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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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13장 복음이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를 주기 때문에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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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제 13장 복음이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를 주기 때문에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복음이 죄와 싸워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와 싸우는 신자에게 힘과 자유를 줄뿐 아니라 죄와의 싸움을 지속할 동기와 격려를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죄와의 싸움에 동기와 격려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둘째로 죄를 이길 효과적인 동기와 격려를 주지 못하는 율법에 대해 셋째로 죄를 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는 은혜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1. 죄와의 싸움에 동기와 격려가 필요한 이유 자동차가 제화모리 강력한 구동력을 가진 엔진을 장착하고 있어도 출발할 때에는 항상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00:56) 죄와의 싸움에서 두기 부여가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이라면 공급되는 은혜의 힘은 구동력에 그리고 경는 윤류의 작용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를 이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데도 신자에게 왜 이런 격려와 동기가 필요할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신자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고 둘째는 연약함 때문입니다. A 두려움 때문에 첫째로 신자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신앙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를 위하여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약함과 강함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부단이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붙들려 사는 일이 필요합니다.
(01:47)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가운데 주어진 말씀을 상기에 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누가복음 1장 73절에서 75절.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결과 의로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김에 방해받을 여지는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겁없이 방종할 때도 많지만 두려움에 휩싸일 경우도 많습니다.
(02:38)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나 거룩한 삶을 위한 경건한 분투를 사소하게 여기고 나태와불성실로 방종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싸움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송사하는 양심과 율법의 참소를 받으며 하나님의 위 앞에 떨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으로 충만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은혜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죄와 싸워 이길 것이라고 하는 믿음도 충만하지만 그 믿음이 희박해지면 죄는 이기기 어려운 거인처럼 느껴지고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신은 미약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집니다.
(03:28)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난 후에 우리는 그 안 자손들 앞에서 두기와 같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화를 위한 죄와의 싸움에 어 도상에서 격려가 필요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곧 죄와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 너와 함께하는 나 여호와는 너를 싼 죄의 세력들을 능히 이기도록 너를 도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려가 필요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을 격려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죄와 싸우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바로 그러한 려를 줍니다.
(04:19) 이한 경험을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이 연약함 때문에 둘째로 신자 안에 있는 연약함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경려와 동기 부여가 필요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자의 강함은 신자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악한 왕 아합과 맞던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많은 바지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이긴 사람입니다.
(05:08) 하늘의 불을 불러내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0절에서 39절. 그러나 그가 어떻게 나약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어기 위에 삼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되 엘리아야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심히심하오니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며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기상 19장 13절 14절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꺼져가는 심지 같은 인간의 존재와 연관지어 노래하였습니다.
(06:01)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갈 때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를 베풀 것이며 이사야 42장 2절 3절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연약함을 능가하는 긍휼과 은총이 주어질 것에 대한 끊임없는 려와 보증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이것을 줍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연약함으로 인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힘을 줄뿐 아니라 격려를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생애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이러한 긍휼 어린 경려의 보증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06:49)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스스로 말에는 보잘 것 없다고 고백하였지만 그에게 놀라운 은혜와 은사를 부어 주시자 철학자들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유창한 웅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역속에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그와 함께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인물이었을뿐 아니라 방문과 지식에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던 그가 아덴에서 기대했던 것만큼 복음 사에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고린도의 일을 지움에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지냈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은 이처럼 종의 한 장의 차이입니다.
(07:35) 그래서 거룩한 생활을 위한 분투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기 부여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복음은 그것을 줍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올바른 원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복음을 통한 격려와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면 우리에게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죄지고 실패하였다고 할지라도 다시 복음과 용서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면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고 다시 거룩한 삶을 위하여 분투하고자 하는 마음과 승리를 믿는 담대함도 생기게 됩니다. 복음이 이런 일을 하기에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08:25) 이 2. 죄를 이길 효과적인 동기와 격려를 주지 못하는 율법. A 지키면 살리라와 실제의 패배의 경험. 그런데 율법은 이러한 죄임에 필요한 동기와 격려들을 주지 못합니다. 지키면 살리라고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패배를 경험합니다. 레위기 18장 5절. 이때 신자는 두려움과 낙심에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게 하는 힘은 율법의 송사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통해서 옵니다. 율법의 통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다스림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살 수 있는 실제적인 힘들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09:17)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지는 않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분투하고 이길 수 있는 동기와 려도 주지 못합니다. 비록 거듭났지만 안으로는 여전히 부패성을 지니고 있어 유혹에 반응하려고 하고 밖으로는 죄의 유혹과 강압이 끝없이 계속되고 양심으로는 송사를 받으며 연약한 믿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지 못하기 일수입니다. 그는 너무나 자주 상갈 때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이사야 42장 3절. 우리가 무엇으로 죄에 끈질기고 강력한 본성과 더불어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내면의 정욕들을 이기고 분투하도록 거룩한 삶을 위하여 힘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 안에는이 끝없는 싸움을 위한 경려와 동기가 없습니다.
