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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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1-11

찬송가 216장 성자의 귀한 몸
오늘은 ‘사랑은 계산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는 요한복음 12장은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끝나고, 수난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입니다. 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어떻게 보면 절정의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나 달랐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어제 살폈던 본문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들어서면 다른 한쪽 베다니에서는 이 예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겁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묵상해보면요, 우리는 인간의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대표적인 지식층이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들은 세상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많이 배웠고 높은 자리에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그러나 그들의 실제는 무지 그자체였습니다. 무지를 넘어서 불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눈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 와도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은 그녀는 뭐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냥 베다니 한 마을에 한 여인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모습입니까.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가룟유다의 무리는 예수님을 철저히 계산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일은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는 일이 되었고요, 유다에게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선생의 행보는 그저 은 30에 팔아버릴 가치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들 머릿 속에는 철저히 예수님은 계산의 대상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들과 달랐습니다. 모두 계산기를 두드리며 예수님을 철저하게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홀로 주님의 마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배, 사랑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전 재산이자 미래와도 같았던 옥함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가져온 향유는 ‘지극히 비싼 나드 한 근’이었습니다. 당시 가치로 300데나리온. 노동자가 1년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거금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는거죠. 마리아의 집이 부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여인에게 이 향유는 인생의 전부이자 자신의 미래의 보장과도 같았던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향유를 대하는 태도는 엄청납니다. 그녀는 그 귀한 향유를 조금씩 나누어 쓰지 않습니다. 뚜껑을 열어 향기만 맡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옥합 자체를 깨드려버렸습니다. 깨뜨렸다는게 뭡니까? 이 향유를 다시는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남겨둬서 나중에 쓰겠다는 계산을 완전히 지워버린겁니다. 그녀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전부를 쏟아붓는 헌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분은, 이 마리아의 헌신이 단순히 감정에 치우친 돌발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예배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진정한 지성의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수차례나 당신의 죽음과 고난을 예고하셨지만 사실 제자들은 이 내용을 깨닫지 못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던 겁니다. 그녀는 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이라면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주님이 가셔야 할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임을 직감한 어찌보면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낌없이 향유를 깨뜨려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고 예비했던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그분을 대하는 참된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예배할 때, 그분을 사랑할 때,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이용해선 안됩니다. 그분을 예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주님이 지금 어떤 생각, 뜻,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그분의 마음과 뜻을 읽어내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를 이용합니다. 예배를 나를 위해 도구화 합니다. 그런데 진짜 예배는 그런게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런게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여 그분의 마음과 뜻을 따라 진짜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살펴볼 부분은요, 가룟 유다의 말입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의 향기가 온 집안을 채울 때, 그 향기를 가로막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가룟 유다의 비판입니다. 5절에 보십시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여러분 이 가룟 유다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비판은요 겉보기에 아주 합리적이고 도덕적입니다. “효율”, “구제”라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몇천만원을 지금 바닥에 쏟아버리는 행위는 효율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한 낭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유다의 이 합리적 비판 속에 숨겨진 그의 중심을 폭로합니다. 6절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오’ ‘도둑’이었다. 그가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유다에게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계산기를 두드려 이익을 남겨야 하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요,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습니다. 이 내용은요 이 다음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과 거울처럼 평행을 이룹니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 두 가지 모습은, 낮아짐과, 자기 비움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걸어가실 그 길, 우리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의 그 사랑의 길을 미리 몸소 보여준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남겨야 하는 것은, 효율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늘 묻습니다. 얼마를 남겼는가. 얼마나 효율 좋게 사용해서 남겼는가. 그러나 진짜 사랑과 헌신은, 얼마나 나를 낮추고, 나를 비워냈는가를 묻습니다. 유다처럼 명분과 효율을 따지는 신앙은요 타인의 진실한 헌신조차 낭비라고 비난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전부를 쏟아붓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잖아요. 주님은 자신을 낭비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죽을만큼 과연 효율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왜 죽어야만 합니까. 그런 비효율적이고 낭비처럼 보이는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명분과 효율이라는 차가운 위선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마리아의 모습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나를 비워 주님의 향기를 내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교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간구하는 이 시간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마리아의 행위가 단순히 개인적인 헌신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향한 왕의 즉위식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왕의 등극을 상징합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호산나 찬송을 받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릅니다. 보통은 화려한 궁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에게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으며 등극하는 것이 왕이 임명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요, 죽은 자가 살아난 나사로의 집에서, 한 여인 마리아에 의해, 그것도 머리가 아닌 가장 낮은 곳인 발에, 기름을 붓고요, 심지어 그 기름은 장례할 때 사용하는 향유로 이 대관식이 치뤄진겁니다.
이 모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왕 되심은요 곧 죽음을 의미하는거에요. 주님은 지금 군마를 타고 영광의 보좌로 향하는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십자가라는 사형대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그분은 칼과 창으로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왕, 가장 낮아지심으로써 우리를 높이시는 왕이 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고백하며 그분을 섬기며 따르십니까? 세상은 늘 높아지고 대접받으며 능력과 힘을 보여줄 왕을 따르고 그런 왕의 백성으로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세요. 낮아지고, 낭비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대접받지 못한, 심지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그것은 실패라 부를지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삶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자신을 부르심을 알고 순종했던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땅에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처럼 낮아지고, 주님처럼 낭비하고,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여 나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헌신이 당장 이 땅의 보상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을 향해 흘린 눈물과 깨뜨린 옥합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빛나는 왕의 면류관이 되어질겁니다. 오늘 하루도 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린 한 여인의 향기로운 예배를 묵상하게 하시닌 감사합니다.
하나님, 때로 우리 안에는 사랑이 식어져 주님 앞에 내 것을 내어드릴 때조차 손익을 따지며 주님을 이용하려 했던 연약한 모습이 있다면 이 시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해, 진짜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효율을 따지고 성공을 계산하며 주님을 죽이려 음모를 꾸밀 때, 마리아는 오직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의 죽음과 그 이면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마리아와 같은 영적 시선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말하는 ‘낭비’와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세상의 ‘효율’보다 주님의 ‘마음’을 먼저 읽어내는 영적 민감함을 주시옵소서. 마리아가 자신의 영광인 머리털을 내려놓아 주님의 발치를 닦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자존심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낮아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뒤따르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어딜 가든 주님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낭비하신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묵묵히 걷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깨뜨리는 옥합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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