴장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심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능히 죄를 이기며 살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은혜 안에 살 때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죄와 사망의 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죄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40:54) 여전히 죄는 신자인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대적하는 한 죄는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사랑하고 선택하면 죄는 강력한 힘으로 자라서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이처럼 죄와 은혜는 모두 자신에 대한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신자 안에서 은혜 신자 안에서 우세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예수고 있습니다. 죄도 자신에 대한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번성하고 은혜도 또한 그러합니다. 여기서 죄에게 무기를 공급해 주는 지원책은 우리 자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순종하며 믿음과 은혜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며 살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다 죽어가는 죄의 잔존하는 세력들에게 도시락을 날라주고 우리 영혼을 파괴할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 주는 것 같습니다.
(41:47) 우리의 순종적인 지원으로 우리 안에 흩어져 있던 잔존하는 죄들은 세력을 교합하고 점점 강성해집니다. 어떠한 은혜의 조치도 없이 방치하면 죄는 점점 더 번성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고 사악한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로부터의 부패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그 사람 안의 강력한 죄의 경 경 경향성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의 표지를 거의 상실하도록 만들어 삶을 살게 됩니다. 죄의 집의 이러한 성격은 폐교와 죄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훌륭하게 입증됩니다. 죄의 욕구에 순종할 때는 우리 안에서 그렇게 강한것처럼 느껴져도 우리가 죄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은혜 언리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죄의 세력은 급속하게 약화됩니다.
(42:49) 기도의 실천 가운데서 영혼은 죄와 맛부터 싸우며 죄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다스린다는 의미는 이렇게 우리 안에 은혜를 주셔서 그것으로 죄의 세력을 이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하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심으셨지만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죄를 이기며 풍성한 은혜의 통찰에 살면서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 희망이 없지만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43:41) 그 은혜의 힘으로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삶. 은혜 아래 있는 신자와 죄.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중생하여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격과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듭난 신자 안에도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고 따라서 죄는 잔존하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 안에 전존하는 죄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신자를 지배하는 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죄의 세력은 신자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거듭날 때 이미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죄의 영향력은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습니다.
(44:32) 신자인 우리 안에 잔존하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나만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원리들을 활용하여 그것을 죽이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면 죄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는 일에 크게 방해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잔존하는 죄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매우 강한 힘을 얻어서 왕성한 세력으로 자랄 그것이 불법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언젠가 성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지체로부터 자신은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가득차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45:22)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죄에 빠졌다는 양심의 가치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며 울지만 그 눈물이 채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목사님 저는 어찌하여야 합니까? 제가 거듭난 자가 맞습니까? 그는 죄의 지배 아래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복음과 죄에 대한 무지가 죄에 대한 사랑을 돕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답장하면서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당신은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할지라도 가끔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되는 것 같아도 그것은 종교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죄를 이길 수 있는 원리를 벗어나 있기에 몸부림처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46:13) 당신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복음이 가르치는 죄 죽임의 원리 곧 당신 안에서 번성한 죄의 지배를 깨뜨리고 은혜의 지배를 가져오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로 돌아오십시오. 먼저 죄와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죄가 역사하는 방법과 죄를 죽이는 이치에 대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길어올리는 진실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그 기도 실천의 과정보다는 결과인 응답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성화의 측면에서 보면 기도 실천의 과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기도의 실청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몸부림을 통하여 받게 되는 영적인 축복이 더 필수적입니다.
(47:09) 기도의 응답은 일반적인 섭리를 통하여 보지만 마음으로 울어나오는 간절하고도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받게 되는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자체를 직접 만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죽이고 은혜를 살립니다. 그리고 이전에 사랑하던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랑하는 그을 마음에 형성합니다. 복음은 죄를 소멸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어떠한 도덕적인 노력이나 윤리적인 개선을 통해서도 결코 죄임에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적인 경건과 하나님과의 평화 죄를이기는 지혜와 능력은 오직 복음 안에만 있습니다.
(47:57) 오직 복음만이 그 모든 성경적인 거룩과 경건의 유일한 뿌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이처럼 우리로이 땅에 살아가 있는 동안 주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이 원리로 돌아와서 이런 승리를 누리면서 성결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네. 죄의 지배를 갖고 있을 때의 대처 >>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큰 산불이 발생하여 수십년 동안 갖고어온 살림을 일시에 태워 버립니다. 최근 10여년 사이에도 세계적으로 큰 산불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머존의 밀림 지역과 호주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일어났던 산불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산불이었습니다.