(10:14) 율법은 더더욱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통해서 부어지는 신선한 동기 부여와 실제적인 격려 없이는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싸울 수도 없습니다. B. 율법으로 죄와 싸우는 어리석음. 마르틴루터가 수도사 시절에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는 죄와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죄와의 싸움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확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으로 잘못된 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도 없이 성령도 없이 죄와 싸웠고 그때마다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사혹한 영혼의 어둠 속에서 이처럼 고통하는 루터를 일깨워 준 것은 슈타우 피츠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1:04) 가톨릭 교회 안에서 대선배이고 또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함께 교수로 있던 슈타우 피치는 자신의 구원 문제로 괴로워하는 마르틴루터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우리의 구원은 고행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공부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젊은 루터가 복음의 능력을 발견하는 큰 전환점이 됩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이겨보려고 싸우다가 실패한 사람들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인과 그들을 가르쳤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와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소원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복음은 없었습니다.
(11:47) 그들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어떻게 영혼 안에 역사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예를 썼지만 정작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의 능력들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은 비단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이 가톨릭의 어둠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죄가 자신들의 마음을 통해 영혼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그 죄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하며 어떤 원리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시고 은혜의 지배를 확고의해 나가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12:43) 그래서 온갖 이상한 형태의 미심적인 신앙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성인들에게 자기를 건져 주도록 기도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의 공로로 자신의 영혼히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통공 사상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한번 자기를 정결케 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과거 가톨릭 아래에서만 있었던 일이겠습니까? 오늘날 계신교 안에서도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체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음의 이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은 그러한 그릇된 가르침에 어둠 아래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13:28) 지각 없는 견에물들어 복음의 도리를 버리거나 죄와의 싸움에 무지하거나 잘못된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아주 쉽게 죄에 패배하고 힘깨에서도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패배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게 만들어 부당하게도 신자이면서 스스로 죄의 종노릇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일제의 학정에서 해방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네 나라로 도망가는 일본 순사의 바자락을 붙잡고 옛날처럼 칼차고 자기를 다스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무지 속에서 이런 어리석은 삶을 이어가는 신자들이 조국 교회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14:12)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지배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서 거기에 복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살아으로 인해 삶의 평안이 깨어지고 영혼도 망가지고 성품도 어그러지며 마음은 굳어져 가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인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인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쳐 죄의 노예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14:56) 그런데 자유인으로 살아갈 노비 해방문사를 손에 들려주었더니 그가 다시 팔려갔던 죄에게 돌아가 비참한 노예로 살아갑니다. 정작 노예처럼 섬기며 살아기 위하여 찾아갈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죄의 지배를 받거나 받지 않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대충 형식적인 신자로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의 지배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사람들이 은혜의 통치 아래 살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15:41) 죄로 망가진이 세상의 한 모퉁 위에서라도 자기가서 있는 자리가 창조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기에 봉사하며 그 성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말고 다른 삶의 선택은 없습니다. C.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는 신뢰. 그러면 신자가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죄와 싸움으로써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우다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1.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죄와 싸움. 첫째로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16:25) 이것은 죄 자체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당하게 될 불명에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특정한 죄에 계속해서 말려들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교회의 장로 혹은 목사인데 이런게 알려지면 무슨 망신인가? 사람들이 알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니 계속해서 그 죄를 지을 마음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맛있게 음식을 먹다가 비위상하는 물건을 보고 잠시 식욕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17:06) 이 경우 죄는 죽지 않고 움추어든 것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우는 참된 동기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신 속죄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구름받았는데 죄가 그것을 깨뜨리고 구원의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죽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2.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움. 둘째로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단지 평안을 원하는 경우입니다.
