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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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서론>
먼저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는
‘거짓 평안’에 대해서 간략히 나눴습니다.
거짓 평안을 깨뜨리자고 했습니다.
통회하고 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자고 권면했습니다.
그럼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평안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가 가진 평안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래고, 오늘은 하나님과 누리는
‘진짜 평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5장 1절 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하나님의 평안’
그러니까 ‘진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칭의’라고 하죠.
중요한 부분은 ‘가짜 평안’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환경이 좋거나, 기분이 좋아서 느끼는 평안입니다.
종교적인 위안을 통해서도 이런 평안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은 두 인격 사이에 일어난 관계의 변화입니다.
먼저,
하나님 편에서 우리와 관계가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도 하나님과 관계가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당신의 기분이 먼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늘 편하면 화평한 것이고
내가 오늘 불안하면 화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양측의 관계 변화에 대해서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복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흔들리게 됩니다.
평안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참된 평안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1.1 - 화평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일>
화평은 먼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8 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죄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정죄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저절로 화평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세요.
하나님은 의로우세요.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기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다 봐주시겠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다 해결 되겠지.”
“기도하면 다 되겠지.”
사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복음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도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참된 화평이 있으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분의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 대신 진노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방식으로
죄인을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대가없이 공의를 버리고 죄를 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우신 방법으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죠.
더 자세하게는 ‘칭의’입니다.
칭의는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 이루어진 화평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해 쌓아 올린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것을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평을 마음의 상태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참 복음을 잃어버립니다.
<본론1.2 - 우리편에서 이루어진 화평>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화평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그 화평을 누리게 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반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피하고 싶어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본성, 그러니까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일 수도 있고, 경건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만나보면 달라요.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람은 불편해집니다.
두려워집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왜인줄 아세요?
자기가 상상했던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듭니다.
자기 성품을 하나님께 투영하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평안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평안이 아닙니다.
자기 상상 속에 있는 평안입니다.
‘거짓 평안’이죠.
참 하나님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은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나는 죄인인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죽게 되었도다.”
“내 더러운 과거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나는 어떻게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에게도 ‘진짜 화평’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으셨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정죄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신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것을 진리로 믿어야 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자기 육체로 허신 것이 무엇입니까?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
우리 ‘육신’입니다. 죄로 망가져 버린 ‘본성’ 이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할렐루야!
참된 화평은 하나님 편의 화평과
사람 편의 화평이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화평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그래서 깨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교제가 다시 세워지는 것이에요.
이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의 진짜 의미입니다.
<본론2 - 우리는 참된 화평은 바라지 않는다. 이미 가졌다>
이제 아주 중요한 점을 봐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화평을 언젠가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너희가 “화평을 얻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이미 가진 것으로 말합니다. 이미 얻은 것으로 말합니다.
이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우리를
“천국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
“언젠가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기대하는 사람”
으로 보는 거에요.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입니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정죄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물론 아직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연약함도 있습니다.
아직 내적인 싸움도 있습니다.
아직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분이 명확한거에요.
‘하나님과 화평한 자’라는 신분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담대함을 주는지 아십니까?
나는 오늘 감정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마음이 답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기도도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복음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에 멈추면 안 됩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본론3.1 - 참된 화평을 가진 결과 1 : 마음의 쉼>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그 전에는
계속 불안합니다.
계속 흔들립니다.
계속 자신을 살핍니다.
계속 과거를 떠올립니다.
계속 “내가 괜찮은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난 사실을 붙들게 되면
마음에 안식이 옵니다.
“하나님이 친히 길을 여셨구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구나.”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되었구나.”
“이제, 나 같은 죄인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구나.”
바로 이 깨달음이
마음을 쉬게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정한 쉼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감정 몰입이 아니에요.
진리 위에 선 안식입니다.
복음을 이해한 평안, 진리를 깨달은 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 진리 위에 쉬어야 진짜 쉽니다.
감정 위에서 쉬면 금방 흔들립니다.
그래서 성도는
복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칭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쉬거든요.
그래야 화평이 지속되거든요.
그래야 시험이 와도 무너지지 않거든요.
<본론3.2 - 참된 화평을 가진 결과 2 : 양심의 공격에서 자유>
참된 평안을 가진 이들은
성도의 삶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싸움에서도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싸움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양심의 싸움입니다.
양심은 말합니다.