(48:58) 혹시 산불이 발생한 현장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산 전체가 차 들어가는 큰 불이 난 현장에서는 태찬 바람과 불길이 이동하는 소리가 납니다. 광활한 살림이 다 들어가며 불길이 씻었을 때 뜨거운 공기가 하늘로 솟고치면서 새로운 공기의 흐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이 울고 있는 듯이 커다란 바람 소리가 납니다. 겨우이 그때 화제를 돕는 바람이 적절하게 불고 있다면 산불은 미세를 더할 것입니다. 요즘은 산불을 끄는 장비도 많이 발달되면서 진화용 헬리콥터가 한 번에 3톤 정도나 되는 물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제의 규모가 워낙 크면 몇십대의 헬기가 물을 커 부부도 진화가 어렵습니다.
(49:49) 결국 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커다란 산불들은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큰 것이 아니라 내리는 비가 껐습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타 들어가던 무서운 불길이지만 하늘 가득 시커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위세를 부리던 그 불길도 세력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지배가 너무 강력해서 혹은이 죄에 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인하여 신자들은 좌절합니다. 제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통해 신앙 상담을 해오는 지세를 대하다가 그런 경우를 봅니다. 어마어마하게는 죄의 불길 앞에 속수 무책으로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적 상황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가끔 만납니다.
(50:41) 어떻게든 그 죄의 저항에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 노력들은 엄청나게 타오르는 산불 앞에 바가지로 물을 몇 번 뛰었는 것처럼 미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큰 좌절을 느끼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껏 해온 신앙생활의 모든 경험, 성경을 아는 것, 기도하는 것 등이 도저히 죄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니 상황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번성하여 강력하게 타오르는 죄의 세력을 열하고 다시 질은혜의 상처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우리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듯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51:32) A 죄의 지배의 교리를 기억하라. 첫째로 죄의 지배의 교리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강력하게 역사한다고 할지라도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거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먼저 사고를 정돈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맛부터 싸워야 하는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정리된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면 생각은 뒤엉키고 지성에 혼란이 옵니다. 감정도 질서를 잃게 되고 의지도 이성에 의하여 형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틀의 은혜로운 질서의 상태를 성실하게 됩니다.
(52:21) 결국 우리는 자신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생각을 정돈하고 혼란스러워진 지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이를 위하여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이 바로 죄의 지배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은 죄와의 싸움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는 샘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적군과 싸우는 군인처럼 말입니다. 죄는 항상 무지하는 어둠의 장막 안에서 번성합니다. 지식의 빛이 없이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르면서 실제로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53:24) 1. 죄에 패배한 상태 1. 죄의 지배를 모르는 경우 첫째는 스스로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모르는 경우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회개할 죄가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서 소문난 죄를 지은 적이 별로 없거나 자기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이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것으로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문난 커다란 죄만이 우리를 죄의 집배 아래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54:13) 궁극적으로 죄란 스스로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같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자신의 행복을 궁극적인 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창조의 목적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고 가음이나 살림, 도질과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참된 영적인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처해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55:01) 그들에게는 진실한 참여를 통한 자기 깨어짐 같은 것이 없습니다. 복음과 경건의 비밀에 대해서 아주 적은 부분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은 생명이 없는 형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추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가 생각나지 않으면 죄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영적 생명의 증거를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증거를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죄로부터 멀어져 성결하게 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귀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과 동행하시며 마음이 청결한 자를 만나 주십니다.
(55:49) 따라서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감격과 하나님을 배우는 신령한 교통이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하며 의롭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누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의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이렇게 자신이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크게 비난받을 일이 없고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비영적인 틀에 갇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축복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토모스 왓슨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잘 길들려진 짐승과 같은 사람들입니다.이 죄의 패배한 상태이 죄의 지배를 아는 경우 둘째로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경우입니다.