(17:52) 죄와 갈등하던 어느 순간 신자에게 죄가 실어졌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털어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싫어서 죄를 지었던 장소에도 가기 싫고 함께 죄를 지었던 사람들과의 교재도 싫어집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극도로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때 신자는 겉으로 볼 때 죄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거스르는 총체적인 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혐오감이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불편함이나 고통으로부터 오는 실증입니다. 죄에 대한 권나 할까요? 그것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쳐드렸다고 하는 신앙적인 마음이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구속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이 얼마나 배음망덕한 짓을 저지른 것인가 하는 복음적인 참여에서 비롯된 마음이 아닙니다.
(18:45) 단지 죄로 말미암는 혼란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을 벗어나 평안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건 역시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운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적인 죄 죽임이 아닙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면 죄가 즐거움도 주지만 괴로움도 줍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만 실을내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도 권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더 이상의 평강을 바라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지만 그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잠시 누린 죄의 즐거움보다 몇 배 더 커다란 심리적인 외로움과 생각의 혼란이 밀려옵니다.
(19:26)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마치 마구 뒤힌 실타례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풀어보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실뭉치를 가지고 씨름하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른 실타례로 바느질하고 싶어 하듯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이 죄를 떨쳐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버린 것도 아니고 죄를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실천들은 죄와의 싸움을 위한 복음적인 원리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생활을 위한 죄임의 실천에 있어서 이러한 시도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죄는 신자가 복음적인 이치로 돌아가서 영적인 원리를 따라 죽일 때만 비로소 죽습니다.
(20:08) 단지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을 위해서 죄와 싸우는 사람은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죄를 죽여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만 오면 싸움을 그칩니다. 마음의 평화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기를 포기할 때에도 일시적으로 찾아옵니다.이 밖에도 여러 다양한 경우에 신자는 죄의 진 상태에서도 일시적인 평화를 갖습니다. 이렇게 평화가 찾아올 때 자기 마음의 평화를 위해 죄와 싸웠던 사람들은 죄와 싸울 동기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죄는 잠시 움츠려 숨었던 상태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20:54) 전혀 약해지지 않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죄를 제대로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죄와 싸우다 실패할 때 신자의 반응. 이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다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할 때 나타나는 신자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1. 이전의 죄로 돌아갑니다. 첫째로 이전의 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다 실패할 때 신자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신속히 예전에 방탕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감정과 그것을 빌미로 드러나는 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죄를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함께 작용합니다.
(21:43) 이때 신자는 속히 이전의 죄로 돌아갑니다. 마치 죄와 싸우는 동안에 억제했던 욕망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참석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서 2장 22절. 진자 가운데에도 죄에 대해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부도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삶에 대해서 죄 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 중에는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도 있지만 은혜의 세계를 꽤 경험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22:24)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상당히 경험하고도 어떻게 지금은 방탕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여러분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방탕하게 산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범법자로 신문 지상에 오른데리고 지명 수배를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르고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삶을 위한 경건한 분투 없이 상식적인 신앙생활 가운데서 마음에 원하는 대로 욕망을 달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전에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서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죄와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죄를이기는 복음의 비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23:04)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험 대신에 계속해서 좌절과 패배를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죄와 스톱으로 싸웠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싸웠기에 거듭배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적인 반감이 생겨난 것입니다.이 미신적인 맹종과 실천. 둘째로 미신적인 맹종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한 자매는 수년 동안 자기 교회의 화장실을 더 맡아서 청소하였습니다. 그의 섬김 실천에 농기는 이러하였습니다. 어느 부흥회를 갔더니 부흥 강사가 교회에 가서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면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다고 설교하더랍니다. 그 강사는 몇 사람의 예를 들어서 증거까지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23:49) 그래서 그 자매는 건강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화장실을 청소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기기 힘들어 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은 아름다운 성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그렇게 되는 것은 미신적인 맹종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미신적인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 안에서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미신적인 맹종과 실천은 지성을 요하지 않습니다. 가끔 신문지상을 통하여 보도되는 것을 보면 이교나 이단을 내에 빠져서 재산을 같이 당하고 심지어 몸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 끔찍한 일들을 겪는 이들을 봅니다. 그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 가운데는 사회의 식자층 인사들도 꽤 있습니다.