“너는 더럽다.”
“너는 자격이 없다.”
“너 같은 사람이 무슨 평안을 누리냐.”
“너 같은 사람이 무슨 구원을 받냐.”
생각보다 이 싸움은 무섭습니다.
아주 실제적입니다.
참 신자에게도 벌어집니다.
중요한 점은 양심의 송사에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잘 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선행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 감정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과거의 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한 가지를 말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피면 충분하다.”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용납하심을 받는다.”
이것이 양심의 싸움에 대응하는
적절한 답변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양심이 나를 치더라도
복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것.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피를 더 크게 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화평을 지키는 길입니다.
<본론3.3 - 참된 화평을 가진 결과 3 : 사단의 공격에서 자유>
두번째, 싸움은 마귀에게서 찾아옵니다.
마귀는 과거를 들추어냅니다.
실패를 들추어냅니다.
넘어짐을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래도 네가 용서받았다고 하느냐?”
“이래도 네가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하느냐?”
“이래도 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느냐?”
그때 믿음 없는 사람은 무너집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흔들립니다.
자기 의를 의지하던 사람은 넘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여기서도 답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내세울 의가 없다.”
“내게는 자랑할 공로도 없다.”
“오직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
마귀가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 상태만 보지 말고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화평이 유지됩니다.
<본론3.4 - 참된 화평을 가진 결과 4 : 위기와 죽음 앞에서 평안>
죽음과 심판, 위기가 다가올 때도
참된 평안을 가진 사람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전에 자기를 정죄할 재판장이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받으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화평은
죽음을 생각할 때도 드러납니다.
심판을 생각할 때도 드러납니다.
진정한 위기 앞에서 드러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물론 떨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연약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이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 서는 것이 아니다.”
“죄에 종되었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음에 넘겨졌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그리스도를 힘입어 선다.”
<본론3.5 - 참된 화평을 가진 결과 5 : 죄를 지었을 때>
참된 평안을 가진 이들은
죄를 짓고 난 뒤에도 다릅니다.
사람이 평소에는 자신 있는 척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말할 수 있습니다.
평안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넘어집니다.
유혹에 집니다. 죄에 빠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곧바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끝났다.”
“내 구원은 없어진 것 같다.”
“이제 하나님은 나를 다시 받지 않으실 것이다.”
겉으로는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아직 분명히
모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선 것은
처음부터 우리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가볍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가 죄를 지을 때 아주 슬퍼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자체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칭의는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 단번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법정적 선언인 것이죠.
하나님의 확정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성도는
절망으로 도망치지 말고
회개하며 다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화평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론>
지난 수련회에서 강조했던 ‘거짓 화평’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모든 평안이 참된 평안은 아닙니다.
‘아자 아자’ 성공의 경험을 통해 얻는 자신감과 믿음은 다른 영역의 것입니다.
모든 담대함이 복음적 담대함은 아닙니다.
거짓 화평이 가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죄 용서와 용납을 말하지만
의와 거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
자기 믿음을 바라봅니다.
셋째,
자기를 너무 쉽게 안심시킵니다.
죄를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떨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갑니다.
넷째,
하나님 앞에서 경외가 없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너무 가볍습니다.
너무 재잘거립니다.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하지만 참된 화평은 다릅니다.
참된 화평을 가진 사람은
가볍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떠나고 싶어합니다.
거룩해지고 싶어합니다.
깨끗한 양심을 원합니다.
선한 일에 힘쓰고 싶어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게 살아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참된 화평은
방종을 낳지 않습니다.
감사를 낳습니다.
거룩을 낳습니다.
주의하는 삶을 낳습니다.
이것이 참 화평의 열매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의 참된 화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처리되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사람 편에서는
그 화평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 안에 서야 합니다.
그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그 화평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각자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실제로 가진 사람입니까?
나는 감정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해 선 사람입니까?
나는 양심의 송사 앞에서, 마귀의 참소 앞에서
복음을 결론으로 답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당신 고백의 결론입니까?
나는 죽음과 심판 앞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나는 죄를 지은 뒤에도
절망으로 무너지기보다
회개하며 다시 주께 나아갑니까?
나는 참 화평을 가진 사람처럼
거룩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감사와 겸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참된 평안을 다시 붙드십시오.
우리의 평안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우리 감정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우리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과 화평한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넘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선언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