(56:49) 이런 경우에는 범죄가 크면 자책감도 크집니다. 그래서 범죄로 말미암은 자책감과 함께 죄의 특별한 지배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영혼의 안식이 없으므로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의 상태로부터 미끄러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혹은 점점 강해지고 죄에 대한 저항력은 점점 약해져서 유혹에 쉽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혹에 굴복하는 일들이 빈번이 일어나게 되면서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은혜의 질은 계속 파괴되어 가고 이에 따라 내면 세계는 엉크러지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57:44)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찾아 신령한 위로를 받든지 다시 죄를 범함으로써 거기서 오는 육체적인 즐거움으로 잠시 고통을 달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세하게 역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전자를 통해 유로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죄에 접근하기 좋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패배한 상태에서는 신령한 위로보다는 사악한 쾌락을 찾게 되기 쉽습니다. 결국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이 그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가고 또 한편으로는 신자 스스로 악을 행함으로써 죄를 좁게 됩니다. 이럴 때 죄의 지배의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여도 그것이 그릇된 방법이며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58:37) 그렇게 되면 죄의 힘은 점점 더 큰 세력으로 느껴지고 죄에 대항하는 자신의 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죄와의 싸움은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이럴 때 가장 시급이 필요한 것은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죄의 지배와 죄의 지배한 공격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통해 스스로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 진단에 맞추어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자신을 공격하는 죄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받는 증거는 이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신자가 아무리 죄의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고 죄의 지배를 경험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죄의 복동적 사건이지 정상적인 지배의 질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59:36) 신자가 아무리 죄의 세력을 강력한 산불처럼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불법하게 그 안에서 일어난 폭동일 뿐이고 신자가 순종함으로 올바른 영적 생활의 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원래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 안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가 그렇게 불길처럼 일어날지라도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없다. 왜냐면 나는 거듭난 신자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함으로 내가 이렇게 세력을 얻어 기승을 부리게 되었지만 너는 나를 영원히 지배할 수 없다.
(1:00:27) 나는 다시 회개하고 복음의 약속을 따라 은혜의 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면 내 영혼과 영혼의 불길처럼 불법하게 일어난 너의 세력은 소멸될 것이다. 너의 불길을 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의 비를 내려 주실 것이다.이 삶의 환경을 정비하라. 둘째로 삶의 환경을 정비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그진 생각이 정돈되고 나면 자신으로 하여금 죄 가운데 살아가도록 돕는 삶의 환경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소급적인 의미에서 삶을 정돈한다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죄를 잃을 힘을 얻게 하는 은혜의 방편과 그를 실천할 환경에 자신을 가까이 두는 것입니다.
(1:01:21) 그렇게 될 때에 생각 속에서 정돈된 죄의 지배의 교리를 자신의 삶속에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심각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이 심각하게 나빠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간의 해로운 것들과 간의 이로운 음식이나 생활 습관 등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로운 것이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피하여야 합니다. 술, 담배, 맵고 짠 음식 등을 피하고 신선한 야채나 기타간에 좋은 음식은 가까이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다른 간 질환으로 이어지게 하는 나쁜 생활 습관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1:02:11) 그런 환경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줄을 한 잔 안 마신다고 해서 갑자기 간이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쯤 피로가 쌓인다고 해서 내일 간 집안으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지를 가지고 그러한 생활 습관을 바로잡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질병은 약화되고 맙니다.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과 가깝고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와 가깝습니다.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지거나 죄의 지배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환경을 정비하여야 한다는 지침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걱정이 됩니다. 아침에 개인 배일을 열어보면 이상한 천지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어살이 찌뿌려질 때가 있습니다.
(1:02:59) 그런데 그런 엄란한 메일들을 우연히 한번 열어봤다면 그게 죄겠습니까? 죄라고 해도 그게 얼마나 큰 죄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자체가 큰 죄인지 작은 죄인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음란 메이를 한번 열어보는 것은 큰 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계속 반복되고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로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드럽던 마음은 굳어지고 신령한 욕구는 감하고 사악한 욕망은 칭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습관이나 환경은 은혜가 죽고 죄는 성장할 수 있는 여건입니다. 유업을 도저히 이기지 못한다 하겠다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1:03:51)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터넷에 편리함이나 유용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까? 인터넷뿐 아닙니다. 불경건한 친구들과의 교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도 끊어야 합니다. 신자가 직장에서 늘 술 접대에 불려다니거나 이중 장부를 작성하는 등에 불법한 일을 강요받는다면 그러한 환경과 문화를 개혁해 나가든지 아니면 다른 직장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TV나 비디오를 보거나 인터넷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아침에 기도하는 일이 방해를 받는다면 밤 시간을 그렇게 보내게 하는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1:04:39)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은혜의 지배를 회복하고 싶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과 생활에 있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은혜받을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주일 교회도 잘 나가고 은혜를 회복하고 유지하게 하는 방편들에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삶의 환경을 정비해야 합니다.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악에 가깝다는 것은 정확한 진리입니다. 2.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라. 셋째로 은혜의 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정욕이 부길처럼 일어나서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게 되면 자기 안에 은혜는 전혀 없고 자신은 온통 죄의 덩어리라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1:05:37) 이러한 자각이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죄가 아무리 강력한 재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해도 그 신자 안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되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내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죽게 된 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 앞에 내 행위의 온전한 것들을 찾지 못하였노니 요한계시록 3장 1절 2절 보십시오. 사대 교회는 사실상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남은 바 은혜가 있었습니다.