(24:33) 인간에게는 모두 그렇게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예속되려 하는 종교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격적인 신앙을 가르쳐 주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할 때에 매우 실망하고 불안해 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메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메이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에 메인 신앙만이 진정으로 능력 있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지만 그가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자기 의에 빠짐. 셋째로 도덕적인 실천으로 자기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25:19)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자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그 싸움을 계속하는 대신에 도덕적인 실천으로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러한 자기 의에 빠지게 되면 삶 전체가 비영적인 틀에 놓이게 되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복음적인 신앙의 원리 없이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였고 그 실천을 위하여 치렀던 자신의 희생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창기와 세리들을 멸시하고 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보이는 삶을 살았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25:59)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의에 빠지는 것 역시 율법으로 죄에 대항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3. 죄를 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는 은혜. 그러나 은혜는 죄를 이길 동기와 경려를 줍니다. 복음이 바로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모든 생활의 뿌리는 오직 복음임을 고려하여 고백하여야 합니다. 복음만이 모든 참된 경건의 뿌리이며 원천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는 우리에게 어떠한 거룩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비밀은 곧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적인 거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심겨져서 그의 삶 전체 안에서 계속됩니다.
(26:47) 신자의 영혼 안에 내지하는 은혜의 거룩한 경향성은 복음적인 순종의 원천과 원리가 됩니다. 복음을 통해 주어진 은혜는 제일 먼저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살아 있는 분별력을 갖게 하며 신령한 것들을 지각하게 하는 영혼의 내적 행동들을 산출합니다. 신자가 이러한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순종을 위한 원리보다 더 즉각적으로 내면에 심겨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이 사랑은 우리를 거룩한 순종을 향해 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복음을 통해 주어진 은혜는 이처럼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께 더 온전히 사랑을 받고 싶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27:38) 그리고이 은혜의 힘으로 죄를 이길 힘을 얻게 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죄를 미워하고 그것과 피흘리기까지 싸울 동기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하는 참된 동기와 격려들을 가져다 주는 일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복음이 객관적인 지식으로 머무는 것과 피어린 확신을 낳도록 경험되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은혜의 경험을 위하여 성령의 좋으심을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한 성령의 은혜를 기대하여야 합니다. 너무감으로 주일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을 가지고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28:23) 복음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의 원리들을 서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죄 죽임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좋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으면 뭐합니까? 신간 서적을 아무리 많이 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정체가 무엇이고 신자가 그것을 어떻게 죽이고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는데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분투하며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지배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거기서 벗어나 실제적으로 은혜 아래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시고 다시 성결한 은혜 속에서 살게 하시는 주체이십니다.
(29:04) 그런데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실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의 빛과 기도의 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영혼의 실증과 게으음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깨달았어도 실제로 분투하는 실천이었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직시하십시오. 믿음의 눈을 들어 지혜로운 마음으로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오늘날 핍절한 삶을 살고 있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감사로 살기를 포기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제시하는 바가 신앙의 표준입니까? 아니면 불변하는 신 성경 진리가 제시하는 바가 신앙의 표준입니까? 신앙에 있어서 진정한 다수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9:50)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소수가 다수입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신앙의 피상성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복음의 장엄한 교리들과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친들은 무시되고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무엇이고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거룩한 생활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비묻든 복음 대신 인간의 사상에 물든 인연들이 환영을 받고 복음의 참뜻을 알고 거룩한 신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행복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30: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려 주시려고 했던 참된 복음 신앙은 어디 있습니까? 선지자들이 피부리며 바라보고 즐거워하였고 제도들이 순교하기까지 위하여 증인이 되었던 복음 신앙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영혼에 직접 내려 주시는 영적 축복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거룩한 삶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축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분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성경은 믿음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원자이시며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31:17)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믿음의 삶이 결국 무엇을 가리킵니까? 성경은 그것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에 따르는 필연적인 싸움입니다. A. 은혜가 주는 죄임의 동기와 격려들 이렇게 신자가 복음의 원리로 돌아가서 죄와 싸우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죄를 이길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는 죄와 싸우는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을 줍니다. 또 용기를 주고 인내할 힘을 줍니다.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우다가 실패하여 거의 엎드어져서 죽은 것 같이 될 때 이제는 도저히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질 때 그때에도 다시 복음의 이치를 깨달으면 성령께서 힘을 주십니다.
(32:04) 그래서 잠시 실패하였으나 다시 일어나 죄와 맛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힘을 주십니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서 4장 10절. 그뿐만이 아닙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죄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는 다락한 기쁨밖에 없었는데 죄와 더불어 실제로 맛부터 싸우기 시작하면 신령한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죄를 이기게 하는 것은 그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근원이 되는 복음 진리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기쁨을 경험하면서 죄와 능히 싸울 수 있도록 격려받게 됩니다.
(32:47) 기받던 성도들이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핍박받을 때에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 그들 안에 충만하신 성령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신자가 죄에지고 있을 때는 어떠한 영적인 담대함도 자유도 없습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은 이글거리면서 다오르고 있는 욕망의 사슬에 매웠습니다. 그러나 성결과 의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복음과 성령으로 죄를 죽이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담대한 용기와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주십니다. 예전에는 죄와의 싸움에서이기는 것이 어렵게만 생각되었는데 복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에 죄와 싸울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33:33)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로 말미암아 주신 자유가 얼마나 크고 능력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이러한 현재적인 승리의 경험은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마지막 승리를 얻기까지 자기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담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죄와 싸워서 부분적으로 승리하면 개별적인 승리보다 더 큰 최종적 승리에 대한 확신이 마음에 불타오릅니다. 그렇게 죄를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신자가 죄의 종노릇하며 살고자 하겠습니까? 이러한 작용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옵니다. B.
(34:24) 신자가 은혜 아래 죄와 싸울 때 받는 위로. 신자가 은혜 아래 죄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위로를 그에게 부어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시는 주님께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죄와 더불어 몸부림치며 싸우는 신자의 작은 노력을 결코 작은 것으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일. 영혼의 소생함, 용서와 믿음을 통해 첫째로 영적인 소생입니다. 이사야 57장 15절. 죄와의 싸움을 통하여 신자가 경험하는 첫 번째 위로는 영적인 소생입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소극로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입니다. 비록 죄를 많이 지었고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어도 복음적인 사제를 경험하고 나면 그것은 영적인 소생으로 나타납니다.
(35:13) 적극적으로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자가 믿음으로 죄와 싸우면서 승리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이 믿음을 통하여 영적인 소생을 주십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의미의 영적 소생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죄임을 실천함에 있어서 반드시 행사되어야 할 믿음은 크게 세 가지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을 속고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서 죄와 분투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한이 충만한 하늘 자원을 숙고하고 그것에 한없는 공급을 약속받고 있음을 숙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임을 위하여 분추하는 자신에게 도래하게 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추수르며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36:00) 죄로 인한 고통과 불안 때문에 그 구원이 다소 지체되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할지라도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때 신자는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고 영혼은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죄임을 위하여 싸우는 자신에게 주어질 은혜를 기대하는 일에 몰두하여야 합니다. 잠시 죄 가운데 떨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놀랍게 자신에게 주어질 것과 예전에 주님과 누렸던 평화보다 더욱 커다란 평화와 행복이 주어질 것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이 하나님께 사랑받은 하나님과의 평화 둘째로 사랑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죄와 싸울 때 받는 또 다른 위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36:50)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장 21절 신자가 죄와 싸울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밀함을 누리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께 대한 적이 일진데 신자가 그것을 미워하고 분투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이전에는 스스로 죄를 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용서의 약속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자신과의 교재로 부르시기 위하여 그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37:32) 신자가 죄에지고 있을 때는 죄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 안에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이때 그 죄로부터 받는 타락의 기쁨은 있지만 하나님과 철저히 격 격리되어 있다는 불라한 상태에서 오는 거리감은 견디기 힘듭니다. 하나님과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하는 거절감에 외에워쌓여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죄와 싸워서 부분적으로 남아 승리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들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38:14) 신자는 죄와 싸워 승리하는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온 것이라.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 3.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 째로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울 때 받는 또 다른 위로는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거로. 빌립보서 1장 19절.
(39:01) 신자가 단지 상상 속에서 죄와 싸울 때에는 성령의 도우심도 개념적으로만 이해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실제로 죄와 맛부터 싸우기 시작할 때 죄를 놀랍게 죽이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신자가 자신 안에 있는 죄와 싸울 때 성령께서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도우십니다. 죄와 싸우면서도 성령의 즉각적인 도움을 힘입지 못하는 것은 죄와 다투고는 입지만 혐감으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죄와 분투할 때 가장 즉각적이고 강력한 영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는 신자에게 즉각적으로 힘을 주십니다.