(1:06:29) 그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습니다. 행위의 온전한 것들을 찾을 수 없던 교회에도 남은 바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장 극악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는 아직도 소멸되지 않은 은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은혜의 원리를 따라 회복되면 그 은혜가 죄를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는 결코 적대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혜에 대한 죄의 승리는 구급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안에 은혜가 남아 있다는 한 증거입니다.
(1:07:19) 죄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신자 안에 있는 은혜를 모두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량이나 라이터 없이 다 꺼진 듯이 보이는 모닥불을 피워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꺼져버린 모닥불을 다시 피워야 하는데 성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닥불이 꺼진 자리를 뒤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얼른 남은잎을 그 불씨 위에 놓고 나뭇까지도 작고 가늘게 잘라서 돌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씨의 입김을 살살 불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작은 불씨가 점점 크게 일어나 남은 입을 사르고 나뭇가지들을 태웠습니다. 이윽고 좀 더 큰 나무들도 능히 태우며 활발 타를 수 있는 불길이 됩니다.
(1:08:09) 죄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은혜도 다 꺼진 모닥불 속에 남은 작은 불씨와 같습니다. 그 불씨는 신자가 정욕을 따라 살면서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점점 사위어 갑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에게 남아 있던 은혜는 불길처럼 일어납니다. 이렇게 신자 안에서 은혜가 불길처럼 일어나 지배력을 갖는 것은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렇게 살도록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때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받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1:08:55) 우리의 영혼이 중생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고 송사하던 율법을 무효로 만드시고 우리를 사로잡던 사단의 권세를 무장 해제시킨 것이라. 실제로 우리 안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던 모든 죄의 지배의 원리를 파괴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신자의 중생을 제창조로 묘사했습니다. 고린도서 5장 17절. 그리고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능히 이기면서 살아가게끔 죄와 싸워 승리할 능력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에는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면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특권들입니다.
(1:09:4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 안에서 이러한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이러한 진리를 믿으라. 넷째로 이러한 죄와 은혜 지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일어날 때는 성령만이 그 죄를 죽이실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려는 옳고든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것이 매우 약화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식은 사람들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죄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덮어자게 하는 이유가 바로이 때문입니다.
(1:10:33)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의 도움이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이 믿음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테만한 낙관이 아니라 죄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 것처럼 다시 은혜의 원리를 따라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를 주셔서 죄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속지 공로를 기초로 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러는 신자가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고 해도 잘 믿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 경건한 사람들이 익숙하게 사용했던 방법은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1:11:20) 마치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낭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팔아라. 그 얼굴에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 5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울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계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편 1절 2절. 이처럼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타이루고 책망함으로써 의심과 반감은 무러뜨려지고 믿음은 강화됩니다. 이것은 경건의 실천을 위한 기술에 있어서 뛰어한 효능을 가진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1:12:10) 믿음이 아주 충만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신자가 믿고자 할 때 그렇게 될까 하는 의심이 일어납니다. 특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자극하게 될 때에 율법과 양심으로부터 송사를 받으니 우리의 죄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이라는 율법의 정제와 그러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양심의 송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때 죄인은 두려움 속에 낙심하기도 하고 죄에 대한 탐으로 도망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죄와 있어서 분투하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진전이 별로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믿음은 자꾸 식어지고 꺾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와 분투하는데도 죄의 지배를 받는 영혼의 상태에 만족스러운 진전이 없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1:13:07) 그래 비록 당장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는 뚜렷한 증거가 뚜렷 나타나지 않지만 이렇게 죄와 분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기게 해 주시리라는 복음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은혜의 공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2. 죄를 이기도록 은혜를 주시는 방법을 생각하라. 다섯째로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를 주시는 방법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이길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지 그 방법을 숙고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때 자신이 이미 겪었던 과거의 회심의 경험을 생각하는 것이 많은 통찰을 줍니다.
(1:14:04) 좁은 의미의 회심은 단 한 번이지만 넓은 의미의 회심은 여러번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그러한 회심의 경험을 첫사랑의 때라고 합니다. 그런 첫사랑의 때를 기억하는 것도 좋고 그 이후에 더 큰 은혜의 경험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런 회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을 경험하기 전에는 대체로 죄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죄의 지배 아래 벗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라는 것입니다.
(1:14:50) 그러면 지금 죄로 말미암아 율법과 양심의 생사를 받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믿음이 생겨나게 되면 비로소 죄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위치들이 떠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회복의 은혜를 주셨는지 우리 자신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었는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영적인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지던 기억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던 영적인 긴장감 그리고 열렬하고 절박한 기도의 실천과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하던 말씀에 대한 경험 같은 것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1:15:41)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통해서 마치 조각난 그림들이 하나하나 짝이 맞추어 모습을 보여주듯이 은혜의 원리가 깨달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선명해질수록 마음은 하나님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의 첫자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를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그 원리로 자기를 다시 드 놓으려는 노력이 없이 단지 고통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은혜의 제배로 돌아가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1:16:26)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은혜의 원리에로의 돌이 니다. F.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여섯째로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데 우리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죄를 이기게 하시는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이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속죄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속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비결이 됩니다.
(1:17:20)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이제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를 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이 세상에 오셔서 머리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곧 고단한 생애를 사시면서이 지상의 죄인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은 그 죄인들을 자기 목숨과 바꾸셨습니다. 그분의 온 생애는 죄인들을 찾아다니신 생애였습니다. 마땅히 거쳐할 곳 없는 외로운 생애를 사시면서도 그분의 어 온 관심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이었습니다.
(1:18:11)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살고 있고 죄의 지배 가운데 괴로워하고 유리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혼들을 돌이키게 하시려고 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마지막은 그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죄인들을 그 죄 가운데서 건져내고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며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인간의 참된 존재의 목적과 창조의 의미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지금도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죄인들에게 쏠려 있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불신자들이 많은이 세계를 바라보시며 그 영혼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시고 고통하고 계십니다.
(1:19:05) 그리고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나 다시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된 사람들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재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에 매어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며 돌아가시던 그 순간까지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이다. 누가복음 3장 34절. 그분은 이처럼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이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특별히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1:19:49) 죄를 이길 수 있는 무한한 힘이 그분으로부터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들려주신 보혈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의 지배를 벗어날 은혜의 능력을 공급하시기에 충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보혈의 샘에서 자기의 더러운 죄를 씻었고 마음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샘에서 그 물을 마시고 어두운 세상을 이길 힘을 얻었고 자기 속에 불릴 듯 일어나는 죄의 불길들을 걷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 샘에 와서 씻었고 거기서 마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된 목적이 예전에 불신자일 때처럼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빛 가운데서 우리 주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하나님께서
(1:20:52) 어찌 그런 자신의 자녀들을 버려 두시겠습니까? 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할 수 없는 축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모든 간교한 작용에도 불구하고 신자를 넘어뜨리는 그 사악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신자에게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죄의 간함보다 더 지혜로운 말씀의 빛과 그 힘을 능가하는 성령의 크신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죄와 더불어 싸우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러한 신령한 자원의 자원을 공급해 주시려고 하늘의 기업의 보고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를 흘리심으로...
아멘.
한눈에 보는 11장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I. 서론: 신자와 죄의 힘
A. 죄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지 않음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 죄가 그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
-이것은 신자가 복음의 원리를 따라 죄에 대항하지 않고 특정한 죄에 탐닉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임
- 믿음의 원리를 따라 성령을 의지하고 싸우면 죄의 지배에서 힘있게 벗어날 수 있음
-죄는 신자가 죄의 유혹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한 결코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없음
B. 죄의 실효적인 힘이 가변적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신자를 공격하는 죄의 실효적인 힘은 견고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보임
-이것은 신자가 죄와 싸우려 하지 않고 육체의 사악한 욕심을 좇아 순종하기 때문임
-정직하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죄는 이제껏 발휘하던 실효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됨
C. 죄의 지배는 영속적일 수 없음
-너무나 긴 세월동안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죄의 지배가 영속적인 것처럼 보임
-회개하지 않을 불신자에게는 죄의 지배가 영속적인 것이지만, 신자에게는 그렇지 않음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면 은해가 밀려오고 죄는 성령의 은혜에 공격당하여 급속히 지배력을 상실함
II. 율법과 은혜
A. 율법은 무엇인가?
1.넓은 의미의 율법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흡없이 계시해 주신 총체로 영혼을 살리는 힘이 있음.