(39:47) 4. 승리를 확신하게 됩니다. 넷째로 승리의 확신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울 때 받는 또 다른 위로는 승리의 확신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의 경험은 이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장 57절 신자가 죄와 싸울 때에 죄와의 싸움 속에서 끊임없는 유혹과 시련 앞에서 승리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작은 승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온전히 깨닫도록 해 주십니다. 그렇게 점점 더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증거들을 많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40:25) 신자가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여 죄에 순종하거나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싸우는 대신 단지 갈등하고만 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위로와 격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도 용납하시고 약한 자도 용납하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이시고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자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와 회복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놀라운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죄와 은밀히 타협하는 신자들은 이러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지만 죄와 싸우는 신자들에게는 풍성한 위로와 격려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신자들이 절망 속에서 죽는 일은 없습니다.
(41:14) 왜냐면 그 외로운 싸움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기도록
아멘.
한눈에 보는 13장
복음이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를 주기 때문에
1. 죄와의 싸움에 동기와 격려가 필요한 이유
A 두려움 때문에
-많은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도 성화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죄와의 싸움의 도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격려가 필요함.
B 연약함 때문에
-신자의 강함은 신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연약함을 능가하는 긍휼과 은총을 주실 것에 대한 격려와 보증이 필요함.
2. 죄를 이길 효과적인 동기와 격려를 주지 못하는 율법.
A. ‘지키면 살리라’와 실제의 패배의 경험.
-율법은 지키면 살리라고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패배를 경험합니다.
-이때 신자는 두려움과 낙심에 떨어짐
-계명을 따라 살게 하는 힘은 율법의 송사가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통해 옴.
B. 율법으로 죄와 싸우는 어리석음.
-역사 속에서 율법으로 죄를 이기려는 노력들이 계속되어 왔으나 처절한 실패를 경험함.
-율법을 지키려 애쓰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함.
C.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는 실례.
1.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싸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당하게 될 불명예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싸우는 경우.
2.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싸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아니라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경우.
D. 이렇게 죄와 싸우다 실패할 때의 신자의 반응.
1. 이전의 죄로 돌아감.
-잘못된 방법으로 싸우다 실패할 때 죄와의 싸움을 신속히 포기하고 예전에 방탕한 삶으로 돌아감
2. 미신적인 맹종과 실천
-미신적인 맹종에 빠져 그 안에서 종교적이고 심리적인 안정을 누리려고 함
3. 자기 의에 빠짐
복음적인 원리를 따라 죄를 죽이는 대신 도덕적인 실천으로 대치하려 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의에 빠짐
3. 죄를 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는 은혜.
A 은혜가 주는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들
-싸우다가 실패하여 거의 엎드려졌을 때라도 복음의 이치를 깨달으면 성령께서 힘을 주심
-죄와 실제로부터 싸우기 시작하면 신한 기쁨을 경험하게 됨.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려 할 때 담대한 용기와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주심
-죄와의 싸움에서의 현재적인 승리의 경험은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짐
B. 신자가 은혜 아래에서 죄와 싸울 때 받는 위로
1. 영적인 소생: 용서와 믿음을 통해
-소극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통해 적극적으로는 믿음을 통해 영적인 소생을 주심
2. 사랑을 받음: 하나님과의 평화
-죄와 싸울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밀함을 누리게 됨.
3.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
-실제로 죄와 맞붙어 싸울 때 죄를 놀랍게 죽이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함
4. 승리를 확신하게 됨.
-끊임없는 유혹과 시련 앞에서 승리를 확신하도록 만들어 주심.
스터디
제13장
복음이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를 주기 때문에
1.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는데도 죄 죽임의 격려와 동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314-317)
2. 율법으로 죄와 싸우다 실패한 사람들의 예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지 생각해 보십시오.(318-320)
3. 신자가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 가지 경우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십시오.(321-322)
4.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다 실패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살퍼보고,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324-326)
5. 신자가 복음의 원리로 돌아가 죄와 싸우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데, 이 은혜가 공급하는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330-331)
6. 신자가 은혜 아래서 죄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331-335)
7. 이번 장을 읽고 느낀 점을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