2. 좁은의미의 율법: 완전한 복종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규칙
a. 에덴에서 주어진 을법 :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힘은 있었으나 그것과 싸워 이기게 하는 힘은 없음
b.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 : 죄를 파멸시키는 은혜의 힘, 능력이나 동기, 격려가없음
c. 율법의 한계
-율법의 도움으로도, 자기의 힘으로도 죄를 이기며 살 수는 없음
-율법은 자신의 죄와 비참한 결과를 깨닫게 함으로써 죄를 이길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함
B. 인간을 다스리시는 두 방식: 율법과 은혜
1.불신자 : 본성적인 율법(양심)으로 다스리심
2.신자 : 성령을 통해 신령한 은혜를 공급함으로 다스리심
III. 은혜 아래 있는 신자와 죄
-원리적으로 신자를 지배하는 죄는 있을 수 없음
-실제적으로 죄의 영향력은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음
-죄와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죄가 역사하는 방법과 죄를 죽이는 이치를 깨달아야 함
IV.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의 대처
A. 죄의 지배의 교리를 기억하라.
1.죄에 패배한 상태 1:죄의 지배를 모르는 경우 자신에게서 영적 생명의 증거를 찾아보아야함
2.죄에 패배한 상태 2:죄의 지배를 아는 경우 죄의 지배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함
B. 삶의 환경을 정비하라
-소극적으로는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켜야함
-적극적으로는 죄를 이길 힘을 얻게 하는 은혜의 방편과 그것을 실천할 환경에 거해야 함
C.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라.
-죄가 아무리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해도 신자 안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함
-신자가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남아 있던 은혜는 불길처럼 일어남.
D. 이러한 진리를 믿으라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도움이 주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함
-잘 믿어지지 않을 때 복음의 약속을 불들고 자신을 타이르고 책망하면 의심과 반감은 누그러지고 믿음은 강화됨
E. 죄를 이기도록 은혜를 주시는 방법을 생각하라
F.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스터디
제11장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첫 번째 공부
거듭난 신자의 외적 삶이 불신자와 다름없는 부도덕한 삶이 된다 해도 그를 향한 죄의 지배가 절대적이고 완전히 실효적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44-246)
2. 넓은 의미의 율법은 무엇이며, 좁은 의미의 율법은 무엇입니까?(248-249)
3. 에덴에서 주어진 율법의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이 율법의 목적과 한계는 무엇입니까?(250-252)
4.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의 당사자는 누구이며,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새롭게 추가된 목적은 무엇입니까?(252-254)
5. 신약성경에서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비유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257-258)
6.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율법으로 다스리시고 어떤 사람은 은혜로 다스리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261)
7.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입니까?(266-267)
두 번째 공부
8. 신자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죄의 지배의 교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69)
9.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회개할 죄가 거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이유는 무엇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저자가 주는 충고는 무엇입 니까?(270-271)
10.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죄의 유혹에 수시로 굴복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보십시오(271-272)
11.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위로를 얻기 위해 쉽게 찾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죄와의 싸움이 점점 힘들어질 때, 가장 시급하게 필요 한 것은 무엇입니까?(272-273)
12.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환경을 정돈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273-275)
13. 정욕이 불길처럼 일어나서 자기 안에 은혜는 전혀 없고 온통 죄 덩어리라는 자각이 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교훈을 생각해 보십시오.(275-277)
14.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죽이시는성령의 사역과 우리의 순종과 믿음의 관계는 어떠합니까?(278)
15. 믿으려고 해도 잘 믿어지지 않을 때,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무엇입니까?(278)
16.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이기도록 은혜를 주셨는지 회심의 경험을 회고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이며, 이것이 주는 효과는무엇입니까?(280-281)
17.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죄를 이기는 방법이 되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보십시오(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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